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1917년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다. 1955년 작곡가로는 최초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 이듬해 마흔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을 떠난다. 파리의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에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고, 1957년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가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보리스 블라허에게 작곡을, 슈바르츠 쉴링에게 음악 이론을, 요제프 루퍼에게 12음 기법을 배운다. 1959년 서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 같은 해 현대음악의 가장 전위적인 실험장인 다름슈타트의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큰 호평을 받는다. 이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 등에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 받으며 유럽에서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동양의 전통음악을 서양의 작곡 기법에 적용한 독창적이고 우아한 작곡법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윤이상은 살아 있을 당시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과 함께 유럽 평론가들이 선정한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으로 손꼽혔으며,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이 선정한 ‘유사 이래 최고의 음악가 44인’에 이름을 올렸다. 1995년 베를린에서 타계했으며, 2018년 3월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꿈에 그리던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이장했다. 눌원문화상 (1960), 킬(Kiel)시 문화상 (1971),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8),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2) 그리고 독일 문화원의 괴테 메달 (1995)을 수상하였다.
일러두기
이 책은 작곡가 윤이상이 파리와 베를린 유학 초기인 1956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 가운데 일부를 모아 엮은 것입니다. 편지에 담긴 작곡가 윤이상의 목소리를 최대한 생생히 전달하고자 사투리와 구어 표현은 남기되,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오탈자는 바로잡았습니다. 다만 인물명, 지명 등 자주 쓰이는 외래어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각주는 모두 편집자주입니다.
1948년, 부산사범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윤이상은 같은 학교 국어 교사였던 열 살 어린 이수자와 만난다. 두 사람은 1950년 1월 30일 부산철도호텔에서 식을 올린다.
1950년 11월, 딸 정이 태어나고 195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이듬해 1월, 아들 우경이 태어난다.
1955년, <피아노삼중주>와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윤이상은 상금을 보태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을 떠난다. 그의 나이 마흔의 일이다.
아내 이수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간다.
1956년
윤이상은 당대 최고의 교육 기관인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에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 이론을 배운다. 이수자는 두 자녀를 데리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남여중 교사로 복직한다.
1956년 6월 3일
여보! 내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 평생의 중대한 첫 여행의 하룻밤을 지낸 후 첫 번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오. 어저께는 네 시 가까이 여의도를 떠나 맑고 아름다운 조국의 하늘을 비상하다가 동해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야에는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대마도도 보지 못하고 큐슈나 일본의 본토도 구름에 덮인 채였소. 8시에 하네다 비행장에 닿았는데 7시쯤 돼서 후지산이 산허리를 공중에 뽐내고 섰을 따름이었소.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비행기에서는 조금도 멀미를 하지 않았고 다만 오를 때와 내릴 때가 조금 이상할 따름이야!
기내에서는 흥분한 나머지 땀을 많이 흘렸소. 어젯밤에 비행장에 도착하여 물품 검사를 할 때에 불화(弗貨)가 든 수첩을 잃었는데 다행히 일인 직원이 주워서 갖다 줍디다. 모두 다 친절해요. 이젠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첫 여행에 흥분되었으니까 그렇지.
도착 후에 짐을 내 방에 올려놓고 곧 거리에 나갔소. 특히 긴자의 이정목에서 초밥을 먹고 실컷 쏘다녔소. 일본은 네온이 많은 것, 자동차가 너무 속력을 내는 것, 룸펜이 흔하고 파친코가 성한 것, 남녀노소가 대부분 양복을 입는 것, 그리고 밤거리에 술집이 많은 것, 이런 것들이 내가 본 일본의 첫인상이오.
이 호텔의 한적한 방 앞에는 궁성의 외곽지대라 수목이 우거지고 산새가 이른 아침부터 지저귀고 있었소.
짐을 챙겨 보니 당신의 블라우스가 들어 있지 않소. 그래서 반갑기도 하지마는 이 길을 잃은 당신의 꺼풀을 어떻게 우편 소포로라도 당신에게 보내야 하겠는데, 이왕 보낸다면 멋진 블라우스를 하나 사서 같이 보낼까 하는데 오늘이 일요일인가. 오늘 밤 12시가 지나면 새벽 1시에 홍콩으로 떠나야 하니까 홍콩서 부칠런지, 아니면 파리 가서 두고두고 당신의 냄새를 맡을는지도 몰라.*
* 윤이상은 도쿄, 홍콩, 앙카라, 이스탄불을 경유해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했다.
내 몸의 컨디션은 목욕하고 잘 자고 나니 피로가 풀렸소. 이 길을 당신과 같이 여행했다면 하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르오. 홍콩 가서 또 편지하리다. 당신의 웃는 얼굴이 보이고 손 흔드는 것이 보이오. 안녕.
