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제임스 빈센트(James Vincent)
런던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 「와이어드(Wired)」,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 등 수많은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현재 「버지(The Verge)」의 선임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첫 번째 저서이다.
옮긴이장혜인(張慧仁)
과학 및 건강 분야의 좋은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제약회사 연구원을 거쳐 약사로 일했다.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래의 자연사』, 『감정의 뇌과학』, 『내가 된다는 것』, 『집중력』, 『본능의 과학』, 『다이어트는 왜 우리를 살찌게 하는가』 등이 있다.
BEYOND MEASURE : The Hidden History of Measurement
by James Vincent
Copyright © 2022 by James Vincent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s © 2023 by Kachi Publishing Co., 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United Agents LLP through EYA (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Eric Yang Agency)를 통해서 United Agents LLP와 독점계약한 (주)까치글방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측정의 세계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저자 / 제임스 빈센트
역자 / 장혜인
발행처 / 까치글방
발행인 / 박후영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67, 파크타워 103동 1003호
전화 / 02 · 735 · 8998, 736 · 7768
팩시밀리 / 02 · 723 · 4591
홈페이지 / www.kachibooks.co.kr
전자우편 / kachibooks@gmail.com
등록번호 / 1-528
등록일 / 1977. 8. 5
초판 1쇄 발행일 / 2024. 2. 27
ISBN 978-89-7291-826-4 05900
나의 모든 스승님들에게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최고의 책이다.……도량학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그러나 저자에게는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있다. 뛰어난 안목으로 숨은 일화들을 꿰뚫으면서도, 사소한 부분들은 우아하게 건너뛰며 인류 진보의 흐름 속에 배치한다.……극도로 좋은 책이다.
―「타임스The Times」
금만큼이나 값지다. 지적 자극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인류의 생존에 저울과 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측정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저자는 재치 있으면서도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거대한 이론 뒤에서 작용하는 인간 드라마에 대한 저자의 감각은 특히 표준화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다룰 때에 두드러진다. 이 책에는 과학에 대한 전염성 있는 열정, 그리고 과학의 활용에 대한 건전한 회의주의가 엮여 있다.
―「옵저버Observer」
조용히 스릴이 넘친다.……사물을 측정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문명의 이야기와 다름없다. 자극적인 과장처럼 들리는 이 말을 이 책이 증명한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저자의 기발한 측정의 역사 이야기는 독특한 측정법이 어떻게 우리를 만들어왔는지를 매혹적으로 탐구한다.……이 독특한 역사서는 인류가 측정이라는 이름으로 걸어온 시간을 설명하는 데에 완벽하다.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매력적이다.……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측정부터 오늘날 우리가 숫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둘러본다.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흥미롭다.……광범위한 과학적 진보와 인간의 노력을 아우르는 매우 야심 찬 작품이다.……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명쾌한 산문으로 표현한다.……인상적이며 즐겁고, 생각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헤럴드The Herald」
깊은 몰입감을 제공한다.……능숙하고 우아하다. 멋 부리지 않는 담백한 문장으로 복잡한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저자의 재능이 솔직히 말해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혼란스러운 우주에서 믿을 수 있는 진리를 찾아내려는 인류의 시도들에 대한 기록.……매혹적이다.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킬로그램이 공식적으로 플랑크 상수로 재정의되었던 2018년에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측정에 빠져들었다. 그의 매력적인 이 책은 과학 그 이상을 포괄한다. 저자는 측정이 “사회 자체의 거울”이라고 지적한다.
―「네이처Nature」
인류의 노력, 실험, 믿음, 그리고 비범한 사람들이 이룩한 공헌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박식하면서도 우아한 책이다. 저자의 열정 덕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상대성 이론, 열역학, 양자물리학과 같은 분야의 이해를 돕는다.
―「메일 온 선데이Mail on Sunday」
저자는 매혹적인 사실들에 대한 안목과 더불어, 더욱 깊은 목적도 가지고 있다. 그는 통제가 항상 정보들을 측정하고 수집하려는 추진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Times Literary Supplement」
지성, 각성, 재치가 어우러져 쓰인 매력적인 책.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s」
측정의 역사는 추상적이거나 학술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 책은 사물의 범위를 결정하는 방식이 어떻게 결국 인간의 진보를 정의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BBC History Magazine」
무엇인가의 범위를 결정하는 일이 그것을 통제하려는 욕망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이 책은 충분히 증명해낸다.
―「히스토리 엑스트라History Extra」, 이달의 책
차례
서론 |측정은 왜 중요할까
제1장
문명의 발화
고대 세계, 최초의 측정 단위와 그 인지적 보상
제2장
측정과 사회 질서
초기 국가와 사회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측정학
제3장
적절한 측정 대상
과학혁명은 측정의 영역을 어떻게 확장했을까
제4장
정량화 정신
세상의 탈주술화,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역사
제5장
미터법 혁명
미터법의 급진적 정치, 그리고 그 기원인 프랑스 혁명
제6장
온 세상에 그려진 격자판
토지 측량, 미국의 식민지화, 그리고 추상화의 힘
제7장
삶과 죽음의 측정
통계의 발명, 그리고 평균의 탄생
제8장
표준 전쟁
미터법 대 제국 도량형, 그리고 측정학의 문화 전쟁
제9장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미터법 단위는 어떻게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제10장
관리되는 삶
현대 사회에서의 측정의 위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해와 측정
나가며 |머릿속의 척도
감사의 글
주
그림 출처
역자 후기
인명 색인
서론
최초의 단어나 최초의 선율처럼, 최초의 측정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알 수 없고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최초의 측정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수십만 년 전 고대 조상의 뇌 속에서 자란 원시 의식이라는 둥지에 측정이라는 행위가 더해지면서, 인간은 마침내 초원에 사는 다른 동물과 달라졌다. 측정은 언어나 놀이처럼 인지의 초석이다. 우리는 측정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게 되고, 직선이 끝나거나 저울이 기울어지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다. 측정은 현실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면서, 앎을 향한 발판을 놓는다. 측정은 건설과 도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구조적 기술의 뿌리이자 정량 과학의 시작이다. 측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주변 세계를 관찰할 수 없다. 실험하거나 배울 수도 없다. 측정은 과거를 기록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규칙을 밝힌다. 결국 측정은 개인의 노력을 통합하여 부분의 합을 넘어 더 큰 무엇인가를 이루도록 하며 사회를 결속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도구이다. 측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 동시에 우리도 만든다.
2018년, 나는 기자로서 킬로그램kilogram의 재정의를 다룬 기사를 쓰면서 측정의 중요성을 처음 깨달았다. 기사 작성을 위해 파리에 갔고, 미터법 감독기관인 국제 도량형국BIPM에서 수십 년간 킬로그램 재정의 문제를 연구해온 과학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킬로그램이 18세기 이후 어떤 과정을 거치며 특정 금속 덩어리의 무게로 정의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 금속은 물리적인 인공물로서 자물쇠가 채워진 프랑스의 한 지하실 금고에 철통같이 보관되어 있다. 전 세계 모든 무게(미터법을 따르지 않는 무게마저)는 킬로그램 원기IPK, 즉 이 금속 인공물을 수호하는 이들이 르 그랑le grand K라고 부르는 이 단일한 표준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킬로그램이 정밀성을 바라는 사회의 요구를 더는 충족할 수 없게 되었고, 과학자들은 기본 물질이 아니라 실제의 기반에 깊이 내재한 양자 특성으로부터 도출된 자연의 기본상수를 이용해서 킬로그램의 값을 재정의하려고 애써왔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존재하는 또다른 모든 미터법 단위도 대체하려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길이, 온도, 시간 같은 단위도 모두 국제 측정법 협약을 거쳐 조용히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숨겨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마치 계시 같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신기한 나무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외계 행성의 표면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측정 단위처럼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것조차 바뀔 수가 있다는 생각으로 짜릿했고, 측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궁금증이 더해졌다. 대체 킬로그램은 왜 킬로그램일까? 인치inch는 왜 인치일까? 누가 맨 처음 이러한 값을 정했고 지금은 누가 이 값을 유지할까?
