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한겨레》 기자로 일하고 있다. 《웅크린 말들》(2017)을 썼다. 필명(이섶)으로 동화 《보이지 않는 이야기》(2011)와 《뜻을 세우면 길이 보여》(2005)를 냈다. 《침묵과 사랑》(2008)에 글을 보탰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표지 그림 조재석
노란집 주민 45명의 ‘가난의 경로’
이름나이방
창고00지하2호
김형순00지하3호
유경식63지하7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
고정국58101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
김공호61103호①
김택부76106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
황정희00107호
조만수59109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
작은교회00110·111호
박철관77201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
양진영60204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
김석필52211호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
장광준63308호①
일러두기
• 이 책은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 곳에서 벌어진 ‘강제퇴거 사건’을 토대로 했다.
• 2015년 4월부터 2016년 5월까지 《한겨레21》에 연재한 〈가난의 경로〉를 씨앗으로 삼았다. 연재 종료 뒤 ‘이후 4년’의 변화를 따라가며 시간을 쌓았다. 보태고 수정해 대부분 다시 썼다. 모두 5년 동안 마흔다섯 명의 이야기를 좇았다.
• 책에 등장하는 사람 이름은 전부 가명이다.
• 표기한 나이는 사건이 벌어진 2015년 당시를 기준으로 했다.
• 이 책은 이주의 경로를 추적하지만 이야기의 경로도 좇아간다. 많은 등장인물과 많은 사건으로 얽힌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주요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의 다음 등장 위치를 표시했다. 표시된 쪽수를 따라가면 해당 인물의 경로를 따라갈 수 있다.
•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기초로 쓰였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 길에 찍힌 그들의 흔적과 그들을 길에 뿌린 사건들이 모여 쫓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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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 ||
구 | ||
가난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엔가 모여 있다. 어떤 가난은 확산되지만 어떤 가난은 집중된다. 가난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지고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 가난의 이야기가 노란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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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 | ||
생 | ||
방문을 열자마자 죽음이 콸콸 쏟아졌다.
“헙.”
빛보다 냄새가 빨랐다. 유경식의 눈이 컴컴한 방 안에서 빛을 찾고 있을 때 냄새는 방문 밖으로 뛰쳐나와 그의 코로 달려들었다. 문틈으로 새던 냄새가 문턱을 넘어 복도 저편으로 범람했다.
유경식이 106호 방 안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켜자 지독한 죽음이 보였다. 생명은 없고 생명이 꺼진 흔적만 남은 방을 죽음이 차지하고 있었다. 유경식이 신발을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106호 남자가 들려나간 자리에서 그가 죽으며 토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살아 있을 때 그의 몸은 바짝 말라 있었다. 젓가락 같은 몸에서 그의 다리만 피 빤 거머리처럼 통통했다. 폐병이란 말이 있었다. 혼자 움직이지 못했던 그는 누운 채 대소변을 흘렸다.
사망 뒤 사나흘이 지나 발견됐을 때 남자의 몸은 방바닥에 눌어붙어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유경식이 남자의 마지막을 물걸레질했다.
물에 저항하던 피가 조금씩 닦여나갔다. 남자가 한 생을 마감하며 온몸을 쥐어짜 남긴 흔적이 동정 없이 지워졌다.
들춰 올린 이불 안엔 구더기가 엉겨 붙어 있었다.
냉기 어린 방바닥에서도 구더기는 생기 있게 움직였다. 거동이 불가능한 남자를 파먹으며 구더기는 반질반질하게 살이 올랐다. 소멸하는 인간을 먹고 태어난 생명들은 지독하고 치열하게 꿈틀거렸다. 유경식이 이불로 구더기를 둘둘 말아 건물 밖으로 내갔다.
죽음은 일상이었다.
누군가 혼자 죽어 발견되는 일이 일상인 건물이었다. 혼자 죽어 발견된 사람을 치우는 일도 혼자 죽는 일만큼이나 일상이었다.
“관리인이 나를 잘 본 거 아니겠어.”
죽음을 닦는 일이 성가신 뒤처리가 아니라 특별한 배려라고 유경식은 생각했다.
그는 고물을 주워 생계에 보태왔다. 죽은 자의 방을 치우고 망자들이 남긴 살림을 고물로 얻었다. 이 건물에서 유경식은 그때(2014년 3월)까지 여섯 개 방2의 죽음을 씻고 유품을 꺼내 팔았다.
106호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유경식이 걸레로 닦아 광을 냈다. 검정 매직으로 쓴 상품 목록을 건물 출입문 벽에 붙였다.
매물
벽면 TV19인치 1만 원
전기장판 1인용 1만 원
딸딸이(손수레)1만 원
작은 까쓰렌지 7000원
지하 7호에 문의
유경식이 건물을 들고 날 때마다 판자문이 꺼억꺼억 울었다.
문다워 문이라기보다 열고 닫는 기능을 하므로 문이었다. 4층짜리 건물에 현관이랄 게 없어 유경식이 판자를 잇고 경첩을 박아 문이라며 달았다.
문은 두 세계의 경계였다.
서로 다른 세계가 문으로 보이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대치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면 좁고 낡은 시멘트 계단이 위아래로 뻗었다. 도시의 화려를 묻히고 귀가한 주민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궁벽한 삶의 세계로 진입했다.
문밖으로 나온 106호 남자의 유품이 주민들의 선택을 받아 다시 문안으로 들어갔다.
유경식이 이불 더미를 내다 버릴 때 구더기 한 마리가 106호 방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를 지운 방 한가운데서 구더기가 뒤집힌 몸을 말았다. 죽은 남자의 몸에서 태어난 구더기는 남자가 흘린 이생의 마지막 한 톨이었다. 죽은 자는 방에서 치워졌어도 그가 남긴 이야기는 징그러운 구더기처럼 살아남았다.
그날3 이후 건물에 이야기 하나가 보태졌다.
청소될 뻔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거되지 않은 구더기처럼 꿈틀거렸다. ‘나를 벌레 취급하지 말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퇴치하려 해도 퇴치되지 않는 벌레처럼 그 집에 달라붙었다.
구더기가 말았다 펴는 힘으로 뒤집힌 몸을 바로잡았다.
몸을 감출 구석을 찾아 필사적으로 기었다. 그 남자와, 그 방과, 그 건물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차가운 방바닥과, 습한 벽과, 낡은 계단과, ‘그 사태’4 사이를 기어다니며 소리 없이 우글거렸다.
209호 나환수(➡이곳으로 이동)의 방은 유경식(➡이곳으로 이동)도 모르는 틈에 치워졌다.
12014년 3월.
23층 3개 방, 2층과 1층에서 1개 방씩, 지하 1개 방.
32015년 2월.
42015년 2월 시작된 강제퇴거 사태.
2 | ||
명 | ||
태 | ||
구겨진 세종대왕을 거칠한 손이 눌러 폈다.
211호 김석필•(52)이 봉투에 1만 원을 밀어넣었다. 209호 나환수•(74)에게 주려고 모셔둔 대왕님이었다. 김석필과 나환수는 동자동 9-2× 건물에서 210호를 사이에 끼고 살았다. 봉투 안으로 쫓겨 들어가는 용안(龍顔)에서 주름이 자욱했다.
좋은 여행 되십소사.
김석필이 나환수에게 두 손 모아 봉투를 건넸다. 그가 주는 여행경비를 나환수는 반기는 듯도 했고 외면하는 듯도 했다. 김석필이 무릎 꿇고 나환수에게 절했다. 머리 숙여 엎드린 김석필을 나환수가 고마워하는 듯도 했고 괘씸해하는 듯도 했다.
그날1 아침 김석필은 나환수의 방에서 냉장고를 꺼내 3만 원에 팔았다.
냉장고를 들어내는 김석필을 나환수는 말리지 못했다. 말린다고 말려질 김석필도 아니었다. 나환수나 김석필이나 마를 것이 남아 있는 인생들이 아니었다. 등이 배에 바짝 달라붙은 명태처럼 쥐어짜도 쥐어짜일 물기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환수 앞에서 대가리 날아간 명태가 포로 누워 하늘을 봤다.
무릎 털고 일어난 김석필이 나환수를 쳐다보며 입술을 닦았다.
김석필의 왼쪽 손목에서 알 굵은 염주가 팔찌처럼 달랑거렸다. 염원(念)하는 구슬(珠)들이 김석필의 시간을 얼마나 살펴줬는지 알의 크기가 설명해주진 않았다. 세종대왕 한 장으로 입을 닦는 김석필에게 나환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배, 사과, 대추, 밤이 명태포와 더불어 나환수 앞에서 홍동백서(紅東白西) 했다.
“내가 7만 원에 사서 방에 넣어준 냉장고라고.”
