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ful Recovery
A Spiritual Path to Healing from Addiction Mindful Recovery: A Spiritual Path to Healing from Addiction by Thomas Bien, Ph.D., and Beverly Bien, M.Ed.
Copyright © 2002 by Thomas Bien and Beverly Bien
Foreword copyright 2002 by G. Alan Marlatt, Ph.D.
Korean translation rights © 2016 Bulkwang Publishing
Korean translation rights are arranged with Thomas Bien through AMO Agency Korea, Meredith Bemstein Literary Agency, Inc. and Fineprint Literary Management, USA.
Arranged through Sylvia Hayse Literary Agency, LLC, Badon, Oregon, USA, and AMO Agency, Korea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AMO 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자와 독점 계약한 불광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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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참다운 고차원의 성취를 이룬다. 그 이유는 도(道)가 그의 안에서, 그를 통과하여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만을 위하여 행동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의 행동은 외부 현실에 대한 폭력적 조작이 아니다. 외부 세계를 자신의 정복의지에 굴복시키는 ‘공격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외부 현실에 순응한다. 그럼으로써 외부 현실을 존중한다. 그의 순응은 경배의 행위이자 신성함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상황에서 요구되는 일에 대한 완벽한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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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신비가와 선승(Mystics and Zen Masters)』(1967)
여윈 노승과 젊은 제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그린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제자는 얼굴에 당황스런 표정을 띠고 있다. 노승이 제자에게 말한다. “다음 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네. 지금이 바로 자네가 찾던 그것이야!”
중독 행동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현재 순간은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다음 순간의 일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예컨대 조금 뒤의 ‘마약 주사’가 지금 여기의 ‘바로 그것’보다 중요하다. 이 멋진 책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마음챙김 수련 혹은 저자의 표현대로 ‘고요한 자각의 계발’은 중독에 빠진 마음 상태를 해결하는 훌륭한 해독제이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삶의 순간순간의 경험이 제공하는 무상(無常), 즉 변화의 성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변치 않는 쾌감을 추구하기 위해 약물과 중독 행동에 탐닉한다. 이러한 헛된 시도를 통해 삶의 비루함과 고통스러움을 회피하거나 벗어나고자 한다.
중독 행동에 빠진 내담자와의 임상 실습을 통해 나는 명상이 중독 재발 방지에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같이 겪고 있는 한 여성이 치료 차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치료를 하며 열흘간의 집중 수련회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수련회를 다녀온 그녀는 그곳에서 술을 마시게 이끌었던 중독 물질에 대한 충동과 갈망의 끝없는 패턴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명상을 통해 중독 물질에 대한 충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했던 것이다. 마치 바다에서 파도를 타듯이 충동에 휩쓸리지 않은 채로 그것을 다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책에 소개된 ‘충동의 파도타기’ 기법을 배웠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더 이상 음주 충동이 지시하는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독(addiction)의 라틴어 어근이 독재자(dictator)와 동일하다는 것을 내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제 그녀는 정신의 독재자가 명령하는 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대신, 음주 충동을 그저 ‘또 하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파도와 같았다. 명상으로 그녀는 ‘중독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연구자로서 명상이 중독 행동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연구를 몇 편 수행했다. 그중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술을 꽤 마시는 음주가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새로운 이완법과 스트레스 관리법을 습득하는 프로그램에 스스로 지원했다. 참가자들을 다음 세 그룹의 6주 훈련 프로그램 중 하나에 무작위로 할당했다. 세 그룹은 명상, 심부 근육 이완, 혼자 책을 읽는 통제 그룹으로서, 각 그룹마다 하루 2회 20분씩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했다. 모든 참가자들은 6주 훈련 프로그램을 받는 동안 매일 알코올 섭취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난 뒤 6주간의 추적 기간 동안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련을 더 지속할 수 있었다. 실험 결과, 명상 그룹은 알코올 섭취량이 평균 50퍼센트 줄었다. 이는 다른 두 그룹보다 월등히 큰 감소량이었다. 명상 그룹은 음주량이 줄었을 뿐 아니라, 다른 두 그룹보다 추적 기간 중 더 오랜 시간 동안 매일의 수련을 지속했다. 우리 연구자에게 명상은 매일의 음주를 자연스럽게 대체할 수 있는 ‘바람직한 중독’으로 보였다.
현재 우리는 심각한 중독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기존의 알코올 및 물질 남용 치료 프로그램으로 효과를 못 본 사람들을 상대로, 장기간의 명상 코스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 중이다. 참가자는 시애틀 소재 개방 교도소의 재소자들로, 대부분 오랜 기간 음주와 마약을 했으며 강간과 강도 혐의로 복역 중인 이도 있다. 재소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실험에 참여했다. 최근 교도소 측은 지역 명상 센터와 연계해 이들 재소자들을 상대로 10일짜리 명상 코스를 실시했다. 이 코스는 위빠사나 수행자이자 통찰명상 지도자인 S. N. 고엔카가 인도의 교도소에서 처음 실시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1997년 처음 실시된 이래, 이 프로그램은 점점 인기를 더하고 있다. 이제는 많은 재소자들이 스스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실시한 연구의 목적은 집중 명상 코스가 알코올과 약물 사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재발률), 그리고 교정시설 출소 후 다시 체포되는 비율(상습성)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명상 코스를 밟은 재소자와 명상 코스를 밟지 않은 통제 그룹을 비교한다. 예비 결과에 의하면, 명상 코스에 참가한 재소자는 상습성 범행 비율이 통제 그룹에 비해 더 낮았다. 또 명상 코스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이 느끼는 마약·알코올 충동의 원인에 대한 통찰을 새롭게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독 물질에 대한 충동과 유혹을 평온하고 균형감 있게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고 했다.
