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중앙대학교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 등이 있다. 논문으로 〈신라 하대 효공왕의 왕위 계승과 최치원〉 〈신라 진성왕의 양위 과정과 배경〉 〈신라 혁거세 국조신화의 형성 시기와 배경〉 등이 있다.
한정수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왜 서희는 외교 담판을 했을까?》 《고려시대사2》(공저) 《고려시대의 역사》(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 〈고려시대 노인사설 설행 양상과 의미〉 〈고려시대 자기인식의 형성과 문명의식의 변화〉 〈고려 우왕대 재이·병란과 천도론의 정치적 의미〉 등이 있다.
고조선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왕을 중심으로 풀어쓴 한국사
왕으로 읽는 기막힌 한국사 43
지은이 김선주・한정수
발행처 도서출판 평단
발행인 최석두
표지 디자인 김윤남
본문 디자인 신미연
등록번호 제2015-00132호
등록연월일 1988년 07월 06일
종이책 발행 2021년 09월 15일
전자책 발행 2023년 07월 15일
우편번호 10594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140(동산동 376) 삼송테크노밸리 A동 351호
전화번호 (02) 325-8144(代)
팩스번호 (02) 325-8143
이메일 pyongdan@daum.net
전자책(ePub) ISBN 978-89-7343-559-3 05910
전자책 정가 11,620원
ⓒ 김선주 & 한정수, 2021, Printed in Korea
※ 저작권법에 의해 이 책의 내용을 저작권자 및 출판사 허락 없이 무단 전재 및 무단 복제, 인용을 금합니다.
※ 이 전자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KPIPA)의 <2023년 전자책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입니다.
• 책머리에 •
한국인의 막강 DNA는
역사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리 역사를 강의하고 연구하다 보면 종종 조심스러워진다. 지금 이야기하는 역사 내용이 정말 맞는 걸까? 또 다른 사실은 없을까? 현재까지의 해석은 적절한 것일까? 똑같은 역사라도 언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지기에 그렇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한국사를 출간하게 된 배경도 그것이다.
원래 이 책은 2009년 초판 출간된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개정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달라진 시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했으나, 집필 과정에서 전혀 다른 책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김선주 교수의 도움이 컸다. 자료 조사와 집필을 포함해 1년 가까이 걸렸다.
최근 한국사 연구는 주제가 매우 다양해졌다. 사회경제사는 이제 연구에서 소외 분야가 되었고, 사회사도 그런 면이 있다. 정치, 경제, 종교, 사상, 외교, 전쟁 등에 관한 연구가 깊어졌고 다양한 직업, 여성, 문화 등의 이해는 넓어졌다. ‘한류’가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는 가운데 한국인의 정체성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자 했다. 지금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을 토대로 과거를 보면 10여 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지금의 눈에서 바라본 과거 우리 민족은 그 어떤 민족보다 강인하고 당당하며 존엄했다. 그 힘으로 우리 민족은 꿋꿋하게 현재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고 앞으로도 무궁히 뻗어나갈 것이다. 책을 읽는 모든 독자분이 자랑스러운 막강 한국인의 DNA를 만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책은 또한, 고조선 건국부터 한반도 분단 순간까지의 역사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이야기들을 왕 중심으로 43가지 다루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가 막히는’ 이야기들이다. 국왕의 탐욕과 한순간의 어리석은 판단이 피바람을 불러오고 나라를 혼돈의 도가니로 바꾼 이야기. 신하의 아첨에 속아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이야기. 100년간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휘두른 경원 이씨 가문,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100년간 정권을 장악한 고려 무신 정권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많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백성을 사랑하고 예의범절이 뛰어난 군주였다. 한때 원수였던 견훤에게도 인생 선배로서의 예의를 다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로 유명하지만, 실은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왕이었다는 점에서 더 칭송받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고종은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황제로 알려졌지만, 그의 개혁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란, 호란 등 나라가 외세에 침략을 당할 때면 어김없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농기구라도 들고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걸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술술 읽히게 서술했다.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가급적 쉬운 말로 표현했다. 각 장마다 ‘현재와의 대화’라는 꼭지를 넣어 과거 역사의 현재진행형에 대해 서술했다. 역사는 좋건 나쁘건 여러 가지 형태로 그 흐름이 되풀이된다. 과거의 잘잘못은 다양한 해석을 거쳐 오늘과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된다. 반성하지도 않고 잘못을 고치지도 않으면 나라는 역사에서 낙오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았으면 한다.
