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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이청준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9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흥 (사자자리)

사망:2008년

직업:소설가 대학교수

기타: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최근작
2022년 7월 <[큰글씨책] 석화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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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제 석양녘 장보따리 거두는 심사 속에 오늘 이 책을 꾸미다보니 그동안 가슴 한구석으로 소리 없이 비켜 앉아 있던 여러 이름들이 새록새록 그리운 정회로 피어난다. 이제는 두고두고 내 마음의 창에 별이 되고 꽃이 된 이름들. 그것이 어찌 세상살이의 꿈과 사랑을 함께해온 선후배 글벗들뿐일 것인가. 문학 아닌 각기 다른 삶의 길을 가면서도 서로 제 것처럼 아껴주며 한 생에 희비를 같이해온 이웃 친지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지 아니하리. 이제 와서 여기 그 이름들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또 무엇 하리. 그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는 달리 내 이름은 다만 어떤 상처나 아픔의 기억으로밖에 남게 되지 않을지. 회한의 눈물과 함께 진심의 용서를 빌 뿐이다.

그와의 한 시대는 그래도 아름다웠다

대부분 돌과 나무와 강물의 이름에 의지해 쓴 글들이지만, 그것은 구실일 뿐 소설을 쓰면서 겪어온 한 세월 세상살이에 대한 작은 느낌들을 적은 셈이다. 거기에 내 소설과 문학에 대한 생각 몇 토막을 덧붙였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내 글눈이 비록 깊지는 못하더라도 아무쪼록 따뜻하게 읽혀지기를 빌 뿐이다.

꽃 지고 강물 흘러

사람들은 더러 이 첨단 대량 정보 시대에도 여러 면에서 가내 수공업적 특질을 벗어날 수 없는 문학이 유효한 것인지 의구심을 금치 못하는 듯하지만, 살아 있는 삶의 정보 자율체라 할 소설은 그 정보의 선악과 유용성을 가려내는 검색 기제로서의 기능 한 가지로 해서도 그 존재의 값을 여전히 힘있게 지녀 나아갈 수 있어 보인다. 그런 믿음 위에 또 소설을 쓰고 책을 내게 된다.

날개의 집

이 책에 실린 중.단편 소설은 분량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써온 내 작품 중의 작은 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부분 속에 자신이 마음으로 아껴온 작품을 기준 삼아 내 소설 전체의 흐름과 대표성을 담으려 애썼다.

눈길 (양장본)

'눈길'은 그러니까 나 혼자 쓴 소설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아내 셋이서 함께 쓴 소설인 셈이다. 오랜 세월 가려져 온 그 새벽 헤어짐 이후의 두려운 사연을 당신의 삶 속에 간직해온 어머니나 그 헌 옷궤의 설운 사연을 실마리 삼아 끝내 그 무고한 아픔의 실체를 드러내준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말 (반양장)

“미친 사람이란 일테면 그 압살적인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자기 삶의 현실로부터 훨훨 탈출을 감행하여, 임의로운 망상과 해방감 속에 평소에 못 이룬 꿈을 마음껏 펴 나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복스러움이 진짜 행복일 수는 없는 일이다. 깨어 있는 정신과 현실 속의 깨어 있는 삶만이 진짜 삶이요, 진정한 삶의 값과 진실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쳐버리거나 했으면 싶은 심사를 좋이 참으며 산 사람들이 많았던 지난 한 시절, 그 암울스런 현실 속에 ‘우리’의 모습을 대신 비춰줄 한 사내의 이야기를 쓰면서 생각했던 일이다.” - 단편 「조만득 씨」를 각색한 연극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1995)에 부쳐

다시 태어나는 말 (양장)

“미친 사람이란 일테면 그 압살적인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자기 삶의 현실로부터 훨훨 탈출을 감행하여, 임의로운 망상과 해방감 속에 평소에 못 이룬 꿈을 마음껏 펴 나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복스러움이 진짜 행복일 수는 없는 일이다. 깨어 있는 정신과 현실 속의 깨어 있는 삶만이 진짜 삶이요, 진정한 삶의 값과 진실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쳐버리거나 했으면 싶은 심사를 좋이 참으며 산 사람들이 많았던 지난 한 시절, 그 암울스런 현실 속에 ‘우리’의 모습을 대신 비춰줄 한 사내의 이야기를 쓰면서 생각했던 일이다.” - 단편 「조만득 씨」를 각색한 연극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1995)에 부쳐