이러한 사소한 질문들을 탐색하면서 나는 측정이라는 분야가 지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운지, 또 얼마나 역사적, 과학적, 사회적으로 경이로운 축제의 장인지를 알게 되었다. 측정의 뿌리는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로 거슬러올라가는 문명의 뿌리와 얽혀 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 교역, 천문학에 일관된 단위를 적용하는 법을 터득했고, 신과 왕을 기리는 높은 기념물을 지었으며, 새로 얻은 힘으로 별의 위치를 지도로 그렸다. 측정 단위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측정을 이용하여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조직화하려는 권력자의 특권이 되었고, 점차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측정법을 개발하는 과학―측정학―은 자연계를 파악하는 인간의 지식을 뒤바꾼 거대한 몇몇 혁신들과 얽혀, 우주 속 인간의 위치를 다시 정의하는 데에 여러 번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측정은 사회의 거울이다. 측정은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를 보여주는 관심의 형식이다. 측정은 곧 선택이자 다른 속성은 버리고 한 가지 속성에만 집중하는 관심이다. “정밀도precision”라는 단어 자체는 “잘라내다”라는 뜻의 라틴어 프라이키시오praecisio에서 왔다. 따라서 측정이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의 요구와 욕망을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세상은 무수한 측정 행위의 산물이지만, 측정 자체는 어디에나 존재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종이책으로 보든 전자책으로 보든, 책이나 화면이라는 최종 형태는 신중하게 무게를 재고 셈한 결과이다. 종이를 만드는 펄프는 먼저 세심하게 조성한 화학적 혼합물을 이용하여, 나무의 섬유질 세포 구조를 깨지 않으면서 서로 분리해서 만든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를 아주 정밀하게 작동하는 거대한 금속 롤러 사이로 통과시켜서 지금 두 손가락 사이에서 만져지는 균일한 두께로 압축한다. 이 종이를 익숙한 크기로 재단하고 묶은 다음, 포장하고 무게를 재어 전 세계로 운반한다. 이 문장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 서체조차 신중한 측정의 결과이다. 획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다듬었고 이웃한 글자 사이의 간격도 균형을 이루도록 배치되었다. 이 책을 전자책 형식으로 읽고 있다면 일련의 측정 과정은 한층 더 복잡하다. 원자 규모에서 일어나는 실리콘 칩의 공학부터 전자책 기기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 섬세하게 균형 잡힌 연금술까지 전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이 모두를 염두에 두든 아니든 측정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측정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은 물론, 시계나 달력, 업무 보상이나 처벌에 이르는 무형의 사회 지침에도 흔히 영향을 미치는 정렬 원리이다.
측정은 세계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인류가 발명하고 부여한 관행이다. 측정이라고 부를 만한 최초의 증거는 눈금이 새겨진 동물 뼈이다. 이러한 측정 유물로는 2만 년 전에서 1만8,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개코원숭이 종아리뼈인 이상고Ishango 뼈가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는 약 3만3,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늑대 뼈도 있다.1 이 뼈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마치 점괘를 읽는 일처럼 불확실하고 직관적이지만, 고고학자들은 뼈에 새겨진 표시의 배열로 보아 이 유물들이 최초의 공식 측정 도구인 탤리 스틱tally stick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늑대 뼈의 경우, 뼈에 파인 홈은 여러 숫자 체계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구분 짓기와 마찬가지로 다섯 개씩 묶여 있다.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는 하나, 둘, 셋, 넷을 표시한 다음 선을 긋거나 빗금을 치거나 갈고리처럼 묶거나 하는 방식으로 다섯을 나타낸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이는 인간이 타고난 인지적 한계에 가까운 것으로, 인간 사고의 자연스러운 장벽이다. 그러나 넘어서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람이 한눈에 갯수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해보면, 보통 기껏해야 세 개나 네 개가 한계이다.2 그 이상이 되면 의식적으로 셈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측정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금을 새긴 뼈는 우리 종의 야망이 뇌의 용량을 넘어섰고 신체 외부의 도구에 손을 뻗게 된, 전 세계에서 여러 번 반복된 순간들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유물은 우리가 주변 세상을 측정하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 시점도 보여준다.
이러한 인공물로 어떤 현상을 기록했는지 알아내면 인간의 초기 인지 발달에서 측정이 점유한 위치를 해독할 수 있지만, 글로 기록된 문서가 없다면 이 유물의 목적은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사냥꾼이 늑대 뼈에 사냥감의 숫자를 기록하면서 사냥감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표시 하나를 하루로 해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뼈에 새겨진 전체 표시 개수―55개―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태양계의 운행 속에 이미 존재한 단위인 음력 한 달의 대략 두 배가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뼈는 세속적인 행위보다는 신성한 행위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우주의 척도가 신성하고 영적인 관념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는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는 행위를 통해서, 생명을 선사하는 자연계의 규칙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연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달력은 동물의 이동, 또는 특정 꽃이나 작물의 모습을 바탕으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 계절력이었다.
인간이 공식적인 측정 체계를 개발한 유일한 생물이라는 점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쥐나 너구리 같은 동물은 수량을 이해하고 많은 식량 더미와 적은 식량 더미를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외에 분명 직관적인 계산 형식이 필요한 행동을 하는 동물도 있다(과학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방향을 잡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새들의 놀라운 비행 능력을 떠올려보자). 그러나 이러한 기술에는 범위가 한계가 있다. 실제로 어린이들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측정 능력은 쓰기나 셈하기처럼 타고나는 직관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습득한 기술에 가깝다.3
1960년에 실시된 한 연구에서는 4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탁자 위에 80센티미터 높이로 쌓은 블록 탑을 보여주고 조금 멀리 떨어져서 똑같은 탑을 쌓으라고 했다.4 아이들이 탑을 쌓는 동안 두 탑을 대보는 등 직접 비교하지 못하도록 중간에는 칸막이를 설치했다. 가장 어린 4세에서 5세 미만의 아이들은 눈대중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이 아이들은 먼저 탁자 위의 탑을 본 다음 이를 본떠 비슷하게 탑을 쌓았다. 좀더 나이를 먹은 5세에서 7세까지의 아이들은 눈으로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을 자 대신 이용했다. 이 아이들은 팔이나 손, 손가락을 대어 두 탑의 높이를 비교했다(이 나이대의 아이들 일부는 아주 당연하게도 이 실험이 장난이라고 여기고 지시를 무시한 채 원래 탑 옆에 마음대로 탑을 쌓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7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은 주어진 긴 종잇조각이나 막대기를 임시 자로 만들어서 외부 척도로 이용했다. 이 나이대의 아이들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좀더 어린 아이들은 탑과 높이가 같은 종이나 막대기를 주로 사용했지만, 좀더 나이가 든 아이들은 전체를 세분해서 셈할 수 있는 더 작은 도구를 편리하게 사용했다.
이 연구는 측정이 나이가 들며 습득하는 기술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측정 행위의 핵심 요소가 추상화 능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쪽 탑을 저쪽 탑과 비교하거나 목표물과 길이가 같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중개물을 고안해야 한다. 고유한 값만을 나타내며 한쪽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편리한 매개, 측정 단위 말이다.
숫자를 처리하는 이러한 능력은 진화의 역사에서 오래 전에 형성된 거대한 인지적 맞교환의 일부라는 의견도 있다. 유전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가 그 증거이다. 침팬지는 특정 숫자 작업에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잘 훈련된 침팬지는 화면에 숫자 1부터 9까지 중 일부를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만 보여준 후에 숨겨도, 정확하게 작은 숫자부터 순서대로 맞힐 수 있다. 게다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실제로 침팬지는 겨우 210밀리초만 숫자를 보여주어도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5 인간의 눈이 화면을 살펴보는 데에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이다. 이 작업에 숫자 파악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보다는 복잡한 시각 정보를 잠깐 보고 기억하는 사진 기억 능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도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침팬지도 네 개나 다섯 개가 넘는 사물들의 묶음을 정확한 숫자와 연결하는 등의 다른 기본적인 수리 능력은 몇 년간 훈련해도 얻지 못한다.6
이 연구를 시행한 연구진은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조상 일부가 밀림에서 위협을 식별하는 데에 적합한 사진 기억을 가졌으리라는 이론을 세웠다. 인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엉킨 이파리나 덩굴, 뿌리, 나무껍질, 꽃, 과일, 그리고 위협이 되는 이빨을 감지하고 잠재적인 포식자를 식별하여 경보를 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우리 조상 일부는 진화의 힘을 받아서, 언어를 처리하고 사회화하고 서로에게서 배우는 능력 등의 다른 인지 능력과 이 향상된 기억 능력을 맞교환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인지 도구는 현대 생활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는 체계를 구성하도록 도우며 측정을 꽃피웠다.
켈빈 경으로 더욱 잘 알려진 19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은 측정이 인간의 앎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상 깊게 요약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측정할 수 있고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지식은 빈약하고 부족하다. 앎의 시작일지는 모르나 과학의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한 사고이다.”7
톰슨의 말은 측정을 절대적으로 보는 신념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혼란스러운 우주의 신비를 다듬고, 계산을 통해서 미지의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숫자의 힘에 대한 확신이다. 정확한 측정이 실험의 전제조건이자 발견을 이끄는 박차라는 사실을 거듭 증명한 과학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믿음은 타당하다. 톰슨이 열역학과 전자기학에서 거둔 획기적인 성과는 바로 이 정확한 관찰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 관계는 고대 천문학이라는 학문으로 훨씬 거슬러올라간다. 오늘날에는 신비주의와 경험주의를 뒤섞은 것으로 보이는 분야 말이다.