당신의 낭군.
도쿄서.
떠나고 보니 잊어버린 게 있어-뭔고 하면-내 땅의 흙 한 줌과 당신의 머리칼을 다음 소포에 부쳐 주도록 하오.
1956년 6월 25일
여보! 오늘은 6월 25일 밤.
월요일, 토요일은 오후 불로뉴라는 교외의 어느 숲속에 있는 호수를 찾아서 약 세 시간을 헤매었소. 그 호수에 가면 당신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위로될까 봐.
밤이 깊었는데도 (발견했을 때는 10시가 넘었소) 그 호수를 찾다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다는 건 나의 결심이 약한 것 같아 그만둘 수가 없었소.
급기야 찾고 만 호수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수림에 싸인 호수 안에는 밤인데도 보트를 타는 선남선녀들이 빨간 초롱을 달고 조용히 노를 젓고 있었소. 밤 새가 신비롭게 울고 물오리는 쫒겨서 물가로 헤엄질 하고 있었소. 나는 물가 벤치에 앉아 당신이 좋아하는 <진주잡이>의 영창을 불렀소.
나는 요새 피곤을 푸느라고 그러는가 아침 9시 이후에 일어나면 조반을 간단히 하고 그도 통 안 먹을 때가 있소. 어학 공부 하다가 12시 가까이 되어 집을 나서서 학교식당엘 가서 밥 먹고 뤽상부르 공원을 지나 알리앙스*로 가면 벌써 2시 가까이 되오. 2시부터 시작하는 어학 공부가 4시에 끝나면 공원에 가서 안락의자에 누워 오늘 배운 불어를 공부한 다음 6시 반이 되면 학생식당에 가서 밥 먹고 집으로 돌아오오.
* Alliance Française, 윤이상이 프랑스어를 배운 파리 6구의 어학원
집에 오면 대개 주인집 가족과 회화로 두 시간 쯤 보내다가 내 방에 와서 어학 공부, 편지 쓰면 벌써 12시 가까이 되오. 나는 그동안 매일 밤 당신과 아이들 꿈을 꾸었는데 지금은 꾸지 않소. 정신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나 봐.
그동안 이곳 사립학교 교장이며 작곡가인데 지금은 은퇴한 노인인 유명한 교수 리옹쿠르란 분이 있는데 그분에게 나의 작품을 보였더니 그가 친필로 비평을 써 주었소.
이 사람은 우수한 소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념(思念)과 분위기는 특수한 점이 있다. 시상(詩想)이 풍부하다. 구상은 상당히 명백하다. 내 의견에 부족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간혹 화성에 대한 연구의 결핍이다. 어떤 경과구에 있어 조화감이 부족하고 경과구가 매우 치밀한가 하면 어떤 데는 단순하여 연락이 상감(相減)하다.
용단성 있는 경과구는 가끔 평탄한 색채를 초래한다. 부족하다고 보이는 점은 이 점이다. 현악사중주는 다분히 음악적 질(質)을 갖고 있다. 그리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현악사중주는 그것이 아니다. 이 현악사중주라는 것은 네 개체가 연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기 드 리옹쿠르
이 글은 그들이 세계적인 시각으로 나의 작품을 분석한 것인데, 나는 이 작품을 쓸 때 한국의 연주가를 대상으로 썼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았소. 이 평을 칭찬과 경고가 반반이라고 생각하지만 칭찬 쪽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오.
지금 국립음악원의 다리우스 미요는 미국으로 가서 약 1년 동안 체류한다니 그분한테 배우려던 목적이 변경되어 역시 국립음악원의 작곡가 교수 토니 오뱅에게 오늘 박민종 씨와 같이 찾아갔었소.
사실 지금 프랑스 국립음악원이 프랑스 악단을 쥐고 있소. 여기는 작곡과 교수가 위의 두 사람밖에 없소. 오뱅은 나이 약 50여 세 된 작곡가로서 다리우스 미요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작곡과 교수로는 미요보다 인기가 있어 여기 음악원에는 젊고 정통파의 길을 밟은 사람은 토니 오뱅에게로, 또 나이 좀 먹고 세밀한 걸 싫어하는 천재형은 미요에게로 모여 있소.
