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물허벅
초판 1쇄 2022년 12월 14일
전자책 발간 2023년 05월 23일
지은이 오미향
발행인 김재홍
디자인 현유주 김혜린
전자책 제작 김혜린
발행처 도서출판지식공감
등록번호 제2019-000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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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5622-805-9 05810
ⓒ 오미향 2023, Prin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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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자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KPIPA)의 〈2023년 전자책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입니다.
지은이 오미향
제주 출생. 이화여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뒤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다.
처음 썼던 글이 서울 중구 여성문예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수필을 쓰게 됐다.
전북일보 신춘문예(2022), 해양문학상(2021), 동서문학상(2020), 근로자문학상(2020, 2018), 남명문학상(2020), 사계 김장생 문학상(2019) 등을 수상했다.
2022년 한국문화 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혜작가로 선정되었다.
이메일: palraiju@hanmail.net
그 섬에는 늘 바람이 불었다. 책장을 넘기던 단발머리 소녀는 먼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뭍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색과 맛은 어떠할까? 이 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 눈에, 가슴 가득 담고 싶었다. 육지로 빠져나가고픈 꿈이 있어 열심히 글자와 숫자에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도시에서는 모든 새로운 것이 펼쳐지고 날마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씩씩하게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건너 도시에 안착한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고립무원한 나의 섬에는 수시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서 벗어나고자 책을 읽었고 글을 끄적댔다. 스스로 박차고 나온 고향 바다의 바람을 내내 잊지 못했다. 뭍에서처럼 땅의 끝에 바다가 있는 게 아니라 땅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바다가 에워싸고 있었다. 어쩌면 내 삶도 자꾸만 달아나고 싶은 것을 바다가 있어 방패막이 돼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분다. 바다는 늘 내게 비릿한 짠 내만을 준 게 아니었다. 살면서 힘들면 찾아오라고, 바람을 쐬라고, 부서지는 포말을 보며 마음을 다잡으라고, 손짓하며 나를 불러세웠다.
삶의 그루터기를 넘을 때마다 자주 넘어지고 아픔을 주워 담느라 허덕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글이 어느 날 제게 찾아왔어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언니의 물허벅》을 내보이며
가쁜 숨을 뱉어봅니다.
부끄러움만이 가득합니다.
막내딸의 철없음을 무한한 사랑으로
끌어 안아준
아버지 어머니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전합니다.
2022년 12월
오미향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자, 암벽 위에 작은 돌집이 보였다. 벼랑 위 깔깔한 소금기를 벗 삼아 삶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는 삭정이 같은 무릎을 보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만 불어도 거친 말 한마디만 내던져도 금세 기울 것 같은 수평을 아버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숭숭 구멍 뚫린 관절에 햇볕을 끌어모으고 먼바다를 내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잊었다는 것인지 다 지나간 일이라 모른다는 것인지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물 쓴물 다 빠진 아버지의 빈 가슴에 찾아 든 것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마음도 마른 웅덩이처럼 젖어들었다. 말랑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가 평생 쌓아 놓은 돌들은 말이 없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자 공무원이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에 널려 있는 돌들을 모았다. 다듬고 매만지다 보면 멋진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돌로 작업하는 일이 즐겁다며 마치 석공이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거칠고 힘들어 보이는 돌 작업을 당신이 취미 삼아 했다. 더는 돌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오늘도 돌집 마당을 서성였다.
조용히 봄볕 드는 양지녘에 앉아 돌을 바라본다. 어느새 아버지의 얼굴에선 미소가 감돌고 커다란 원석을 어루만지는 손에 힘이 느껴졌다. 꼭 다문 입술이 비장했다. 허공에 떠 있던 쇠망치가 주인의 손을 거쳐 낙하했다. 끙 소리와 함께 사과 잘리듯 커다란 돌덩이는 반쪽으로 벌어졌다. 바가지 머리의 소녀가 그 틈 사이를 비집으며, 기억 속 유폐된 추억 주머니를 매달고 걸어 나오며, “아버지 뭐 만들어요? 우리 집은 언제 만들 거예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돌하고 얘기를 나눴고 돌을 부수고 깨며 겹겹이 쌓아 올릴 뿐이었다. 애써 만든 조형물이 다음 날은 자취도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아련했다. 자연스러운 모양을 갖출 때까지 아버지는 수없이 반복했다.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돌을 조각하면서도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돌은 ‘우리들’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가루 튄다고 나를 멀찍이 밀어내며 장난스레 “우리 향이한테 무얼 만들어줄까?” 하고 물으면 “음, 이따만한 멋진 궁전을 만들어주세요.”라며 두 손을 넓게 벌려 보였다.