기원전 1894년 무렵 등장한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왕국에서는 동물 내장에서부터 ‘사람에게 오줌을 누는 개의 색깔’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물에 신의 뜻을 부여하면서, 신이 다소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인간과 자주 소통한다고 믿었다.8 특히 하늘은 어디에서나 보이기 때문에, 멀리까지 전파되는 천체 방송 시스템처럼 하늘이 별과 행성을 통해서 아주 권위 있는 소통 체계를 제공한다고 여겨졌다. 밤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질병, 홍수, 침략 같은 재난이 임박했음을 경고했다. 평화로운 시기, 고대하던 아기의 탄생, 수익 높은 거래의 성사를 알리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은 하늘의 전언을 해독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 결과를 도표화해 불규칙성을 걸러내며 신의 은총을 살폈다. 이러한 방법은 세상을 정확히 관찰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식의 핵심이다.9
이러한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측정의 중요성은 수 세기 동안 그다지 순조롭게 발전하지 못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손과 눈으로 계산해서 얻는 지식이 추상적인 사고로 얻는 지식보다 열등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심은 고대 그리스의 스콜라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들은 물질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같은 비물질적 특성을 참조해야 실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본능을 완전히 버리고 밤하늘을 관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하려면 과학혁명이라는 계시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16세기 덴마크의 귀족 튀코 브라헤는 의외로 끈질긴 측정의 수호성인이었다. 브라헤는 재산이 엄청났고(삼촌 요르겐 브라헤가 덴마크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다), 금속 코를 착용했으며(결투에서 코가 잘렸다), 반려동물로 엘크를 키웠다(이 엘크는 맥주를 너무 마시고는 브라헤의 성의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추정된다)고 전해지는 괴짜였다.10 브라헤는 1572년에 새로운 별―우리은하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초신성들 중의 하나이다―이 밤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뒤 천문학에 푹 빠졌다. 고대의 지혜나 종교적인 교리는 하늘이 불변한다고 가르쳤지만, 브라헤는 “하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관찰자들”을 혹평했다. 그가 목격한 새로운 별은 분명히 다른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지은 우라니보르그 천문대에서 수십 년에 걸쳐 상세하고 정밀한 천문 기록을 수집했다. 통찰력 있는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브라헤의 제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곳에서 브라헤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최초의 수학적 천문 법칙인 세 가지 행성 운동 법칙을 도출했다. 이 법칙은 행성이 타원 궤도로 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태양계 속 행성들을 신성하고 영묘한 실체가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로 다루었다. 이처럼 새롭게 우주에 주목하고 결국 교회의 진리를 대체할 영원한 진리를 밝힌 것은 바로 측정이었다.
켈빈 경의 시대에 이르면 측정의 힘은 과학적 지식을 넘어 산업적으로도 적용되면서 그 우위가 입증되었다. 19세기의 정밀 공학은 비효율적이고 허술한 기계였던 증기기관을 산업혁명의 고압 동력으로 바꾸어놓았고, 전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계량하는 기술은 조명이나 통신 같은 상업적 분야에 적용되었다. 농장 대신 공장이 국가 부富의 근간이 되고 전신선이 대륙을 연결하며 엑스선이 인체 내부를 비추던 시기였다. 횃불과 가스등이 깜빡이며 시작된 1800년대는 전기가 번쩍이며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모든 진보는 적어도 측정할 수 있는 것들 덕분에 이루어졌고, 이후 점점 속도가 붙었다.
케플러의 계산은 불변하고 정밀하며 검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통 최초의 과학 “자연법칙”으로 여겨진다. 이 계산의 권위는 보편성에서 나온다. 이 계산이 예측한 사실은 지금, 이 행성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에 걸쳐 모든 행성에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이 계산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칙이다. 이러한 특성은 측정법 개발에 필수적이다. 실제로 측정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점점 추상성이 증가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측정은 인간 경험의 특수성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인간의 삶과 노동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 결과 측정은 케플러의 법칙처럼 훨씬 넓은 영역에서 권위를 얻게 되었다.
1960년의 블록 탑 쌓기 실험에 참가하여 탑의 높이를 잰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가장 먼저 사용하는 측정 도구는 몸이다. 손이나 발을 이용한 일반적인 단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큐빗cubit(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이나 패덤fathom(양팔을 쭉 뻗을 때의 너비) 같은 단위도 친숙하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신체로부터 매우 다양한 측정 지표를 개발했다. 예컨대 아즈텍인은 큐빗이나 패덤에 해당하는 단위뿐 아니라, 팔뚝의 길이(오미틀omitl)나 손끝과 겨드랑이 사이의 길이(키아카틀ciacatl), 손가락 끝과 어깨 사이의 길이(아흐칼리ahcalli)를 이용한 단위도 만들었다.11 마오리인은 몸을 이용해 적어도 12가지가 넘는 단위를 고안했다. 가장 짧은 단위인 코누이konui는 엄지손가락 첫 마디의 길이를 의미하고, 가장 긴 단위인 타코토takoto는 양팔을 머리 위로 쭉 뻗었을 때의 몸 전체 길이를 나타낸다.12 이들 중에 대부분은 표준 단위로 바뀌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양손을 오목하게 모아서 쥘 수 있는 양을 의미하던 중세 영국 단위인 옙슨yepsen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지금도 음식이나 재료를 한 줌이나 한 꼬집 같은 단위로 나눈다.
우리의 몸을 이용해서 세상을 측정하는 방법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활동에 적합한 척도일뿐더러, 측정 도구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여러 전근대적인 척도들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렇게 얻은 측정값이 탄력적이어서 환경에 따라 늘거나 줄어들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핀란드의 옛 길이 단위인 페닌쿨마peninkulma는 원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6킬로미터 정도)를 의미했다.13 이러한 단위는 측정하는 지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부정확하다(개 짖는 소리가 어디까지 들리는지는 울창한 숲과 광활한 계곡에서 각각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유연성 덕분에 지형이나 접근성 등 나름의 정보를 주기도 한다. 비슷한 농업적 요소에 따라 달라지는 중세의 토지 단위에서도 측정의 이러한 측면이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옛 단위인 콜럽collop은 소 한 마리를 방목하는 데에 필요한 땅의 면적을 의미했다. 생활의 실질적인 부분을 적용한 셈이다. 콜럽으로 따지면, 풀이 무성하고 소가 먹을 것이 많은 목초지는 같은 면적의 황량한 언덕보다 더 작은 값으로 측정된다.
1942년 아일랜드의 작가 에릭 크로스가 쓴 소설 『재단사와 아내 앤스티The Tailor and Ansty』에서 주인공 재단사는 콜럽을 이용해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땅을 4,000에이커나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고작 “실제로는 소 4마리밖에 풀을 못 뜯는” 땅을 가진 이웃을 비웃으면서, 재단사는 “1에이커라고 해도 돌무지 땅 1에이커일 수도 있으니 콜럽으로 따져보자”고 말한다. 재단사는 조상들의 실용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쇠물닭이나 검둥오리 같은 뜸부깃과 새의 수명을 기준으로 시간 단위를 설명한다. “뜸부기 수명 세 배 해보았자 사냥개 한 마리 수명 / 사냥개 수명 세 배 해보았자 말 한 마리 수명 / 말 수명 세 배 해보았자 칠면조 한 마리 수명 / 칠면조 수명 세 배 해보았자 사슴 한 마리 수명 / 사슴 수명 세 배 해보았자 독수리 한 마리 수명 / 독수리 수명 세 배 해보았자 주목 한 그루 수명 / 주목 수명 세 배 해보았자 땅에서 솟은 오래된 산등성이 하나의 수명.” 재단사는 오래된 산등성이 수명을 세 배 하면 “세상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시간”이기 때문에 더 큰 시간 단위는 필요 없다고 덧붙인다.14 과학저술가 로버트 P. 크리스는 뜸부기 한 마리의 수명을 10년이라고 치고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면, 6만5,610년이 된다고 썼다.15 오늘날 우주 나이의 추정치가 약 140억 년인 것을 고려하면 터무니없지만 중세의 추정치와는 비슷하다. 재단사가 말했듯이 옛 단위가 우수한 이유는 분명하다. 옛 단위는 “주변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계산하니 어디에 가든지 달력이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16
단위의 설명 능력은 단위가 노동과 토지의 형세에 맞춰 이루어진다는 실용적인 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단위 사용은 지역성과 전통을 우위에 두는 세계관의 일부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사회가 점점 더 연결되면서 척도는 문제를 일으켰다. 이웃 지역에서 다른 단위를 사용하면(또는 더 심각하게는 같은 단위가 다른 값을 나타내면) 교역에 문제가 생겼다. 사투리처럼 지역마다 다른 측정 때문에 사람들은 단위를 쉽게 판독할 수 없었고, 중앙정부는 시민의 재산을 평가하거나 세금을 부과하기가 어려웠다. 서로 다른 척도 때문에 부패도 만연했다. 예를 들면 봉건 영주들은 시장이나 제분소에서 사용하는 척도보다 더 큰 용량 척도로 곡물을 측정해 소작료를 더 걷었다. 농민들이 영주에게 속았다고 해서 권력기관에 의지할 수 있었겠는가? 표준화된 척도가 없던 까닭에 생긴 권력의 공백은 쉽게 악용되었다.