김석필(➡이곳으로 이동)이 목청을 갈았다. 공원에서 쩌렁대는 그의 목소리를 아무도 귀에 주워 담지 않았다.
“그걸 내가 3만 원에 판 게 잘못됐냐고.”
사람들이 던지지도 않는 눈치를 김석필이 굳세게 퉁겨냈다.
“노잣돈으로 1만 원이나 줬으면 된 거 아니냐고.”
마른 바람이 일어나 새꿈어린이공원을 훑었다.
바람에 차인 병풍이 나환수 뒤에서 사르르 떨었다. 뿌리 없는 병풍에 기대고 설 만큼 나환수는 야위어 가벼웠다. 병풍에 등을 받친 영정 안에서 나환수가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김석필의 봉투 위로 동네 주민들의 봉투가 더해졌다. 나환수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사람들이 공원 여기저기 앉아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흐, 허.”
술 냄새 끓어오르는 내장 안으로 김윤창(56)이 술을 흘려넣었다.
끓는 것은 끓인 것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살아온 시간이 싱겁고 밍밍해 속이 끓을 때마다 그는 끓여서 뽑아낸 알코올을 들이부어 간을 맞췄다. 간이 맞을수록 간이 망가진다는 사실을 김윤창은 술을 들이켜며 애써 모른 척했다.
“흐, 허.”
311호 김윤창은 아래층의 나환수를 몰랐다. 살았을 때 알지 못했던 나환수의 얼굴과 이름을 죽은 뒤에야 김윤창은 보고 들었다. 김윤창이 숟가락을 들어 육개장 국물을 떴다. 그는 자주 술로 밥을 대신했다. 첫 대면이 작별인 나환수 앞에서도 그는 육개장 국물로 밥을 넘기는 대신 소주를 삼켰다.
“갸는 왔어?”
양진영(60)이 김윤창(➡이곳으로 이동)에게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아직이요.”
잠깐 다녀오겠다며 나간 ‘갸’(➡이곳으로 이동)는 소식이 없었다.
음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었다. 배고프게 죽은 자가 차린 밥으로 산 자들이 고픈 배를 채웠다. 굶주린 비둘기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원 바닥에 부리를 찍었다. 꽃망울 하얗게 터뜨린 목련 아래서 고성의 욕설이 터졌다.
“절이나 하고 처먹어라.”
“씨발놈아, 처먹고 할란다.”
“돌아간 양반한테 인사나 하고 처먹어라.”
“자식아, 살았을 땐 아는 척도 안 하더만 왜 죽고 나서 예의고 지랄이고.”
양진영이 일어나서 말렸다.
“자자, 오늘 같은 날은 정숙합시다. 가시는 길 편안히 가시도록 합시다.”
양진영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싸움을 달랬다.
204호 양진영(➡이곳으로 이동)은 ‘우리동네 나눔이웃’이었다. 서울시가 위촉했다. ‘멋진 나눔이웃상’도 받았다. 서울시쪽방상담소2장이 줬다. 그는 봉사에서 보람을 찾으며 살았다.
촛대 없는 제사상이었다. 종이컵으로 바람을 막아 초에 불을 붙이고 상에 촛농을 떨어뜨려 초를 고정했다. 주민들이 고인에게 술잔을 올렸다.
봄이 오니 가싰소.
“재배(再拜).”
나환수를 아는 이웃들이 잔을 받아 술을 채웠다.
인자 날 따실 낀데 와 벌써 가시능교.
“재배.”
영정 앞에서 주민들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맘껏 피어보도 몬한 꽃들이 고마 대가리 쳐박대끼 확 떨어져부렀소.
“재배.”
나환수 옆엔 병풍에 기댄 남자 둘이 더 있었다.
“누구야?”
조문객 틈에서 머리 하얀 할머니가 남자들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어머.”
영정의 얼굴들을 알아본 할머니가 놀라 말을 끊었다.
세 개의 영정 안에서 흐린 얼굴들이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들 모두 영정으로 쓸 사진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빈방에서 발견된 주민등록증의 얼굴이 평생 가져본 적 없는 크기의 얼굴로 확대돼 상에 올랐다. 색의 입자들이 흩어진 얼굴들엔 초점이 없었다.
“어머어머.”
남자들 얼굴을 알아볼 때마다 할머니가 “어머”를 말했다.
이 동네에 살면서 영정의 흐린 얼굴들을 셀 수 없이 봐왔지만 그때마다 그는 놀랐다. 더는 죽음이 놀랍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을 알아보면 습관처럼 놀랐다. 죽음이 익숙한 동네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는 죽음만큼 쓸쓸한 죽음도 없었다. 아직 놀라워하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그가 먼저 간 사람을 애도하는 의식이었다.
“여기 공원에 앉아서 나랑 이야기하던 양반인데.”
할머니가 망연해했다.
“저 사람(9-2× 209호 나환수)은, 저 사람(5-× 214호 남자·72)도, 저 사람(9-×× 202호 남자·56)까지……”
‘저 사람들’의 얼굴은 살았을 때처럼 죽어서도 표정이 갈라졌다.
나환수 오른쪽 옆에 ‘5-× 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동네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됐다. 주민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조용히 지냈다. 깊은 밤 주먹으로 벽을 치는 소리가 옆방을 괴롭힌 날이 있었다. 주먹을 치지 않아 옆방이 고운 잠을 잔 지 이틀 만에 그는 발견됐다. 그 이틀 동안 그는 옆방의 잠길에 끼어들지 않고 혼자 죽어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아플 때 그는 때릴 것이 벽밖에 없었다. 밤처럼 검은 낯빛의 주검이 때려도 동요 없는 대낮의 건물 밖으로 들려나왔다. 딸들이 있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5-× 저 사람’ 오른쪽엔 ‘9-×× 저 사람’이 있었다. 동네에서 산 지 20여 년 됐다. 활동적이어서 몸이 안 좋을 때도 주민들과 어울렸다. 딸이 있었으나 각서3를 쓰고 아버지 인수를 거부했다. 딸에게 아버지는 잃어버린 물건만큼도 되찾아야 할 이름이 아니었다. 필요할 땐 찾아도 찾아지지 않던 아버지가 필요를 잊었을 때 주검으로 찾아왔다. 잃어버린 이름이 되길 선택했던 아버지는 딸에게도 복원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동네 주민들이 딸에게 연락해 장례를 위임받았다. 가족이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돼도 위임을 받지 못하면 이웃들은 장례를 치러주지 못했다. ‘저 사람들’ 중에서 ‘9-×× 저 사람’만 이웃들이 주관해 화장을 했다. 가족과 연락되지 않은 나환수와 ‘5-× 저 사람’은 병원 안치실을 떠나지 못했다.
두 달 동안 사망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공원에서 합동으로 추모했다.
누구의 가족도 찾아오지 않았다. 닷새 전에도 같은 자리에 파란 천막이 쳐졌다. 9-×× 건물 201호(남·80)의 빈소였다. 그는 군 제대 직후부터 50여 년을 동자동에서 살았다. 결혼하지 않아 가족이 없었고, 세 차례의 뇌경색 끝에 사망했다. 두 번째 뇌경색이 왔을 때 입원했고, 세 번째 찾아온 날 뇌가 멈췄다. ‘9-×× 저 사람’의 옆방에서 30년을 머물렀다. 이웃한 두 방이 며칠 간격으로 주인을 잃었다.
주민들이 익숙하고 덤덤하게 절차를 치렀다. 매번 똑같이 슬퍼하기에 이 동네에선 너무 많이 죽었다. 할머니가 부의 봉투 세 개에 2만 원씩을 넣었다.
“왜 그렇게 많이 하세요?”
임시 상주가 말렸다.
“내가 죄가 많아서.”
생전 알현하지 못한 수의 대왕이 나환수(➡이곳으로 이동)와 ‘저 사람들’ 앞에 쌓였다.
왕이 제거된 시대로 소환된 대왕은 자신의 혈통 대신 자신을 새긴 종이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세상을 봤다. 자신이 왕이어서 왕이 아니라 돈이어서 왕이란 사실을 명석한 대왕은 알 수 있었다. 왕은 부귀한 고관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에게나 지엄한 존재였음을 대왕은 돈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왕을 넘치도록 소유한 사람들에게 그는 종잇조각일 뿐이었고 왕을 갖지 못해 애달픈 사람들에게서나 그는 왕 대접을 받았다.
할머니에게 6만 원은 거금이었다. 한 달 수급비 48만 원의 10분의 1이 넘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치를 수 있는 이상의 ‘죗값’으로 영정 주인들을 떠나보냈다.
밖에서 타는 향불은 빨리 사위었다.
12015년 4월 1일.
2 서울시가 동자동 쪽방 주민들의 복지와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위탁 운영하는 기관. 쪽방이 많은 영등포와 남대문에서도 별도의 상담소가 운영된다.
