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지운
30대 초반,
국어교육을 만만히 보고 거침없이 뛰어들었다가
40대 초반,
그 열정이 식어감에 놀란 K-아재.
현실의 냉정함 속에서 뜨거운 동력을 찾으려면
30대일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매일 온몸으로 이해하는 옛날 사람.
머리말
어린 시절, 집안 사정이 썩 여유롭지 않았기에 책을 사겠다며 돈을 달라 내미는 손이 무안했던 적이 많았다. 책을 읽겠다는 아들의 기특한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어색하다 느껴질 만큼 큰 목소리로 교과서나 열심히 공부하라며 면박을 주시곤 했다.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이후로는 책을 사겠다는 말을 감히 꺼내기 어렵게 되었고, 그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시립도서관은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그 당시 신기하게도 집 근처까지 오던 이동도서관이 있어 토요일마다 책을 빌릴 수 있었다.
학업이 주는 스트레스로 인해 책을 빌려 읽는 일에 시간을 내기 힘들어질 때쯤, 나는 받은 용돈을 한두 푼씩 모아 버스를 여덟 번 안 타면 살 수 있는 문고판 책을 한 권씩 사기 시작했다. 〈삼중당 문고〉의 작가 장정일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싼값에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문고판 책들은 당시 나의 지적 열망을 부족하게나마 채워준 가성비 좋은 해결책이 되었다.
그때 모았던 책들을 떠올려 보면 근본도, 계통도 없는 책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특이했던 것이 루쉰의 《아Q정전》이었다. 이제 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때 그 책을 왜 샀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1980년대 후반부터 밀어닥친 민주화 물결로 인해 그동안 ‘죽(竹)의 장막’ 너머 신기루 같던 루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 바람에 여러 출판사의 문고판 세계 명작선 한 귀퉁이를 루쉰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추측한다.
어쨌거나 루쉰이 누구인지, 그의 소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 놓여 있는지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던 그때의 소년에게 《아Q정전》은 이상하고, 기괴하며, 기분 나쁜 책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Q정전〉, 〈광인일기〉, 〈쿵이지〉처럼 희한한 제목들로 수놓아진 루쉰의 소설집은 난해한 첫인상만큼이나 내용 또한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부담스러운 그로테스크함은 둘째 치더라도, ‘중공’에서 막 ‘중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가깝고도 먼 나라의 근세사에 대해 역사적 이해가 전혀 없었으니,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담긴 숨은 의미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루쉰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다시 읽게 된 것은 외국어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 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특성상 방과 후에 세계문학을 주제로 한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때 중국어권 문학을 다루면서 루쉰의 소설들을 골랐기 때문이다. 중국의 작가들 중 가장 유명하고, 이해는 부족했지만 어린 시절 한 번 읽어보긴 했으니 나름 익숙하기도 했고, 길이도 짧은 편이라 방학 때 읽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고 교사의 자리에서 루쉰이라는 사람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탐색하다 보니, 그의 글에서 과거보다는 뭔가 더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사소한 일에만 흥분하는 나의 오래된 옹졸함과는 달리 언제나 혁명의 정점에 서려 노력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날카로워지는 루쉰의 필치를 따라가면서, 중국인들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 사회적 모순을 파헤치는 날카로움, 새로운 세상을 막아서는 적들을 향한 냉정함, 사회의 밑바닥으로 밀려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등의 복잡한 감정이 글에서 새록새록 배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곱씹을수록 더 진하게 우러나는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열정에 감복하던 그때, 열여섯 즈음의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지금의 이 깨달음을 루쉰의 세계에 막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조그만 열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전공자도 아니고 중국어에 능통한 것도 아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코끼리의 온몸을 꼼꼼히 탐색하는 맹인이 된 심정으로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일천한 지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지만, 나름대로 루쉰을 만나려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쓰는 도중, 아들에게 책 한 권 시원하게 사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하셨던 어머니께서 무거운 이승의 짐을 놓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이 책을 제일 먼저 어머니의 영전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치려 한다. 그리고 함께 마음고생을 겪었던 아내와 고양이 봉남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 특히 함께 루쉰을 읽었던, 지금은 대학생 혹은 사회인이 된 ‘그때 그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어진 출판 일정을 잘 기다려주신 편집자분들께도 죄송함과 감사함의 마음을 거듭 전한다.