당신들의 천국

졸작 『당신들의 천국』은 1974년과 75년 간에 씌어졌고, 그 이듬해인 76년 5월에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단행본 초간이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불과 8, 9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짧은 세월 간에 우리말이나 문장 감각, 나아가서는 소설 자체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겪어온 것 같아 보인다. 당시로선 으레 당연시돼오던 종조 조판을 횡조 조판으로 바꿔야 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 그 증거의 하나려니와, 차제에 누권(陋卷)을 일별해보니 저자 자신에게도 낡고 불만스러운 대목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렇다고 작품을 요즘 감각과 욕심대로 맘껏 수정을 가하거나 다시 쓸 수는 없는 일, 어법과 어순의 변화에 따른 사소한 어미나 토씨, 혹은 부적절한 접속사와 부사 정도만을 최소한도로 수정·첨삭·변치(變置)하였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상 명백한 비약과 실수로 여겨지는 두세 곳 오문들을 새로운 문장으로 바꿔 연결하였다. 발표된 작품은 낡아가는 대로 그것대로의 나이를 먹어가게 해두는 것이 옳을 듯싶어서다. 하기야 그리 변변치도 못한 작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면 이쯤에서 그만 절판을 해버림도 무방할는지 모른다. 한데도 굳이 이것을 다시 횡조 조판으로 재발간함에는 초간 발행 때와 발행인의 자리를 바꿔 앉은 김병익 외형(畏兄)의 넓은 아량과 각별한 배려의 덕(초간 발행 때도 지리멸렬한 연재본을 모아다 다시 손질하여 책을 묶게 한 것 역시 그의 각별한 배려에서였지만)이 크거니와 작자인 나로서도 여기에 조그만 구실 한 가지는 마련해두는 것이 도리인 듯싶어 뵌다. 다름아니라 그것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인해서다. 굳이 사족을 더할 바가 없겠지만,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은 당시 우리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우의성(寓意性)에 근거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땐가 그것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어 불릴 때가 오기를 소망했고, 필경은 그때가 오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오게 되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사시적(斜視的) 표현이나 그 책의 존재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 우리에겐 한 작은 섬의 이름으로 대신해 불렀던 그 ‘당신들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거침없이 행복하게 바꿔 불러도 좋은 때가 온 것인가. 대답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밝혀둘 것은 다만 발행인 김병익형과 나는 대답이 한곳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횡조 조판으로 ‘천국’을 다시 간행하기로 한 것-다행스러워할 일이 못 될지도 모르지만-그것이 우리들의 일치된 대답이자, 횡간본 제작에 대한 저자로서의 구차스런 변명이기도 한 것이다. - 1984년 9월

당신들의 천국

이 책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을 실재의 섬 소록도와 소록도의 일에 관계된 분들에게 취재하였다.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은 물론 한편의 소설 작품이며, 소설 속의 이야기들 역시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섬의 실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 자체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인명이나 지명·사건 들이 더러는 사실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는 대목도 있으나, 그 역시 소설의 의도에 알맞게 첨삭·변경·재구성된 소설 속의 일부분일 뿐 섬의 실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나는 지금도 소록도와 소록도 사람들을 위해 성자적인 노력을 바치고 있는 분들의 값진 기여를 알고 있으며, 아직도 그곳에서 불굴의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수많은 원생들의 처지를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이번 소설이 섬을 위한 그분들의 높은 뜻과 노력에 그리고 원생들의 줄기찬 투병 생활에 어떤 위로와 보탬이 되지 못할망정 행여 다른 바람직스럽지 못한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지가 심히 두렵다.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그 지극히도 당연한 창작 논리를 여기서 굳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점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연재의 기회를 주신 『신동아』 여러분과 취재를 도와주신 조창원(趙昌源) 전원장님, 그리고 조선일보의 이규태님-특히 한 미숙한 문학 청년에게 제법 야심적인 창작 의욕의 발단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소설 곳곳에서 그의 빼어난 취재의 눈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규태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비길 데 없는 자랑이요 행운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1976. 4. 27

동백꽃 누님

튼실하지 못한 꽃눈과 열매를 버리는 나무의 아픈 시련, 뒷날의 큰 거품을 위한 참을성 있는 기다림, 그런 것을 이기고 넘어서야 우리 삶은 보다 힘있고 아름답고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글을 계기로 나는 내 어린 시절에 어떤 아픔과 시련,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넘어서는 노력과 기다림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길러 준 내 가족들과의 가슴아픈 이별에 대해서, 그것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서당과 글방과 혼례식 풍경을 통해 일종의 어린이 성장담으로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지나간 일은 아무리 괴롭고 큰 슬픔이였다 하더라도 세월의 풍화 속에 뜻깊고 아름다운 추억의 빛을 띠게 마련이라, 이 일은 내가 지금에 와서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살아 보는 벅찬 즐거움이었던 셈이다.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소설을 써 오면서 우리 문학 주변과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느낌을 적은 것 중, 주로 새 천 년 이후의 단문들을 골라 모았다. 소설이나 문학에 대해서는 물론 세상사 이야기에서도 나는 될수록 사람의 사람다운 냄새와 따뜻한 눈길을 담아 보려 애썼다. 그리고 여기 실린 글들은 그 냄새와 체온이 내겐 아직 생생하게 묻어나는 것들이다.

사랑의 손가락

내가 글을 써 오면서 보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찾아보려 하면, 그것들은 자주 우리 옛날이야기 속에 재미있게 전해 오곤 하였다. 내가 굳이 새로운 삶의 아름다움이나 지혜를 찾아 헤매느니보다 그것을 먼저 빌려 쓰고 누림이 자신과 독자에게 더 알기 쉽고 유익해 보일 때가 많았다.