3 고인의 시신과 시신 처리를 두고 어떤 권리나 문제 제기도 하지 않겠다는 각서.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관할 자치단체는 시신을 인수할 유족을 찾는다. 소재가 확인된 가족이 고인과의 관계 단절이나 경제 형편 등을 이유로 인수를 거부하면 각서를 쓰고 장례를 자치단체에 위임한다. 자치단체는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공문을 보내 장례대행을 요청하고 장례비용 50~70만 원을 입금한다. 병원은 입금된 금액에 맞춰 수의와 관 등을 써서 장례를 치른다. 화장대행업체가 화장한 뒤 무연고 납골묘에 안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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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 ||
연 | ||
생(生).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 형태를 갖춰 나온다는 것.
나환수•는 전라북도 무주군을 고향으로 삼아 세상에 왔다. 땅의 대부분을 산이 차지한 마을은 포근하면서도 막막했다. 그에게 생을 준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고, 가족을 이루고, 남겨준 것들이 모여 나환수의 형태를 이뤘다. 세상에 나왔을 때 나환수의 형태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생명 그것뿐이었다. 남녀는 부부가 되지 않아도 생을 잉태할 수 있었고, 부부가 부모 되길 원치 않아도 생을 세상에 밀어낼 수 있었다. 형태 갖출 것이 무엇 하나 없어도 생이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생의 곤란함이 있었다. 형태 없음도 형태의 일부였으므로 생과 형태는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못했다.
사(死).
생이 소멸한다는 것. 죽어 사라진다는 것.
나환수는 9-2×에 퇴거 통지1가 붙은 뒤 열흘 만에 사망했다. 췌장암이 복막에 전이됐다. 죽는 순간 죽을 수 있는 것도 죽은 자의 복이었다. 나환수가 숨을 멈췄을 때 그의 죽음은 시작됐다. 숨이 빠져나가고 남은 몸까지 소멸해야 끝나는 것이 죽음이었다. 죽음이 시작됐을 때 나환수의 형태는 그의 삶이 시작됐을 때처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죽음 그것뿐이었다. 나환수는 눈을 감은 뒤에도 65일 동안 죽음의 절차를 마치지 못했다.
죽은 나환수가 죽음을 끝낼 때까지 찾아오는 가족은 없었다. 원치 않아도 맺어지고 원해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 가족이었으나 있어도 없는 것 또한 가족이었다. 그가 사망한 병원은 구청에 ‘가족 찾기’를 의뢰했다. 구청은 나환수에게 친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구청이 죽은 아버지를 데려가라는 우편물을 아들에게 보냈다. 우편물은 반송됐다. 거주지가 바뀐 것 같다고 구청 담당자는 판단했다. 대전에 사는 조카와 무주에 사는 육촌 동생에겐 전화가 닿았다. 시신 인수를 상의해보겠다던 그들은 연락을 끊었다.
구청은 장례대행을 맡긴 업체에 화장 요청 공문을 보냈다. 구청은 나환수를 무연고 사체로 최종 분류2하며 자신의 역할을 끝냈다. 화장 요청 하루 전 나환수의 시신은 찾아가지 않는 분실물처럼 공고3됐다.
사망 35일 뒤4 나환수는 불 타 없어졌다. 장례대행업체가 서울시립승화원(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화장해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집(파주시 용미리)에 안치했다. 사망 두 달이 지나서야 나환수는 한 줌 뼛가루가 돼 육신의 무게를 떨어낼 수 있었다. 김석필의 노잣돈을 받고도 20일이 더 지나서였다. 나환수의 마지막은 그렇게 ‘처리’됐다. 그의 죽음도 비로소 끝났다.
삶.
살아간다는 것. 생과 사 사이를 견뎌낸다는 것.
나환수는 209호에서 5년을 살았다.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것이 삶이었지만 뜻대로 살아낼 수 없는 것도 삶이었다.
장례 이틀 전 김석필•이 나환수의 방 자물쇠를 땄다. 건물 관리인5은 나환수의 방 열쇠를 김석필에게 맡기며 짐 정리를 시켰다.
김석필과 나환수 방 사이의 210호 문도 잠겨 있었다.
방주인 최중호(59)가 있었다면 관리인은 그에게 열쇠를 맡겼을지도 몰랐다. 나환수가 죽었을 때 최중호(➡이곳으로 이동)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폭행 시비로 50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고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벌금 낼 돈이 없을 때마다 그는 교도소에서 하루 5만 원짜리 노역을 살았다.
지난겨울 최중호가 구치소에서 201호 박철관(77)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리인 앞으로 쓴 편지를 동봉했다. 박철관이 관리인에게 전한 편지에서 최중호는 “내년(2015년)2월이면 출소하니 방을 빼지 말라”고 청했다. 그는 4월이 됐는데도 교도소 안에 있었다. “날짜 계산을 하면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 노역이 아니라 다른 일로 들어간 거 아닌가 모르겠다”고 김석필은 추리했다. 관리인은 최중호의 자물쇠를 끊고 새 자물쇠를 달았다.
최중호가 210호에 입주하기 전 그 방에 살던 남자도 혼자 죽어 발견됐다.
남자는 옆방 나환수와 자주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의 술판이 박철관에겐 고역이었다. 그때 박철관•은 나환수의 방과 복도를 끼고 마주보는 206호에 살았다. “209호 늙은 놈”과 “210호 젊은 놈”의 술장단에 질린 박철관은 복도 끝방(201호)이 비자 곧바로 짐을 쌌다. 210호 남자의 주검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박철관이었다.
젊은 놈이 “아침 늦게까지 처자고” 있었다. 꼴 보기 싫어 “빨리 안 일어나냐”고 소리를 질렀다. 저녁에 봐도 “여전히 처자고” 있었다. “아직까지 디비 자냐”면서도 “약이라도 사다 주랴” 박철관이 물었다. 젊은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문을 열었는데 “씨발 그대로”였다. “등골이 싸늘해져서” 경찰을 불렀다.
나환수가 정리하지 못한 생의 부스러기들이 그의 빈방에서 차갑게 얼어 있었다.
“날마다 둘이 붙어서 술 처먹더니만. 젊은 놈이 암으로 먼저 가니까 이제 늙은 놈까지 암으로 따라가뿌네.”
나환수의 방을 들여다보며 박철관이 혀를 찼다.
“뭐 먹고 살았노.”
작은 플라스틱 통에 쌀이 한 움큼 남아 있었다. 반찬으로 먹었을 멸치들이 마른 비린내를 풍겼다. 한 뼘 방을 가로지른 빨랫줄 위에서 속옷과 양말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렸다. 열 가지 넘는 약의 처방전이 낡은 서랍 안에 가득했다. 나환수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모든 것은 헌 것이었다. 뜯지 않은 참치캔 한 개와 돼지고기 장조림 한 캔만 새 것이었다. 살이 휜 채로 흐린 날을 받쳐온 우산과, 가라앉는 몸을 지탱해온 나무 지팡이와, 적막한 방에 소리를 넣어준 낡은 텔레비전과, 짠 인생에 짠맛만 더한 작은 소금통과, 지난 시간을 제대로 빨아주지 않는 세탁 세제가, 어디선가 애국할 때마다 흔들었을 손태극기와 뭉쳐져 냉장고 없는 방에서 눅눅했다.
방문 위 때 묻은 벽지에서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문장 하나가 선명했다.
“이○○씨(기초생활 수급자) 다달이 방값 줌.”
문장 밑엔 주소와 전화번호 몇 개가 월세 납부를 보증하는 신원 증명처럼 적혀 있었다.
매달 방값을 냈다는 증거를 이○○는 그렇게라도 남겨야 했을 것이었다. 더는 9-2×에 살지 않는 그가 언제까지 나환수의 방에 의탁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방을 나설 때의 생사 여부도 주민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9-2×의 임대 영업이 시작된 뒤 몇 명이 그 방을 살아서 떠났고 몇 명이 죽어나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서 스스로 짐을 쌌다고 축복일 리 없었고, 죽어서 짐처럼 들려나갔다고 저주인 것도 아니었다. 그 건물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리 두껍지 않았다.
떼지 못한 나환수의 달력이 2014년 12월에 멈춰 있었다. 나환수가 209호에 남기고 간 시간에서 빠져나간 것은 나환수뿐이었다. 그 시간에서 나환수를 빼내 병원에 데려간 것도 박철관이었다.
“그렇게 마시면 뒈진다”며 박철관이 나환수의 가방을 쌌다. 입원시킨 뒤 열흘 만에 찾아간 병실에 나환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그의 병실이 바뀌어 있었다. 토요일 오후 그는 세 번째 옮겨진 병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박철관이 손을 잡았으나 나환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때가 된 것 같다고 박철관은 짐작했다. 이틀 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나환수는 또 없었다.