몇 년 전 나는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고엔카가 지도하는 10일짜리 집중 수련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고엔카는 앞서 말한 재소자 명상 프로그램을 만든 명상 지도자이다. 수련회가 끝날 무렵, 나는 그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서양인들이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중독을 신체적(유전적 또는 생물적) 질병으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고엔카는 이렇게 답했다. “중독은 질병이 맞습니다. 다만 마음의 질병이지요.”
이 책은 ‘마음의 질병’인 중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로 마음챙김 명상을 제시한다. 저자인 토마스 비엔과 비버리 비엔은 치료사로서의 전문적 경험과 명상 수행자로서의 경험을 결합하여, 마음챙김을 통한 중독 회복에 이르는 열 개의 ‘문’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열 개의 문 각각은 ‘일상의 경험이라는 마법 발견하기(첫 번째 문)’부터 ‘부정적 감정 변화시키기(아홉 번째 문)’까지, 마음챙김을 통해 깨어 있는 삶의 다양한 영역을 열어 보인다. 저자들은 구체적인 개별 사례와 함께 독자들이 직접 해볼 수 있는 갖가지 수련법을 소개한다. 또한 자각을 높이는 방법, 자기 수용을 키우고 타인에 대한 연민을 키우는 방법, 영적 도정에 대한 경험을 일깨우는 방법 등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저자들이 이러한 주제를 일련의 문으로 설명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 열 개의 문들이 AA(Alcoholics Anonymous: 알코올 중독자 자조모임)를 비롯한 12단계 지지그룹에서 사용하는 기존의 12단계 회복 프로그램에 대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중독을 포함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사성제와 팔정도로 설명한다(첫 번째 문에 나온다). 올바른 마음챙김을 포함한 팔정도의 각각을 이 책의 다양한 문들에서 발견하고 탐색한다. 12단계 회복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에 하루씩’ 절제를 실천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불교는 한발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서 삶의 순간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열 번째 문).
이 책은 깨어남의 문, 자기 자각(self-awareness)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저명한 정신분석가 칼 융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낙담한 신비주의자’로 표현했다. 술병의 알코올 성분(spirit) 때문에 영적(spiritual) 깨어남의 여정에서 길을 잃었다는 의미에서다. 스스로를 ‘낙담한 신비주의자’라고 여기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중독 회복을 향한 문들에서 영적 해방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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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앨런 말라트(심리학 교수, 워싱턴대학 중독행동연구센터 이사)
우리 모두는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은 불교만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오직 저자 한 사람(이 책의 경우, 두 사람)만의 결과물일 수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거친 초고를 읽어주느라 고생한 친구들, 러스 월시, 조 버로우즈, 찰스 엘리엇, 펄 그로스의 지지와 조언에 고마움을 표한다. 불굴의 격려와 열정으로 도와준 아담 발레스티에리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유익한 브레인스토밍 시간을 갖게 해준 팀 스타라이커, 미칼 스트라이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또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해준 밥 웨버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예전에 데니스 미첼 에이전시에 있었던 제프 루터포드의 노력에 감사를 표한다. 그는 우리의 난삽한 학문적 글을 읽기 편한 글로 만들어주었다. 또 우리의 에이전트인 데니스 마실과 메레디스 번스타인은 열정과 능력으로 우리를 대변해 주었다. 와일리 출판사의 편집자 톰 밀러는 유용한 아이디어와 제안을 수도 없이 해주었다. 역시 와일리 출판사의 킴벌리 먼로와 주드 패터슨은 원고 준비 작업을 배려 깊게 도와주었다.
특히 워싱턴 대학교 G. 앨런 말라트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심오한 학자이자 연구자, 불교 수행자인 교수님은 특별히 이 책의 서문을 써주셨다.
또한 나(토마스 비엔)의 예전 스승님이셨던 저명한 학자-연구자인 뉴멕시코 대학의 윌리엄 밀러 교수님께 고마움을 드린다. 나는 중독 행동의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혹시라도 이 책에 학문적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모든 고귀한 존재와 보살의 축복으로 이 책이 많은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길 기원한다.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오랜 성찰과 연구, 경험과 수련의 결과물이다. 우리 두 저자가 개인적으로, 또한 중독 전문가로서 겪었던 고충과 그에 이은 평화의 흔적이 책의 페이지마다 드러나 있다. 우리가 중독 전문가로서 영성과 영적 수련에 대해 가졌던 평생의 관심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토마스 비엔)는 한동안 세계의 위대한 영성 전통에 대해 공부했었다. 내가 명상을 수련하고 베단타(힌두교 성전인 베다에 관한 철학)와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파탄잘리의 요가 경구를 읽기 시작했던 때가 벌써 30년 전이다. 이런 공부 덕분에 나는 서양의 영성과 신학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믿고 있는 영성 전통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물론 그것만을 유일하게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떤 영성 전통이라도 그것을 깊이 있게 수련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목적지를 지향하고 있다.
