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은 아팠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즐거웠던가.
그랬습니다.
인간의 뇌는 여러 가지 기억 중에서
고통을 가장 먼저 잊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살아가라는 뜻이라 들었습니다.
서둘러 고통을 잊고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또 사랑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두려워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춤거리고 물러서고 상대가 보다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확신이 더 또렷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던 날도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랑을 보지 않고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내 안의 상처만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시절에 저를 만났던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사랑하라’고 말하고 또 말하는
책 속의 제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날 길고 어둡던 터널이 끝났습니다.
가장 간절했던 생각은
‘그래도 사랑하길 잘했다’는 것이었고요.
강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질색입니다.
매일을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사는 것이 어디 뜻대로 되어야 말이지요.
조금도 원하지 않았으나 아픈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이별이 찾아왔고
마음이 아파서 울다가 몸이 아프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몸에 지워지지 않을 큰 흔적 하나를 갖게 되었지만
저는 이제 그것을 상처라 부르지 않고 흉터라고 부릅니다.
흉터는 만져도 아프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가로 겪었던 아픔들도 이제는 그렇습니다.
이 책을 끝내고 무척 즐거웠습니다.
다 괜찮아졌음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해
제법 용감해진 나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지 않게 해준,
내 마음의 지지 않은 햇살.
내 사랑하는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고 해놓고
못나고 못난 모습을 보여버린
제 손을 끝까지 꼭 잡아준 부모님께 특히.
그리고 당신에게도.
2013년 9월 가을의 시작
정현주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흘려 말했었다.
치장하고 나가야 하는 관계 말고
집 앞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나가서
편의점 앞에 나란히 앉아 맥주도 마시고
함께 만화책도 빌려 보는 사이,
어느 날 저녁을 지었는데
생각보다 맛있고 양이 넉넉한 날
“우리 집 와서 밥 먹어.”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며칠 전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했었다.
매일 저녁 여자는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영어회화를 공부했다.
여자는 여행을 좋아했는데,
처음엔 낯선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으나
점점 그 낯선 곳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낯선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만나
그곳의 문화를 경험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즐거웠다.
매달 1일.
새로운 클래스가 시작되었다.
7월의 클래스에서 여자는 흥미로운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자기소개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업에 필요해서,
승진하기 위해,
업무에 필요해서라고 이유를 말했지만
유독 한 남자만 달랐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자신과 똑같은 이유를 가진 남자라니,
그날 이후
여자는 남자가 하는 모든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여자는 버스를 기다리다 남자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목례를 나누고,
같은 버스를 탔다.
남자가 여자에게 어느 동네에 사느냐 물었다.
여자가 대답하자 남자는 같은 동네라며 좋아했다.
두 사람은 버스 한 정거장 사이에 살고 있었다.
“좋네요. 동네 친구가 있었으면 했는데.”
남자가 말했다.
마음을 들킨 듯하여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이내 내려야 할 곳이 되었다.
인사를 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물었다.
“혹시, 혼자 저녁 먹어야 하면 같이 먹지 않을래요?”
두 사람은 소박한 식사를 함께했다.
그동안 여행한 곳에 관해 이야기했고,
꿈꾸는 여행지가 같다는 사실에 즐거워했으며,
자주 다니는 카페가 같은 곳임을 알고 좀 놀랐다.
헤어질 무렵, 남자가 물었다.
“평소에는 뭘 할 때 제일 즐거워요?”
산책할 때라고 여자는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는 내일 학원에서 보자며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멀어졌다.
집에 돌아온 여자는 청소를 했다.
왠지 모르는 이유로 저절로 그러게 되었다.
깨끗해진 집을 보며 웃고 있을 때,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 남자였다.
집 근처 공원을 찍은 사진 아래,
단 한 줄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 그치면 우리 산책할래요?”
짧지만 여자를 오래 웃게 하는 문장이었다.
●
그
녀
에
게
말
걸
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는 애서가인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 뒤에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에요. 책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몇 달 전 남편과 나는 드디어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안 지 10년,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된 사이였다.