나는 토니 오뱅에게 모이는 사람처럼 수재형이 아니고 미요에게 가야 할 성격인데 그가 미숙하기 때문에 부득이 오뱅에게로 가기로 했소. 이 두 사람은 여간해서 제자를 받지 않고 또 오뱅은 대단히 엄격한 교수라 내심 박민종 씨가 자꾸 권하는 걸 회피하곤 했는데 오늘 용기를 내어 찾아갔더니 작품 삼중주와 사중주를 보고 퍽 좋다고 하면서 곧 자기에게서 배우라고, 그리고 하기 휴가를 떠나니까 10월에 가서 배우기로 하고 돌아왔소.
나는 앞으로 방학 동안 3개월간 파리를 떠나지 않고 어학공부나 충실히 해야겠소. 당신에게 편지 쓰고.
이젠 편지도 다 되었소. 자야, 안녕.
나의 조용한 목소리가 지구의 반경을 뚫고 나의 임에게로 가서 귓가를 적시기를!
당신의 윤이상.
1956년 7월 13일
여보! 오늘은 금요일, 지금은 오후 10시, 이럭저럭 2주간도 지났구려. 여기는 대개 토, 일 2일간 쉬기 때문에 금요일 밤만 되면 우리나라에 있을 적에 토요일 밤의 기분이구려.
나는 요새 아침 8시 전후에 일어나면 내 손으로 이럭저럭 빵, 버터, 카베쓰, 토마토 먹고 나면 9시 반, 10시 집을 출발하면 알리앙스에 10시 반부터 들어가 두 시간 동안 불어 수업을 받소.
12시 반에 나와서 곧 식당에 가면 사람이 하도 많아 한참 기다려야 해요. 요새는 어떻게도 외국 사람이 많은지, 주로 스페인 사람, 미국, 영국, 독일의 순서로 온통 국제 인물시장에 온 기분. 점심을 먹고 나면 1시 반, 30분 지나서 빈 교실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교과를 준비하면 2시 벨이 울리오. 2시부터 4시까지 시작하는 수업에서 다시 두 시간 동안 하고 다음 저녁식사 7시까지 세 시간 동안 또 빈 교실에서 내일의 숙제 같은 걸 하오.
알리앙스의 식사는 그리 고급은 아니나 프랑스의 체면 문제도 있어 퍽 깨끗하고 또 순 프랑스 요리요. 여기는 다른 학생식당처럼 다니면서 담아 오지 않아도 갖다 주니까 좋은데 나에게는 풍족한 양이 못돼요. 요금은 여기 돈으로 두 끼에 500프랑, 우리 돈으로 약 800환 정도요.
지금 파리는 그리 덥지도 않소. 이러다가 소나기가 한번 쏟아지면 또 가을 날씨 같소. 저녁을 먹고 나면 8시, 여기서 뤽상부르 공원은 가깝소. 그래서 공원으로 가서 쇼팽 기념비 앞에 앉아 공상에 잠기오. 영원의 애인 콘스탄티아를 바라보고 그것을 당신과 바꿔 놓고 묵상하오. 언제 봐도 그 조각은 잘돼 보이오. 기도하듯 우러러보는 그 용모가 성스럽소. 약 30분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오오.
나는 지하철 표를 주일마다 한 카드를 사는데 요일마다 구멍이 뚫려서 나중에는 마지막 구멍이 뚫리면 아, 이 주일도 또 갔구나 하오. 3년이면 약 150매의 카드를 소비해야만 당신과 우리 어린 것들을 안아볼 수 있겠구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또 어쩔 수 없는 사명이니까. 나의 불어는 조금씩 늘어가는 모양이요.
오늘은 13일, 모레가 8·15날이어서 여기 공관에서 기념식이 있는데 내가 한국서 녹음해 온 춘향전과 민요를 여기서 그날 돌릴 것이오. 임원식 형과 만나 식사도 같이 다니기도 했소.
세계 무슨 여성회의에 김활란 씨랑 몇 여장부들이 와서 같이 식사도 공관에서 하고 돌아갔소.
여보! 지금은 밤 10시, 우리 가족 사진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끔 우리 성북동에서 당신은 아이를 업고 정아 손잡고 저녁 먹은 뒤 산보했지. 그런 게 늘 생각나오.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뺏겨도 그런 생활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여생을 즐길 수 있소.
행복이란 것, 안식이란 것, 아무 걱정 없는 인생, 생활의 무풍지대를 말하는 거야! 우리가 성북동으로 넘어오는 보성고보 뒤의 마루턱에 올라앉아 모기를 쫒고 한담할 때나 성북동 골짜기 숲속을 거닐 때 우리에게 무슨 바람이 있었으며 무슨 근심이 있었소? 있었다면 다만 생활 걱정!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걱정 없으리라.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인생을 즐깁시다. 우리 어린것들 손잡고. 그것들이 자라면 우리끼리.