바로 이것이 측정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미터법의 탄생에 이바지했다. 18세기 말의 몇 년간 프랑스 혁명과 함께 탄생한 미터법 계획은 당대 정치의 상징이자 실증이었다. 프랑스의 지식인 학자들은 당대의 이상을 반영하기 위해서 미터법을 설계했다. 이들은 도량형을 표준화하면 봉건주의 생활의 불균형을 일부 제거하고 공화정의 정치적 평등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학자들은 노동과 환경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허의 요소들을 측정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요소가 없는 불멸의 중재자라고 여겨지는 것을 바탕으로 단위를 정하고자 했다. 바로 지구 자체이다. 당대의 여러 훌륭한 지식인들이 지구를 측정하고 새로운 길이 단위인 미터를 정의하는 계획에 장장 7년이나 헌신했다. 결국 길이 표준인 미터는 북극점에서부터 적도까지 이르는 거리의 1,000만 분의 1로 표준화되었고, 질량 표준인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한 변의 길이가 10분의 1미터인 정육면체)의 무게로 정의되었다. 학자들은 과학적 계산의 산물이자 혁명의 심판을 거친 이 새로운 단위들이 보편적으로 수용되리라고 믿었다. 이 단위들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추상화한, 공정하고 불변하는 단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상화는 결국 미터법이 전 세계에서 채택되고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 공헌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미터법 단위가 어떤 측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오래 지속되고 보편적인 결실”이라고 언급했다.17 미터법이 탄생하면서 측정은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사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규모로 조직화, 분석,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실제로 발명된 이후로 수 세기 동안 미터법은 훨씬 더 추상화되었다. 미터와 미터의 친구들인 또다른 미터법 단위들은 더 이상 지구의 둘레 같은 엉성한 것에 기반하지 않았다. 이제 미터법은 빛의 속도나 원자의 회전처럼―우리가 아는 한―현실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우주상수 그 자체로 정의된다.
측정의 역사를 살펴보는 여정은 나를 여러 곳으로 인도했다. 나의 여행은 측정학의 중요성이 피라미드 돌에 새겨진 타는 듯이 뜨거운 카이로에서부터 최초의 섭씨온도계가 보관된 웁살라의 서늘한 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의 취재 대부분이 이루어진 곳은 런던 대영도서관이다.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의 문헌을 읽고 배우며 나만의 취재를 이어나갔다. 도서관 입구로 걸어갈 때마다 건물의 수호신 석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앞에 놓인 것을 측정하려고 몸을 굽히고 있는 거대한 석상이다. 그 석상은 무엇인가에 강한 관심을 쏟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몸은 거대하고 근육질이며, 뻗은 손에는 번개처럼 땅을 찌를 듯한 컴퍼스를 잡고 있다.
처음에는 그 석상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측정, 그리고 측정의 역량과 권위를 나타내는 기념상이 매일 나를 맞이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점심시간에 도서관 안뜰에 앉아 무심코 이 석상의 역사를 읽다가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전하는 설명을 발견했다. 이 석상은 이탈리아의 화가 에두아르도 파올로치가 1995년에 만들었는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아이작 뉴턴을 같은 자세로 묘사한 1795년의 수채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파올로치는 이 석상으로―여러 학문 분야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인류의 탐구를 상징하기 위해서―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원본은 그보다는 훨씬 더 비판적인 의도를 담았다. 그는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업적을 기리기보다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그를 풍자했던 것이다. 블레이크의 수채화 속 인물은 분명 계산에 몰두하고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경이로움은 보지 못한다. 그는 영웅적이라기보다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측정에 몰두하느라 컴퍼스로는 담지 못하는 세상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블레이크는 이 작품을 몹시 좋아해서, 전 생애에 걸쳐 여러 번 다시 그렸고 병상에서도 임종 직전까지 마지막 사본에 색을 덧칠하기도 했다.18 이 작품은 블레이크 생애의 가장 큰 지적 투쟁을 나타낸다. 블레이크에게 영감을 준 동시에 반감을 불러일으킨 합리성과 진보라는 계몽주의 이상에 대한 처단인 것이다. 블레이크가 수채화에서 묘사한 뉴턴의 자세는 블레이크의 신화적 세계에 등장하는, 컴퍼스를 휘두르는 또다른 신, 유리즌을 떠오르게 한다. 블레이크의 시와 회화에서 법과 이성, 질서를 구현하는 태초의 창조주로 묘사되는 신이다(유리즌Urizen이라는 이름은 성서적이지만 “당신의 이성your reason”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몹시 솔직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와 대화하고 혁명을 옹호했던 신비롭고 급진적인 블레이크가 보기에, 유리즌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최초로 우주의 무게를 달고 측정하면서 인간의 영혼에 한계를 부여한 억압적인 폭군이었다. 미술사가이자 소비에트 첩자였던 앤서니 블런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블레이크가 보기에는] 유리즌의 탄생으로 무한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짓눌리고 인간이 오감이라는 좁은 벽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19
킬로그램을 재정의하는 작업에 처음 매료되었을 당시에, 측정을 억압적인 힘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측정학의 역사에 깊이 빠져들면서 그 측면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측정은 분명 통제의 도구이고, 그 결과 역사 전반에서 조작, 박해, 압제에 이용되고 있다. 무엇인가를 측정한다는 것은 결국 여기까지는 되고 더는 안 된다는 한계를 세계에 부과하는 일이다. 그 복잡함을 전부 포착하지 못하는 제한된 범주에 현실을 억지로 꿰맞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계의 어떤 면을 측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편견과 욕망을 반영하여 선택하기 때문이다. 측정은 우리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화하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선택을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 측정이 잘못되더라도 아주 작고 사소한 경우라면 직장에서 체면이 깎였을 때처럼 잠깐은 괴롭지만 금방 잊히기도 한다. 그러나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사례도 있다. 우생학이나 과학적 인종차별에서 오는 공포를 떠올려보자. 인종적 위계질서라는 추악한 개념으로 추동된 이러한 운동은 머리뼈 크기 비교나 IQ 테스트에서 나타난, 측정법의 가짜 객관성으로 정당화되었다.
블레이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야만성을 문명 세계에 예견된 산물로 보았다. 20세기의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나 테오도어 W. 아도르노는 일반화된 규칙과 범주를 생산하는 모든 추상화 과정이 좋든 나쁘든 근대성의 기초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끊임없이 형성하는 것도 블레이크가 진저리쳤던 바로 그 계몽주의 사고의 산물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분류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한 조건이며, 결국 지식은 분류를 해체한다.”20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 세상은 “등가물로 지배받는다.” 즉, 모든 것을 숫자로 정리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추상적인 수량으로 요약하여 비교하려는” 욕망에 지배받는 세상이다.21 어쩌면 수 세기 전의 풍자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말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이란,
입맛에 맞는 체계를 발견하고
모든 면에서 꿰맞춰
자연이 복종하도록 강요하지.22
이러한 평가가 그저 잔인한 줄자와 부당한 저울을 비난하려고 측정에 부과하는 무거운 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보건, 교육, 치안 등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때 측정에 어김없이 의존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측정이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까? 나는 이것이 측정이라는 주제가 지닌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측정의 깊이는 표면에 가려져 있다. 익숙함이라는 얇은 표면을 한 겹 벗겨내면, 측정이 결코 진부한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측정은 역사를 형성해온 복잡하고 격동적인 힘이다. 측정은 인류를 이끄는 교사이자 지배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며 측정은 신과 왕의 관심사가 되었고, 철학자와 과학자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아이들이 연필과 자를 들고 연습하며 습득하는 기술인 동시에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통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따져보면 측정은 우리 모두에게 흔적을 남긴다.
나는 손으로 길이를 측정할 때 줄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면적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저울 무게를 더하지 않았습니다.