우리에겐 수많은 역경 속에서 형성된 막강 생존력의 DNA가 있다. 우리가 지금 세계를 상대로 당당하게 소통하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8·15 광복 전후까지의 우리 역사에서 부디 그런 힘을 느끼기를 바란다.
끝으로, 각종 숙제와 강의로 집필을 뒤로 미루려 한 필자들에게 조근조근 예의를 다해 채근해준 최석두 사장님께 감사의 말을 올린다. 또한 책이 나오기까지 하나하나 원고를 읽으면서 좀 더 읽기 쉬운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편집에 최선을 다해준 오경희 편집장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2021년 8월
김선주, 한정수
반만년 역사의 의미
왜 우리 역사를 5천 년이라고 할까? 우리 역사의 무대인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는 60~7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담고 있는 구석기 유적으로 단양 금굴,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 동굴 등이 있다.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양양 오산리 등에는 기원전 6~8천 년경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유적들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를 5천 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았던 모든 시대를 역사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 사용을 기준으로 이후를 역사시대라고 하고, 그 이전을 역사 이전으로 선사시대라고 한다. 우리 역사가 5천 년이라는 것은 문자로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5천 년 전이라는 의미이다.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건이자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고조선 건국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 첫머리에는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역사상 첫 국가를 언급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 조선이지만 일연은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전에 존재했던 ‘옛날 조선’이라는 뜻으로 ‘고조선’이라 표기했다. 오늘날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위만조선까지 포함해 ‘고조선’이라고 칭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을 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중기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인데, 그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고조선이 단군에 의해 중국 요임금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삼국사기》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만이 한 차례 등장한다. 《삼국유사》 외에도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비롯해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에서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전하고 있으며 대체로 중국 요임금을 기준으로 무진년에 건국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반만년 역사라는 표현은 바로 무진년, 즉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서기西紀에 기원전 2,333년을 더하면 4천 몇백 년이 되므로 포괄적으로 5천 년, 혹은 반만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화에 담긴 역사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에는 대부분 건국 시조 관련 신화가 있다. 그 내용은 신비한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천신과 동침해 임신했다.” “빛을 받아 임신했다.”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했다.” “용과 관계를 맺고 임신했다.” “커다란 알을 삼킨 뒤 배가 불렀다.” 등으로 과학 문명이 지배하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다.
고조선의 건국을 전하고 있는 단군신화도 마찬가지이다. 단군신화가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삼국유사》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었던 여성과의 사이에서 고조선 건국자인 단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산신이 되어 1,9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계급 분화 등이 이루어진 청동기 시대에야 성립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까지 진행된 고고학적인 연구로 보면, 한반도와 주변국에서 청동기 문화의 상한선은 기원전 1,000~1500년경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원전 2,333년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단군신화에 언급된 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기록된 단군신화는 역사 자료로서 의미가 없을까? 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화를 모두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다. 단군신화 자체는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은 고조선이 건국될 무렵의 사회상이나 건국 배경 등을 함축한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고조선 건국자 단군은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환인’이라는 이름은 ‘Sakrodevendrah’라는 인도의 신 이름을 한자로 옮긴 ‘석제환인타라釋提桓因陀羅’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 신을 불교식으로 바꾼 칭호로 본다. 고조선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신령스러운 하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환웅은 천신족을, 웅녀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을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이 여러 세력 집단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환웅을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로, 곰을 그 지역에 살던 존재로 표현한 것에서, 고조선이라는 국가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결합으로 정복 및 통합 과정에서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 문명과 국가로서의 고조선
단군왕검은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과 정치 지배자를 의미하는 왕검을 합친 말이다. 고조선 사회가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이야기하는데, 단군왕검을 특정 사람이 아닌 고조선의 지배자를 일컫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요컨대, 단군신화는 정복과 복속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리되지 않았던 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환웅은 ‘풍백(風伯, 바람의 신), 우사(雨師, 비의 신), 운사(雲師, 구름의 신)’를 거느리고 내려왔다고 하는데 바람, 구름, 비는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었다는 것이나,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고 하면서 곡식을 열거한 것 등에서 고조선이 농경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환웅이 하늘 신에게서 받고 가져왔다는 천부인 3개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당시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3가지 상징물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지배자의 무덤을 보면, 주요 부장품으로 검, 거울, 옥 혹은 방울 3가지가 있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를 통해 단군신화가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건국되었던 나라의 건국 신화임을 알 수 있다.