나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독 행동(addictive behavior)을 학위논문의 중심 주제로 삼기로 했다. 중독 행동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혹은 변화하지 못하는지)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연구 영역이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해롭고 파괴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러한 통찰을 항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인간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해 알 수 있는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나의 영적 관심이 불교와 마음챙김(mindfulness) 수행으로 향하고 내담자와의 심리치료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이 두 분야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심리치료는 그 자체로 일종의 마음챙김 수련이다. 그간 나는 내담자에 대한 심리치료 작업과 마음챙김 수행을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시켜 왔다. 이로 인해 무엇보다 심리치료 장면에서 치료자 역할을 하는 나 자신의 현존 수준이 깊어졌다. 뿐만 아니라 내담자에게 의식적인 호흡과 명상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더 깊고 고요하게 현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 한 명의 저자인 비버리 비엔 역시 중독 분야를 중심으로 영성 수련과 치료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녀 또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중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만났던 그녀는 알코올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본인 또한 니코틴 중독을 경험하면서 중독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으며, 행동 위주의 금연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지도하기도 했다. 상담심리학 석사인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돌봄 제공 서비스 및 교육 분야에서 12년 이상 일해 왔다. 거기에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 약물을 남용하는 노숙인, 정신질환과 약물 남용으로 기관에 수용된 사람도 있다.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이에 비버리는 보다 깊은 영적 자각과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중심을 되찾기 위해 집중 수련회에 참석했으며 또한 명상과 요가를 자기 삶의 일부로 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그녀와 내가 서로의 삶에 들어왔을 무렵(결혼했을 때),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챙김 수련을 심화하는 데 있어 서로 지지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안정감과 통찰을 얻은 뒤에는 ‘마음챙김으로 깨어 있는 삶(Mindful Living)’이라는 워크숍을 통해 이러한 결실을 사람들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서서히 구체적인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모든 관심사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요한 자각 또는 알아차림(awareness)이라는 마음의 성질이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도 부른다. 마음챙김 수련을 통해 우리는 내담자와 우리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능력이 커짐을 경험했다. 그것은 곧 삶에 대처하는 능력이 깊어지고 효과적으로 커지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에게 마음챙김은 중독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독제로 보였다. 왜냐하면 중독이란 그 본질상, 깨어 있는 상태로 삶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삶을 ‘회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많은 중독자에게 중독 행동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숨기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삶을 회피하고 문제를 숨기기에 급급하면 문제의 발생 빈도와 심각성은 점점 악화될 뿐이다. 이에 ‘영성’과 ‘삶의 의미’가 중독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핵심 열쇠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회피의 대척점에 있는 마음챙김에 기초한 영성 훈련이야말로,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마음챙김이라는 영성이 중독자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통찰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게감과 구체성을 더해갔다. 물론 우리가 취한 접근은 기본적으로 심리적 접근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하나의’ 심리치료법을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삶에 대한 영적인 접근법’을 제안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중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또 더 큰 명료함과 평정심, 평화와 통찰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다시 일구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변화의 과정을 시작한 중독자뿐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영적인 바탕이나 토대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자 했다.
이 책에서 취하는 접근 방식을 ‘영적인 길(spiritual path)’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협소하고 제한된 의미의 영성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포괄적 영성을 의미한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성령(Holy Spirit)’이나 ‘하느님의 영(Spirit of God)’ 등의 표현에 보이는 ‘영혼(spirit)’에서 나왔다. 이처럼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흔히 종교적 의미와 관련짓는다. 그런데 성경의 기본 언어인 헤브루어나 그리스어에서 ‘영혼’에 해당하는 단어[헤브루어 루아흐(ruach), 그리스어 프뉴마(pneuma)] 숨 또는 바람[風]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리고 라틴어의 스피리투스(spiritus)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그때까지 생명이 없던 인간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숨, 즉 영혼으로 가득 찬 아담은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의 생명력이 곧 신성(神性)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영성 수련에서 호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신이나 거룩한 존재와 연결된 ‘영성’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특정 인격신을 믿어야만 이 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영성’이라는 말이 종교 신앙을 떠올리게 한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도 좋다.
첫째, 저자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삶에 대한 시적(詩的) 감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삶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의미에 관한 ‘나만의’ 감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컨대 갓 태어난 당신의 아이가 처음으로 눈을 뜰 때, 황홀한 해넘이를 감상할 때,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 빗는 모습을 지켜볼 때, 고대유적의 오래된 석조건물을 직접 손으로 만질 때 우리는 ‘영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는 말을 타거나 꽃을 심는 동안에도(이것에 열정을 갖고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과 가슴에서 우러나는 대화를 나눌 때도 영적 경험을 한다.