땀이 비 오듯 내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어디선가, 밥 먹으멍 헙써(식사 드시면서 하세요), 점심을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아버지는 궁전을 지었었나? 울퉁불퉁한 표면에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커다란 사람, 돌하르방이 떡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일까. 우스꽝스러운 그의 코는 반질거리며 납작해져 갔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미소를 잊지 않는 돌하르방은 자식을 위해 온몸의 윤기가 빠져나가도 헬쭉거리며 웃어 보이는, 자식의 행복만을 기원하는 포근한 아버지였다.
어느새 정수리를 뚫고 나온 새치를 한 가닥 뽑으며, “아버지, 혹시 물팡 만드세요? 물허벅을 부릴 데가 있어요?”라고 물었다. 받침대로 쓰일 튼튼한 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이지만 옛것에 대한 향수로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민속박물관에, 마당 너른 집에서 볼 수 있는 물팡은 물허벅을 진 이의 욕망과 간절한 이상향의 징표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부지런히 올라와선 물허벅을 집 마당에 부려놓으며 쳐다보는 하늘이 그렇게 파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물 한 방울이라도 안 흘리려 고생했던 그 마음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줬다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고 했다.
물을 길어 올리고 관리하는 게 여자의 일이라면 제주 남자는 돌과 함께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삶이 녹아있는 돌 하나 하나하나가 모여 홑담이 되었다. 아랫돌 괴어 윗돌 받치고 중간돌 빼서 윗돌 올리며 어깨동무하듯 겹담이 되면서 견고해졌다.
빽빽이 잘 쌓아 올리는 게 최선은 아니었다. 사이사이로 바람구멍을 터줘야 돌들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나의 삶도 높이 쌓아 올리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을까? 주변을 돌아보며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바람길을 만들 생각은 했었는지? 내쉬는 날숨에 상처받은 이가 있었다면 더불어 배려하는 들숨으로 바람구멍을 터야겠다.
아버지는 험한 바다와 돌담의 형식으로 바람을 붙잡고 살아냈다. 시꺼먼 화산불이 핥고 지나가도 섬을 지켜냈다. 송송 뚫린 시간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돌담은 숱한 바람들이 돌 틈 사이로 빠져나가며 삶을 이어주고 견고하게 지켜준 자리였다.
시골집 근처 밭마다 테두리를 두른 돌담이 즐비했다. ‘여기는 순이네 집’, ‘철수삼촌의 보금자리’, ‘영희네 우영팟’, ‘작은삼촌의 일터’라는 밭담이 아버지의 손에서 빚어졌다. 그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고 햇살을 받으며 자양분을 듬뿍 먹고 자라날 수 있었다.
나만의 방식대로 물허벅을 지고 왔다. 구덕에 두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앉히고 두 줄의 긴 끈으로 돌돌 감아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날랐다. 물허벅을 어깨 너머로 꺼꾸러지게 해서 순도 높은 물을 항아리에 부어 넣었다. 잠시 물팡에 물허벅을 얹혀 숨을 돌리기도 하면서. 잠시 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반 호흡 사이 생의 교차로는 여러 갈래로 뒤엉키기도 했다. 길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어디쯤에서 사라졌을까.