두 개의 서재를 하나로 합치는 데 그들은 전쟁 수준의 과정을 거쳐야 했어요.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도 달랐고, 겹치는 책도 많아서 누구 것을 간직할지 결정을 해야 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종종 충돌했지만 합의를 도출했고, 마침내 서재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책의 첫번째 챕터는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나의 책과 그의 책은 우리의 책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
서재를 하나로 합치면서 두 사람의 세계는 더 깊이 교류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책을, 아내는 남편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거죠. 관심 분야가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아내는 남극탐험에 대한 책을 갖고 있었고, 남편은 열대지방에 관한 컬렉션을 갖고 있었죠. 서재를 합친 덕분에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됐어요. 더불어 책에 그어진 밑줄과 메모를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상대의 생각, 그 역사까지도 알게 됐죠. 그리고 대화가 이어졌어요. 저는 이 결혼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무척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스페인 여행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죠. 어느 날 저에게 그녀가 멋진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일, 그 일을 하는 중에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여행을 좋아하는 제가 길 위에서 만난 여행을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한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시간이 나면 떠날 궁리를 하는데 그 시간이 무척 즐거워요. 여행 스타일도 비슷하고요. 내가 행복한 순간, 그 사람도 행복하다는 건 아주 중요한 거예요.”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서재 결혼시키기』의 부부도 그랬어요.
지은이인 앤 패디먼. 그녀의 아버지는 출판사를 했고 어머니는 기자로 여러 권의 책을 썼죠. 책으로 가득한 집에서 자라나서 그녀 역시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조지 하우콜트. 시인으로 책에 대한 열정이 아내 못지않았죠. 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두 사람이 만나 책 속에서 ‘우리가 정말 함께하는구나, 결혼했구나’ 느꼈다니 아름답지 않나요.
그러니
가장 행복한 순간,
곁을 잘 보세요.
거기 평생을 함께할
좋은 사람이
웃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자는 오늘,
그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주었다.
오래 동료로 지내다가
이제 막 두근거리는 사이가 된 참이었다.
본래 운전에 능숙했던 남자였는데
오늘은 서툴러서 꼭 초보인 것 같았다.
차선 변경을 제대로 못 해서
옆 차선의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후진을 하다가 벽을 스치기도 했다.
당황하는 남자의 모습이 낯설어서
여자는 자꾸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겨우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목이 마르다며 커피를 한 잔 사달라고 했다.
커피를 아껴 마시며
그는 차창 밖에 있는 여자의 집을 올려다보다가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꺼내었다.
일곱 살 때 집을 잃어버렸던 이야기.
“이사를 하던 날이었어요.
어머니가 집 정리하느라 바쁘니까
라면을 끓여 먹자면서
집 앞에 있는 가게에 가서 라면 몇 개를 사 오라고 하셨죠.
근데 라면을 사 들고 돌아서니까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방금 이사를 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죠.
좀 헤매다 보니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었어요.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죠.
우리 집이 어딘지 아냐고,
혹시 우리 집을 모르냐고.
길 가는 사람들이 알 리가 없잖아요.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타났어요.
골목 끝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알고 보니까 우리 집은 바로 옆 골목에 있더라고요.
바로 앞에 두고 멀리서 찾았지 뭐예요.”
이야기를 끝내고 그는 여자를 보며 웃었다.
남자와 헤어져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자꾸만 남자의 미소가 생각났다.
‘어쩌면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참 좋겠네.’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바로 거기 그 사람이 있었는데
멀리까지 가서 참 오래 헤맸다.
사랑을 찾아 멀리까지 갔었다.
바로 앞에 나를 보고 웃는,
참 따뜻한
사람이 있었는데.
●
그
녀
에
게
말
걸
다
영화 <온리 유>는 질문하고 있습니다.
운명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까? 혹 우리가 선택하고 믿는 것이 그대로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영화의 주인공 헤이스는 어려서부터 ‘내 운명의 짝은 누구인가’에 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궁금한 나머지 11세 생일에 점을 쳐보았는데 ‘너의 짝은 데이먼 브래들리’라는 답을 들었죠.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잊고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드레스를 가봉하던 날이었어요.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데이먼 브래들리라고 했습니다. 헤이스의 오빠 친구라면서 지금 이탈리아로 출장을 떠나는 참이라고 했죠. 헤이스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로마까지 날아가서 헤이스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헤이스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자신이 ‘데이먼 브래들리’라고 말합니다. 정말 운명이었냐고요? 아니었어요. 그는 헤이스가 마음에 들어서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죠. 남자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운명의 남자를 찾는 일을 돕기로 합니다. 결론은 예상한 대로예요. 둘이 사랑에 빠졌죠. 어쨌거나 영화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멀리까지 가서 한참을 찾았지만 운명의 상대는 바로 옆에 이미 있었다는 이야기.