둘째, 이 책에서 저자는 ‘영적’이라는 말을, 인간이 처한 삶의 ‘실존적 조건’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불교의 ‘다섯 가지 기억하기(Five Remembrances)’라는 수행법에서는 오직 자신의 행위만이 자기의 유일한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한다[다섯 가지 기억하기: 1. 나는 반드시 늙을 것이다. 2. 나는 반드시 병에 걸릴 것이다. 3.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4. 나는 반드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사람과 헤어질 것이다. 5. 나는 내 행동(업)의 유일한 소유자이며 상속자이다. 붓다는 남자나 여자나, 속인이나 성인이나 모두 이 다섯 가지 사실을 스스로 자주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는 다섯 번째를 가리킨다. - 옮긴이]. 붓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기 2,500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통찰했다.
이렇게 ‘영적’이라는 말에는 우리의 삶이 시간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이 삶이 더욱 소중하다는 자각이 깃들어 있다. 또 거기에는 우리의 선택에 따르는 의미대로 삶의 매 순간을 채워가야 한다는 깨달음이 녹아 있다. 이는 또한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매우 중요하며, 그러므로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굽이굽이가 장차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의도하는 바는, 독자를 기독교와 유대교를 배격하는 불교 신자로 만들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와 철학의 정의로 볼 때, 불교는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불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길(path of liberation)일 뿐이다. 붓다(깨어 있는 자)가 된 고타마 싯다르타의 관심사는 다른 종교와 경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종교 시장’에 내놓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주의 기원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받았을 때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러한 추상적 맥락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때로 불교의 가르침이 종교나 철학으로 비치더라도 그것은 결코 불교의 본질이 아니다. 불교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어떻게 하면 고통을 끝내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00년 경, 자신이 살던 당시에 유행했던 종교적·영적 전통들을 모두 체험해보았다. 그는 그것들을 극한의 깊이까지 수행한 뒤에 그 모두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반 혹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고타마 싯다르타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가르침과 신앙, 수행법을 이미 넘어선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붓다는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체험한 바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붓다는 침묵을 지키는 현자로 살아가는 데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직 깨닫지 못한 존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가르침을 펴고 난 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그때까지 펼친 모든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의 가르침은 오직 고통과 고통의 종식에 관한 것이다.” 고통과 고통의 종식,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교화시킨 교사로서 붓다가 지녔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불교가 전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이다. 이것 역시 고통과 고통의 종식에 관한 내용이다. 사성제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첫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삶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붓다는 고통처럼, 우리가 쉽사리 무시해버리는 삶의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일반적으로 ‘고통’이라고 번역되는 팔리어(붓다 생존 시 사용하던 언어) 둑카(dukkha)는 ‘불만족감’ 또는 ‘삶에 대한 환멸’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둑카가 반드시 불치병이나 죽음 같은 파멸적인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할 때, 혹은 무슨 직업을 가져야 좋을지 모를 때 느끼는 곤란함까지 모두 포함된다.
2. 두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삶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인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거부한 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삶에 집착한다는 의미다.
3. 세 번째 고귀한 진리는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 즉 그로부터 놓여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이다.
4. 네 번째 고귀한 진리는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 번째 진리에서 말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곧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이들 여덟 가지에는 모두 ‘바르다’로 번역되는 팔리어 삼먁(samyak, 正)이 앞에 붙는다. 그런데 이것을 서양의 십계명에 보이는 윤리적 의미의 바름으로 해석한다면 적절하지 못하다. 붓다는 윤리적이고 사변적이 아닌 실제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바름’은 오히려 ‘온전하다, 완벽하다, 효과적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바르다’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통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는 함께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를 깊이 닦으면 다른 일곱 가지도 함께 닦는 것이 된다. 예컨대 바른 견해를 닦는 것은 직장에서 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과도 연관된다. 다시 말해 팔정도 가운데 하나인 바른 견해는 바른 생계, 바른 말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덟 가지가 서로 연관된다면, 우리는 팔정도를 단순화시켜 그중 일곱 번째인 마음챙김에 온전히 집중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은 팔정도의 나머지 일곱 가지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위의 팔정도를 직접 수행한 뒤 스스로 결과를 확인하라는 것이 불교에서 권하는 태도다. 맹목적인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이야기다. 다만 이 경우에도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필요한 잠정적 믿음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시도한 후에는 스스로 그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실제적인 태도다.
우리는 독자들이 저마다의 신앙 혹은 무신론을 견지하면서도 이 책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음챙김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이 믿는 종교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챙김의 측면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의 어려움은 오늘로 족하게 하라”고 했다. 이것은 어쩌면 마음챙김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이 중독(addiction)이라는 말을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 중독은 우리 몸이 특정 물질에 대한 문제적이고 파괴적인 남용 패턴에 길들여진 상태를 말한다. 이 같은 협소한 의미에서라면, 중독에 빠진 사람은 갑자기 물질의 사용을 중단할 경우에 금단 증상(withdrawal)이라는 이상 상태를 경험한다고 본다.