저울추를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의 서약1
나일 강의 풍요로움을 측정하다
우리는 대개 측정이 세상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저울이나 계측기, 자 같은 수단을 이용해 자연에서 얻은 지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그저 관습적인 생각일 뿐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척도는 흔히 측정보다 앞선다. 척도는 보이지 않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복잡한 체계의 산물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기 전부터 존재했고 이해하려면 노력이 필요한 체계 말이다. 고에너지 우주 입자를 찾아낼 수단을 고안하기 전에도 우주 입자가 수백만 년간 우리 조상들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듯이, 척도는 다른 차원에서 온 영혼처럼 셀 수 도, 지각할 수도 없지만 우리 곁에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척도를 이해할 수단을 고안하는 것뿐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사람들이 정착하고 문명을 건설하기 훨씬 전부터 특별한 척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나일 강이라는 보물이다. 이 흐르는 보물은 홍수로 불어난 물과 비옥한 땅으로 매년 계량되었다.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입니다.”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의 이집트학 교수 살리마 이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살리마와 나는 소비에트 시대의 낡은 택시를 타고 카이로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살리마는 자신의 유려한 말솜씨와 뜨내기 작가의 게으른 요구, 모두를 의식하는 듯이 살짝 윙크하고 미소 지으며 이 구절을 인용했다.
카이로를 처음 방문한 나는 말 그대로 도시의 소음과 열기에 완전히 진이 빠졌는데, 체구가 작고 상냥하면서도 몹시 기민한 살리마에게는 더욱 기가 꺾였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살리마는 끊임없이 친구나 동료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침착하게 저녁 식사 약속과 고고학 발굴 작업 일정도 조정하면서, 대화 상대가 누구든 다정하게 “자기”나 “하비비”(아랍어로 부르는 애칭)라고 불렀다. 그 사람들 모두와 정말 그렇게 친한 사이인지 묻자 살리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이름이 기억 안 나서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른 헤로도토스의 말은 물론 옳았다. 나일 강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지대에서 이집트로 흘러 내려와 주변 평야를 매우 규칙적으로 범람시켰다. 수천 년 동안 매년 여름이면 나일 강 주변에는 풍부한 진흙이 두껍게 쌓였고, 이 끈적한 땅에 뿌리를 내린 작물은 물을 적게 주어도 겨울 햇살 아래에서 충분히 여물었다. 봄이 되면 작물을 수확할 준비가 되었고, 여름 더위에 진흙이 말라 쩍쩍 갈라지면 마개 빠진 욕조에서 물이 빠지듯이 여분의 물과 미네랄이 땅에서 빠져나가면서 땅이 바짝 마르고 다시 농사 주기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았고, 문화 깊숙이 나일 강의 존재를 새겼다. 매년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나일 강의 범람은 달력에 세 계절을 만들었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인 아케트Akhet, 곡식이 자라는 시기인 페레트Peret, 물이 빠지는 시기인 셰무Shemu였다. 홍수는 하피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불룩 나온 배와 부푼 가슴으로 묘사되며 세상에 풍요를 가져오는 자웅동체雌雄同體 신이다.2 나일 강의 풍요는 매년 깊은 산속에 숨겨진 동굴에서 물을 길어온다는 하피의 불가해한 의지라고 설명되었다. 이집트로 강물이 범람할 때면 하피의 영혼이 펄떡거리는 개구리와 악어 무리를 거느리고 땅을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이었다. 매년 하피가 강림하며 생긴 막대한 풍요로움이 수천 년 동안 문명을 일궜다. 오늘날에도 나일 강은 이집트 물 수요의 95퍼센트를 충당하는 필수 자원이다.3
이 풍요를 포착하려면 독창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살리마는 이 작업에 이용된 도구 하나를 보여주러 나를 데려갔다. 문명이 발화하던 시기의 측정법의 역할을 증언하는 고대 측정 유물, 나일로미터nilometer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로미터라는 측정 도구를 이용하여 매년 나일 강의 범람 수위를 측정했다. 나일 강의 범람 수위는 그해의 수확량이 많을지 적을지를 결정하고 시계태엽처럼 나라를 움직이는 동력이 될 통찰을 주었기 때문에 이 수위를 읽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나일로미터가 기근이 온다고 하면 식량을 비축해 사람들을 먹이고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풍작이 온다고 하면 작물, 노동, 토지의 형태로 적절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자원은 이후 은이나 구리 교역을 뒷받침하고 군대에 식량을 배급하고 사회를 뒤흔든 피라미드 같은 건설 작업의 바탕이 되며 국가사업을 지탱했다. 풍성한 수확을 이용해 흉년을 대비하고 사람들을 먹일 수확물을 잔뜩 비축해 곡물 창고를 채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결정을 내리려면 측정이 필요했다.4
이러한 각각의 목적에 적합하게도 나일로미터는 단순했다. 본질적으로 나일로미터는 나일 강의 물이 닿는 기둥이나 벽, 계단에 새겨진 거대한 자라고 보면 된다. 눈금은 큐빗cubit 단위로 새겨져 있다. 큐빗이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거리로, 이집트에서 고안되어 이웃 문화로 퍼진 듯한 고대의 길이 단위인데(이 단어는 “팔꿈치”를 뜻하는 라틴어 쿠비툼cubitum에서 왔다) 『성서』에도 자주 등장해서 오늘날에도 친숙하다. 수천 년 동안 여러 큐빗 단위가 있었고, 이집트인들도 두 가지 종류의 큐빗을 사용했다. 6팜palm인 “일반 큐빗”과 7팜인 “로열 큐빗”이다. 1팜은 네 손가락을 모으고 잰 한 손바닥의 너비이므로, 긴 큐빗인 로열 큐빗은 대략 52센티미터(20인치)이다.
살리마와 내가 탄 택시는 꽉 막힌 길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겨우 빠져나와 나일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다리에 이르렀다. 공기는 강물 위를 흐르며 시원해졌다. 살리마는 나일로미터가 맨 처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이집트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살리마는 나일로미터가 전국에 걸쳐 수백 개는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며,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이집트의 제1왕조가 영토를 통일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도 나일 강에 의존했어요. 문자나 관료제의 탄생과 더불어 고대 이집트라는 국가가 발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물과 땅에 대한 접근을 조직화하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누가 물을 소유하고 물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문서화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러려면 국가가 필요했죠.”
살리마와 나는 이 구역의 나일 강에서 큰 섬에 속하는 로다 섬에 내렸다. 우리는 타는 듯한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 나일로미터가 설치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이 특별한 나일로미터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나일로미터는 아니지만,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이집트가 이슬람 아바스 왕조에 속했던 9세기에 만들어진 이 나일로미터의 나이는 겨우 1,0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5 살리마가 (현명하게도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초소를 내팽개치고 그늘 벤치에서 쉬고 있는)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일로미터 보관소를 바라보았다. 나일로미터 보관소는 거대한 12면 지붕이 얹힌 단층 구조물이었는데, 섬의 끝에 위치해서는 배의 조타수처럼 나일 강을 향하고 있었다.
살리마가 표를 샀고 경비원 한 명이 건물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오전이어서 우리가 그날의 첫 방문객이었다. 경비원이 문을 여는 동안 우리는 비켜서 있다가, 다행히도 열기를 피해 아래쪽의 서늘한 석조건물 그늘로 내려갈 수 있었다.
건물에 들어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얼떨떨해졌다. 나일로미터 자체는 평범했는데―11미터 정도 깊이의 계단통 중앙에 단순한 8각기둥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위쪽에 펼쳐진 지붕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대칭을 이룬 12개의 창문을 통해 빛과 공기가 건물로 들어오고, 첨탑처럼 솟은 천장은 덩굴, 잎, 꽃이 빽빽하게 짜인 장식으로 덮여 있어서 파릇파릇한 태피스트리처럼 보였다. 금색과 초록색으로 엮인 장식 때문에 마치 신비로운 보석 정원의 차양 아래에 서 있는 듯하기도 했다. 살리마는 경비원에게 조용히 다가가 돈 몇 푼을 찔러주었다(나에게는 “제가 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속삭였다). 경비원은 계단통 아래로 통하는 전용 문을 열어주었다. 벽을 타고 돌계단이 늘어서 있었지만 난간이 없어 불안한 탓에 나는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살리마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던 살리마가 잠깐 멈춰 서더니 조금 재미있는 낙서를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벽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1820년 영국 관광객 왔다 감.”
일단 바닥에 도착하자 나는 평정을 되찾고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교회의 지하 묘지처럼 먼지가 쌓여 있고 축축한 그곳은 지하실이라기보다는 동굴 같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그제야 벽 꼭대기에서 계단통이 입구를 메우고 있는 12면 지붕의 화려함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나일로미터 기둥 꼭대기에는 거대한 꽃이나 떠오르는 태양을 닮은 소용돌이 모양이 있었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나는 “너무 멋지네요” 하고 중얼거렸고, 살리마는 동의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답죠.”