1. 루쉰의 어린 시절 - 슬프고도 아련한 추억
루쉰은 1881년 중국 저장성 샤오싱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명문 저우씨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저우수런이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셔우였다. ‘루쉰’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글을 쓰게 되면서 필명을 정할 때 어머니 루뢰이의 성을 따서 만든 것이다.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중국 고전 경서들을 공부해야 했던 장셔우, 즉 어린 루쉰은 따분한 경서 대신에 중국 전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산해경(山海經)》의 기기묘묘한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장난도 치면서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유년기를 보냈다. 나중에 〈고향〉이라는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룬투’의 모델이었던 윈쉐이와 애틋한 우정을 나눈 것도 이때였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며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어린 루쉰에게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다. 할아버지인 저우푸칭이 과거 시험에서 비리를 저지르면서 집안이 순식간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저우푸칭은 당시의 관행대로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사려 했는데, 그 사실이 우연히 발각되면서 합격이 취소됨과 동시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어린 루쉰은 큰외삼촌 집에 맡겨지는 신세가 된다. 그야말로 ‘도련님’에서 하루아침에 ‘밥 빌어먹는 아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할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루쉰의 아버지 저우펑이는 결국 집안의 전답과 재산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좌제로 인해 기존의 신분조차도 유지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까지 내몰린다.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힌 저우펑이는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술에 의지해 살아갔고, 그 결과 건강이 점점 악화되면서 결국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마저도 치료를 위해 거의 다 탕진하고,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고작 십여 세였던 어린 루쉰이 집안일을 도맡게 된다. 이때부터 루쉰은 사회의 냉혹함을 몸소 경험한다.
특히 이때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집에 드나들었던 한의사들의 치료법을 보면서 루쉰은 전통 의학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찢어진 북의 가죽’, ‘정절을 지킨 귀뚜라미 한 쌍’과 같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한의사들의 처방약을 구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었지만,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점 병이 악화되던 아버지 저우펑이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나중에 루쉰이 일본에서 근대 의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런 비극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쉰이 이렇게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던 당시, 중국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 사회는 과거의 미몽에서 깨어나 근대화라는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침략이 한창이던 이 시기에 뜻있는 청년들은 중국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과거 시험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출세하기 어려웠던 루쉰 또한 이런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루쉰은 해군을 양성하는 서양식 학당인 수사학당(水師學堂)에 입학하기로 마음먹고 난징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학문을 만날 기대에 한껏 부풀었지만, 막상 진학하여 마주한 학교의 상황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루쉰은 다른 길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바로 ‘광업철도학당’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광업철도학당은 광산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를 배출하는 학교로서, 수사학당보다는 비교적 체계를 갖추어 근대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루쉰은 이 학교에서 과학, 수학, 지리, 의학과 같은 근대 학문의 기초를 어느 정도 배우게 된다. 특히 이때 옌푸의 《천연론(天演論)》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는데,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이 책은 당시 시대를 풍미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의 기본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 책을 통해 근대화에 뒤떨어진 중국이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총독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생을 선발하는 기회가 생겼을 때,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이나 의화단의 봉기 모두 실패로 돌아간 암울한 정치 상황에 실망한 루쉰은 선진 문물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2. 루쉰의 일본 유학 - 새로운 길에 들어서다
메이지유신이라는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일본은 당시 아시아 근대화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침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선 루쉰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중국 사회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청나라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을 점점 키워나갔다.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인 고분학원의 학생으로 입학한 루쉰은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교류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시대적 모순에 당차게 맞서는 ‘학생 전사’로서 다시 태어난다. 특히 중국인 유학생들은 동아시아의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일본인들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 동맹휴업 등의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항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루쉰은 쉬셔우상과 같은 비슷한 처지의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중국인의 미래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당시 루쉰의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변발을 잘라버린 것이다. 청나라, 즉 만주족의 지배를 상징했던 변발을 자른다는 것은 만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와 함께 근대화의 대열에 앞장서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시 루쉰은 장타이옌, 차이위엔페이 등의 혁명파들과 교류했는데, 그때부터 전제군주제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는 혁명파들의 사상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또한 루쉰은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고, 읽은 책들을 중국에 소개하기 위해 중국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인상적인데, 〈중국광산지(中國鑛産志)〉, 〈라듐에 대하여〉 등의 글을 발표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과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면서 동시에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인 《달세계 여행》, 《땅속 여행》 번역을 병행할 정도로 루쉰은 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폭넓은 학문적 탐색 속에서 고분학원을 졸업한 뒤, 루쉰은 동경제국대학 광업과라는 정해진 길을 버리고 과감하게 의학 학교 지원을 결심한다.