그런데 중독이라는 말을 더 광의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점점 흔해지고 있다. 특정 ‘물질’이 아니라 한 사람의 ‘행동’ 패턴에 강박적 성격이 있을 때에도 중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요즘은 일 중독, 성 중독, 음식 중독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중독이라는 용어를 이처럼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더라도 이들 문제적 행동에 관한 일말의 진실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저자들은 이와 같은 영적인 책에서 반드시 중독을 애초의 협소한 의미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독이라는 말을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광범위한 의미의 중독으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이 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자의 실제 치료 장면에서 만났던 내담자들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단일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례를 함께 엮어 구성하였다. 특정 개인에 관한 사례인 경우에도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름 등 신상 정보를 변경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사람들은 무엇을 좋다고 알면
그 외의 것은 좋지 않다고 분별한다.
또 누군가를 맞다고 판단하면
그 외의 사람은 맞지 않다고 분별한다.
—
노자, 『도덕경』(기원전 6세기)
“나는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려 했어요. 술이 부모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생생하게 지켜봤거든요. 매일같이 계속되던 고함과 비명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해요. 언니와 나는 매일 밤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혹시라도 내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 다시는 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멜리사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학 파티에서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술을 입에 댔다. “처음 마신 술은 그다지 맛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또 다시 술을 입에 댔죠.” 그다지 맛이 없었지만 멜리사는 알코올과의 관계가 향후 오래 지속될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머지않아 멜리사는 기숙사 파티에서 자주 술을 마시게 되었다. 처음에 우려했던 삶을 그대로 살게 된 것이다.
“파티가 점점 많아졌어요.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러자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더군요. 숙취 때문에 수업에 빠지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지요. 물론 성적도 떨어졌어요. 모든 게 엉망이 되었고 계속해서 불안했어요. 불안은 이제 그 자체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어요.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술을 더 마셨어요. 2학년 중반 즈음 퇴학당하고 나서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별 재미도 없는 단순 사무였죠.”
꿈이 좌절된 상황에서 멜리사는 삶의 의미와 목표 상실로 괴로워했다. 한때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고귀한 관심과 열정을 지녔던 멜리사였다. 청소년 시절에는 정신건강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고귀한 바람은 알코올에 취한 몽롱한 길로 바뀌고 말았다. 이렇게 그녀는 변질된 의식 상태에 빠진 채 답을 구하고 있었다.
음주운전으로 죽음에 가까이 갔던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멜리사의 진짜 비극은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처럼 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비극은 자신의 꿈이 좌절된 데 따른 심한 무력감에 있었다. 멜리사는 알코올 때문에 일이 불만족스러웠고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으며 신체적으로도 쇠약해졌다. 그녀의 삶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꽉 막혀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단순 사무 일을 여기저기 전전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어요.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어요. 지금도 정신건강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하기만 해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져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요? 또 술을 입에 대고 말죠.”
첫 치료 세션에 찾아왔을 당시 그녀는 3주 동안 술을 끊은 상태였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하게 될 치료 작업의 기본 원칙을 설명해 주었다. 중독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원인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라는 점, 그리고 이런 도망은 또 다시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다소 건성이기는 했지만 나의 설명을 알아듣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을 자신의 실제 경험에 적용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처음 몇 차례 만남을 갖는 동안 멜리사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어려워했다. 고통에 가까이 간다고 느낄 때마다 즉각적으로 도망치거나 고통을 얼버무리려 했다. 예컨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에요. 나에게 더 맞는 일을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다음 그녀는 즉각적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다음 그녀는 다른 주제, 좀 더 안전한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치료 과정을 통해 멜리사는 점차 고통에 친숙해지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명상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완전히 갇혀버리지 않고 그것과 함께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명상을 시작하자 치료 과정에 속도가 붙었다. 명상을 통해 멜리사는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 그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 때문에 또 다시 음주 충동이 일어나는 과정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치료 방법으로 멜리사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착한 아이’로 자랐다는 사실을 일기 쓰기를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학교에서 멜리사는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가면 학급을 감독하는 반장 역할을 좋아했다. 또 성적표에 난생 처음 C를 받으면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이런 그녀에게 술은 조금은 제멋대로 반항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이었다. 그런데 치료 과정을 통해 그녀는 반드시 모든 일을 잘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재미있게 즐겨도 괜찮다는 것, 즐기더라도 덜 해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치료 종결 시점에 이르러 멜리사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잊혀진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장 대학으로 돌아갈 형편은 못 되었지만, 어느 정신병원에서 정신건강 상담사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보험회사 일보다 월급은 적었지만 이 일에서 더 큰 만족을 찾았다. 당시 그 병원은 재정 문제로 인해 예산이 삭감될 상황이었지만, 다른 직장에서와 다르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멜리사는 나와 가진 마지막 상담에서, 앞으로 계속 정신건강 분야에서 연수를 받은 뒤에 자격을 취득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중독으로 힘들어 하다가 그로부터 조금 놓여난 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된다. 멜리사도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헝클어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출 수 있었다. 멜리사만이 삶에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자신이 바라는 삶의 길에 서 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 괴로움과 공허함이 생겨난다. 이럴 때 당신은 무엇으로 자신을 채우는가? 어떻게 시간을 메우는가? 무엇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감당하는가? 이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시킬 수도 있다. 즉, 고통은 나의 삶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로 볼 수도 있다. 고통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치유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비록 그 앎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고통은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로서 의미가 있다.