평생을 걸어도 아직 닿지 못한 길의 끝에 돌하르방이 있다. 두 손에는 끌과 망치를 들고 내게 손짓을 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앞에 커다란 암석이 있더라도 헤치고 걸어오라고. 오월의 기분 좋은 햇살과 살랑거리는 미풍에 알맞게 데워진 돌의 살갗을 만져보라 한다. 돌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며 돌의 향기를 맡아본다. 쓰다듬는 손에선 따뜻한 돌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몇 해 전, 눈밭이 흩날리던 겨울날이었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은 희망을 주지 못했고 인생은 이상대로 흐르지 않는 것 같아, 뭐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도서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검정 가죽바지에 긴 머리를 틀어 올린 교수님이 하는 문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낯설고 매력적인 외모보다 문학에 대한 진솔한 가르침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문학이, 글쓰기가 이렇게 중년의 저를 붙들어 매줬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씩 끄적거렸던 일기를 수필로 완성해 보고, 사물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시로 적어봤습니다. 첨삭을 기다리던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지고 글쓰기에 푹 빠져들어 가며 저는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아름답고 향기가 있는 사람이 되라며 예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께 이제야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늘 운전대를 잡아 쥐고 따뜻한 커피를 말없이 내밀어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천천히 집 앞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보이는 것보다 원담은 저 멀리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아버지의 등에 가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스스 내려앉은 바람이 돌들 사이로 스며들며 원담은 활기를 되찾았다. 아버지는 뜰채로 가느다란 멸치를 건졌다. 운이 좋으면 숭어도 올라온다고 했다. 밀짚모자 아래 숨겨진 아버지의 주름살에 웃음이 깃들였다. 많이도 아니고 그저 잡을 수 있을 만큼만 잡고 나머지는 놓아줬다.
바다가 질리게도 싫었던 나는 뭍을 꿈꾸며 도시로 가는 게 소원이었다. 나를 둘러싼 이 바다 밖에는 더 큰 물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담담히 오래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넘기면 바다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금은 제주도가 환상의 섬이지만, 그때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섬에 불과했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이상을 품고 뭍으로 빠져나오는 꿈을 날마다 꾸었다. 고립무원한 섬 바깥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를 둘러싼 세상이 자전과 공전을 하는 모습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도시의 삶이 고단했을까? 그렇게 첫배를 타고 섬 밖으로 떠났던 나는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무심하게 고향을 찾았다. 고향 바다에서 불어오는 깔깔한 바람 소리가, 비릿하게 온몸에 휘감기는 바다의 결이 그리웠다. 한때 그 바다가 싫어 뭍으로 내달렸던 내 젊은 날의 바람은 다 어디로 흩어졌는지. 내 열정과 젊음의 끝자락을 매달고 맴을 돌던 그 바람을 잡고 싶어 신열을 앓듯 열병을 앓았다. 그럴수록 나를 키운 건 대부분이 바다였음을 알았다. 얼굴이 틀 정도로 맨몸으로 받았던 그 거친 고향 바다의 바람. 그 바람이 싫어서 뛰쳐나왔는데 그 바람을 맞고 싶어 어디론가 걸어가고 또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할머니가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자 큰집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눈칫밥을 먹어야 할 때마다 바다를 찾았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했으며 모래알을 손으로 훑어내리며 언제면 어머니가 올지 모래점을 쳐보곤 했다.
그러다 4·3사건이 터졌고 혈혈단신으로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았다. 6·25가 발발하자 자원입대했으며 한쪽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지구촌에서 화염과 폭발이 휩쓸고 지나는 장면과 전쟁 이야기만 들려도 아버지는 동공이 흔들리며 나머지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마음을 못 붙이고 겉돌기만 하던 아버지는 늘 바다로 나갔다. 매 순간 역사의 굴곡진 뒤안길에서 홀로 깨쳐 나와야 했던 아버지는 바다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 아버지를 이끄는 바닷길은 언제나 햇살이 부서지며 갯것의 냄새를 한껏 내뿜었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수평선 가득 여명을 깨치고 떠오르는 햇살을 보고, 저녁이면 노을빛이 한없이 좋은지 바다를 바라보다가 걷다가 또 걸었다. 바다를 낯설어하는 어린 나를 데리고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 톳이나 따개비 등을 잡아주곤 했다. 자식들이 하나 둘 뭍으로 떠난 후에는 거주지를 아예 바닷가 앞 초라한 공터로 옮겼다. 자나 깨나 돌을 날랐다. 물살이 들고 나면 크고 작은 바다 돌들을 모아 울타리를 쳤다. 처음에는 조그맣던 경계가 날이 갈수록 넓혀져 갔다. 한 뼘씩 몸을 키워가기 시작한 돌담은 꽤나 큰 원담이 되었다.