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이 의학이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근대 의학을 통해 중국의 미신적 사상을 깨뜨리고 나아가 근대 과학에 대한 믿음을 증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무기력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부채 의식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루쉰은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 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루쉰은 몇 가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도쿄 유학생들의 강력한 투쟁을 권고하던 유학생 천티엔화의 자살 사건이었다. 조국의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귀국을 촉구했던 그의 죽음은 루쉰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때 함께 귀국을 독려했던 여성 혁명가 츄진 또한 귀국 후 중국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츄진은 나중에 루쉰의 소설 〈약〉에 ‘샤위’로 등장한다. 두 번째 사건은 루쉰의 단편소설집 《외침》의 서문에 나와 유명해진 사건이다. 그것은 의학 전문학교 시청각 교육 시간에 일본 학생들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담긴 환등기 영상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른 사건이었다. 루쉰은 이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데, 거기에 친하게 지내던 후지노 선생의 비호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일본 학생들의 모함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의학의 길을 포기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육체를 개조하는 것보다 정신을 개조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택한 방법이 바로 ‘문학’이라는 험난한 길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선택한 길로 힘차게 나서는 루쉰의 앞에는 생각지도 않은 인생의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3. 루쉰의 가정사 - 안타까움과 서글픔
루쉰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일종의 오해로 인해 그가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는 헛소문이 동향의 유학생을 통해 고향까지 퍼지게 된다. 이때 루쉰의 집안에서는 그의 혼처를 이미 정해놓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루쉰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다른 여자가 먼저 생기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결심한다. 혼처로 정한 집안은 샤오싱 지역에서 꽤나 부유한 축에 속했다. 루쉰의 신부가 될 여자의 이름은 ‘주안’이었다. 그녀와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루쉰의 어머니는 자신이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루쉰에게 보낸다. 전보를 받고 급히 달려온 루쉰은 그 소식이 거짓이었으며 당사자인 자신도 모르는 결혼식이 미리 준비된 사실에 큰 분노를 느꼈지만, 어머니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 유학 중이던 1906년에 사랑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일은 루쉰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비극 중 하나의 서막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루쉰은 주안에 대해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두고 “어머니의 며느리일 뿐, 아내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주안 또한 비극적인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통이 요구하는 순종적 여성상에 익숙했던 그녀였기에 꾹 참고 루쉰과의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루쉰으로부터 이혼에 가까운 버림을 받게 된다. 루쉰에게 새로운 반려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루쉰은 귀국 이후 자신이 근무하던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에서 학내 분규가 일어났을 때 함께 투쟁했던 자신의 제자 쉬꽝핑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투쟁의 과정에서 동지로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쉬꽝핑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쉰은 평생의 반려자로 쉬꽝핑을 받아들이고, 저우하이잉이라는 아들까지 낳는다. 루쉰은 쉬꽝핑과의 관계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루머에 시달렸지만, 이 관계를 끝까지 유지한다. 쉬꽝핑과 아들 저우하이잉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난 뒤에도 루쉰의 부인과 아들로서 인정받으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른다. 반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주안은 여전히 루쉰 어머니의 며느리로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는 루쉰 사후인 1947년에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루쉰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베이징 서구문 밖 묘지에 묻힌다.
그런데 루쉰의 가정사를 살펴보면 첫 번째 부인과의 사랑 없는 결혼이라는 사건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때 가장 가까운 혈육이자 동지였던 동생 저우쭈어런과의 결별이었다. 1906년경 동생의 미래를 고민하던 루쉰은 저우쭈어런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형과 함께 일본 유학을 시작한 저우쭈어런은 형 못지않게 근대 학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소설 번역 작업까지 같이 진행하면서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이라는 외국 소설 번역집까지 출간한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며 저우쭈어런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문화에 깊이 감화되었으며, 정치·사회적인 변혁 운동보다는 사변적 인문학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서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형 루쉰과는 점차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런 학문적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성격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저우쭈어런의 아내였던 일본 여성 하부또 노부꼬 때문일까. 귀국 이후에도 베이징에 집을 구해 어머니와 함께 나름 화목하게 살아가던 루쉰과 저우쭈어런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점점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1923년 7월에 결별 선언을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이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고 살아갔으며, 저우쭈어런은 루쉰의 죽음 이후에나 루쉰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냈을 정도로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그런데 루쉰이 사망한 이후 저우쭈어런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을 때, 저항의 상징과 같았던 형 루쉰과는 달리 저우쭈어런은 당시 문단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책임을 저버린 채 친일 대열에 앞장서게 되고, 그로 인해 치욕스러운 말년을 보내기 때문이다. 1945년 말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