경비원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뒤쪽 발코니를 순찰하는 동안 살리마와 나는 높은 대리석 측정 기둥 양쪽의 그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기둥의 표면에는 1,000년쯤 된 큐빗 표지가 얕게 새겨져 있었다. 살리마는 파라오 시대에 이 도구로 잰 측정값을 정확히 어떻게 수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얼마나 자주 값을 읽고 얼마나 오래 기록을 보존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나일로미터의 값이 좋든 나쁘든 모두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기원후 1세기, 역사학자 대大플리니우스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 있었다는 나일로미터에서 읽은 수치를 바탕으로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수위가 12큐빗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으면 이집트는 두려운 기근을 겪는다. 13큐빗이 되어도 굶주림은 여전하다. 14큐빗은 되어야 기쁨의 열매를 맺는다. 15큐빗이면 모든 불안이 잠잠해진다. 16큐빗이면 무한한 기쁨이 이어지는 풍년이 온다.”6 이 16큐빗이라는 숫자는 플리니우스의 기록 이후에도 큰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기원후 2-3세기의 작품을 본떠서 만든 18세기의 한 석상은 누워 있는 근육질 인물로 나일 강을 묘사한다. 이 석상은 16명의 아기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각 천사의 키가 1큐빗으로 이들을 합치면 이상적인 범람 수위를 상징하게 된다.7
이러한 수치에 얽매이는 일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일로미터의 측정값은 사소하지 않았다. 나일로미터의 측정값은 한 해를 극도로 빈곤하게 보낼지 혹은 풍요롭고 순탄하게 보낼지를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 정치적 운명을 반영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종교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라의 사제는 법을 감독하고 자원을 관리하며 반인반신인 파라오에게 조언하는 공직자였다. 따라서 신성한 의식과 엄격한 관료제 모두가 나라의 번영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했다. 나일로미터가 보통 사원 안에 세워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일로미터의 눈금을 읽는 바로 그 사제들이 범람을 축복하는 종교의식을 감독했다. 살리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일 강의 범람과 비옥한 토양은 파라오의 통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범람이 과하거나 부족하다면 신이 파라오에게, 더 나아가 이집트 전체에 화를 낸다는 의미였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나일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일은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 신의 은총을 측정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살리마와 나는 바닥에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벽 한쪽에 난 그늘진 터널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이어지는 거죠?” 내가 묻자 살리마가 대답했다. “나일 강으로 쭉 이어지죠. 나일로미터를 사용하던 당시에는 이 터널을 통해서 이곳에 물이 찼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잠겨 있죠. 안쪽을 볼까요?” 우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플래시를 켜고 탐험가처럼 터널 안을 비추었다. 섬 중앙에서부터 멀어지며 어둠을 헤치고 나일 강 쪽으로 나아가면서, 나는 바위와 돌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고작 몇 미터 너머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떠올렸다. 수천 년간 이 땅을 지배해온 힘이다. 그리고 측정은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자, 숫자, 척도의 발명
측정은 고대 이집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였지만, 측정학 자체가 나일로미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측정학이 인간 문화에서 차지한 위치를 이해하려면, 그 뿌리를 찾아 문자가 개발된 시기로 더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문자가 없다면 측정값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메소아메리카, 중국, 이집트 등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화에서 각각의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좋은 증거가 있다. 그러나 문자가 가장 먼저 발명되었다고 생각되는 곳은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이다.
문자의 기원을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사물이 있었고, 이 사물을 세어야 했다. 그 사물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양 떼나 보릿대 묶음 등 정착 농경이라는 새로운 체계의 산물이었으리라. 이 새로운 체계 덕택에 수만 명이 사는 도시가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새로 쌓은 부를 기록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 점토로 만든 물표物票를 사용하기로 했다. 원뿔이나 원판, 삼각형, 원기둥 모양에 게임 말 정도의 작은 크기인 이 물표는 굴러다니는 주사위처럼 고고학 기록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가장 오래된 점토 물표는 수메르인의 고향인 수메르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던 기원전 7500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8 여러 세기에 걸쳐 모양과 수가 다양한 점토 물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물건은 유용하게 사용된 듯하다. 도시 거주자들이 양모나 금속 같은 원자재뿐만 아니라 기름, 맥주, 꿀 같은 가공품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생활이 다양해지자, 이러한 자원을 대표할 더 많은 물표가 필요해졌다. 사람들은 물표 표면에 흠집을 내거나 그림을 그려서 의미를 더했고, 그러면서 물표의 모양새는 점점 복잡해졌다. 주머니에서 딸그락거리는 잔돈을 무겁게 느끼는 수천 년 후의 쇼핑객들처럼, 메소포타미아인들도 물표 더미가 귀찮아졌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물표를 개선하기 위해서 물표를 몇 개씩 묶어 점토 용기인 불라bulla에 담기 시작했다. 기원전 3500년 무렵에 나타나기 시작한 불라는 테니스공 크기의 울퉁불퉁한 구 모양 물체로, 안에는 점토 물표가 들어 있는데 아기 딸랑이처럼 봉인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불라 하나로 여러 사물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방법에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농민에게서 공물을 걷어 기록하는 수메르 성직자에게는 진흙 구체에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것이 장점이었겠지만, 불라를 깨지 않고는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성가셨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최후의 불라를 만들던 이들은 불라 안에 물표를 넣기 전, 채 마르지 않은 불라 표면에 물표를 꾹꾹 눌러서 안에 든 내용물을 표시했다. 고고학자 데니스 슈만트-베세라트는 이러한 방법이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단계였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 점토 물표가 근대 문자의 선구자라는 중요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렇게 지적했다. “3차원 물표가 2차원 표시로 압축되었다. 최초의 문자를 알린 신호탄이다.”9 게다가 이러한 방법은 엄청난 인지적 도약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새로운 의사소통 체계의 시작이자, 분명 뇌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을 반영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기술은 해방이었다.”10
이러한 체계는 수 세기에 걸쳐 발전했다. 먼저 필경사들은 점토에 물표를 눌러 표시하는 대신에 물표의 윤곽을 그리거나 상형문자 또는 그림문자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필요한 정보가 불라 표면에 다 저장되어 내용물이 필요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필경사들은 점토 공을 짜부라트려서 두꺼운 점토판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자 물표도 필요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필경사들은 셈한 사물과 그 양을 다양한 기호로 표시했다. 이들은 기름병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름병 상형문자를 그리는 대신, “그 물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있는지”를 나타내는 별도의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공식적인 숫자와 문자 체계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측정도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년대를 거치며 불라에 새긴 상형문자는 점점 추상적인 기호로 바뀌었다. 갈대를 꺾어 점토에 쐐기 모양을 여러 번 누르며,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음절이나 자음을 표시하게 된 것이다. 설형문자로 알려진 “쐐기 모양” 글자는 수메르인은 물론 이들의 후손인 바빌로니아인과 아시리아인에 이르는 모든 주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되었다.11
기원전 2500년이 되자 이 문자 체계는 “매우 복잡한 역사 및 문학 저작을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충분한 조형력과 유연함”을 갖추게 되었다.12 그러나 아주 초창기에는 문학 작품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수만 점에 이르는 발굴된 서판들은 대부분 관리에 쓰인 것들이었다. 이 서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보존과 번영을 도운 응집력”이었던 전문 필경사들이 작성했다. “사원의 관료, 법원 비서관, 왕실 고문, 시민 관료, 상업 통신원” 등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다.13 필경사들이 작성한 문서는 영수증, 계약서, 구매 목록, 세금 신고서, 판매 증서, 재고 목록, 급여 명세서, 유언장 등 다양하다. 시간이 지나며 왕실의 발표나 전쟁 기록 같은 서사적인 기록이 추가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문헌조차 정복한 지역, 태어난 자손, 봉헌되거나 훼손된 사원 등을 나열한 목록의 형식을 취한다.
문자의 발명이 지배자에게 자원을 감독하고 분배할 역량을 주어 초기 국가가 발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역으로 초기 국가의 수요가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졌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기록은 지식을 처리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 되어 우수한 조직은 물론이고 우수한 사고를 이끌었다. 일부 학자들은 점토판에 명사와 숫자를 구분해 표시한 방법이 세금을 더 잘 추적할 수 있도록 왕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인지적 혁명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러한 도약을 통해서 주변 세상을 전에 없이 더욱 추상화하고 범주화할 수 있게 되었다.
목록 작성이 인지적 대격변을 이끄는 다이너마이트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널리 퍼지면서 초기 사회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개발되었고 사람들은 주변 세상을 분석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인류학자 잭 구디는 이렇게 지적했다. “목록은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에 의존한다. 목록은 사물을 숫자나 초성, 범주에 따라서 나열하게 한다. 그리고 외적, 내적 경계를 두어 범주를 더욱 가시화하는 동시에 더욱 추상화한다.”14
구어口語가 정보를 어떻게 구체적인 맥락 속에 두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하루를 떠올리며 “오늘 장 보러 가서 팬케이크를 만들 달걀, 밀가루, 우유를 샀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목록을 적을 때는 간략하게 쓰기 위해서 연속성을 배제한다(예를 들면 “살 것 : 달걀, 밀가루, 우유”). 각 항목에서 폭넓은 서사를 지우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자들이 “덩이짓기chunking”라고 부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정보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세부로 나누고, 세상을 덩어리로 구분해서 측정하는 과정이다. 대부분 우리는 이러한 방법의 이점을 본능적으로 안다. 해결되지 않은 작업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목록 만들기에 의존해서, 세상의 혼란을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할 수 있는 일로 묶어 구분한다.