“아버지 대단해요. 어쩜 이렇게 튼튼히 쌓았어요? 고기는 많이 잡혀요?”
그저 웃기만 하는 아버지. 당신의 어깨와 손에서 어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아버지는 하루의 문안 인사를 하듯 매일 아침 돌들을 어루만진다. 일손을 쉬는 시간에는 집 앞 평상에 앉아 원담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가 돌을 허물지는 않는지. 걸어가다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비바람이 치는 날에는 더욱 바빠진다. 어젯밤 폭풍에 장마에 돌들이 무척 아팠겠다고 생각하고 배열을 가다듬고 먼지를 닦아내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어루만진다.
아버지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게 원담을 쌓는 일이었는지 그 안에 물과 함께 흘러온 인생이었는지. 당신만의 방식대로 하나씩 돌을 쌓으며 걸러내고 추억하며 지난 삶을 해석하는 듯했다. 원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는 건 아닐는지. 가끔은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거친 바다 위에 쌓은 아버지의 집과도 같은 돌담, 돌무더기에 불과한 원담은 아버지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큼직한 돌은 아랫돌이 되어 튼튼히 받쳐주어 밑돌이 되었다. 크고 작은 돌들은 얼기설기 얹히고 쌓여서 바닷물을 가뒀다. 그 사이로 들숨과 날숨이 섞여 드는 또 하나의 작은 세상이 생겼다. 물고기들이 자연스레 드나들며 노니는 바다의 정원이었다가 생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작업장이 되기도 했다. 한때는 꽤나 많은 들물과 날물이 드나들었을, 뜨겁게 부풀어 올랐던 저 파도를 한 울타리에 가두기는 쉽지 않았으리.
물때에 맞춰 하나의 소우주가 되면 천지는 가득함으로 팽팽했다. 자연의 생명력과 삶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때 아버지는 희망과 에너지로 가득함(滿)을 가슴에 품었으리라. 비어야 다시 채워질 수 있음을 터득하고 바람이 통하도록 담 사이로 틈새를 만들었다.
원담을 쌓을 때는 한쪽은 가파르게 다른 면은 완만하게 쌓아야 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한없이 원만한 듯 굴러가다가도 폭풍이 일 때는 거세게 막아낼 수 있게 경사가 져야 함을 알려줬다. 우리 삶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아버지를 한없이 끌어당겼던 바다. 그 끝없는 공간에서 삶의 궤도를 하나씩 그리며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겼다. 원담 안에 스며든 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나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달의 기운에 따라 온 천하가 자신 안의 욕망과 이상을 모두 받아 주는 양 물로만 가득 찼을 때도 아버지는 허허롭기만 했다. 나도 곱게 바다밭이 된 길을 가끔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봤다. 바다 저편의 생생한 에너지가 나를 끌어당겼다. 삶은 그렇게 팽팽하게 가득하다가도 욕심을 내려놓고 비워두라고 한다. 무한하기에 뛰어들 수 있었고 내려놓았기에 가득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원담 안은 텅 비었다. 비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꽉 차리라는 예감이다. 삶의 헛헛한 잔기침은 부재를 슬퍼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이다. 그저 기다린다. 물때를 기다린다. 허물 벗은 뱀 마냥 아버지의 맨가슴에 스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기약하면서. 없음으로 하여 있음 가득한 허(虛). 가득 채우고 또다시 비워내며 아버지가 남았다.