숭어 도둑

내 어렸을 적 고향 마을에는 요즘의 컴퓨터나 텔레비전 같은 기기는 물론 라디오나 축음기, 신문 따위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생각하면 그 시절 사람들은 그런 답답한 세상을 불편하고 재미없어 어떻게 살았는지 이상스러워할 수도 있을 듯싶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엔 늘 비슷한 이치와 지혜가 움직여, 그때는 그 시절대로 즐겁고 신명나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다는 게 지금껏 내 믿음이요, 기억이다.

신화를 삼킨 섬 1

나는 결국 우리 굿 문화와 현실상황 양쪽에서 모든 사실성을 단념하고 오직 상상적 허구 속에 이야기를 조직해 나가기로 작정했다. 각 지역의 고유 굿 형식이나 내용에선 그 계통이나 진행 형식에 상관없이 소설에 필요한 조작과 변형을 감행해가며 적절한 국면을 임의대로 취해오고, 현실 상황 가운데서도 특정 지명의 현재성을 지우기 위해 그 위치나 유래를 뒤섞어놓는 따위로 모든 역사적 현실적 사실성을 무시한 채 오직 필요한 국면의 상상적 근거로만 삼는 식이었다.

신화를 삼킨 섬 2

나는 결국 우리 굿 문화와 현실상황 양쪽에서 모든 사실성을 단념하고 오직 상상적 허구 속에 이야기를 조직해 나가기로 작정했다. 각 지역의 고유 굿 형식이나 내용에선 그 계통이나 진행 형식에 상관없이 소설에 필요한 조작과 변형을 감행해가며 적절한 국면을 임의대로 취해오고, 현실 상황 가운데서도 특정 지명의 현재성을 지우기 위해 그 위치나 유래를 뒤섞어놓는 따위로 모든 역사적 현실적 사실성을 무시한 채 오직 필요한 국면의 상상적 근거로만 삼는 식이었다.

아름다운 흉터

편하고 즐겁게 쓴 만큼 그 글들에는 또한 소설에 못지 않은 책임이 따랐음도 물론이다. 우회적 화법의 소설에 비해 이 수필류 산문에서는 당연히 글쓴이의 숨결이나 생각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을 꾸미는 일로 모처럼 그것들을 다시 읽다 보니 내 유년 시절과 고향을 향한 기억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뿐 아니라, 그간의 세상살이에 대한 내 생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달까. 그런 내 마음이 한갓 헛된 자족과 망발이 아니기를 빌 뿐이다.

이야기 서리꾼

사람은 원래 깨끗하고 아름다운 낙원에서 행복하게 태어나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그런 좋은 세상을 잃어버리고 다만 그것을 되찾고 싶은 꿈을 꿀 수 있을 뿐이라고. 아마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다시 찾아 살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도 오직 우리의 지난날과 어릴 적 일들을 통해서일 뿐, 그러나 그 꿈은 절대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청준의 인생

편하고 즐겁게 쓴 만큼 그 글들에는 또한 소설에 못지 않은 책임이 따랐음도 물론이다. 우회적 화법의 소설에 비해 이 수필류 산문에서는 당연히 글쓴이의 숨결이나 생각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을 꾸미는 일로 모처럼 그것들을 다시 읽다 보니 내 유년 시절과 고향을 향한 기억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뿐 아니라, 그간의 세상살이에 대한 내 생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달까. 그런 내 마음이 한갓 헛된 자족과 망발이 아니기를 빌 뿐이다.

잔인한 도시

정신의 틀, 정신의 신발 세상사람들의 발은 모양과 크기가 각각 다르다. 신발가게도 모양과 크기가 다른 신발들을 진열해야 물건이 팔린다. 소설은 이래야 한다. 이것만이 좋은 문학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한 잠정적인 희망일 수 있을 뿐이어야 할 듯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각기 그 나름의 다른 모습과 크기의 정신으로 살아가며, 그들은 각기 자신에게 알맞는 자기 정신과 삶의 신발을 원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곧 그 시대와 개인의 삶을 감당할 알맞는 정신의 틀을 짓는 일이며, 그 정신의 틀, 정신의 신발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삶과 존재의 양식이요, 그 양식에의 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의 현장 (반양장)

결국 모든 것은 다시 말의 정직성과 그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과 정직성의 문제는 다시 공리적 설명어와 심정적 고백어의 문제로 회귀한다. 우리말의 타락이나 오염 현상들은 그 말의 정직성과 믿음의 파괴에서 초래된 결과이며, 그 정직성과 믿음의 파괴는 심정적 고백어의 덕목을 배척한 내실 없는 설명어의 일방적인 창궐과 횡포의 탓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려면 그 정직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하고, 그 정직성이 회복되려면 우리들 모두가 설명어의 일방적 창궐과 횡포 앞에 심정적 고백어의 기능과 덕목을 충분히 평가하고 존중해나가는 것이 제대로의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 공리적 설명어와 심정적 고백어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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