나는 당신을 들여다보고 있소. 그러면 당신이 밤낮 하던 버릇,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을 연상하오. 나는 저 어느 세계에서 왕국을 하나 주어 나를 모셔간다 해도 당신들과 나뉜다면 팽개치고 당신들에게로 돌아가야겠소. 물론 나는 여기서 연한이 차면 당신들을 만나리라. 당신이 오든지, 내가 가든지.
나는 이렇게 꼬박꼬박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 거르지 않고 내는데 당신의 편지는 왜 오지 않소.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지금은 10시 45분, 오늘은 자고 내일 더 써서 항공으로 날리리라. 내일 아침 당신의 편지가 날아오기를 고대하며.
정아, 아버지는 날마다 엄마하고 정아하고 우경이하고 정자하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 잘 듣니?
아버지는 여기 있어도 정아가 말 안 듣고 잘 울고 하는지 착한 일만 하는지 잘 안다. 하느님이 다 가르쳐 주신다.
정아, 아버지는 너 사진을 방 책상 위에 붙여 놓고 늘 본다. 지금도 아버지는 너를 보고 방긋이 웃어도 너는 조금도 웃지 않구나. 정아야! 불러 봐도 너는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구나.
정아, 날마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우경이에게 좋게 하고 또 정자 말 잘 듣고 해라. 아버지는 여기서 공원에서 정아와 같은 아이들을 보고 늘 빙그레 웃어 준다. 프랑스 아이들은 참 얌전하고 착하고 선생님 말 잘 듣는다. 그럼 빠이 빠이.
파리서 아버지가.
1956년 7월 15일
여보! 오늘도 날마다 하는 버릇대로 밖에서 들어와 손, 발 씻고 잠옷 갈아입고 당신에게 편지 쓰오.
어제는 7월 14일, 프랑스혁명일. 개선문에서 군대 행진이 있었고 밤에는 도처에서 폭죽이 터져 하늘을 장식하고 번화가에서는 거리거리마다 밤을 새워 춤추고 논다 하오. 이 날은 프랑스의 대단한 축제일이라 하오. 그러나 금년에는 프랑스도 알제리 전쟁 통에 국력이 쇠약해졌고 국민도 자숙하여 그런 대단한 구경은 할 수 없었소.
나는 어제 개선문에 갔다가 그 거리로 언젠가 갔던 불로뉴의 숲속을 찾았소. 이번에는 쉽게 찾았소. 두 개의 큰 호수가 기다랗게 가로놓이고 호면에는 백조가 놀고, 젊은 청춘들이 보트를 타고. 나는 숲속 깊숙히 들어가 잔디밭에 누워 독서하며 당신과 아이들 생각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 가서 오래간만에 밥을 먹었소.
오늘은 일요일, 식당에서 한국 학생들을 만나 식후 숲속 공원에서 한바탕 조국의 정세, 우리나라의 앞날 등 많은 얘기가 오고 갔소.
여기 프랑스의 얘기 좀 적을까? 파리의 물은 맛도 좋고 우리나라 수돗물과 다름없는데 얼굴을 씻으면 근적근적 뻑뻑하고 마실 수가 없소. 센 강물이요. 이곳 물이 나빠서 파리 여인들은 화장할 때 얼굴을 물에 씻지 않고 모조리 화장수와 화장품으로 했다 하오. 물이 나빠서 프랑스 화장품이 세계적으로 발달했는지 모르오.
여기는 뤽상부르 공원, 알리앙스에서 뒤로 돌아오면 약 2분만에 이 공원의 뒷문으로 들어올 수 있소. 여기서 약 한 시간 동안 안락의자에 앉아 졸고 나니 퍽 기분이 상쾌하오. 내가 앉은 이곳은 저 유명한 쇼팽의 기념비 옆이오.
나는 때때로 이 기념비 옆에 와서 묵상하다가 가곤 하오. 이 조그만 기념비는 숲속에 싸여서 때로는 찾기 힘드오. 그래 나는 여기 와 앉아 있으면 마음의 위안을 얻소. 이 기념비는 쇼팽의 상도 없고 다만 돌을 깎아 ‘A Frederic Chopin’이라 글을 새기고 그 글 아래 상반신의 어느 여인이 기도하는 것처럼 위를 쳐다보고 있소. 이 여인은 고향 폴란드에서 어릴 때부터 쇼팽을 사랑하던 영원의 애인 콘스탄티아이오. 쇼팽이 조르주 상드와 파리에서 사랑에 빠졌지만, 이 여인이야말로 끊임없는 순정을 평생 동안 간직하고 죽은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후세의 역사는 콘스탄티아를 영광스런 쇼팽의 필생의 애인으로 기록하는 것이오. 이 나의 졸렬한 그림은 이 성스러운 콘스탄티아의 모습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소. 이 그림과 여기 내가 바라보는 조각을 비교하면 쇼팽에게 죄스러운 생각까지 들구려.