원담을 지나 보목항 근처에는 자리 잡이 배로 가득했다. 비릿한 자리물회 향과 사람들 소리로 항구는 활기가 넘쳐났다. 쏟아지는 햇살과 검푸른 파도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바다는 짭조름한 냄새로 또 한 번 생명 에너지로 가득했다. 뉘엿뉘엿 태양이 제 그림자를 조금씩 감추기 시작하면, 어스름은 슬픔의 조력자인 양 저녁 햇살에 뉘여 있었다. 해변의 깔깔하면서도 빛깔 고운 모래알이 눈을 감으면 내게로 쏟아질 듯 다가왔다. 태양과 달이 번갈아 자리를 바꾸는 동안, 나는 욕망으로 두터워진 이불을 덮었다가 다음 날엔 성실, 인내, 절제로 수놓아진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원담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으리라. 이제는 내 안의 욕심과 질투, 가식 등으로 수놓아진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면서 작은 돌멩이 하나 원담에 올렸다. 파도가 제 속살을 보여주며 포말을 일으킬 때, 나도 비워지고 허허로운 육체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견고한 원담을 만들어가고 있다.
모나고 거친 돌은 파도와 해풍에 조금씩 날이 무뎌지고 깎여가며 부드러워질 것이다. 돌을 하나둘씩 쌓다 보면 큰 원이 되고 그 안에 스며드는 물을 마음껏 취할 수도 흘려보낼 수도 있기에 말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에 늦은 때란 없으리라. 무엇보다 삶이라는 바다를 미숙하게나마 헤엄쳐왔기에. 가끔은 파도와 맞설 만큼의 담력도 깃들어 있기에. 폭풍우에도 끄떡없을 나만의 원담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아버지의 원담이 저 앞에 있다. 그러니 천천히 걸어가고자 한다.
카페의 통창 가득 바다가 담겨있다. 목젖으로 넘어간 해가 붉은빛을 머금어 햇살을 들이키는 시간, 한낮의 절정에 머무른 해의 파장이 스펙트럼을 이루듯 눈이 부시다.
물살은 잔잔하게 오르내리며 파고를 만들었다. 줄지어 선 부표들이 출렁대는 사이로 함지박처럼 보이는 것들이 둥둥 떠다닌다. 자세히 보니 오렌지색 박새기였다. 잘 달인 해를 들이키고 살이 오른 햇살을 부둥켜안은 듯 태왁은 서너 개씩 혹은 외따로 떠 있다. 해녀들의 작은 몸은 바다에 빚진 듯 거꾸로 매달려있을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잠수복에 일상의 비루함이 숨어 있으리라. 자맥질의 깊이만큼 참아내는 숨은 서울로 가겠다는 자식의 등록금이었고 이제는 손주들의 용돈일 것이다.
태왁과 연결된 망태기를 질질 끌면서, 제일 늦게 불턱으로 돌아오는 상군 해녀가 있었다. 소라의 뿔이 무릎에 덧댄 고무를 뜯어내고 성게 가시가 그녀의 손을 찔렀다. 물 밖으로 나와서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뱉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이름은 엄마였다.
음력 보름사리가 지날 때쯤이면 바다는 갯것들의 냄새로 짭조름했다. 햇살이 쏟아지고 갯바람이 바위에 앉아 숨 고르기에 들어가면, 숨어 있던 해초는 부스스 일어났다. 바람이 해초 더미를 말리는 동안 햇살은 나른하게 물살 위에 누워있었다. 바닷물을 한 바가지 뜨면 건져 올릴 것 같은 날미역의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갯바위에는 바다의 불로초라 불리는 톳이 봄 마중하느라 밝은 갈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운이 좋으면 바위틈 새로 눈먼 해삼과 돌게, 보말을 만나기도 했다.
새하얀 교복칼라를 매만지던 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앨버트로스의 날갯짓처럼 저 바다 끝까지 내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모래와 자갈, 소라껍데기만이 나뒹굴고 한약 재료가 되는 감태가 가득 널려 있었다. 괜히 부아가 치민 나는 보물단지인 양 터진 태왁을 정성스럽게 수선하고 있는 엄마에게 눈을 흘겼다.
“배는 돛이라도 있지, 박새기 하나에 내 인생 걸지 않을 거라구. 적어도 저 태왁보다는 더 큰 꿈을 꿀 거야, 태왁에 저당 잡힌 엄마 인생, 바다가 보상해줘?”