만주와 한반도는 비파형 동검과 거친 무늬를 특징으로 하는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은 이들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건국한 첫 국가였고, 단군신화는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건국된 고조선의 건국 신화로 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이전에 편찬된 중국의 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중국 춘추 시대의 사정을 전하고 있는 《관자》에 따르면 제나라와 8천 리 떨어진 곳에 조선이 있었으며 제나라와 짐승 가죽을 교역했다고 한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기원전 4세기 무렵의 사정을 전하면서 “조선이 왕을 칭하고 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국가체로서의 모습을 갖추었고,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고조선의 중심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에 실린 단군신화에 태백산 신시,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등의 지명이 나온다. 이들 지명을 현재의 지명과 연결하기는 곤란하다. 단군신화가 문헌에 정착하기까지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그사이 지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이라는 지명만 해도 오늘날 북한의 수도 외에 다른 곳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가설은 고조선이 한반도 서북부 대동강 유역인 평양에 있었다는 ‘고조선 평양설’이다. 훗날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그중 낙랑군에 조선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평양 지역에서 낙랑 유물과 낙랑과 관련된 명문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는 점도 그런 가설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이 같은 평양설이 맞다면, 청동기 문화 출토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확인되어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조선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는 비파형 동검과 거친 무늬 거울, 탁자식 고인돌은 평양 일대가 아닌, 중국의 랴오닝 지방부터 한반도의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다링강大凌河, 또는 롼허灤河 지역부터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시기적인 변화상을 간과한 의견이다. 왜냐하면 청동기 초기의 대표적인 유물은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거울이며, 청동기 후기의 대표적인 유물은 세형동검과 잔무늬 거울인데, 중국의 랴오닝 지방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청동기 초기인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거울이고, 후기의 유물인 세형동검과 잔무늬 거울은 한반도 서북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조선의 위치가 초기에는 랴오닝 지방 중심이었으나, 점차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문헌에도 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2천 리의 땅을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진개의 공격으로 2천 리 이상을 빼앗겼다면 조선은 이후 그만큼 동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조선 중심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처음 중국 랴오닝 지역이었으나 연나라와의 충돌로 2천여 리를 빼앗기고 한반도 서북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이해가 차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이민들의 유입과 기자조선의 실재?
기원전 5~4세기 무렵 중국은 전국 시대로 혼란을 피해 많은 유이민이 동쪽으로 이주했다. 그 과정에서 고조선에 철기 문화가 유입되었다. 철기 사용은 고조선의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기와 농기구까지 철기가 사용되면서 발전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조선은 크게 성장했다.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상, 대부, 장군과 같은 관직이 등장했다.
《한서》 〈지리지〉에는 고조선에 팔조법금八條法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세 가지 항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② 남의 몸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
③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만약 죄를 씻고자 할 때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
범금 8조의 내용은 고조선 사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째, 고조선은 곡물 및 화폐 경제가 이루어진 사회였고 둘째, 사유 재산제를 바탕으로 계급 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셋째, 형벌과 노예가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인과응보 주의가 있으면서도, 돈으로 속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는 것은 고조선 사회가 비교적 발전된 사회임을 말해준다.
중국의 《한서》는 범금팔조를 만든 사람이 은殷나라의 기자라고 한다. 《서경》에 의하면 은나라 현자인 기자가 은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그를 왕으로 봉했다고 한다. 3세기의 《위략魏略》과 이를 저본으로 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기자 이후 자손이 40여 대에 걸쳐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기자동래설을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라 하여 타율성론을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은나라가 있었던 황허 지역과 고조선 사이가 거리적으로 멀고 주나라의 통치권이 황허 유역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 등에서 기자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면 고조선 문화에 은나라와 주나라 문화의 유입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교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 실재성이 의심받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자동래설이 만들어진 배경이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다. 그 과정에서 고조선은 중국에서 이주해 온 세력들을 수용했다. 기자동래설에는 그런 주민 이동과 변화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위만, 고조선의 왕이 되다
고조선은 기원전 3~2세기 전후로 위기 국면을 맞았다. 중국에 진秦, 한漢이라는 거대한 통일 제국이 연이어 들어서자 고조선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으로서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해 중국과의 관계와 국방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진한 교체기에 많은 중국인이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그중에 위만도 있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 역시 무리 1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위만을 연나라에 살던 고조선인으로 보고, 모국으로 돌아오면서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고조선이 연나라에 2천여 리 땅을 빼앗겼을 때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연나라 백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만이 원래 고조선 사람이었는지, 연나라 사람이지만 고조선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다른 민족의 옷을 입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준왕은 위만을 신임했다. 중국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던 준왕은 위만을 믿고 서쪽 변경 100리의 땅을 주어 수비하게 했다.