운명에 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스토리로 ‘빨간 끈의 인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전설이지요. 보통의 인연은 하얀 끈으로, 하늘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은 빨간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하죠. 흔히 알려진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조금 다른 부분입니다. ‘빨간 끈은 아주 길다’는 사실이죠. 몹시 길어서 그 끝에 누가 있는지 금방 찾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멀리까지 가서 헤매야 등 뒤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오고 그런 후에 뒤를 돌아보면 거기 오래 찾아 헤매던 자신의 짝이 서 있다는 겁니다. ‘멀리까지 가기도 하고, 또 오래 헤매야 알 수 있으나, 사실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지요.
인연은 이미 옆에 있습니다. 바로 등 뒤에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찾지 못하고 오래 방황하는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어요. 모두가 다 보물을 찾아가는 즐거운 과정이고, 스스로 보물이 되는 시간인 것이니까요.
아직은 바람이 차갑던 3월 14일의 저녁.
길 위엔 사탕 바구니가 가득했다.
남자는 그 길을 걸으며 한 여자를 생각했다.
그에게 언제나 친절했던 여자.
그녀 때문에 그의 마음이 들뜨는 날도 있었지만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상냥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몸에 밴 친절일 뿐인지도 몰랐다.
친절을 믿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달 전인 2월 14일.
여자가 그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남자는 자꾸 웃음이 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직원이 그날 여자에게 초콜릿을 받았다.
남자는 혼자 질문했다.
‘그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칠 때가 많았다.
때마다 여자는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남자에겐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혼자 생각에 빠져 걷던 남자는
스산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다가
사무실에 머플러를 두고 왔음을 알았다.
되돌아가보니 여자가 혼자 일하고 있었다.
머플러를 챙겨 들고 나오는데 그녀가 물었다.
“저녁은 먹었나요?”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화이트데이네요”라고 하더니
여자는 말했다.
“어느 책에서 본 건데
사랑은 고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래요.
밥 먹었어요?
나랑 차 마실래요?
이런 간단한 말로 시작하는 거래요.”
그제야 남자는 답을 찾았다.
그는 식당을 나오며 말했다.
“우리, 커피 마실래요?”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기다리던 말이네요.”
그리하여
오래 엇갈리던 두 마음이 마침내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그날 밤
하늘의 눈썹 모양 달은
환하게 웃는 여자의 눈을 닮아 있었다.
●
두
사
람
에
게
말
걸
기
더스틴 호프먼이 감독을 한 영화 <콰르텟>은 은퇴한 음악가들이 모여 있는 영국의 비첨하우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누비며 공연하던 전설의 성악가들이 모여 있죠. 하지만 화려했던 것은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이 들고 병들었으며 가난해지기도 했죠. 그런 가운데도 로맨스는 펼쳐지는데 재미난 것은 어르신들의 연애는 젊은이들의 것보다 한결 심플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인공 레지는 사랑했지만 아픔으로 남았던 여인, 진을 비첨하우스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오래전 둘은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 다음 날 진이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시고 다른 오페라 가수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어요. 자존심이 강했고, 결벽증을 가진 레지는 깊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평생 진을 피해 다녔지만 운명은 그들을 삶의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했어요.
시간은 그들에게 솔직해지는 용기와 담백해지는 지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연 준비를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이런 둘의 마음을 눈치챈 친구가 진에게 사과하고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보라고 말합니다. 진은 괴로워하며 너무 늦었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그녀의 고뇌하는 한마디를 듣게 된 레지는 혼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사랑하는 데 너무 늦은 것은 없어.”
그날 저녁. 진과 레지는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무대 인사를 나갔을 때 관객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죠. 뜨거운 함성 속에서 레지는 옆에 서 있는 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결혼하자.”
진은 레지의 손을 꼭 잡았어요.
긴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진심은 몇 마디 말로 파악됩니다.
언젠가 정말 많이 보고 싶던 사람에게 어떤 말로 이 깊은 감정을 전할까 고민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보고 싶다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었어요. 사랑이 벅차오를 때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 역시 그랬습니다. “사랑해”로 충분했습니다. 감정을 풀어 설명하는 어떤 말도 필요 없었어요.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들은 대개 아주 심플합니다. 좋은 사랑 또한 그렇다고 믿어요. 너무 많은 생각은 사랑을 망칠 뿐이에요.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커가는 것 아닐까요. 사랑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 선택이 있을 뿐.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느가 말했죠.
“신은 너와 나 사이에 있어.”
사랑 또한 그렇습니다.