악다구니를 쓴 나는 완도로 가는 쾌속선을 타고 뭍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듯 내 인생도 거침없이 펼쳐지리라. 갈매기의 노랫소리가 응원가처럼 들렸다. 엄마의 물질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엄마는 매일 마이신을 먹으면서도 바다에 나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태왁에 담긴 해산물의 가격을 먹으며 도시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도시의 불빛은 황홀하고 힘이 넘치며 원하기만 하면 모든 걸 안겨줄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는 관계는 나를 좀 더 발전시키는 일이라 생각하며 위안 삼았다.
이 도시에서 얻은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있었다. 단지 얻을 수 있는 것에 무게중심을 뒀을 뿐이다. 한동안 바다의 내음을 맡지 못하고 도시의 화려함만을 쫓아다녔다. 사르트르와 까뮈의 서적을 팔에 끼고 캠퍼스의 낭만을 눈에 담으며 꽃길처럼 펼쳐질 미래를 상상했다. 졸업하면 교단에 서서 마음껏 강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하나로 엄마의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부딪혀 무릎이 멍들고 깨지기도 하며 버텨야 한다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단단한 땅 위를 두 발을 딛고 있어도 잔챙이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번번이 무너져내렸다. 물속에 있었던 엄마가 바삐 오리발을 흔들며 수천 리 바닷길을 헤엄쳐 와 내 손을 잡았다. 수경 너머 당신의 눈이 젖어있음을 애써 모른 척했다. 엄마는 물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암초를 어떻게 온몸으로 막아내며 자맥질을 했던 걸까.
카페 문을 밀치며 날것 그대로의 바다를 마주했다. 태왁이 요동쳤다. 해녀가 제트기류를 일으키는 것처럼 툭 튀어나왔다. 여기저기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녀들이 등장했다.
그녀들은 가쁜 듯이 몰아서 훅 크게 한번 내쉬거나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숨비 소리를 고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바다를 쉼 없이 넘나들면서도 찡그린 기색이 없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물들이 한가득 망태기에 들었다. 도망가려는 문어를 쥐어 잡는 해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서둘러 불턱으로 모여든 그녀들은 잠수복의 물기를 털어내며 언몸을 녹였다.
“오늘 수확은 어떵허우까?(오늘 수확은 어땠어요?)”
“하영 잡았수까?(많이 잡으셨나요?)”
“놀멍 쉬멍 손지 줄 만큼은 잡았져.(놀면서 쉬면서 손주 줄 만큼 잡았지.)”
물고기 비늘 같은 70세 상군 해녀의 주름진 입가에 갯바람이 앉았다. 보고 있는 내 머리 위에도 비릿한 공기가 머물다 갔다.
어릴 적부터 깊은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보면 엄마가 생각나 부러 외면했었다. 모든 걸 집어 삼킬 듯한 검푸른 바닷속에 겁도 없이 뛰어드는 엄마가 놀랍고 신기했다. 숨이라도 쉬는 건지, 한참을 올라오지 않을 때면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가 파도 소리보다도 더 커서 화가 났었다. 부유하듯 한 점 태왁으로 생명줄을 붙들고 있었던 엄마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남보다 더 숨을 참았고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물질을 했던 것이다.
불턱 한쪽 구석에 버려진 태왁이 보였다. 얼기설기 꿰맨 자국이 안쓰럽다. 제 할 일 다한 물건의 주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유품이 되어버린, 껍질이 벗겨져 낡아버린 엄마의 빛바랜 태왁을 떠올려본다. 더는 참지 말고 편안한 숨을 내쉬는 엄마를 떠올렸다. 폐부 가득 숨을 부풀리며 깊이 들이마시고 시원하게 내뱉으며 아, 살 것 같다며 웃음 짓는 엄마를.
태왁을 끌어안았다.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더 보탤 것도 없는 빈 몸뚱어리로 왔을 때, 소리쳐 웃고 울었던 지난 기억이 짭조름하게 다가왔다. 둥둥 떠다니는 태왁에서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부터 나의 삶은 덤이라고 애써 말해본다.