그런데 위만은 딴마음을 품었다. 위만은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 사람들,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규합해 나갔다. 세력을 키운 위만은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을 급습해 준왕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다. 기원전 194년의 일이었다.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은 측근을 거느리고 뱃길로 남쪽으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제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임금이 되었다. 위만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다. 왕실은 바뀌었지만 왕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는 위만조선과 그 이전을 ‘옛날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으로 구분했지만, 오늘날 고조선은 후대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며, 위만조선까지 포함한다.
정복 국가 고조선과 한나라
준왕을 쫓아내고 왕이 된 위만은 한나라에서 외신外臣의 자격을 얻어 주변 나라들과 정치 집단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위만은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갖추고 중국의 문물 제도 등을 수용하면서 행정 및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읍들을 정복해 나가기도 했다.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비롯한 주변의 나라들이 고조선에 복속되면서 고조선은 사방 수천 리 되는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 발전했다.
한나라 장군 진무는 문제에게 고조선의 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월(지금의 중국 남부에서 베트남 북부)과 조선은 진나라의 전성기에 내속해 신하가 되었으나 그 후에 군대를 갖추고 험한 곳에 의지해 중국을 엿보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팽창과 성장은 한나라 입장에서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한나라는 애초에 고조선을 이용해 외부 세력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전략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력한 정복 국가가 등장하고 있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이르러 고조선은 더욱더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고조선은 남쪽의 진辰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마저 독점했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다. 무엇보다 고조선이 북방에 있는 흉노족과 손잡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기원전 128년,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예군 남려가 28만 명을 이끌고 한에 투항하자, 한은 그곳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해 고조선을 압박했다. 그런 한편, 한 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고조선에 보내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우거왕은 협상을 거부했다.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기가 두려웠던 섭하는 귀국하던 길에 배웅 나온 고조선의 비왕裨王을 죽이고 돌아갔다. 그런 섭하에게 한 무제는 요동군 동부도위遼東郡東部都尉로 임명해 고조선을 자극했다. 격분한 우거왕은 부하를 보내 동부도위 섭하를 죽였다. 섭하 사건으로 한과 고조선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조선 최후의 날
기원전 109년,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 무제는 왕검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크게 둘로 나눠 해로와 육로로 공격하는 양면 전술을 택했다. 해로로는 누선장군 양복이 옛 제나라 땅에서 병사 7천 명을 거느리고 보하이해渤海를 건너 왕검성에 도착했다. 육로로는 한나라 좌장군 순체가 요동의 군사를 동원해 진격했다. 많은 군사력을 동원했기에 우거왕이 금방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은 한 무제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고조선은 한나라 침략군을 맞아 1년간 항전했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 원정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전략을 수정했다. 전면적인 공격과 더불어 고조선의 지배층을 분열시키는 방책도 동원했다.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되었다.
고조선에는 오랜 전쟁에 지쳐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중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장군將軍 왕협王唊 등 주화파의 일부가 왕검성에서 나와 적군에게 투항했다. 주화파였던 니계상尼谿相 참參은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항복했다.
그런데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가 성안의 백성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항전한 덕분이었다. 한나라는 항복한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조선의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게 했다. 결국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이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결국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諸侯)가 된 사람이 없었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 무제는 조선의 옛 지역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라는 4개의 군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비롯한 관리를 보내 통치했다. 한 군현은 고조선 유민들의 저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거나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낙랑군도 고구려의 끈질긴 공격으로 서기 313년 멸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었다고 한다. 경주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 각지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고조선 계통의 유적과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데, 고조선 멸망 이후 많은 유이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개천절을 기념할까?