‘A Frederic Chopin’ 이것은 ‘쇼팽에게’란 뜻이오.
이 가냘픈 콘스탄티아가 영원히 그의 정성을, 그의 동경을 쇼팽에게 바치는 그 맑고 간절한 눈, 그 애원하는 듯한 표정-쇼팽은 정말 천재였소. 그의 음악은 그의 피를 짜서 오선 위에 악보를 그리고 그의 살을 오려 붙이고 다시 뼈를 깎는 소리를 표현하였소. 그러기에 그의 음악을 들으면 음악 속에 흐르는 음은 쇼팽의 가슴으로부터 우리의 (인류의, 청춘의) 가슴으로 전해 흐르는 정령(精靈)의 소리를 모아 이것을 다시 걸러서 맑고 고운 에센스만으로 된 현란한 보석이오. 또한 밤에 월광을, 푸른 월광을 받고 난무하는 정령의 넋들의 호사스런 탄식이오. 해골들의 부딪치는 화음! 만일 시대의 차이가 없었다면 나는 쇼팽을 배우고 쇼팽의 수법을 따를 것이지만. 당신도 가끔 기회 있는 대로 쇼팽을 들어 보시오.
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8시부터 시작하는 오페라를 보러 가야겠소. 나는 지금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소. 한 가지는 세계무대에 전적으로 나서는 것, 또는 만사가 마음대로 안 될 때는 그리운 내 땅에 돌아가서 당신과 우리 가족들과 편안히 여생을 보내겠소.
세계무대에 나선다는 것은 나에게는 험악하고 거칠은 행로요. 그러나 나의 타고난 패기는 나로 하여금 세계를 정복하자고, 나에게 지워진 선천의 재능은 나의 호기심을 무한히 끌어올리오. 그러나 내 나이 이미 40. 나의 신체 기능은 이제부터 내리막이고 가슴은 과거에 심히 침범 당했소.* 그리고 돈 없고 기술은 선진국의 인재들에 비해 미급하오.
* 결혼 전 윤이상은 결핵으로 입원, 병원에서 치료 중에 광복을 맞았다.
내가 만일 여기서 세계무대에 나서게 되는 가능성은 2년 안으로 알 수 있소. 그때엔 당신을 부르겠소. 그러나 나의 제반 사정이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없으면 돌아가서 어부가 되는 것도 또한 심히 만족스런 일일 수 있소.
그동안 연속으로 보아 온 오페라들 중에 오늘 본 <오셀로>는 다른 오페라보다 좋았소. 소프라노는 노래도 잘하고 흑인장군도 노래 잘하고 그의 충복도 잘했소. 합창도 좋았고, 오케스트라도 좋고, 특히 극적 효과를 잘 내었소. 연극은 다 잘해.
그러나 이것은 본시 이태리 오페라이기 때문에 불어로 하니 원형적인 것이 좀 다르지. 마지막 흑인이 자기 애인을 죽이고 나서 반실신하고 기진하여 쓰러지는 장면 같은 것은 참 좋았소.
나는 우리 가족을 어쩌면 파리로 해서 미국으로 약 수년 동안 같이 보내다가 한국으로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간절한 꿈, 신명에게 비는 마음이고, 당신은 이런 일 기대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듣기만 하겠지. 당신을 끝없이 생각하며.
수정 같은 곧은 정신과 순교자 같은 맑은 자애가 항상 당신에게 충만하기를 빌고 또 빌며.
안녕, 또 편지에서 만날 때까지.
당신의 낭군이.
1956년 8월 25일
여보! 오늘은 토요일 밤 10시, 지하철의 일주일 정기권에 구멍이 다 뚫렸구려. 요새는 일주일이 빨리 가오.
편지 속에 넣어 보낸 우리 그리운 식구들의 얼굴! 참 반갑게 받았소. 방에 들어와서 옷도 벗기 전에 이 사진들을 보고 웃으면서 이 집 안주인에게 가져갔더니 퍽 좋아하면서 자기네들 사진틀을 하나 비워서 주었소. 우경이 보고 늠름한 기분이 참 좋네요.
저녁에 들어온 남자주인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네들에게 한 장 주었으면 하는 표정인데 암만 생각해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내 방에 가져다가 네 장을 함께 액자 안에 넣어서 큰 거울 앞에 끼워 두고 하루에 열 번도 더 보오. 우경이란 놈이 제일 배우, 정아는 애교에 표정, 한없이 귀엽구려. 이번 사진이 오고 나서는 나의 고독감이 없어졌소.