이번 해부터 모든 기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됐다. 제기와 제수용품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나갔다. 지하철을 두 번 바꿔 타며 내린 남대문시장 부근에는 장관을 이루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신세계명품관을 옆에 두고서도 하나도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이다.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풍습과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는 것이다.
제사가 아니었음 찾아오지 않았을 이곳, 전통시장에서 놋그릇이 눈에 띄었다. 볕 좋은 날 외진 곳에 홀로 앉아 놋그릇을 뽀득뽀득 닦아내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아로새겨졌다. 일에 쪄 들은 피곤한 기색인 어머니의 그늘진 눈매와 울퉁불퉁한 손마디가 그려졌다. 볏짚으로 뽁뽁 닦아내던 놋그릇이 보기도 싫었는데 시간이 지나 그 그릇을 내 손으로 선택하게 될 줄은.
말끔하게 닦여진 놋그릇을 쳐다보며 처음으로 준비한 제사가 백번 얘기한 것 이상의 산교육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울 뿐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관리를 잘못하면 안 한만 못하다는 놋그릇의 속성이 가격 대비 불편함만 초래할 줄 알았다. 놋그릇은 정성스럽게 닦으면 닦을수록 광채가 났다. 사람의 내면도 채워지면 빛이 난다. 놋그릇 앞에 있으니 마음이 정갈해지고 내면의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놋그릇이 오늘 밤 제사상에 놓여질 것이다. 은은하게 비추는 기품 있는 내면에는 수천 번 수만 번 두드려 대던 장인의 땀과 숨결이 배여 있다. 때로는 맨몸으로 세상 풍파와 부딪혀가며 깨어지고 넘어졌을 것이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면서 다져질 것이다. 하나의 놋그릇이 탄생되기까지 수없이 담금질하는 것처럼. 뾰족한 것을 두드려 펴고 약한 것은 강하게 다져질 일이다. 인생이란 큰 그릇을 오늘도 조금씩 두드린다. 메와 탕국을 올리고 제주를 올리며 제를 시작했다.
나란히 선 삼부자가 영가를 불러냈다. 시골집이 아닌 도시의 밤이 조금은 어색했을까. 유세차를 읊어대는 남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요즘 세상에 제사가 말이 되냐며 불만이 많았던 아들은 웬일인지 잠잠하다. 분위기에 압도당했을까. 아버님의 진지한 태도와 정성 가득한 차례의식이 아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 걸까. 남편과 아들이 제관을 맡아 술잔을 올리고 내리며 의식에 따라 예를 올렸다. 아버님이 굽은 등으로 절을 하고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남편이 뒤를 이었다. 햇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한 아들의 몸이 미끄러지듯 예를 올렸다. 문지방을 태워 올려보내면서 제사는 끝이 났다.
앞치마를 둘러맨 아들은 뒷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님의 눈빛이 있는데 부담스러운 내가 한사코 말렸으나 아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설거지를 했다. 누구보다 엄마가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면서. 손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중국에서 사망한 공자가 왜 우리 집에 부활했느냐며 진보 이론을 펴던 아들이었다. 풍습과 관념에 사로잡힌 미풍양속이 구시대적이라며 설전을 벌이던 아들에게 매번 입을 다물어 버렸던 나였다.
사연을 담아내는 그릇.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쓰임이 다한 못이 박힌 채 구석에 방치된 폐목처럼 나도 가끔은 울지도 빼지도 못하고 꺽꺽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놋그릇이 부딪치는 작은 토닥거림이었다.
8할이 바람이었던 나의 감성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나 뭍을 꿈꾸는 아이, 지구는 나를 위해 자전과 공전을 해야 했다. 말갛게 떠오르는 해는 해 가루를 흩뿌리며 내 주변을 감돌고 달빛 젖은 감성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야 했다.
다소 엉뚱한 기운에 사로잡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아이를 어머니는 보듬어주지 못했다. 지나칠 정도의 관혼상제 풍습은 어머니를 옥죄고 딸들의 신파조 앞날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매번 기일이 가까워 오면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어깨에 부서지는 해 가루를 받으며 그릇을 닦곤 했다. 지푸라기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벗 삼아 그 옆에 쪼그려 앉은 단발머리 아이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우리 향이는 좋은 데 시집가서 이런 일 하지 마라. 조상 모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좋은 건만은 아니야. 나 혼자 고생으로 족해.”