10월 3일 개천절은 하늘이 열렸다는 뜻으로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3·1 만세운동 이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한 바 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경일로 지정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왜 개천절을 국경일로 기념까지 하는 것일까? 단군신화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자산이며, 외부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였다. 고려 시기 몽골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단군신화가 부각되고, 일제의 침략을 앞두고 단군을 모신 대종교가 창설된 것 역시 단군이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3·1 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되면서 개천절을 기념일로 삼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우리는 일본과 다른 뿌리와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독립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이론적 기반이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단군신화 부정
일제 강점기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독립 의지를 없애고자 했던 일본인들은 학자들을 동원해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번째로 일본 학자들은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처음 나타난 《삼국유사》가 고려 중기에 편찬된 것에 주목하고는 고조선과의 연대 차가 너무 크게 난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둘째, 고조선의 건국 신화를 다룬 일연의 《위서魏書》와 《고기古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위서》라는 책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만들어졌는데 그중 단군신화를 언급한 버전은 없고, 《고기》는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셋째, 《삼국유사》에서 언급된 환인은 불교 용어이고 풍백, 운사, 우사는 도교 용어이므로 단군신화는 불교와 도교가 도입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일제 강점기의 일본 학자들은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아닌, 고려 중기 몽골 침략 때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로 보았다.
일본의 역사 왜곡 배경에는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있었다. 일본과 한국은 하나의 조상,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 논리에 단군신화가 걸림돌이 되었다.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만 인정하려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일본 학자들은 중국의 역사 기록에 은나라 출신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제는 단군을 부정한 뒤 기자조선을 기원으로 보면서 한국의 역사는 중국의 책봉을 받은 제후국에서 시작되었다며 타율성론의 근거로 삼았다. 이런 사례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가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의 단군 인식
정치적인 목적으로 단군을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 이후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 존재했다는 재요령설을 주장했다. 단군에 대해서는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북한은 단군은 역사적 인물이며 고조선의 중심지도 평양 중심설로 확고하게 선회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단군릉 발굴이었다.
북한은 1993년 9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발굴된 유적에서 2개의 유골이 출토되었는데 감정 결과 그 유골은 5천 년 전의 남자와 여자의 인골로 추정되었다. 그들은 이를 5천 년 전에 실존했던 단군 부부라 보았다.
그런데 단군릉의 무덤 양식이 고구려 후기에 사용했던 돌방무덤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때 출토된 금동관과 토기 같은 유물도 고구려 양식이었다. 북한이 사용한 연대 추정 방법도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북한은 단군릉 발굴 이후 단군이 신화가 아닌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을 계속해 나갔다. 단군과 단군조선 관련 유물·유적에 대한 대규모 조사 발굴 또한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평양 일대에 대형 고인돌 무덤군과 고인돌 무덤 뚜껑돌에 새겨진 40여 개의 별자리, 청동방울 및 단추, 비파형 창끝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밀집된 고대 부락터와 제단 시설이 드러났고, 토성을 비롯한 고대 성곽도 발굴되었다.
이를 근거로 북한은 기원전 30세기 초 평양에 고조선이 성립되었고, 고조선이 대동강 문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북한은 이제 세계 문명 발생지에 대동강을 포함해야 한다며, 대동강 문명 혹은 대동강 문화까지 포함해 세계 5대 문명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1994년에 단군릉을 고구려 장군총 형식의 무덤 양식으로 조성했다. 그리고 1997년부터는 공식적으로 개천절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이 단군을 실존 인물로 내세우고 단군릉을 복원한 것은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속셈이다.
단군릉과 대동강 문화에 대한 북한 측 주장은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다만,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놓인 현재의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 모두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은, 양국 모두 고조선 건국을 역사의 출발로 삼으며 단군이라는 공통된 시조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단군과 고조선은 남과 북이 동질성을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자 통합의 구심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 수많은 나라
기원전 5~4세기경 유입된 철기 문화는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철은 구리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가 단단하게 벼릴 수 있어서 다양한 도구 제작이 가능했다. 철제 생산도구는 생산력을 급격히 높였고, 철제 무기는 국가 형성과 통합을 더욱 촉진했다.
고조선 멸망 전 주변 지역에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여러 정치 세력이 출현했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 국가인 부여가 등장했다. 부여는 기원전 1세기경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여가 자리한 쑹화강 유역은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원으로 농경과 목축이 유리했다.