보내는 사진은 알리앙스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 앞에서 같이 찍은 여자는 내가 초급반 때 배운 선생하고 고려대학 나온, 한국은행에 있다 온 경제학을 연구하는 이종욱 씨, 사진 찍은 사람은 어느 날 저녁에 같이 밥 해 먹은 그림 공부하는 손 씨.
나의 불어는 한 달 동안에 1급 반에서 3급 반으로 뛰어오르려고 하고 있소. 9월부터는 작곡에 열중해야겠소.
파리의 가을은 참 빨리도 오오. 벌써 가을인가 봐. 단풍이 들기 전에 낙엽부터 먼저 지는구려. 그러나 차츰 단풍이 들 것이오. 파리의 가을은 해가 없이 우중충한 날만 계속된대요.
10월 초에 벌써 외투 입고 성급한 사람은 저녁때쯤 되면 외투 입고 나오는 것을 더러 보오. 그러니까 파리 사람들의 옷은 질정(質定)이 없지. 무엇이든 입고 싶을 때 입소. 여름이래야 여름 같은 기분은 일주일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사계절은 얼마나 규칙적으로 찾아오는지, 그리고 그 사계절은 얼마나 특색이 있소. 가을이면 푸른 하늘, 노랗고 붉은 색색의 단풍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요새 나는 파리의 어느 일류 신문에 연재되는 한국의 기사에 열중하고 있소. 10일간 연재되는 이 대(大) 신문의 2면의 기사는 한국의 욕으로 꽉 차 있소. 현지 특파원 기자가 보낸 것이오. 나는 이런 기사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 이에 반박문을 준비하여 이 신문과 한국 신문에 내어야겠소. 끝까지 보고 따져 볼 것이지만 참 창피한 기사들이오.
이 편지가 내일이면 또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부지런히 날아 적도를 지나서 멀리 당신에게 닿겠지.
그럼 여보, 다음 편지까지 건강과 평화를 유지하며 잘 있어요.
안녕. 당신의 낭군이.
1956년 9월 2일
여보! 오늘이 9월 2일. 내가 서울 떠난 지 만 3개월, 말 들으니 3개월이 여기 온 사람들의 고향집 생각의 고비래요. 요새 집 생각, 고향 생각이 나지만 그러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오. 영 각오를 했으니까. 그리고 하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한 생각뿐이오.
여기 국립음악원 외국인과에는 작곡과에 적을 두고 화성학과는 다른 음악학교에다 하나 더 적을 두어 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약 1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전적으로 이론 재교육을 철저히 받아서 후일 이론으로서도 권위자가 되고 싶소. 또 한편으로는 좋은 작품 만들어서 여기서 발표를 해 보고 기반을 잡을 생각도 간절하고, 가능만 하면 약 1년 반 동안은 엄격한 서구식의 기교를 완전히 쌓았으면 하오.
토, 일요일 2일은 연달아서 오페라를 봤는데 토요일 밤은 바그너의 <로엔그린>, 일요일 밤은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그런데 바그너의 <로엔그린>은 감동을 받지 못했지만 <보리스 고두노프>는 참 큰 감동을 받았소. 파리 와서 본 오페라 중에서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것이오. 특히 고두노프 역으로 나온 가수는 그야말로 훌륭한 노래에다 훌륭한 연기였소.
청중들은 끝이 나도 박수를 계속 치며 극장에서 나오지를 않았소. 정말 훌륭한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뺏는 것이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우리나라의 단종애사 비슷한 것이나, 그의 쫓겨난 왕자의 숙부는 정권을 잡고 나서 고민 때문에 스스로 죽는 것이 이 극의 마지막인데 그 고민하는 양상이 전 가극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나는 이 오페라를 보면서 상상했소. 이 오페라의 작가 무소르그스키는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사람은 아니었소. 그러나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감동적인 억양, 빈틈없는 선율, 독특한 화성, 그리고 관현악의 특수한 색채감으로 하여 작곡의 대가인 바그너의 작품에 지지 않고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그리고 작곡의 기법을 훌륭히 쌓은 마스네의 <타이스>를 들을 때를 비교하면 정말 큰 차이가 있었소.
그리고 나는 거기서 꿈꾸었소. 그 무대 위에다 내가 지은 춘향전이나 그 밖에 우리 민족성을 띤 오페라를 상연시켜서 성공하는 공상을 했소. 그러면 어느 정도 국제적인 주목을 그으리라. 그러자면 내가 여기 3년은 있어야 될 것 같소. 1년은 충분히 기법을 쌓아야겠고, 2년째부터는 작품을 만들면서, 3년째부터는 본격적으로 발표하기에 전념하고.