“이놈 어디 갔어요?”
옆 침상 환자에게 물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환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어제 죽어서 내려갔어요.”
인연.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 사람이나 사물과 연결돼 연줄을 갖는다는 것.
모든 관계가 연줄이 되고 인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죽호도(竹虎圖)가 화려했다. 대나무와 호랑이가 201호 박철관의 방을 곧고 용맹스럽게 장식했다. 나환수가 주워다 준 고물 액자들이 “뭣도 없는” 그의 방을 “있어 보이게” 했다.
한밤중에 방을 나선 나환수는 서울역과 명동과 남대문을 돌아 충무로까지 다니며 종이상자와 플라스틱 병을 주웠다. 깜깜한 거리에서 녹슨 리어카를 밀며 나환수는 가난한 생활을 끌었다.
고물은 가난한 자들의 각축장이었다.
운때가 어긋나면 리어카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하나라도 더 주우려면 더 먼 곳까지 더 오랫동안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밤새 고물을 두고 경쟁한 노인들이 뿌연 새벽이 열릴 즈음 고물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고층빌딩 주차장을 쉴 새 없이 들고 나는 승용차들처럼 고물상 앞에서 리어카들이 엉켜 ‘교통 혼잡’을 빚었다. 리어카를 고물상 앞에 세우고 꾸벅꾸벅 졸던 나환수도 문이 열리자마자 고물을 밀어넣고 무게를 달아 팔았다.
“새벽부터 댕기면서 좆같이 벌면 뭐 하냐고. 그 돈으로 술 처먹고 죽을 거.”
죽은 나환수에게 말을 걸며 박철관이 액자를 닦았다.
죽어도 좋을 만큼 술이 좋아 나환수가 술에 잠겨 죽은 것은 아니었다. 고물을 줍기 전 나환수는 전국을 다니며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부러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환수가 맺은 인연의 선들은 휴대전화가 필요할 만큼 팽팽하지 않았다.
나환수가 몇 달 만에 209호로 돌아온 날이 있었다.
그에게 닿지 못한 소식이 다급할 것 없다는 듯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활지원 기관으로 전달된 아들의 사망 소식을 그는 한 해가 지나서야 듣게 됐다. 아들은 어느 스키장 부근에서 얼어죽어 발견됐다고 했다. 육촌 동생이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고 나환수는 박철관에게 술 취해 말했다. 자살이었을 것이라고 박철관은 나환수 아들의 죽음을 짐작했다. 구청이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하라’는 우편물을 발송했을 때 편지의 수신인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뒤부터 나환수의 술잔이 깊어졌다.
“양씨, 환청이 들려.”
암세포에 몸을 점령당한 나환수는 헛것을 보고 들었다.
“밥이 안 먹혀. 내가 안 먹혀. 속에서 밥을 안 받아. 밥이 속을 안 받아.”
그의 말은 뜻이 통했다 안 통했다 했다. 그는 말을 먹기도 했고 말에 먹히기도 했다.
우리동네 나눔이웃 양진영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병문안을 다녔다. “칠팔만 원을 써가며” 죽과 음료수를 사들고 갔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나환수는 “이젠 오지 말라”고 했다. “앞으로는 절대 오지 말라”고 했다. 오지 말라니 가지 않는 것으로 양진영은 나환수의 뜻을 따랐다. 병원에 다녀온 박철관(➡이곳으로 이동)이 “일요일에 가버렸다”며 나환수의 죽음을 전했다.
가려고 그랬을까. 오지 말라는 나환수의 말이 섭섭했는데, 지켜보는 사람 없이 홀로 떠난 그의 배려가 양진영(➡이곳으로 이동)은 안쓰러웠다.
무연(無緣).
맺어지고 연결된 사람이 없다는 것. 죽어서도 죽음을 기릴 인연이 없다는 것.
무연의 생김새는 인연을 맺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연으로부터 도피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확인됐다.
209호 선반 위에서 나환수(➡이곳으로 이동)의 길마다 함께했을 검은색 여행가방이 핼쑥했다. 9-2×에 사는 사람들에겐 가방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의 짐이 살림의 전부였다. 가방에 담길 만큼만 유지돼온 ‘나환수의 양’을 박철관이 가늠했다.
“저 가방 하나 들고 들어와서 저 가방 하나 들고 나가는 거야. 여기 있는 짐 다 필요 없는 거야. 가져갈 수 없으니까 그냥 버리고 가는 거야. 살아서 나갈 때도 그렇게 나가고 죽어서 나갈 때도 그렇게 가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는 거야.”
김석필(➡이곳으로 이동)이 나환수의 짐들을 건물 밖으로 내렸다.
살림을 살 수 없었던 나환수의 살림살이가 고물로 부려졌다. 고물 하며 주워온 나환수의 밥솥, 냄비, 벽시계, 플라스틱 수납장이 고물 줍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졌다. 나환수는 인연의 결과로 왔으나 단절된 인연을 뒤로하고 갔다. 걸레질로도 닦이지 않을 나환수의 자국들만 209호에 묻어 있었다.
첨단과 수직의 고층빌딩 아래에서 낡았고, 삭았고, 헐었다. 벌레가 파먹은 듯한 지구의 후미진 땅에서 동자동이 도시의 뒷면을 구성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의 주거공간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가장 남루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죽음과 동거했다. 그들은 한 건물에서 살았지만 남모르게 죽었다.
꽃 피는 계절이 올 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우수수 졌다.6
겨울 동안 웅크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펼 때쯤 겨울 동안 웅크렸던 긴장을 풀고 그들은 세상을 떴다. 환절기마다 죽음의 밀도가 높아졌다. 저승사자가 실적을 채우지 못할 때마다 들러 머리수를 흥정하는 듯싶었다. 그들에게 계절이 바뀌는 시간은 살아남아야 하는 나날이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죽음들이 무연을 확인하며 계속됐다. 죽음 뒤엔 유경식(➡이곳으로 이동)이 매직으로 쓴 ‘매물’ 광고가 벽에 붙었다.
12015년 2월 5일 9-2× 방마다 붙은 노란색 퇴거 통지.
2 서울 중구청은 “14일 안에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연고 처리”한다고 설명했다.
3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 및 시행령 제9조, 시행규칙 제4조 규정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뒤 인적 사항과 사망 경위, 안장지 등을 공고한다. 전국 단위 일간신문 두 곳, 또는 자치단체 홈페이지와 하나 이상의 일간신문을 통해 알려야 한다. 지자체는 시신을 10년 동안 매장하거나 화장한 뒤 봉안할 의무를 지닌다. 10년 뒤엔 일정한 장소에 집단 매장하거나 자연장(10년 전 화장하지 않고 봉안됐던 시신의 경우 화장)한다.
42015년 4월 20일 오후 2시.
5 관리인은 9-2×에서 가장 큰 방(405호)을 썼다. 동자동 밖에 있는 집과 405호를 오가며 지냈다. 입주민과 건물주 사이에서 임차인 수를 속여 임대료 차액을 가로챈다는 의심을 받았다. 강제퇴거가 시작된 뒤 임대료 착복 의혹이 건물주에게 전해졌다. 관리인 직을 잃고 동네를 떠났다.
6 동자동사랑방과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이 확인한 2014년 사망자 수만 14명이었다. 14명 중 절반인 7명이 ‘고독사’(가족의 시신 인수 거부로 4명 이상이 무연고 처리)했다.
4 | ||
아 | ||
멘 | ||
해진 소파 하나가 나타났다.
김석필(➡이곳으로 이동)이 주워온 덩치 큰 소파가 건물 입구에 바리케이드처럼 놓였다. 방마다 퇴거 통보가 붙은 직후였다. 주민 몇 명이 소파에 모여 앉아 햇볕을 쬐고 망도 봤다. 김석필은 전투용 작대기인지 호신용 몽둥이인지 모를 나무막대기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지하4호 이황수(63)가 건물 밖으로 걸어나왔다.
양진영(➡이곳으로 이동)이 소파에서 일어나 부축했다. 중증의 관절염을 앓는 이황수(➡이곳으로 이동)는 걸음마다 10센티미터씩 전진했다.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의 걸음걸이는 발바닥 전체로 지면을 끌었다. 관절염 없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타박타박하는 동안 그의 보폭은 셀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져 슥, 슥, 슥, 슥 했다.
그는 밥때마다 아픈 다리에 몸을 얹고 무료 급식소를 오갔다.
밥은 평생 그가 온 힘을 짜내야 닿을 수 있는 물질이었다. 슥, 슥, 슥, 슥,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쓸며 이황수는 다만 10센티미터씩 밥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10센티미터씩 이동해 수백 미터 저편의 밥을 모신 뒤 10센티미터씩 이동해 수백 미터 이편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도 자신에게 닥친 한 끼를 밀어내기 위해 그는 10센티미터씩의 땅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슥, 10센티미터.