부여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반면, 고구려와 인근 종족과는 적대적인 관계 속에 갈등을 빚었다. 3세기경 선비족의 침략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부여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일부가 두만강 유역으로 가서 동부여를 세우기도 했지만, 부여는 5세기경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여러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는 옥저, 그 아래 원산만 부근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로 불리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그러나 지리적 여건상 외부의 자극이 적고 철기 유입이 늦어서 국가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옥저와 동예에는 왕이라 불릴 만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이 읍군邑君,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각 읍락을 다스렸다. 옥저와 동예는 고조선, 한 군현, 고구려 같은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가 최종적으로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가 등장했다. 고조선 시기에 이름을 보인 것은 진국이었는데, 언제 소멸되었는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마한, 진한, 변한으로 이루어진 정치 세력이 나타났다. 마한에만 54개국이 있었으며, 진한과 변한도 각각 12개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삼한이 삼국과 가야로 이어진다.
마한에서는 처음 목지국이 주도권을 가졌으나 한강에서 일어난 백제에 의해 통합되었다. 진한은 경주 지역의 사로국에 통합되면서 훗날 신라로 성장했다. 변한은 낙동강 유역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이루었는데 각 소국들은 통합되지 못한 채 독립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멸망한다.
흉년이 들면 왕을 죽였다
초기 국가 단계의 정치체제는 연맹체적 성격을 지녔으며 왕권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부여에서는 가뭄과 장마가 계속돼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왕이 죽임을 당했다. 중앙에 왕이 있었지만,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가 독자적인 관인을 두고 사방의 읍락을 자치적으로 다스렸다.
삼한에는 신지臣智, 읍차邑借로 불리는 군장 세력이 있었으나 이들은 권력이 약해서 여러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정치적 통치자인 주수主帥 외에도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따로 있었다. 전문 사제였던 천군은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주관하면서 소도蘇塗라는 특별 구역을 지배했다.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는데, 그곳은 죄인이 도망치더라도 잡지 못하는 신성불가침 지역이 되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부여와 고구려, 동예는 하늘 제사를 지내면서 공동체 간의 결속을 다졌다. 부여에서는 음력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열렸다. 이때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군사와 관련된 일이 있을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다.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가 열렸다. 이때 온 나라 읍락의 남녀들이 밤에 모여 서로 노래와 놀이를 즐겼고, 도성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서는 강 위에서 수신隧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동예에서도 해마다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즐기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고구려의 동맹과 동예의 무천은 농사가 끝나는 10월에 개최했다는 점에서 농경 의례적인 성격으로 보고 있다. 삼한에도 농경 의례적인 제사가 있었다.
“5월 씨뿌리기를 마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 지어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서로 장단을 맞춘다.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의 탁무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를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 《위지》 동이전
삼한 사람들은 파종 이후와 추수 이후, 제사를 지내면서 먹고 마시면서 춤추고 노래했다는 이야기이다. 삼한의 제사도 천군이 존재하고 농경 절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천 행사에 속한다.
투기하면 죽였다
부여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을 하는 취수혼娶嫂婚이 있었다. 고구려에도 취수혼이 있어서, 산상왕은 고국천왕이 죽은 뒤 형수였던 우왕후를 다시 왕후로 맞이했다. 취수혼은 대체로 흉노 같은 유목 민족들에게서 나타났다. 취수혼으로 태어난 아이는 죽은 남편의 아이로 간주되었다. 취수혼은 남편이 없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성 입장에서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남편의 아이를 낳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한편 고구려에는 혼인을 약속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에 와서 동침하는 서옥제壻屋制가 있었다. 동침 후 여자는 그대로 친정에서 살았고 아이가 태어나 장성하면 비로소 아이와 함께 남자의 집으로 갔다. 이때 아이가 없을 경우, 혼인 관계가 무효가 될 수도 있었다.
서옥제나 취수혼 같은 결혼 풍속은 혼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산이었음을 말해준다. 노동력이 경제 기반이 되는 사회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출산이었기 때문이다. 옥저에서는 신부가 될 여자아이를 신랑집에 미리 데려다 놓고 키우다가 성인이 되면 신부값을 치르고 아내로 삼았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에서 혼인으로 발생하는 신부 측의 노동력 손실을 신랑 측에서 보상해준다는 의미였다. 동예에서는 같은 씨족끼리 혼인하지 않는 풍습이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부여에서는 투기를 금기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여자가 남편의 다른 여자를 질투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질투한 아내에 대해서는 죽인 뒤 그 시신을 산 위에 두고 썩게 내버려 두었다. 여자의 집에서 그 시신을 거두어 가려면 소와 말을 남편의 집에 바쳐야 했다. 고구려 때도 여자의 투기는 엄격하게 다루었는데, 고구려 중천왕 때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질투했다가 가죽 부대에 넣어 죽임을 당한 사례가 있었다.