삶을 사는 것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는 고통이 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가? 아니면 비록 일시적으로라도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없애버리려고 발버둥 치는가? 우리는 삶에 존재하는 공허함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 공허함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가? 어떤 사람은 지나친 소비와 끝도 없는 개인적 야망으로 고통과 공허함을 채우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과 일, 컴퓨터와 비디오게임으로 채우려 한다. 그들은 조금의 빈 공간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또 멜리사처럼 술과 약물로 공허함을 메우려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각종 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이 중독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자신의 중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영적인 삶의 관점을 갖고자 하나, 기존 프로그램에서는 이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당신이 탐닉하고 있는 중독 물질을 끊는 일은 회복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첫 단계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버린 중독 물질을 단번에 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일시적으로 끊었다 해도 그 변화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삶의 영적인 측면에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불교에는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 구도승이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유명한 고승을 찾았다. 그는 고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불교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줄줄 읊어댔다. 말없이 듣고 있던 고승은 구도승의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가 흘러넘치는데도 계속해서 따르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고승이 입을 열었다. 이미 머리가 꽉 차 있는 사람, 진리를 알았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선(禪)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금 당신의 마음은 열려 있는가? 당신의 찻잔은 차를 더 따를 수 있는 여유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을 마음챙김을 통한 중독 회복의 길로 친절하게 안내할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신과 함께 중독 회복의 영적이고 정서적인 면을 함께 탐구해 보려 한다.
영적 관점에서 중독 회복을 생각하는 소중한 방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중독 회복의 영적 측면은 종교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주로 서양의 사고방식이다. 최근에는 동양의 영성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동양 전통을 중독자들의 필요와 연결시키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중독 치유의 접근법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마음챙김이란 현재 순간에 대한 자각(알아차림)과 수용(받아들임)을 특징으로 하는 열린 마음을 말한다. 마음챙김은 유일하게 실재하는,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마음챙김의 삶은 미래나 과거에 사는 것이 아니다. 또 미래와 과거에 빠져 있는 자신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챙김은 자신의 영적이고 진실한 본성과 다시 접촉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또 자신의 고통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이 나에게 던져주는 교훈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수련하기 위해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자신이 현재 믿고 있는 종교를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마음챙김을 수련할 때 우리는 종교적 태도를 조금도 지닐 필요가 없다. 마음챙김을 통한 중독 회복(Mindful Recovery)은 보다 조화로운 중독 회복의 방법을 모색한다. 일반적으로 중독자들은 자신의 중독 상황에 따른 고통과 직접 대면하기보다, 약물 등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기 쉽다. 마음챙김은 중독자들의 자각을 회복시킴으로써 고통에 직면하는 보다 편안한 방식을 제공한다.
마음챙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중독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음챙김의 계발을 통해 깨어 있는 삶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체와 감정, 주변상황을 더 잘 자각하게 되는데 이로써 지금 나의 어떤 부분이 불균형 상태인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에 관하여 분명한 신호를 받을 수 있다. 나아가 중독과 관련하여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파괴적인 행동을 중단시킬 수도 있다.
또한 마음챙김은 살아 있음의 단순한 기쁨과 다시 접촉하게 해준다. 랍비 아브라함 헤셀이 말했듯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일이다.” 삶의 모든 순간은 우리의 영혼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충일함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즉 살아 있음에서 느끼는 단순한 충족감은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중독자들은 이 부분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중독이란 지각 능력을 무디게 만들어 스스로를 외부와 차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독은 나에게 아픔을 주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려는 욕구에서 생긴다. 하지만 아픔을 차단하면 현재 순간에 대한 단순한 경험으로부터도 단절되고 만다. 아침의 신선함이나 손님을 반기는 개의 소리, 자신이 좋아하는 의자에서 느끼는 안락함 같은 것 말이다. 마음챙김은 현재 순간이 선사하는 단순한 기쁨과 다시 접촉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약물을 비롯한 해로운 물질로 삶의 공허함을 메우지 않아도 좋게 한다.
