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기의 사랑 혹은 아낌의 지혜를 우리는 온몸으로 다시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강신주
철학과 삶을 연결하며 대중과 가슴으로 소통해온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을 통해, 불교 철학의 핵심 사유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중요한 화두인 ‘사랑’을 ‘아낌’의 의미로 재해석하고, 삶의 주인으로서 진정한 아낌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지은 책으로 『철학 vs 실천』 『철학 vs 철학』 『강신주의 다상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의 감정수업』 『철학이 필요한 시간』 『김수영을 위하여』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이 있다.
격변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간편하고 지적인 방법
일러두기
— 이 책은 방송 프로그램 〈EBS CLASS ⓔ〉의 강연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과 동시 기획되어 출간된 책입니다.
— 본문에 인용한 김선우 시인의 시 「고쳐 쓰는 묘비」 외 7편은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강연은 강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정 주제의 강연이 끝나자마자 진정한 강연이 시작된다. 바로 대화의 시간이다. 질의응답 시간, 책에 사인하는 시간, 또는 사진 촬영 시간이 내게 더 긴장감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연에 참석한 분들은 한 사람당 채 3분을 넘지 않는 이 아주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고뇌와 의문을 쏟아낸다. 삶, 사랑, 행복, 인간관계와 관련된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보려 했으나 개운치 않았던 애절한 질문들이다. 철학, 정치, 혹은 역사 등 거대하고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던, 방금 마친 강연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들의 애절한 마음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삶이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한데, 왜 그리고 어디서 그런 이탈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애매하니 낭패다. 그들이 내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이유다. 철학자라면 거기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나는 강연에 기력을 소진한 상태지만, 마지막 힘을 쏟아 그들의 고뇌를 함께하려 했다. 불행히도 대화 시간은 항상 너무 촉박했다. KTX 열차를 막차로 바꾸어도 촉박하기는 마찬가지다. 흔히 ‘거리의 철학자’라 소개되는 나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대학 근처나 배회하는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들고, 서라벌 저잣거리에 녹아들었던 원효를 생각하면 부끄러움마저 감출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많은 철학 책들, 우리 이웃을 위해 썼다는 철학 책들은 표적을 맞추는 데 실패했던 것일까? ‘거리의 철학자’에 어울리는, 쉽게 읽히지만 깊이가 있는 책, 읽고 다시 읽어도 소진되지 않는 샘물처럼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EBS의 강연과 출간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 수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로 이 책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 그 결과물이다. 우리 이웃들의 삶과 마음에 적중할 수 있는 책이 완성된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이 책으로 내가 우리 이웃들의 삶과 마음을 겨냥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과연 표적에 제대로 적중할 수 있을까? 아니, 내 화살은 표적 근처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2020년 7월 4일
뭉게구름 아래 광화문에서
강신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고 서로의 심리를 모르는 게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도취를 상실한 채 무미건조해지고 서로의 관계들은 그 생명력이 마비되며, 또한 관계의 지속 자체가 처음부터 무익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 게오르크 지멜, 『분별의 심리학』 중에서
그가 늦게 귀가했다. 나는 단출하지만 한 공기의 밥과 함께 식사를 차린다. 그의 배고픔을 가시기 위함이다. 사랑, 그거 별것 아니다. 배고픔이든 고독이든 뭐든 타인의 고통이 사무치는 것이 사랑이니까. 그러니 그 고통을 달래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배고프고 내가 외로운 것보다 그가 배고프고 외로운 것이 더 아프다. 그러니 그의 배고픔과 그의 외로움을 내 것으로, 나의 수고로 가지고 와야 한다. 다행히 한 공기의 밥으로 그는 편안해진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최소한 배고픔과 관련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까지다. 한 공기의 밥으로 그가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두 공기의 밥, 세 공기의 밥, 나아가 한 가마의 밥을 그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 배고픔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고통에 빠져들고 마니까. 사랑은 ‘한 공기의 밥’과 같은 것이다.