요컨대, 부여와 고구려는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남자 1명에 여자 여러 명이 함께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도 고구려가 일부다처제였음을 말해준다.
주몽, 알을 깨고 나오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주몽에 의해 건국되었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조 탄생을 이야기한다.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밖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금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가 비추자 (유화가) 몸을 끌어당겨 해를 피했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그녀를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임신해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왕이) 다시 길 가운데 알을 버렸으나 이번에는 소도 말도 피했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고 했으나 쪼개지지 않아서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 아이는 겨우 7세 때도 영리함이 범상치 않아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은 하늘의 아들을 자처하는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시조인 주몽이 ‘천제의 아들’에게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5세기경 고구려 귀족의 무덤에서 나온 모두루묘지는 주몽을 ‘일월의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단군신화가 말하는 그대로 고구려 건국 세력이 천손 의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주몽의 어머니는 유화인데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 비문’에는 유화가 하백의 딸이라고 한다. 하백은 원래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황허강에 사는 물의 신’을 뜻하지만, 고구려 신화에서는 특정한 강보다 물의 신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물은 농경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점에서 유화가 땅의 신이자 농업신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화는 남하하는 주몽에게 곡식을 챙겨주고, 주몽이 곡식을 잊고 가자 새를 통해 전달했는데, 이 역시 농경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은 하늘신인 해모수와 땅의 신 유화의 결합으로 태어난 신성한 존재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주몽의 탄생 신화는 부여의 동명신화와 흡사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표현한다. 동명성왕에서 ‘성聖’을 제외하면 동명이 된다.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문화 배경에서 성장했으며, 고구려 건국 세력이 남하한 부여계 일파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고구려가 자리 잡았던 중국 랴오닝성 환인과 집안 지역에는 고구려 지배층이 사용한 돌무지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돌무지무덤은 기원전 3세기부터 나타나고, 고구려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부터 나타난다는 점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주몽으로 대표되는 부여계 세력이 남하하면서 왕실이 교체되었을 것으로 본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 그리고 비류
백제의 건국 설화에는 건국 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다른 신이한 기적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채록된 시기가 다소 늦은 데다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을 반영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는 온조와 비류 두 계통의 건국 설화를 전한다. 그중 온조를 주인공으로 건국 과정을 설명한 설화는 온조를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서술한다. 그가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에 정착해 나라를 세웠는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를 통합했다고 한다. 초기 백제가 자리 잡은 서울 송파구 지역에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돌무지무덤이 남아 있어서, 백제의 건국과 성장 과정에서 고구려계가 이주한 사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온조 설화에 덧붙여진 비류 설화에도 비류는 온조와 형제 관계로 설명된다. 이에 따르면 주몽은 친아버지가 아닌 의붓아버지였다. 온조 형제의 친아버지는 북부여 출신 우태優台였다. 이 설화는 백제가 부여에서 파생했으며 백제의 혈통과 문화 기반이 고구려와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백제 건국 설화가 비류와 온조 형제를 주축으로 하는 형제 설화인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했음을 뜻한다.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연맹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해서였다.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고 하는데, 이에 온조계로 세력이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중국의 사서에는 백제의 건국 시조로 구태仇台, 도모都慕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백제 건국과 발전 과정에 다양한 참여 집단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한강 유역에 남아 있는 백제 고분 또한 돌무지무덤 외에 흙무덤 계열의 다양한 무덤 양식이 있어서 백제 지배 세력의 다양성을 말해준다. 부여에서 고구려 방면, 한강 유역으로 여러 차례 주민 이동이 있었는데, 이때 한강 유역에 공존하던 본래의 토착 세력 등 여러 집단이 백제로 통합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온 혁거세
신라의 건국 시조인 혁거세 역시 알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내용을 보자. 고조선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양산 기슭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6촌 중 하나인 고허촌 촌장 소벌공이 발견했다.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떠났고 큰 알만 있었는데 알을 깨고 혁거세가 나왔다.
신라의 건국 시조인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것은 주몽과 같았지만, 혁거세의 부모가 등장하지 않고 혁거세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주몽과 다른 점이다. 혁거세의 경우 부모가 보이지 않는 대신 ‘알영’이라는 왕비가 나온다. 알영 역시 혁거세 못지않게 신성하게 태어났다.