“반년 전이었제.”
공기가 더위를 탈탈 털어내던 가을날1의 일이었다.
슥슥, 30센티미터.
“그러니까 금요일 밤이었다고.”
방을 채웠던 열기가 빠지고 으슬으슬한 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슥슥, 50센티미터.
“그 인간(56)이 찾아왔제.”
으슬한 밤공기를 묻힌 ‘그 인간’이 감기 기운으로 뒤채던 이황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슥, 60센티미터.
“며칠만 재워달라 하등마.”
이황수는 그 인간을 산에서 처음 만났다. 오래전 그와 그 인간을 품어준 곳은 산밖에 없었다.
슥슥슥, 90센티미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에도 거기,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겨울에도 거기, 거기 나무 밑에서 이불만 덮고 잤거등. 우산으로 머리만 가리고설랑.”
거기, 사직공원(서울 종로구 사직동) 뒷산에서 이황수는 10년을 노숙했다. 그 인간은 이황수처럼 산 위로 올라가는 대신 거기, 산 아래 공원 정자에서 잤다.
슥슥, 110센티미터.
“그러다 산에서 내려와서 나는 이리로 왔고 그 인간은 남대문 쪽 고시원으로 갔는데.”
산을 떠난 이황수가 서울역까지 내려와 누울 자리를 찾았을 때 역에서 노숙하고 있던 그 인간과 재회했다. 거리와 고시원과 여인숙을 그들은 번갈아 들고 났다.
슥, 120센티미터.
“방값을 못 내 고시원에서 쫓겨났다대.”
그날 이황수를 찾아온 그 인간은 하룻밤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슥, 130센티미터.
“방을 구할 때까지 며칠만 재워달라더라고.”
슥슥, 150센티미터.
“갈 데가 없다믄서.”
이황수도 그 인간도 환대받는 인생이 아니었다. 그들은 반겨주는 사람을 가져본 적 없이 살아왔다.
슥슥, 170센티미터.
“밤새 술 먹고 담배만 피워싸터니.”
그 인간 때문에 두 배로 좁아진 방에서 이황수는 찌부러진 잠을 제대로 붙들지 못했다.
슥슥, 190센티미터.
“토요일 아침에 밥 먹으러 가자니께 어지러워서 못 가겠다더라고.”
눈을 뜨고부터 이황수는 몸이 무거웠다. 눌러앉은 그 인간을 따라 감기까지 눌러앉았나 싶었다. 그 인간을 방에 두고 이황수가 밥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갔다.
슥, 슥, 슥, 슥…… 200센티미터, 210센티미터, 220센티미터, 230센티미터……
셀 수 없을 만큼의 10센티미터들과 싸우며 밥에 닿은 이황수가 셀 수 없을 만큼의 10센티미터들을 되짚어 방으로 다시 슥, 슥, 슥, 슥 했다.
“방문을 여니께 그때까지 엎어져 있어.”
계속 어지럽냐고 물어도 그 인간은 반응하지 않았다.
“덩치도 큰 인간이 꿈쩍을 안 했응께.”
이황수의 손끝에 닿은 그 인간은 체온을 잃고 차가웠다.
“밥이라도 한술 뜨고 갈 일이제.”
이황수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전봇대에 얼마간 기대 있었다.
“112로 전화해서 ‘사람이 죽었소’ 했지.”
방문을 다시 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위암 3기였다대.”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건물 밖에 앉아 이황수는 하늘을 봤다.
“늘 보던 대로 특별할 것 없는 하늘이었제.”
이황수보다 여덟 살이 어렸던 그 인간은 이황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경찰서 따라가서 물어보는 대로 답혔네.”
고향이 예산(충남)이었다고 기억했을 뿐 이황수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딱히 상심이 크진 않았어.”
그 인간은 “성질이 안 좋았고 거짓말도 자주” 했다. “예배를 본 교회에서 가끔 쌀을 훔쳐” 허기를 달랬다. 이황수가 아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그다음은 몰르지.”
그 인간이 방에서 실려나간 이후를 이황수는 듣지 못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도 인연이라면 무연보다 나은 것인지 이황수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슥, 10센티미터.
늘 보던 대로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슥, 10센티미터.
늘 하던 대로 이황수는 땅을 끌어당겼다.
슥, 10센티미터.
늘 그랬듯 말할 수 없이 더딘 길이었다.
슥, 슥, 슥, 슥……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쌓여도 쌓이지 않는 길이였고, 나아가도 나아가지 않는 길이였다. 좁혀도 좁혀지지 않는 배고픔의 길이가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10센티미터 너머에서 가물가물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 인간도 나환수처럼 무연고 시신으로 화장됐다.
나환수(➡이곳으로 이동)와 두 남자의 추모제를 박철관이 2층에서 복도 창문으로 내려다봤다.
영정들을 흔들던 바람이 창문으로 넘어와 복도를 쓸었다. 바닥에서 날아오른 먼지 알갱이들을 햇빛이 투명하게 잡아챘다.
박철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참았다. 주검과 영정을 만지며 생계를 꾸리던 그가 누군가의 죽음에 얽혀 교도소에서 보냈던 시간(➡이곳으로 이동)은 지금도 삼킬 수 없는 먼지처럼 그의 기억에서 떠다녔다. 그의 남다른 청결은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의 먼지 탓인지도 몰랐다.
그의 방은 9-2×에서도 정리정돈으로 유명했다.
나환수의 술주정을 피해 옮겨온 201호는 건물 외벽과 맞닿아 결로가 심했다. 3층에서 타고 내려온 물까지 천장을 적셨다. 박철관은 시멘트를 개어 갈라진 벽을 바르고 습기 머금은 장판을 걷어내 새로 깔았다. 벽지를 사다 도배도 다시 했다. “대비하는 것”이었다.
9-2×의 방 대부분은 더러웠다. 더럽다기보다 정리가 안 돼 있었고, 정리가 안 돼 있다기보다 정리가 불가능했다.
9-2×의 방들은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찼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넣어도 흘러넘쳤다. 그들의 방은 밥알을 욱여넣는 순간 허기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김밥 같았다. ‘죽어도 깨끗이 죽는 것’은 박철관이 만나는 사람마다 전하는 설법 같았다.
“오만 거 주워오지들 말어. 방에 쌓이면 냄새나잖아. 옷도 좀 빨어들 입어. 몸에 냄새 풀풀 나면 죽고 나서도 얼마나 창피해. 깨끗하게 죽어야 우리 치우는 사람들한테도 덜 부끄럽지.”
방 더러운 사람들이 방 깨끗한 박철관 앞에서 말이 없었다.
“여기서 몇 년을 살아도 빗자루 한번 드는 놈들이 없어.”
자기 방을 쓸고 나온 박철관이 2층 복도를 쓸고 닦았다.
“아쉬운 놈이 치워야지 어쩔 거여.”
2층 수도가 고장 나도 박철관이 나서서 고쳤다. 건물주가 뭘 고쳐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관리인은 뭘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은 겁나는 게 없다. 죽으면 죽는 거지 죽는 게 뭐가 무섭나. 단지 방 안에서 죽고 싶을 뿐이다. 평생 거리잠을 자면서 얼어죽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죽어도 그렇게 죽고 싶진 않은 것이다. 치매라도 걸리면 똥오줌은 누가 받아주나. 그전에 대가리 처박고 죽을 것이다. 죽을 때가 됐는데도 뜻대로 못 죽는 게 무서운 것이다. 그런 것이다.
박철관은 쓸고 닦을 때마다 다짐했다.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데 뭐라? 나가라고? 나가서 죽으라고?”
9-2× 방문마다 일제히 노란 딱지가 붙었다.
건물주가 관리인에게 부착을 지시했다. 나환수가 사망하기 열흘 전이었다. 그가 죽은 날 주민 누군가가 방문에서 딱지를 떼냈다. 종이에 매직펜으로 쓴 두 글자를 딱지 자리에 붙였다.
“근조.”
2층 복도 창문에 팔을 괸 박철관의 눈에 목사가 보였다.
“우리한테서 뭘 얻어먹겠다고.”
추모제 직후 도착한 목사가 영정을 치운 공원에서 설교했다. 의자에 띄엄띄엄 앉은 주민들이 목사를 따라 찬송가를 불렀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으세요.”
9-2× 건물 너머로 해가 기울었다.
“작고 더러운 집에 산다고 영원토록 그렇게 사는 건 아니에요.”
길 건너 고층의 빌딩들이 키 작은 9-2×를 굽어봤다.
“천국에 크고 좋은 집을 예비해두셨다고 믿으세요.”
빌딩의 눈높이에서 동자동의 낮은 건물들은 움푹 파인 골짜기처럼 보였다.