그러나 여보, 운명은 나의 갈 길에 대해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오. 어떤 자리인지. 정말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순조로운 자리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돌아가서 통영의 한산섬 밖에 조그만 섬을 나에게 허락해 주어 강태공으로 일생을 마치도록 할 것인지.
나는 어느 것이라도 불만하지 않겠소. 한산섬 밖 강태공의 생활도 당신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조금도 불만할 게 없구려. 인생은 대개가 거진 다 같은 것이니까. 체념만 한다면 모든 게 다 가소로운 것이오.
국제적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다는 것. 이것 역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좀 자극적인 것 먹는 거나 마찬가지지. 된장국하고 밥 먹어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마찬가지니.
어쨌건 나는 하는 대로 해 보겠소. 만일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국에 돌아가면 다음날 국제오페라 극장 쯤 생기겠지. 나의 작품이 거기 상연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가 뜻하는 예술의 의도를 살려볼 수 있을 것이오.
훌륭한 문장은 절대로 과장하는 데 있지 않소. 마음의 알맹이를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남의 가슴을 찌른다오. 추상적인 문구의 되풀이는 오히려 흥미를 깨뜨리는 법이니까.
여보, 당신과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는 나의 향수가 사실인즉 나의 피요, 나의 정신을 길러주는 원천이오. 나는 마치 순진한 중학생이 그의 절대의 애인을 사모해서 날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랑의 일기를 쓰는 것 같소. 어쩌다가 우리는 알맹이와 알맹이가 만나서 나는 이렇게 당신을, 당신은 그렇게 나를 생각하고 혼자 웃고 혼자 울고 하는 아름다운 운명이 되었소.
오늘은 이만 쓰겠소.
당신과 우리의 어린것들을 끝없이 생각하며, 안녕, 안녕.
1956년 9월 13일
여보! 나는 그동안 당신과 아이들 데려오는 것을 몽매에도 잊지 않았는데 지금의 편지는 생각하고 생각하던 끝에 보내는 것이니 잘 읽고 당신의 의견을 적어 보내 줘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다는 것은 고통이오. 나는 여기서 당신과 아이들 생각과 마음 때문에 전 생활의 상당한 분량을 희생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은 어차피 이런 기회에 외국에 나와서 지내보는 것도 우리들 생애에 중대한 일이리라. 그래서 가을부터 당신들이 수속을 해서 내년 초봄까지는 들어오는 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우리가 여기서 풍족하게는 살 수 없지만 한국서 산 거나 마찬가지로 생활하면 여기서 충분히 생활할 수가 있소. 집도 교외에 나가면 지금 지불하는 나의 방값의 반만 줘도 우리 식구가 살 수 있는 방 두 개와 부엌 칸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우리 서울집을 팔아서 그 돈을. 그 다음은 당신의 여비인데 아이들은 반액을 내야 할 거요. 그러면 당신들 세 사람이 두 사람분의 여비로 될 것이오.
당신들이 오려면 하루라도 빨리 일찍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왜냐면 여기서 혼자 생활비 가지고 절약해서 살면 한 가족 살 수 있소. 프랑스 사람들의 수입은 평민층은 150불 정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소.
여보,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머리 맞대고 산다면 약간의 고생인들 못 참겠소. 결심해 보구려!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보호해 주시리라. 당신과 아이들만 같이 있다면 외국에 뼈를 묻혀도 한이 있겠소?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야지. 한국서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해야지.
어떻소! 실천은 항상 공상에서부터 우러나는 법이오. 나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공상 같은 것이 전부 실천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오? 그래서 사람이란 용단이 필요한 것이오. 그러니 잘 생각해서 편지해 주오.
1956년 9월 19일
여보! 당신들이 파리에 오는 가능성에 대한 지난번의 편지 보고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주책없는 소리라고 웃어 버렸는지 몰라.
하기야 나도 확실한 계산에서 한 편지는 아니지만 다분히 희망적인 가능성을 생각해서 한 편지야. 당신이 오는 데 필요한 수속 절차를 밟을 동안에 나는 우리의 있을 집과 약간의 경제적인 수입도 생각해 보겠소. 최악의 경우 내 혼자 생활비만 가지고 우리 식구들 생활을 절약히 할 수가 있소.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서 서로 애태우는 것보다 낫지 않소?
그리고 나는 마음 푹 놓고 연구할 수 있고. 그리고 세월이 몇 해가 가도 걱정하지 않고. 또 경제적인 부담이 크지만 생활비가 적게 드는 독일이나 벨기에 가서 공부하며 생활할 수도 있고.