나와 나의 생각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도 깨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풍요롭고 다채로운 드라마 속에서, 삶을 인위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또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을 약물로 채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에 대한 이러한 풍요로운 자각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 풍요로운 자각은 평소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이나 관심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차를 몰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중이라고 하자. 이때 당신의 생각이 오로지 직장에 지각하지 않는 데만 가 있다면, 당신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나 겨울 아침의 차갑고 신선한 기운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또 여름의 나른한 따스함도, 장엄한 해돋이도, 산과 바다도, 초록의 신록도, 광활한 벌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당신은 의도했던 대로, 직장에 늦지 않게 출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말한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당신의 출근길 경험은 그 자체로 더 풍요로웠을 것이다. 이때 운전은 출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만, 그와 동시에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명상 지도자이자 작가인 샤론 샐즈버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샤론의 스승 한 사람이 명상을 하는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제자들은 무언가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지혜를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스승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스승이 대답하기를, 자신이 명상을 하는 이유는 길가에 핀 작은 보라색 꽃을 무심코 지나치는 일이 없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일상의 ‘작은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작은 것에 대한 자각은 매우 중요하다. 틱낫한 스님은 설거지를 할 때는 오직 설거지만 하라고 가르친다. 혹시 당신은 설거지보다 만족을 주는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해 설거지를 그저 ‘해치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설거지를 즐기지 못할 뿐 아니라 설거지 이후의 활동도 즐길 수 없다. 예컨대 설거지가 끝난 뒤 먹게 될 디저트를 목표로 설거지를 해치우고 있다면 당신은 디저트 역시 맛있게 즐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 상태로는 실제 디저트를 먹더라도 마음은 다시 디저트 ‘다음의 것’(나중에 보려고 저장해 둔 영화나 누군가에게 걸어야 할 전화, 마저 읽어야 할 소설 등)에 온통 마음이 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삶의 실재하는 순간들을 살지 못한다. 당신은 계속해서 지금보다 ‘더 좋은’ 순간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기 위한 계획만 세우는 일이다.
음식이 몸에 양분을 주듯이, 경험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운다. 우리는 누구나 직접적이고 분명한 경험이 선사하는 풍요로움을 필요로 한다. 풍요로운 경험은 영혼을 건강하게 살찌운다. 만약 불안이나 두려움, 걱정, 계획으로 인해 경험이 차단되어 정신의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은 빈혈 상태에 이른다.
심리학자들은 ‘감각 차단 탱크(sensory deprivation tank)’에서 여러 차례 실험을 진행했다. 감각 차단 탱크는 사람 체온 정도의 소금물을 일부 채운, 어머니 자궁과 비슷한 작고 어두운 방음실이다. 실험 참가자들은 이 방에 들어가 오래 머물며, 경험이 차단된 환경이 인간의 기능과 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게 된다. 오랜 시간 이 방에 있었던 참가자들은 종종 환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극도로 자극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뇌가 스스로 환각을 만들어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의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정신 상태는 일종의 기아상태에 빠지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실제와 무관한 환상과 두려움에 시달릴 수도 있다. 나아가 굶주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운 경험에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물이나 알코올은, 배는 부르지만 영양가 없는 패스트푸드와 같다.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것은 잔뜩 쌓인 음식을 곁에 둔 채 배를 굶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양의 영적 전통, 특히 지금 여기에서의 자각을 중시하는 마음챙김이라는 전통은 중독에 관한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중독의 자동반사적이고 강박적인 성질은 마음챙김의 활짝 열린 여유로운 마음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독이 있는 곳에 마음챙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마음챙김이 존재하면 그곳에는 중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정된 공간에서 둘 중 하나를 크게 만들면, 나머지 하나가 줄어드는 이치와 같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중독 회복의 방식은 주로 마음챙김이라는 동양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시도하는 모든 기법이 동양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마음챙김을 계발하는 방법은 서양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일기 쓰기, 이야기치료를 주로 하는 내러티브 심리학, 통찰 위주의 심리치료, 인간관계 작업, 꿈 분석 등은 모두 서양에서 발달한 방법들이다. 이것들 역시 자각과 열린 마음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서양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동양의 기법에 뿌리를 둔 마음챙김만을 이야기하는 책들과 다르게,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함께 제시한다.
중독 회복의 많은 치료 모델이 질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건강’ 위주의 치료 모델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우리 두 저자는 질병과 병리가 아니라, 건강과 활력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원인에 맞서 그것을 해결할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 저자는 질병이나 무력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삶의 긍정적인 측면과 접촉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온전하고 만족스러우며 의미 있는 삶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삶의 건강하고 긍정적인 면과 접촉해야만 우리가 가진 문제에 직면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절제위반효과(AVE, Abstinence Violation Effect)이다(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끊었다가도 어쩌다 한 번 실수로 술을 입에 대게 되면 금주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생각에 다시 술을 입에 대는 것 - 옮긴이). 절제위반효과는 일종의 흑백논리로서 AA(알코올 중독자 자조모임)의 “한 잔이 주정뱅이를 만든다(one drink, one drunk).”는 슬로건과 유사하다. 절제위반효과의 관점에서는,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중인 사람은 자신을 ‘완전히 술을 끊은 사람’ 아니면 ‘구제불능의 주정뱅이’로 여긴다고 본다. 그들에게는 이 양극단 사이의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한 번 술을 입에 대는 것으로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주정뱅이로 낙인찍어버리는 중독자들은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쉽게 빠진다. “나는 가망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무력한 존재야.” 같은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빠져 있기 때문에 파괴적인 음주 습관을 지속할 확률도 당연히 커진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고 만다. 물론 가능하다면 한 번의 실수도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가 곧 완전한 실패라는 극단적 사고방식은 중독의 재발을 일으킬 가능성을 오히려 높인다.