“지금을 감사하며 사세요.”
목사의 입을 떠난 ‘복음’이 마이크로 확성돼 골목을 돌아다녔다.
“감사할 게 얼마나 많아요.”
9-2× 옥상에서 위성안테나 몇 개가 들리지 않는 신의 뜻을 들으려는 콩나물 대가리처럼 납작한 머리를 쳐들었다.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의자에 앉아 졸던 주민들이 외쳤다.
“아멘.”
12014년 10월.
5 | ||
의 | ||
사 | ||
201호 박철관•
1938년 황해도 해주 출생
16년 거주1
폭탄처럼 펑 터졌다.
전쟁으로 터진 내 삶이 그날 다시 터졌다.
어린이날이었다.
예정대로 창경원2에 갔다면 그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남자가 넘어져 죽었다.
터져버린 내 생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나온 208호 이기방•(60)이 다리를 절룩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저 인간도 오래 살긴 힘들겠어.
방문을 열어젖힌 채 팔을 괴고 누워 있는데 눈앞으로 이기방이 천천히 지나갔다.
아직은 멀쩡한 듯 돌아다니는 그를 볼 때마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걸었다. 오랫동안 인간의 죽음을 수습해온 나는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누군가의 곁에 다가온 죽음을 직감할 때가 있었다. 한 건물에 살아도 이기방과 말을 섞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보다 먼저 그 방에 살던 한 인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야 이 자식아,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그따구로 자빠져 있어.”
내가 타박하자 백장호가 얼굴에 찬웃음을 띄우며 대꾸했다.
“내 병은 내가 아요.”
미친놈.
“이놈아, 그렇게 잘 알아서 이리 질질 싸냐.”
백장호가 똥을 흘렸다.
항문 조일 힘이 풀려 누운 채로 내보냈다. 창자 안에 담아둘 때나 고상하게 변(便)이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내보내면 몸에 떡칠하는 오물일 뿐이었다. 아무리 정갈한 것이라도 붙들어야 할 때 붙들지 못하면 냄새나고 추한 것이 되고 말았다.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죽을 때라도 깨끗하게 죽어야 죽음이 덜 가여울 텐데 여기 사는 인간 치고 그 이치를 아는 놈이 드물었다.
백장호는 종로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같이 노숙했던 인간이었다. 내가 거리잠을 끝내고 9-2×에 와보니 아래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권해서 9-2×로 옮겨왔다.
인연이 꼬이면 지랄이 됐다.
씨발씨발 하면서 사흘 동안 백장호의 똥을 받아냈다.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입원시켰더니 이미 치료가 힘든 지경이라고 했다. 병원 몇 곳을 떠돌다 백장호는 죽었다.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화장장 들어가는 데 한 달 넘게 걸렸다. 그가 죽어나간 방에 들어와 짐을 푼 사람이 이기방(➡이곳으로 이동)이었다.
내가 한때 장의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왜 죽어가는 인간들마다 눈앞에 꼬이는지 내 인생도 엿 같았다.
죽음을 무시하던 백장호를 병원에 데려간 것도, 죽음이 가까운 209호 나환수를 응급실에 입원시킨 것도, 혼자 죽은 210호 ‘젊은 놈’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것도, 모두 나였다. 문 앞에 신발이 있는데도 하루이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방문을 두드렸다.
혼자 죽는 것은 비통한 일이었다.
지켜보는 사람 없이 숨을 꼴딱이며 넘어가는 이승의 마지막 고갯길은 고통이었다. 죽음에 익숙한 나는 죽음이 두렵진 않았으나 거리에서의 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반드시 내 방에서 죽을 것이었다. 언제 죽어 어떻게 발견돼도 창피하지 않도록 나는 내 작고 곰팡이 슨 방을 틈날 때마다 쓸고 닦았다.
평생 거리의 죽음을 보며 살아왔다.
전쟁이 사람을 죽여 거리에 내다 널었다.
찾아갈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는 명절이 돌아오면 나는 임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봤다. 보기만 할 뿐 밟지는 못하는 땅, 눈길은 닿아도 발길은 닿지 못하는 땅, 그 어딘가에 황해도 해주 내 고향이 있었다.
육이오가 터지자 열두 살이던 나도 펑 터졌다.
“너라도 배를 타라.”
“할아버지는요?”
“나는 교회를 지킬 거다.”
“엄마는요?”
“네 어미는 집안을 지킬 거다.”
“저만요?”
“네 애비는 몰라도 너는 살아남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 간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때 징집돼 행방불명됐다. 할아버지는 목사였다. 전쟁이 났을 때 교회를 버릴 수 없다며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집에 남겼다. 할아버지는 교인이었던 내 소학교 담임 여선생님한테 장손인 나를 맡겼다. 잠깐 피한 뒤 전쟁이 수그러들면 다시 데려와달라고 할아버지는 부탁했다. 엄마와 떨어질 수 없다며 혼자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야.”
나를 배에 태우고 엄마는 흥남부두3에 주저앉아 울었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엄마는 다시 만날 것이란 말을 주문처럼 외웠는지 몰랐다. ‘금방’이 한 해 두 해 쌓여 70여 년이 됐다. 평생 할아버지를 원망했으나 지금은 할아버지를 원망해온 시간조차 원망스러웠다.
모두 배에 타려 했어도 모두 배를 탈 수 있었을진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정말 자신의 운명을 피란 대신 하늘의 손에 맡길 생각이었는지, 할아버지가 정말 엄마를 나와 보내는 대신 가문에 묶어둘 생각이었는지, 이젠 모르겠다. 모두 배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에 나 하나라도 살릴 생각이었는지, 가족 모두 배에 타려다 실패하고 나 혼자만 간신히 태운 것인지, 어떤 기억이 맞는 것인지도 이젠 뚜렷하지 않았다.
보글보글 끓는 개미굴의 개미보다 수만 명으로 바글거리는 흥남부두의 사람이 많았다.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는 유엔군들과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공산당에게 잡혀 죽는다는 공포에 싸인 피란민들로 부두는 흘러넘쳤다.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부두로 사람들의 필사적인 행렬이 밀려들었다. 정원의 열 배 넘는 사람들을 태운 배가 새까맸다. 피란민들의 까만 머리로 배가 터질 듯했다.
“엄마.”
우글거리는 피란민들이 엄마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잡아먹었다.
상륙선(LST·LandingShipTank)의 앞문이 닫히자 피란민들이 문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배와 문 사이에 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손을 놓쳐 바다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태워주길 기대하며 허리까지 차는 얼음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바다에선 추격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을 떼어내느라 유엔군이 함포를 쏘아댔다.
“엄마.”
매년 통일전망대에서 망향제를 지낼 때마다 불렀다. 배를 탄 뒤 펼쳐질 내 인생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절대 나 혼자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호떡을 들고 뛰면 욕설이 날아왔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저마다 들고 뛰어야 했다. 누구는 호떡을 들고 뛰고, 누구는 옥수수를 들고 뛸 때, 누구는 인간다움을 놓고 뛰었다. 곳곳에서 날아온 갖가지 욕이 하루 종일 뒤통수에 붙어 따라다녔다. 산다는 것은 때로 서로의 내장까지 털어먹는 일이었다.
선생님과 배를 타고 가닿은 부산도 배를 열고 새빨간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와 선생님은 한동안 영도다리4 밑에서 살았다. 영도의 산들부터 새빨갰다.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이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어린 풀까지 모두 캐먹어 녹색이라곤 없었다.
새빨간 생선 내장을 주워먹었다.
새벽이 되면 깡통을 들고 자갈치시장으로 갔다. 버려진 물고기 대가리와 창자를 주워와 끓여먹었다.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배고픔을 이길 순 없었다. 사람들이 새빨간 바닥을 드러냈으나 새빨간 뻔뻔함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해주에서 선생님을 했고……
나와 선생님은 국제시장5에서 헤어졌다. 내가 밥을 얻으러 갔다 어긋난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선생님을 잃어버린 것인지 선생님이 나를 버린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쪽지를 붙여놨지만 찾지 못했다. 영도다리엔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찾는 쪽지들로 가득했다. 한 끼 밥을 해결한 사람들이 짬이 날 때마다 다리를 서성이며 가족을 수소문했다.
투두둑 터졌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실밥은 기워지지 않고 계속 터졌다. 노숙과 구걸과 도둑질로 삶을 잇다 보면 실 터진 누더기 옷 사이에서 추위에 쓸린 마음이 붉게 텄다. 강제로 뽑힌 창자처럼 상한 마음에서 비린내가 났다.