그러면서도 물이 덜 닦인 흔적과 거무튀튀한 표면이 말끔하게 닦이면 어머니의 입가엔 밝은 미소가 번지곤 했다.
“하기 싫음 안 하면 되지.”
순간 시골에 계신 친할머니의 강건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벗어날 길은 공부밖에 없어. 열심히 해서 섬을 벗어나는 거야. 애써 등 돌리고 살았던 관혼상제의 올가미는 덜커덕 이른 결혼과 함께 다시 찾아들었다. 유년의 기억을 유폐시키듯 나라는 그릇도 함몰되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예쁜 접시에 담겨야 빛을 발하고 눈과 입이 즐거운 법이다. 5월의 햇살, 뭉게구름, 종달새의 노래, 유채꽃의 향이 담긴 나의 그릇은 그 누구도 매만져 주지 않았다. 가족의 조그만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예쁘게 담아내지도 못했다. 그저 부엌 찬장 한구석에 박혀 숨죽이며 살았다. 두 아이가 크고 나면 좀 달라지려나. 밥풀이 꼬깃꼬깃 뭉쳐있고 김칫국물이 배여 있는 허드레 막사발 같은 그릇이 될까 봐 혼자 숨죽였던 지난 시간들. 일 년에 몇 번 꺼내져 우아하게 대접받은 놋그릇에 비하면 나는 막사발 어디쯤에 서 있었던 것일까?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내는 파열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온 거실을 울렸다. 과일을 담아내려다 유달리 약한 나의 왼쪽 손목에서 꽃무늬 접시가 떨어져 나갔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어른들이 눈치챌까 봐 얼른 치운다는 게 깨진 조각을 집어버렸다.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줄줄 검지를 타고 내렸다. 멍하니 한참 들여다봤다. 거봐. 너 스스로 아끼지 않으니 쟤도 저렇게 떨어져 나가잖아. 순간 모든 게 싫어졌다. 내 앞에 놓인 이 상황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오랜 관성의 법칙에 이끌려 얼굴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철버덕 잘도 집안일을 해냈다. 그릇의 역할을 다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발적 복종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막사발 탓만 할 수도 없었다.
한 번 깨지면 존재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사기그릇에 비하면 놋그릇은 쟁여놓고 세상사에 잊어버리다 정해진 날이 찾아와 들여다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잊지 않고 찾아 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처럼. 이따금씩 뽀드득뽀드득 힘주어 닦아 주면 매끄러운 광택과 겉모습을 유지한다. 청아한 빛을 발하기도 하면서. 우아한 식탁을 위해서 혹은 나처럼 조상의 예를 갖추는 시간에 찾아드는 놋그릇은 옛사람들의 숨결과 향기를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다. 지켜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고 바람에 실려 아들에게도 전해질 것만 같았다.
볕 좋은 날 베란다에 앉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놋그릇을 하나하나 닦아 본다. 묵은 마음의 때를 벗겨내듯이, 요즘 들어 부쩍 소원해진 남편과의 추억을 되새겨 보며. 지나가던 조각구름이 빼꼼히 얼굴 내밀고 말간 해가 머물다 간다.
가끔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지인들에게 건네 볼 양이다.
삶에 놋그릇 하나의 무게를 더해 본다.
이제껏 예상치 못한 퍼펙트 스톰이 몰아쳤다. 왕관 모양의 이 바이러스는 평온하던 일상을 강제로 멈추게 했고 비자발적 격리는 피로도를 더해가며 햇빛과 바람, 공기를 숨겨버렸다.
들숨과 날숨을 잊어버린 날들이 계속되고 종일 방바닥을 지키고 앉았으니까 그동안 지내왔던 일들이 두서없이 천정에 둥둥 떠다녔다.
오래되어 빛바랜 앨범을 하나씩 들춰보니 어수룩한 한 아이가 유년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 시간의 앨범 속에 담긴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추억이란 기억의 빗장을 열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