마음챙김은 중독 회복 과정에서 한 번의 실수로 이어질 수 있는 신호를 미연에 알아보게 한다. 그래서 한 번의 실수를 단지 ‘한 번의 실수’로 보게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을 수련하면 회복 과정에서 중도 탈락할 가능성이 애당초 줄어든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의 실수를 하더라도 그 의미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완전한 실패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중독을 비롯한 습관적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습관적 행동을 중단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새로운 상태, 즉 습관적 행동을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를 이후에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 끊기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나는 그 일을 천 번도 넘게 해봤다.” 그런데 그저 담배를 안 피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피우지 않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보다 큰 맥락에서 살펴보면, 중독의 회복 과정에 서로 다른 몇 개의 변화 단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각 단계에서 특정 필요가 충족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심리학자 제임스 프로차스카(James Prochaska)와 카를로 디클레멘테(Carlo DiClemente)는 자신들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중독 회복의 변화 단계를 제시했다.
대개 중독에 빠진 사람은 행동 단계와 재발 단계를 오가는 사이클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에 비로소 안정적으로 머물게 된다.
예컨대 알코올 중독자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고려 전 단계’에서,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는 ‘고려 단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거기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나 정보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자신과 비슷한 알코올 문제를 가진 친구가 곁에 있거나, 알코올 때문에 중병을 앓고 있는 친척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알코올 섭취를 줄이자 불안 수준이 올라가는 증상을 몸으로 느낄 수도 있다.
고려 단계에서는 아직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할 뿐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과 문제가 없다는 ‘느낌’을 왕복하면서 시소를 탄다. 만약 알코올 문제를 가진 사람이 고려 단계에 있다고 하자. 그는 내면에서 자신과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는 정말 음주 습관을 바꿔야 해. 아침에 엉망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가 나. 두통과 속쓰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 정도 술 마시는 사람도 많잖아? 나보다 더 마시는 사람도 있는데 뭘! 내가 문제라면 찰리는? 그리고 슈는? 난 별 문제없을 거야. 그저 술을 즐길 뿐이야. 스트레스도 좀 풀고 말이야. 그렇지만 어젯밤 마구 취해서 집에 들어왔을 때 아들 녀석이 쳐다보던 눈길은 여전히 맘에 걸리더군.’ 이런 식으로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이 단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느끼는 애매모호함과 ‘시소 타기’를 넘을 수 있는, 보다 확실한 사건이나 정보가 있어야 한다.
내담자 중 한 사람이 어느 날 고려 단계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계기가 된 사건을 경험했다. 막 걸음을 걷기 시작한 아기가 먹을 우유를 사기 위해 돈 몇 푼을 가지고 동네 구멍가게에 갔던 날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담배가 똑 떨어졌다. 수중의 돈으로는 담배와 우유를 함께 사기에는 모자랐다. 그는 담배를 살까, 우유를 살까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를 사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자신에게 확실히 니코틴 중독이 있음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들면 변화를 향한 문이 열리게 된다. 바로, ‘결심 단계’이다. 이렇게 열린 문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현실성 있는 변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생각이 현실성 있는 계획이다. ‘다음 달 1일부터 담배를 끊겠어.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담배는 모조리 부러뜨리겠어. 내가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를 모두 나열하겠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마다 그 목록을 다시 꺼내보며 스스로 상기할 거야.’ 이처럼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모처럼 열린 변화의 문은 닫혀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나의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스스로 속삭이며 고려 전 단계로 돌아가버린다.
변화의 필요성을 스스로 납득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그려볼 수 있다면 이제 ‘행동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단계로서, 중독 행동을 중단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유지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행동 단계와는 또 다른 필요성이 존재한다. 즉, 유지 단계를 성공적으로 지속시켜 중단과 재발 사이클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일시적 중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중단 기술이 필요하다. 유지 단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내심뿐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스탠은 6개월 동안 용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가까이에서 술을 접하는 상황, 그래서 음주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스탠은 남동생의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에 술이 많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형으로서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술자리를 피하는 방법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곁에 두고도 마시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다시 중독 사이클의 처음, 즉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고려 전 단계로 돌아갈 것이다.
중독 행동을 지속적으로 삼가면서 유지 단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중독 물질 이외에 다양한 관심사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는 반드시 영적인 믿음을 갖거나 봉사 활동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평범한 활동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만약 유지 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다시 재발로 이어져 고려 전 단계로 후퇴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단과 재발의 사이클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건강한 삶을 영위한다. 아마 당신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 스스로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언뜻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일이 실제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복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전개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회복은 이 정도면 됐다고 느끼는 심리적 안주와 재발로 인한 자기 비난 및 절망 사이를 왕래하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이 심리적 안주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재발이 자신들에게 심각한 문제이며 어떤 경우에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음을 안다. 가능하다면 재발은 확실히 피해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재발 단계를 여러 차례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확실한 변화에 이른다.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그것을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일시적 후퇴로 간주할 필요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단 한 번으로 완전히 중독을 끊을 수 있다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처음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홈런 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실수로 중독 물질에 다시 손대더라도 자신에게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