부산에서 몇 년을 빌어먹은 뒤 서울 가는 석탄 운반 열차에 몰래 올라탔다. 서울에 도착한 뒤 무너지지 않은 건물에 기어들어가 잤다. 빈집마다 다니며 쥐가 갉아먹고 남은 좁쌀을 주워먹고 이가 드글드글 끓는 옷을 주워 입었다. 며칠 입은 옷을 불에 태우면 타닥타닥 이 타는 소리가 났다. 청계천 다리 밑으로 갔다. 나처럼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그들로부터 소리 지르는 법을 배웠다.
“구두 따앆어. 구두 따앆어.”
구두닦이 통을 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외쳤다. 구두를 닦아 번 돈과 꼬지6로 얻은 돈으로 꿀꿀이죽7을 사먹었다.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를 하다 ‘거지 단속’에 걸렸다. 인천 송도에 있는 보육원으로 보내져 4년을 살았다.
보육원은 성인이 되면 내보냈다. 열아홉 살에 보육원을 나와 인천 중앙동의 한 극장 앞에서 다시 구두를 닦았다. 잠은 인근 성당 앞에서 잤다.
겨울이 오면 나는 두더지가 됐다.
사람들이 점령한 땅 위는 너무 위험해 돌멩이 헤쳐 땅속으로 파고드는 두더지. 바람 부는 보도블록은 너무 차가워 얼음 서걱이는 흙 안에서 온기를 얻는 두더지.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동상 아래쪽에 두더지 인간들이 모여드는 방공호가 있었다. 거리잠을 잘 수 없는 한겨울이 되면 냉기에 떠밀린 두더지들이 방공호로 찾아와 몸과 몸을 붙이고 눈을 붙였다. 날씨가 얼어붙을수록 두더지들은 땅을 파듯 서로의 냄새나는 몸을 파고들었다. 그 방공호에서 우리는 포획됐고 배에 태워졌다.
사냥당한 두더지를 실은 배가 도착한 곳에 섬이 있었다.
그 섬, 선감도(仙甘島).
속세를 떠나 구름과 학을 벗 삼던 신선들이 찾아와 맑은 물로 목욕했다는 섬이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의 섬이 두더지들을 가둔 감옥섬(➡이곳으로 이동)이었다.
그 섬에서 두더지들은 소처럼 일했고, 개처럼 맞았으며, 파리처럼 죽었다. 추위를 피해 땅을 팠던 두더지들이 죽은 동료들을 묻기 위해 땅을 팠다. 소였다가, 개였다가, 파리가 된 내가 목숨 걸고 섬을 탈출했을 땐 두더지보다 못한 부랑인8이 돼 있었다.
낙천(樂天).
낙천적인 성격도 못 됐고 즐거운 천국은 꿈도 꾸지 않았던 내가 그곳, 낙천에서 주검과 죽음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내 꼬인 인생에 무슨 낙천.
나는 낙천을 욕심내지 않았고 남들 사는 보통의 삶을 바라지도 않았다. 평범 이하의 삶 언저리에라도 닿을 수 있길 원했다. 그쯤이어도 나는 그곳을 낙천이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스무 살 넘어 건설현장에서 철근을 나르고 공구리를 비비며 살았다. 노가다 오야지9를 따라 전국을 다니며 나이 서른을 맞았다. 건축자재를 파는 가게가 서울 신당동에 있었다. 오야지와 그 가게를 들락거리다 가게 앞에서 그곳, 낙천을 만났다.
낙천장의사.
처음 2년간은 월급을 받지 않고 일을 배웠다. 밤낮없이 사람이 죽었다. 하루에도 몇 구씩 시신이 들어왔다. 칠성판10을 놓고 병풍을 치고 염(念)을 담아 염(殮)했다. 그들을 초혼하고, 수의를 입히고, 관에 넣어 매장하고, 진혼하며 나는 장례 내내 진을 뺐다.
그 낙천이 사람들에겐 천한 땅이었다. 내 옆으론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낙천장의사는 내가 먹고 자는 곳이었고, 내가 하루의 목숨을 잇는 곳이었고, 내가 나의 낙천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땅을 떠나는 자들이 하늘로 건너가도록 도우며 나는 나의 낙천이 열리길 빌었다.
염병 같은 낙천.
그 아스라한 두 글자 앞에서 내 삶이 다시 터졌다. 낙천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나는 무기수였다.
감형돼 25년을 살았다.
그날 창경원에 갔더라면 내 작은 낙천에 들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지금도 애가 탔다.
“돈 받으러 가자고.”
사장의 목소리에 취기가 돌았다.
한 살짜리 아이가 있던 사장네 식구들과 창경원에 놀러 가기로 한 어린이날이었다. 아침 일찍 수습한 시신의 노제가 장의사 앞에서 열렸다. 사장이 노제에서 술을 마시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냥 창경원 가요.”
내가 말렸지만 사장은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
사장은 ‘그 새끼’를 향한 울분으로 끓어올랐다. 사장이 그 새끼한테 야산을 샀는데 사기였다.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다. 큰돈이 날아갔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사장의 눈이 팽 돌았다. 창경원 구경을 째고 술 취한 사장이 나를 끌고 그 새끼한테 갔다. 그 길로 낙천장의사도 나의 낙천도 끝장났다.
우리가 그 새끼를 밀었는데 그 새끼가 넘어지더니 죽어버렸다. 어린이날 우리는 ‘사람을 죽인 강도단’이 돼버렸다.
“사람이 죽었어요. 죽인 게 아닌데 죽었어요……”
경찰에 전화한 건 나였다. 그때 신고하지 않고 도망갔다면 나도 사장처럼 죽었을 것이었다. 사장은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형님, 방바닥이 뜨끈뜨근해요. 텔레비전도 있어요.”
교도소에 있는 210호 최중호(➡이곳으로 이동)가 편지를 보내 감방 생활을 한탄하는지 자랑하는지 모를 소리를 써댔다. 웃기고 자빠진 놈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여름이면 쪄죽고 겨울이면 얼어죽었다. 그 떠들썩했던 88서울올림픽도 모르고 살았다. 그땐 ‘가다밥’11을 먹었다. 밥까지 등급을 나눠 양을 달리했다. 교도소 밖에서 농사일을 거든 사람이나 출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죄수들이 1등급을 먹었다. 재판을 받지 않은 미결수에겐 4등급 밥이 주어졌다. 4등급부터 1등급까지 단계별로 먹으며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서울에서, 수원, 안양, 춘천, 광주, 김천으로 이감을 다니며 25년을 채웠다.
나이 서른일곱에 수감돼 예순두 살에 나왔다. 그 시간 동안 교도소 노역으로 모은 돈이 280만 원이었다. 출소 뒤 죽은 사장의 아들을 찾아가 그 돈을 줬다. 이젠 역사관이 된 형무소 부지를 가끔 찾아가 사장의 명복을 빌었다.
백장호가 거기 있었다.
을지로입구 지하도에서 누울 자리를 찾았을 때 그를 만났다.
교도소에서 나온 뒤 노숙을 했다. 전쟁고아가 돼 거리에서 숙식했던 나는 살인자가 돼 다시 거리의 사람으로 돌아갔다.
“형님은 어디서 왔능교?”
백장호가 물었다.
“사람 사는 데서 왔다.”
내가 말했다.
“맞지요. 살자고만 하면 못 살 데가 어디 있겄소.”
백장호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밥 먹는 곳을 알려줬다.
빌어먹는 것이 난데없진 않았지만 이미 늙어버린 나는 밥 얻어먹는 일이 힘에 부쳤다. 백장호 덕에 밥길(➡이곳으로 이동)을 익힐 수 있었다. 얻어먹는 데도 정보가 필요했다. 청량리와 서울역 쪽에 무료 배식하는 교회가 있었다. 사당역 근처에선 성당에서 밥을 줬다. 영등포에도 있었고 용산에도 있었다. 이쪽에서 배식이 없는 날엔 저쪽으로 갔다. 완전 공짜인 곳이 있었고 200원쯤 내고 먹는 곳도 있었다. 육십 넘은 사람한테만 주는 데도 있었다. 굶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성실해야 했다. 한 끼 밥을 위해 거리 상관 않고 찾아다녀야 빈 배에 밥을 넣을 수 있었다.
그 밥길을 걸은 그와 내가 이 세계의 가장 작은 방에서 다시 만났다. 9-2×에서 백장호의 생이 다해갈 때 나(➡이곳으로 이동)는 그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그의 똥을 닦았다.
1 강제퇴거 공고가 붙은 2015년 2월을 기준으로 그때까지 거주한 기간.
21909년부터 1983년까지 현재의 창경궁 자리에 있었던 동·식물원. 조선왕조 궁궐이었던 창경궁을 일제가 격하할 목적으로 조성했다. 1983년 창경궁을 복원하며 경기도 과천(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다.
3 한국전쟁 당시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함경남도 흥남부두를 통해 해상 철수 작전을 펼쳤다.