둘이 만들어가는 것인데 홀로 상대의 마음을 예측하며 두려움을 키워가잖아요. 용기를 낸다면 헛된 고민으로 흘려보낼 시간에 함께 사랑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좋은 사랑은 복잡한 말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복잡한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사랑 앞에서
심플해지는 지혜와 편안해지는 용기가
함께하길 바라요.
남자는 오늘 지하철 안에서 그녀를 보았다.
처음 본 것은 5년 전 대학 캠퍼스.
몇몇 수업을 같이 들었다.
어느 날, 시험을 앞두고
여자가 남자에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었다.
전공이 달라서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여자는 노트와 함께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보답으로 남자가 커피를 샀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학기를 끝내고 남자는 군대에 갔다.
이상하게도 가끔 그녀가 생각났다.
하늘이 맑은 날엔 유난히 그랬지만
연락할 방법을 몰랐다.
돌아와 보니 학교에 그녀는 없었다.
아마 이미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었을 것이다.
애를 쓰면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려졌다.
그렇게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린 인연인 줄 알았는데
오늘 남자는 지하철 안에서 그녀를 보았다.
다가갈 사이도 없이 여자가 내렸다.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 또한 내렸다.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성큼 커다란 걸음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놀랍게도 여자는 단번에 남자를 알아보았다.
“잘 지냈나요? 오랜만이네요.”
형식적인 안부가 오고 간 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 할 때
남자가 물었다.
“집까지 바래다줘도 될까요?”
여자는 작게 웃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꽤 오래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침내 여자의 집 앞.
인사를 나누고 돌아설 때 여자가 말했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돼요.
지하철역까지 갈 거면요.”
남자는 물었다.
“그럼 왜 아까 마을버스를 타지 않았어요?”
여자는 대답했다.
“같이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요.”
답을 뻔히 알면서도 질문을 하고,
원하던 바로 그 답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말했다.
“내일 저녁 7시.
아까 그 지하철역 입구에서 만나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산책하기 알맞은 날이면 좋겠다고,
여자는 그들의 내일에 대해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돌아섰다.
전화번호는 묻지 않았다.
반드시 만날 것을 아는 사람에게
열한 자리 숫자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스물두 시간 남았다.
1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겠지만
기다림은 분명 즐겁고 고마울 것이다.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
그
에
게
말
걸
다
‘사랑을 어떻게 시작할까’에 관해서 가장 명쾌한 해답을 주는 영화로 저는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를 꼽습니다. 주인공 동치성. 한때는 잘나가던 야구선수였지만 현재의 삶은 엉망진창입니다. 2군으로 밀려났고, 애인에게도 차였는데, 심지어 3개월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으니 당연히 방황할 수밖에요. 그는 본래 소심한 남자였는데 이제 막 살아버리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은행에 강도가 들었는데도 겁먹지 않고 맞서 싸웠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동치성이 강도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이 뭐냐?”
강도는 대답합니다.
“저요, 사랑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뭐 그런 거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영화엔 이런 말도 있었죠.
“사랑이 뭐 있어? 이름이 뭐냐고 묻고,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묻고, 어디 사느냐고 묻고, 뭐 좋아하느냐고 묻고, 그렇게 시작하는 게 사랑이지.”
바보 같은 남자 동치성은 영화 내내 방황합니다. 그런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응원하며 아껴주는 여자가 있었죠. 이름은 한이연. 두 사람은 같은 골목에 오래 살았고, 한이연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동치성을 좋아해왔습니다만 동치성은 그녀의 존재조차 몰랐어요. 어느 날 둘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동치성은 ‘그냥 아는 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깊어도 관계가 얽히지 않으면 ‘그냥 아는 사람’에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 해요. 바보같이 빙빙 돌면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 헤매었지만 죽음의 코앞까지 다녀온 덕분에 동치성은 사랑을 시작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둘이 나란히 골목을 걸었어요. 동치성이 한이연에게 물었죠.
“좋아하는 음식이?”
“사발면.”
“혈액형이······ O형?”
“아, B형······ 성격이······.”
“성격이 좋죠?”
둘은 마주 보고 웃었고 이렇게 해서 겁쟁이 동치성에게는 마침내 첫사랑이 생겼습니다. 미래도 생겼고요.
‘사랑이 뭐 별것인가요. 이름 묻고, 전화번호 묻고, 그날 저녁에 전화하고, 그러다가 정이 들면 사랑이지.’
사랑 앞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저는 그 대사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간결한 것이 더 좋은 답이다. 간결한 것이 아름답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