만일 당신이 확실히 계획이 없는 이상 안 오겠다고, 그리고 나에게 송금을 최소한밖에 보낼 수 없는 형편이라면 나는 돈이 적게 드는 독일이나 벨기에로 가야겠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오늘은 9월 23일, 나는 19일, 20일 양일간을 보스턴심포니가 와서 구경 갔었소. 물론 연주도 우수했지만 거기 발표된 미국에 살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인 마르티누라는 사람과 이태리 출신의 미국인 크레스톤이라는 두 사람의 작품을 듣고 여간 흥분하지 않았소.
두 사람의 작품은 대단히 대규모의 교향곡 작품인데 모두가 미국 특유의 메카닉한 기교를 구사했다는 것이 특유하고 또 퍽 효과적이었소. 그 사람들의 작품이 뭐 초인적인 미의 세계를 그린 것은 아니고 다분히 상식적이지만 그 아름다운 심포니 단원들의 연주하는 분위기가 좋은 극장에서 좋은 청중 앞에 연주될 때 어찌 좋게 들리지 않겠소?
건강과 시간이 나에게 충분히 주어진다면 나도 그런 대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인데. 사실 나는 작곡을 계속해서 3, 4일 집에서 하면 그만 건강을 걱정하는구려. 그러나 여보! 나는 낙심하지 않소. 당신만 생각하면 큰 욕심도 다 살아나는구려.
요새 10일 정도 계속해서 파리의 일기가 가장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오. 나는 지난 4, 5일 전에 ‘파스퇴르’란 거리를 지나다가 가로수 사이로 달을 쳐다보니 만월이 아니겠소. 나는 당신의 편지를 생각하며 추석이란 것을 알았소. 우리 아이들 옷을 당신이 해 입혔다니 보고 싶어졌소.
우리나라의 추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운 추석 옷 차려입고 음식 차려 조상 묘 참배하고, 들에는 곡식이 황금색으로 익고, 씨름판에, 소씨름판에 모여 꽹과리 두들기며 춤추며, 저녁이면 맑고 밝은 보름달 산정에 올라 달 사리기에 흥분하고, 숲속에서는 풀벌레 소리, 반딧불이 나르고……. 우리나라 같이 아름다운 곳은 이 세상에 또 찾아볼 수 없을 게요.
간밤에는 밤새도록 당신들이 파리에 와 있는 꿈을 꾸었소. 그래서 부둥켜안고 어떻게나 울었는지, 꿈에서 아마 소리를 내었던 모양. 당신이 아마 나의 편지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느라고, 또 내가 늘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는 모양이지.
나는 이제부터 대작을 착수하겠소. 나의 작품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신에게 빌며 나의 사랑의 역사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빌며 당신과 우리 아이들 머리 위에 나를 대신하여 조국을 지키는 우리 향토의 신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나는 당신 꿈을 밤마다 꾸는 것을 변하지 말고 밤마다 꾸어 주기를 원하며 우리가 상봉할 감격의 날이 하루 빨리 주어지기를 하느님께 빌며.
나의 자야, 우리 대장부 우경, 우리 정아 뽀뽀.
또 다음 일요일까지 안녕.
다음 편지에는 우리 정아 글자도 적어 보내 줘요. 아이들 야단쳐서 겁쟁이 만들지 말고. 여기 아이들은 참 행복해요. 장난감도 얼마든지 있고 옷도 아름답게 입히고 인형같이 예쁘오. 부모는 여가만 있으면 아이들과 공원에 나와 같이 놀아 주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 아이들 생각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어 주오. 부모 마음이란 다 마찬가지지.
나는 이 달에 한국서 가지고 온 트리오를 마지막 끝냈고 그 까닭과 또 며칠 밤은 음악회 나가고 하느라 불어가 퇴보한 감이 드오.
또 열심히 해야지…….
1956년 10월 24일
오늘 당신 편지 받고 세 번 읽고 또 읽었소. 당신의 성의와 애정이 간절해서 좋고 또 프랑스 오는 일에 대해서 희망적인 내용은 나를 고무시키는 일이오. 나에게 편지 할 때는 온다는 걸 전제하고 편지를 써요.
송금이 아직 오지 않아서 걱정이오.
우리 정아. 너무 운동시키지 마오. 계집애 달음질 잘해서 뭐 해. 그보다도 그림책, 이야기책 많이 사 줘서 교육적으로 기르는 것 잊지 말 것. 정아는 특히 심장이 약할지 모르니까. 남달리 섬세한 감성이 있을 것이니 그림을 잊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