41934년 11월 개통. 한국 최초의 도개교(선박이 통과할 수 있도록 몸체가 위로 열리는 구조)이자 부산 최초의 연륙교(섬과 육지를 연결)였다. 개교 당시 다리가 하늘로 들어올려지는 모습을 보려고 6만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5 부산시 중구 신창동에 있는 시장.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모여들고 미군 구호품과 반출물자들이 유통되면서 상권을 형성했다.
6 ‘돈을 구걸하는 행위’를 뜻하는 노숙인 은어.
7 미군이 먹고 버린 짬밥을 끓여 만든 죽. 돼지들이 먹는 밥 같다고 해서 꿀꿀이죽이라 불렀다.
8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는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없이 떠돌아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부랑인이란 단어에는 질서를 해치고 제거돼야 할 존재로 보는 시선이 반영돼 있다.
9 ‘(가게·직장의) 주인이나 상사’를 뜻하는 일본어.
10 죽은 사람의 시신을 올려놓는 나무판. 북두칠성을 본뜬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칠성판이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닦고 삼베옷을 입힌 뒤 창호지를 깐 칠성판 위에 올린다. 별이 인간의 명운을 좌우한다는 중국 도교의 칠성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11 ‘틀’이란 뜻의 일본어 ‘가다’에 밥을 붙여 만든 말. 틀에 넣어 찍어낸 밥으로 등급마다 양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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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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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당해 건물은 금번 실사한 구조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철거 및 구조 보강공사가 필요한 구조체로 판정되었기에 입주민들께서는 공사가 시작되는 3월 15일까지 모두 퇴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전진단 용역: H구조안전기술원
보강공사 및 철거: M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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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건물 방마다 노란 벼락이 쳤다.1
겨울이 기운을 다해가는 하늘은 싸늘하고, 건조하고, 맑았다. 싸늘하고, 건조하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 회색을 칠한 방문들 위로 난데없이 노란색 딱지가 떨어졌다. 9-2× 잿빛 건물에서 딱지만 홀로 환했다. 주민 마흔다섯 명의 세계가 벼락에 맞았다.
강제퇴거 통보는 예고 없이 붙었다.
어제처럼 일어나, 어제처럼 밥을 먹고, 어제처럼 볕을 쬐고, 어제처럼 소주를 마시고, 어제처럼 자고 눈을 떴을 때, 주민들 앞엔 어제와 다른 오늘이 있었다. 길게는 20여 년을 살아온 방에서 어제처럼 문을 열고 나와 문을 닫았을 때 너무 화사해서 눈이 얼얼한 노란색이 문 위에 있었다.
노랑에서 튀어나온 “공고”는 붉었다.
노란 공고문에서 붉은 글자들이 피멍처럼 맺혀 검은 글자들을 깔고 앉았다. “구조 안전진단 결과”가 붉었고, “철거 및 구조 보강공사”가 붉었으며, “판정”이 붉었다. “3월 15일까지 모두 퇴거”가 가장 붉었다. 붉은 두 겹의 사선이 노란 딱지를 대각선으로 갈랐다.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서 왼쪽 하단 모서리로 딱지를 이분하며 주민들의 기대를 썰었다. 선의 기울기는 단호했다. 퇴거까지 허락된 시간은 한 달 보름이었다. 퇴거 뒤 이주 대책은 제시되지 않았다. 강제퇴거 보상안도 없었다. 딱지가 알려주는 정보는 오직 정해진 날짜까지 나가란 명령뿐이었다.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5개 층 건물
제2종 일반 주거지역
철근콘크리트조·연와조 구조
주용도 영업·주택
건축면적 86.31m²
연면적 400.59m²
지하와 1층 면적 각각 83.54m²
2층과 3층 각각 86.31m²
4층 60.89m²
벼락 맞은 건물엔 모두 마흔여덟 개의 방이 있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는 층마다 열한 개의 방으로 쪼개졌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방들이 뚫려 있었고, 방마다 합판으로 짠 나무문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었다. 4층엔 방이 다섯 개였다.2 다섯 개 중 두 개는 9-2×에서 가장 큰 방들3이었다. 월세가 3~4만 원 더 비쌌다. 관리인이 그중 하나를 방세 없이 썼다. 마흔여덟 개 방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방은 세 개였다. 지하 방 하나는 창고가 됐고, 1층 교회가 방 두 개를 터서 썼다. 퇴거 사태 전후로 사람이 거주한 방은 모두 마흔다섯 개였다.
층마다 공동세면장 겸 취사장이 하나씩 있었다. 주민들은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몸을 씻고 밥을 했다. 층과 층 사이엔 공동화장실이 두 개씩 있었다. 여름철 재래식 좌변기가 놓인 화장실 앞을 지날 때마다 주민들은 통제되지 않는 냄새로 숨이 넘어갔다. 세면장도 화장실도 남녀 구분이 없었다.
“뭣이여?”
묽은 새벽4 화장실을 다녀오던 201호 박철관•이 건물 밖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에 못 보던 트럭 한 대가 잡혔다. 길쭉한 쇠파이프와 구멍 뚫린 직사각형 철판이 트럭에 가득했다.
“이 양반들아, 그게 뭣이냐고?”
박철관을 힐끗 올려다본 인부들이 트럭에서 쇳덩이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박철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 시파……”
뭣의 정체를 알아본 박철관의 혈압이 솟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3~4층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다들 어여 일어나.”
1층으로 뛰어내려가며 욕 같기도 하고 뭣 같기도 한 소리를 질렀다.
“아, 아시바5여……”
박철관이 건물 밖에서 ‘메인 골목’이 쩌렁하도록 다시 소리쳤다.
“아 씨바, 아시바라고.”
박철관의 고함 소리에 204호 양진영•도 잠을 깼다.
양진영의 방문에 검은 매직으로 쓴 숫자가 방호수를 알려줬다. 통일된 잠금장치 없이 모양과 크기와 성능이 제멋대로인 자물쇠들이 방문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닫아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방문들이 방문을 자처했다. 방주인들은 문틀에 못을 박고 문고리에 끈을 묶었다. 끈을 문틀 못에 둘둘 말아 문이 열리는 것을 막았다.
서로 엮이지 않는 것은 삶과 방 사이의 일이기도 했다. 겨울엔 난방이 고장 나 냉기가 차고 방습이 안 돼 벽이 썩었다. 여름엔 옷을 훌렁 벗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방에서 주민들은 작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늘어졌다. 온갖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엉킨 방은 언제든 누전으로 불이 날 수 있었다. 소방 당국이 제공한 화재경보기들이 방마다 달려 있었다.
2와 0과 4가 날림으로 적힌 방문 안에서 양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날 밤 그는 삼겹살을 구웠다. 프라이팬을 들고 나가 건물 입구에 놓고 고기를 얹었다. 고기 주위로 모인 동네 주민들에게 소주를 따랐다. 술이 오른 옆 건물 남자가 양진영에게 “한 방 멕였”다. “동네에서 가장 덩치 큰” 양진영이 남자를 밀었다. 그가 남자 위에 올라타서 목을 붙잡고 있는데 신고를 받은 지구대 경찰이 출동했다. ‘쌍피’(쌍방 폭행에 따른 쌍방 피의자)로 엮인 그는 잠에 엮여들지 못했다.
양진영도 “아 씨발”을 쏟아내며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9-2× 주민들이 계속 뛰어나왔다. 아픈 사람들까지 뛰어나왔다.
인부 여섯 명이 건물 벽에 아시바 설치를 시도했다. 양진영도 “노가다 좀 해봐서” 알았다. 일단 건물에 아시바가 묶이고 나면 공사는 돌이킬 수 없었다. “동네 제일의 덩치” 양진영이 인부들에게 경고했다.
“내 분명히 말하지. 내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아시바는 안 된단 말이지.”
환갑을 넘겼지만 양진영의 말투엔 상대가 무시하지 못할 묘한 기운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은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가득했다.
소주로 수면제 백 알을 털어먹고, 한센병 치료제를 모아 삼키고, 한강다리 아래로 투신하고, 달리는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고, 기차 문밖으로 몸을 던지고……
죽음으로 달려들다 실패할 때마다 그의 몸엔 차곡차곡 병이 쌓였다. 머리를 다치고, 팔이 부러지고, 허리가 꺾이고, 장기가 상했다. 한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땐 살고 싶어 허우적거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죽으려고 먹은 약의 얼룩을 다스리느라 그가 매일 넘기는 약이 마흔 알이었다. 죽음 곁을 서성이는 글들로 그의 일기장(➡이곳으로 이동)은 빼곡했다.
“비밀이야. 더는 말 못해.”
‘어떤 수칙’을 외우다가도 그는 검열받듯 자기 말을 끊곤 했다. 달군 쇠가 뇌에 찍은 낙인처럼 강제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