초기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도 이렇게 지식을 분류했다는 증거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어휘 목록”이라고 부른다. 어휘 목록은 여러 군의 사물들을 백과사전 항목처럼 단순하게 나열한 서판이다. 나무 종류부터 신체 부위, 신의 이름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 목록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휘를 가르치는 데에 이용되거나 필경사들의 연습에 쓰였을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서판은 분류 문제를 붙들고 고심하는 고대 인간을 보여준다.
구디의 주장처럼 주제별 목록을 구성하는 과정은 “지식을 늘리고 경험을 조직한다.”15 이러한 과정은 조직된 철학 체계의 전조이자 결국에는 과학의 전조이기도 하다. 수백 년 후인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저작인 『범주론Categoriae』에서 사고를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모든 현실을 분류하는 목록 형식을 활용했다. 이 거대한 분류 체계에서는 불가사의한 차이를 여럿 끌어온다. 영원하고 움직이는 물체(하늘)와 파괴되고 움직이는 물체(지상의 사물)의 차이, 영혼 없고 파괴되며 움직이는 물체(원소)와 영혼 있고 파괴되며 움직이는 물체(생물)의 차이 등이다. 고대 그리스 이전에 나타난 분류 형식은 철학적으로 이만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형식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기원전 1000년 무렵의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올라간다. 『아메노페의 용어집Onomasticon of Amenope』이라고 알려진, 이집트 관료 문화의 산물이다. 이 문헌은 용어집이라는 단순한 형식을 빌려서, 당시의 세상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610개 항목을 단순히 나열한다. 서문에서는 이 문서의 목적을 “프타가 창조하고 토트가 베껴 쓴 것으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배우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했다. 문헌은 자연계로 시작한다. 첫 번째 항목 “하늘”에 이어 “태양”, “달”, “별”, 그리고 “어둠”, “빛”, “그림자”, “햇빛”을 거치고는 “강둑”, “섬”, “모래”, “진흙” 등 다양한 땅 위의 범주를 다룬다. 땅을 설명한 다음에는 땅 위에 사는 거주자로 옮겨간다. 먼저 초자연적 존재인 “신”, “여신”, “영혼”에서 시작해 가장 중요한 인간인 왕실(“왕”, “여왕”, “왕의 어머니”), 고위 관료와 군인(“장군”, “요새 부관”)에 이어 다양한 직업으로 나아간다. 다음 항목은 가장 촘촘히 구분된 부분으로, 수백 개의 항목에 걸쳐 이집트 사회를 상세하게 그려낸다. 먼저 전문 장인(“조각가”, “시간 기록자”, “천문학자”)으로 시작해 더 낮은 계층(“조타수”, “목동”, “정원사”, “무용수”)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다룬 다음에는 이집트의 도시, 이어 건물과 토지 유형으로 넘어간다. 밭에 이르면, 100여 가지가 넘는 작물, 채소, 기타 식료품이 풍부하게 나열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하위 항목으로 더욱 구분되어 생고기, 익힌 고기, 양념한 고기로 끝난다.16 목록을 작성한 저자가 약속한 대로 이 문헌은 “[태양신] 레가 빛을 비춘 모든 것”을 두루 살피며 우주의 만신전에서 정육점 진열대에 이르는 여정을 610가지 단계를 차근차근 거치며 나아간다.
문헌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본들을 대조한 이집트학자 앨런 가디너는 이 문헌에 그다지 감명받지 못했다. 그는 1947년에 이 문헌을 혹평했다. “『아메노페의 용어집』보다 더 지루하고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하는 책은 분명 없을 것이다.”17 그러나 30년 후에 구디는 이 목록에서 훨씬 큰 가치를 발견했고, 이 용어집이 “분류를 작성할 때 거두는 변증법적 효과”를 얼마나 독보적으로 보여주는지를 지적했다.18 전체 문서는 영적인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하나의 거대한 스펙트럼으로 묶으며 계층 구조가 지닌 힘에 대한 교훈을 준다. 이 목록은 “빛”과 “어둠”과 같이 한 쌍을 대비해 유사점과 차이점을 강조하는 한편, 다음 범주로 넘어갈 때는 세심함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용어집에서 “이슬”이라는 항목이 놓인 위치를 보면, 현상 자체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슬” 항목은 하늘과 땅의 경계에 놓여 있는데, 태양이 떠오르면 풀잎에 실제로 물기가 맺히듯이,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섬세한 흔적처럼 보인다. 몹시 시적인 목록이지 않은가? 분류 체계는 사물의 위치를 고정하는 일을 넘어 사물에 대한 인식을 고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분명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천 년 후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942년에 발표한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라는 단편 수필에서, 중국의 고대 백과사전인 『은혜로운 지식의 하늘 창고Emporio Celestial de Conocimientos Benévoles』에 등장한다는 가상 분류법을 언급하면서 목록 작성의 부조리와 한계를 지적했다. 이 단편 속 백과사전에서는 무명의 필경사가 세상의 모든 동물을 14가지 항목으로 분류한다. 여기에는 “황제에게 속한 동물”, “훈련된 동물”, “젖먹이 돼지”, “인어”, “이 분류에 포함된 것”,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광란하며 떠는 동물” 같은 항목도 있다.19 이 구분은 정확하고 우아하며 부조리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이, 이 하늘 창고는 목록을 만들 때 섬세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목록을 작성하려면, 나누고 분류하고 비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특성이 『아메노페의 용어집』 같은 고대 문헌에서는 다소 감춰져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특성을 한껏 펼쳐내어 춤추게 한다. 푸코의 말대로 “사물 사이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은 가장 모호하면서도 (적어도 겉보기에는) 경험적인 과정이며, 이만큼이나 날카로운 눈과 이처럼 충실하고 잘 들어맞는 언어가 필요한 과정은 없다.”20
신성한 시간
최초로 측정을 활용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조직하는 솜씨에만 달려 있지 않았다. 탐구심과 호기심도 있어야 했다. 측정은 세상의 규칙을 기록하고 우리의 반응을 이끌며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이었다. 신의 은총을 측정한다는 나일로미터의 능력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자연의 운행이 신성한 원인에서 온다고 훨씬 더 자주 믿었던 고대 세계에서는 측정이 실제적인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초기 측정학은 흔히 초자연과 만나는 방법이었고, 이러한 관계는 시간 측정의 기원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간의 기본 단위는 물론 하루이다. 24시간 주기는 지구가 온전히 한 바퀴 자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다. 「창세기」에는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라고 되어 있다. 하루라는 단위의 값은 가스와 먼지구름이 합쳐져 지구가 처음 탄생했을 때 결정된 지구의 우연한 자전 속도로부터 생긴 사건에 불과하다(게다가 그후로 점점 느려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는 우리의 DNA에 생체 리듬으로 깊이 박힌, 생물학적 특성에 새겨진 척도이기도 하다. 이 생리학적 현상은 우리 각자의 몸을 우리의 고향인 지구의 자전에 맞춰 조정한다. 밤에는 배변을 억제하고 새벽이면 각성을 일으키며 저녁에는 멜라토닌을 분비해 잠들 준비를 한다. 이러한 리듬은 동물계만이 아니라 식물, 곰팡이, 심지어 진화 경로상 15억 년에서 20억 년 전에 우리와 갈라진 아주 오래된 생물 형태인 일부 박테리아에도 있다.21 오늘날 우리가 지닌 모든 측정 단위들 중에서 하루는 인간이 이해하기 전부터도 의미가 있던 유일한 단위이다. 하루는 최초의 인류가 인식했을 단위이자, 인류가 하루라는 단위를 만든 이 행성을 남겨두고 떠나더라도 분명히 가져갈 척도이다. 90분마다 지구를 공전하는 국제 우주정거장의 우주비행사는 분명 지구의 24시간 주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정거장도 우주비행사들의 신체 리듬을 위해서 지구를 모방한 “하루”를 설정하여 우주정거장 조명의 강도와 색을 조절한다.22