알영은 우물에 나타난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우물이나 용은 모두 물과 관련된 것으로 알영이 땅의 신이자 농업신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알영은 혁거세와 함께 순행하며 농업과 길쌈을 독려하고 토지 생산을 장려했는데, 여기서도 농경과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혁거세와 알영이 부부로 설정된 것은 신라 건국에 두 집단이 중심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혁거세는 유이민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혁거세 이전 고조선 유이민이 내려와 6촌을 형성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이민 유입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있었던 경주 지역에는 ‘움무덤’이라는 무덤 양식이 사용되다가 점차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변화된다. 움무덤이란 구덩이를 파고 지하에 시신을 넣은 관이나 곽을 넣은 다음 흙을 덮는 무덤 양식을 말하며,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지하나 지상에 나무덧널을 짜서 시체를 넣은 나무 널과 부장궤를 안치한 뒤 돌무지를 쌓고 다시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 양식을 말한다. 오늘날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이 발견되는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움무덤을 사용하는 집단과 다른 새로운 세력이 경주에 유입되었음을 말해준다.
가야 연맹의 맹주, 수로왕
금관가야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는 수로왕 역시 알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를 보면, 아직 나라가 없던 시절 주민들은 가락 지역에서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했다.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고 노래했다. 그때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 알이 6개 있었고, 며칠 뒤 이 알에서 남자아이가 차례로 태어났다. 그중 제일 먼저 나왔다는 뜻에서 ‘수로’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다고 한다. 다른 남자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왕은 혁거세처럼 부모가 등장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알을 깨고 나왔다.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대신 수로왕에게도 기이한 왕비가 등장하는데,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옥이 바로 수로왕의 왕비였다. 배를 타고 온 허황옥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편, 가야에는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를 낳았다는 전승도 전한다. 가야 산신이 천신에 감응되어 가야의 시조를 낳았다는 점에서 산신은 지모신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수로왕 역시 유이민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의 성립
고대국가는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가 정비되고 정복 국가로서의 특성을 가진다.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했던 여러 나라 중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가 되었다. 부여는 5세기까지, 가야는 6세기까지 존속되었지만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여는 고구려에,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흡수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 모두 기원전 1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중 신라가 가장 빠른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고 고구려는 기원전 38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것으로 나타난다.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같은 중국의 역사서에는 부여전과 고구려전만 있고, 백제와 신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지》 ‘한전’이라는 항목에서 마한 54개국 중 하나로 백제국伯濟國,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사로국이 소개된다. 백제국과 사로국이 훗날 백제와 신라의 모태가 되는 것을 고려할 때, 삼국 중 고구려의 건국이 가장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송서》 등의 중국 사서에는 백제만 나타나고 신라는 보이지 않다가, 훗날 편찬된 《양서》부터 신라가 등장한다. 구체적인 건국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국가로 성장한 것은 신라가 백제에 비해 늦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고이왕,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국가는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였다. 이는 한강 유역이 비옥해 백제의 농업 생산력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내륙 지방은 물론 해상을 통해 중국 및 일본과도 잘 통할 수 있었던 이점 덕분이었다.
백제는 마한에 소속된 54개국 중의 하나였던 백제국에서 출발해 점차 주변 소국들을 통합하면서 지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백제는 연맹 내의 세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백제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군현 및 말갈靺鞨로 표현되는 예濊 세력과 공방을 치르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3세기 중반 고이왕 때 백제는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고이왕은 좌장左將을 설치하고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중앙 관등제를 마련해 지배 체제를 정비했다. 《삼국사기》에는 ‘6좌평·16관등제’가 고이왕 때 완비된 것으로 나오는데, 좌평佐平과 솔率 등의 관등이 설치되어 뒷날 16관등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대외적으로도 목지국을 제압하면서 백제는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에서는 이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했다. 경제력 강화를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도 했다. 이로써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를 제압하다
고이왕 때 다져진 중앙집권적 토대 위에 대외 정복사업을 벌인 사람은 근초고왕이었다. 근초고왕은 마한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을 병합해 남으로 영산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해 가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근초고왕은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 세력과 대결했다. 근초고왕은 371년(근초고왕26년),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했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오늘날 경기, 충청, 전라도 땅 전부와 강원도와 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근초고왕은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요서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에도 학술, 기술 등 선진 문물을 제공했다. 아직기와 왕인을 통해 일본에 한자를 가르쳤고, 《천자문》과 《논어》도 전했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된 칠지도七支刀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근초고왕의 국내 활동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