그러나 하루는 단기적인 질서만 부여할 뿐이다. 더 긴 시간 단위를 제공한 것은 지구의 자전축이 약간 기울어진 채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탓에 생긴 계절의 변화였다. 계절 변화는 꽃과 과일, 농작물의 생장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동물의 이동, 그리고 농업 사회가 성공적으로 유지되려면 예상하고 대처해야 하는 홍수나 태풍 같은 기상 현상도 조절한다. 초기 농부들은 씨를 뿌리고 수확할 시기를 알았을 것이고, 표준화된 달력 없이도 자연계의 신호를 아주 명확하게 읽었을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더욱 정교한 시간 기록 체계가 등장했고 대부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분야인 천문학에 바탕을 두었다. 계절이 바뀌면 밤하늘도 달라지고, 별자리가 나타나고 사라지며, 행성은 하늘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천체의 변화와 땅의 변화는 동시에 발생하며 자연히 서로 인과관계가 있음을 암시했으므로, 별을 관찰하는 일이 곧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법이 되었다. 고고학자 이언 몰리의 지적대로, 고대 문명의 달력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만나 세상을 설명했다.”23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예로 들어보자. 지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작은 별 무리로, 최소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신화적, 영적 중요성을 부여받아왔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움직임을 일곱 소녀가 곰에게 쫓기는 모습, 남편에게 쫓겨난 아내들, 병아리를 모는 암탉 등으로 해석했다.24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위도상 최남단 지역을 제외하면, 가을 새벽에 맨 처음 나타나고(나선형 상승으로 알려진 현상) 매일 점점 더 높은 하늘에서 나타나다가 한겨울에 진로를 바꿔 봄이 오기 전에 사라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성단이 아틀라스 거인이 하늘을 떠받치는 동안 사냥꾼 오리온에게서 달아나는 아틀라스의 일곱 딸을 묘사한다고 생각했다. 이 성단은 일꾼에게 보내는 신호가 되기도 했다. 성단이 사라지면 바다를 떠도는 시기가 끝나고 이제 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기원전 8세기 시인 헤시오도스는 교훈시 「일과 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플레이아데스, 히아데스, 거인 오리온이 자리 잡으면 / 다시 쟁기질해야 할 때가 왔음을 기억하라 / 대지가 한 해를 먹여 살릴 자양분을 주시기를 바라며.”25
여러 고대 문명에서 시간의 기록은 신과 분명한 연관이 있었다. 기원전 1600년 무렵부터 중국을 지배했고 중국 최초의 군주제 왕조로도 알려진 상나라는 열흘 주기의 달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치했다. 이 달력에서 각 날은 신령이나 조상과 연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산 자들을 위해서 힘써주기를 기원하며 이들에게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 달력은 현재를 조직할 뿐만 아니라 달력을 따르는 사람들의 미래를 통제할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26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 메소아메리카 사회에서 시간 기록과 신의 연관성은 마야인의 장기력에 잘 나타나 있다. 마야 문명은 자연계에서 반복되는 규칙에서 영감을 받아 시간이 거대한 주기―“우주 주행계”―를 따르며,27 그 과정에서 187만2,000일(5,125년)마다 한 번씩 천천히 우주를 재설정한다고 생각했다. 이 달력에 따르면, 가장 최근 주기는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에 시작해 2012년 12월 21일에 끝난다고 추정된다.28 이러한 점에서 마야 장기력은 서양의 관찰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 날짜를 앞두고 퍼진 어수선한 흥분이나 편집증, 기회주의적인 종말론 따위는 당대 마야인 공동체의 반응과는 달랐다. 고대 마야인들은 거대한 주기에 따른 재설정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명확히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괴보다는 재생에 더 관심을 두었던 듯하다. 분명한 사실은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하기를 고대했던 사람들이 12월 22일 아침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목격했다는 점이다.
이 달력은 영적 요구와 실용적 요구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서 개발되었는데, 처음 생각보다는 그다지 규칙적이지는 않은 자연계의 순환에서 나왔다. 고대의 어느 시점―어쩌면 수렵채집인이 동물 뼈에 알 수 없는 수치를 기록하던 즈음―에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최초의 의미 있는 달력이 고안되었다. 바로 한 달이다. 달이 규칙적으로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은 알아보기 쉬운 규칙성을 띠었으므로, 고대인들은 같은 모양의 달이 뜨는 간격을 측정해서 음력 달을 정의했다. 어떤 이들은 보름달을 시작점으로, 다른 이들은 초승달이나 새로 뜨는 달을 시작점으로 삼았다. 별을 관찰하는 사제들이 달 모양의 변화를 알렸다. 이러한 관행에서 “불러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칼라레calare로부터 “캘린더calender”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음력 한 달은 적합한 단위가 가져야 할 몇몇 기준을 충족했지만, 완벽하게 일정하지 않았다. 측정 단위로 유용하게 사용되려면 일정한 값이 필요하다. 그러나 달을 기준으로 본 한 달의 길이는 반나절 이상 차이가 나서 평균 길이가 29일 12시간 44분 2.8초라는 점이 문제였다. 단순히 달이 뜰 때 새로운 달의 시작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미래로 이어지는 달력을 만들려고 하면 금방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면 29일과 30일이 번갈아 반복되도록 기록한 달력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달력도 실제 관찰한 달과는 점점 맞지 않게 되면서 대략 3년마다 하루만큼 차이가 발생한다. 한 생애로 보면 충분히 눈에 띌 만한 영향을 미칠 차이이다. 제대로 된 기록과 관찰 기술이 있다면, 달을 완벽히 무시하고 달의 모양이 달라지는 간격 대신에 태양력에 따라서 춘분 또는 추분이 돌아오는 기간을 기준으로 한 해를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문제가 남는다. 1년은 평균 365.2422일이기 때문이다. 4년마다 하루를 더해 윤년을 적용한다고 해도 몇 세기가 지나면 여전히 달력이 틀어진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차이를 메꾸려면 주기적으로 일수를 추가해야 한다.
고대 문명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사제나 천문학자의 재량으로 달력에 달을 추가하거나 여러 달력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종교의식에는 태음력을, 일상생활에는 태양력을 이용하는 식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도 이중 달력을 사용했다. 이들은 나일 강의 범람에 맞춰 120일 단위의 세 계절로 된 상용 달력을 고안했다. 이 달력에 따르면 1년이 360일밖에 되지 않으므로 열두 달 뒤에는 “윤날”을 5일 추가해 365일을 만들었다.29 이러한 관행은 다른 여러 문화권에도 이어졌다.
이렇게 추가된 윤날은 일상의 정기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이상한 날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보통 이날에 노동자들에게 휴가를 주었다.30 관대함이라기보다는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배려였다. 윤날은 지나간 해와 새로 다가오는 해 사이에 낀 시기이므로, 영혼이 불안정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제들은 대지를 보호하려고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사람들은 몸을 사려 부적을 지니고 다녔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악마를 방해할까 싶어 모든 사람들이 조심조심 걸어다녔다.31 이러한 전통이 마야의 상용 달력에도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야인들은 장기력과 별개로 18개월 20일로 된 이 상용 달력의 끝에 달이 지정되지 않은 와예브라는 5일을 추가했다. 이 시기에는 “인간계와 암흑계 사이의 문이 열려서” 악령이 세상으로 흘러들어와 훼방을 놓는다고 전해졌다.32 마야 문명에서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식과 주문이 치러졌다. 모두 태양계의 불규칙함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한 달력이 만든 결과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의 닷새 동안 일시 정지된 느낌을 받는다. 일을 해야 할까, 쉬어야 할까? 새해를 준비해야 할까? 그런데 준비한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일까? 달력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고 자연계로부터 구조를 도출하려는 시도이지만, 모든 측정과 마찬가지로 달력은 그 자체의 현실도 창조한다. 측정학은 우리 삶을 조직하도록 돕고, 그 결과 우리는 이러한 체계에 중요성과 힘을 부과한다. 그래서 이러한 체계가 지닌 영향력을 깨닫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손 닿는 곳에 : 최초의 단위
4,000년 된 메소포타미아 문헌인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는 목록의 작성이 중심이던 당대 문화에서 주목할 만한 예외적인 작품이자, 초기 측정의 관행과 한계를 조망하는 특수한 작품이다.33 비극적 영웅을 다룬 최초의 이야기로 알려진 이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 주인공 길가메시―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초인超人 수메르 왕―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운명을 거부하고 불멸을 얻으려고 애쓴다.
길가메시는 죽음을 속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먼 곳에 있는 자’라고도 알려진 신비한 존재 우트나피쉬팀의 집으로 향한다.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는 원래 필멸할 운명의 인간이었지만, 세상을 멸망시키는 홍수에서 인류 일부를 구한 보상으로 신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이 이야기는 『성서』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우트나피쉬팀의 집에 도착한 길가메시는 자신도 죽음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지 묻는다. 우트나피쉬팀은 간단한 시험을 낸다. 우리의 영웅 길가메시가 6일 낮 7일 밤을 깨어 있다면 영생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