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한 공기의 사랑’ 혹은 아낌의 지혜를 우리는 온몸으로 다시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고통을 느꼈다면, 두 공기, 세 공기부터는 그가 고통스러울 것임을 느꼈다면, 내가 초래한 사랑의 비극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를 미워해서 두 공기, 세 공기를 먹게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철학자는 표리가 일치하는 행동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비극이 일어날 때 문제가 된다. 사랑은 “최소한 나로 인해 당신의 고통이 가중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발원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차라리 사랑하지나 말 것을!” 사랑이 고사되어갈 때쯤 혹은 생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탄식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우리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파국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한 공기의 사랑’으로 압축되는 아낌의 지혜가 더욱더 요구되는 시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회의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심지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보다는 개나 고양이와 있기를 원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그러니까 사랑과 연대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 옆에 그들을 사랑한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두 공기, 세 공기, 나아가 한 가마의 밥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맹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 우리의 아이,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에게 사랑이나 아낌이 축복의 언어가 아니라 저주의 언어가, 자유의 언어가 아니라 강요의 언어가 되고 만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 사무쳤던 시절, ‘한 공기의 사랑’을 실천했던 처음으로 돌아가자.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사람 대신 배고픔, 불편함, 그리고 수고를 행복하게 감내했던 ‘아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한 공기의 밥이 되도록 온몸을 다시 만드는 일이니, 그것은 감성과 지성, 혹은 심장과 머리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이 책에서 시인의 감수성, 부처의 마음, 그리고 철학자의 지성이 총동원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공기 사랑’의 애절함이 심장으로 파고 들어가야 ‘아낌의 인문 정신’으로 머리가 가득 찰 수 있다. 혹은 지성으로 ‘아낌의 인문학’을 받아들여야 우리의 감성을 ‘한 공기의 사랑’으로 애절하게 물들일 수 있다. 무소유와 보시의 정신과 연기의 지혜를 통해 자비의 감수성이 우리를 관통할 수 있다. 감성의 변화에만 머물러도 안 되고, 지성의 변화에만 머물러도 안 된다. 온몸, 즉 실천의 차원에서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의 정신’이 충만해야 하니 말이다.
이 책은 8강, 즉 여덟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강에서는 ‘고(苦)’를, 2강에서는 ‘무상(無常)’을, 3강에서는 ‘무아(無我)’를, 4강에서는 ‘정(靜)’을, 5강에서는 ‘인연(因緣)’을, 6강에서는 ‘주인(主人)’을, 7강에서는 ‘애(愛)’를, 그리고 마지막 8강에서는 ‘생(生)’을 키워드로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의 정신’을 다룬다. 특히 7강과 8강은 앞에서 다룬 여섯 챕터의 지혜를 모아 본격적으로 ‘아낌의 인문학’을 모색하는 부분이다. 각 챕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가슴으로 애절하게’라는 표제를 가진 첫 부분은 우리의 감성을 뒤흔들 것이고, ‘머리로 냉정하게’라는 표제를 가진 두 번째 부분은 우리의 지성을 날카롭게 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첫걸음을 당당하게’라는 표제를 가진 세 번째 부분은 새로운 감성과 지성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지 제안할 것이다.
‘가슴으로 애절하게’에서 우리의 감수성을 흔들 수 있는 계기로 김선우 시인의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에 실린 시 여덟 편을 캐스팅했다. 불교의 핵심을 시로 녹여낸 시집이 한국시에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발원』(민음사, 2015)을 쓴 이후 발표한 시집이라 그런 듯하다. ‘머리로 냉정하게’에서는 싯다르타, 나가르주나, 임제, 그리고 백장 등 불교 사유와 함께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중요한 철학적 사유가 종으로 횡으로 펼쳐진다. ‘정(靜)’을 다루는 4강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으니 천천히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 ‘첫걸음을 당당하게’에는 ‘착수처(着手處)’가 있다. 착수처는 ‘손을 대는 곳’이라는 뜻이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어디서부터 제대로 된 삶과 사랑을 시작해야 할지 막연할까 봐 염려되어 마련한 부분이다. 한 챕터가 끝날 때 앞에서 소개한 김선우 시인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테니. 이제 한 공기의 사랑을 실천하는 아낌의 사랑꾼이 되는 공부, 시인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과 철학자의 마음에 접속하는 공부를 시작할 때다.
가슴으로 애절하게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일까, 조금만 외로워도,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가난해도, 한마디로 말해 조금만 불행해도 우리는 못 견딜 정도로 힘들어한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데 자기만 불행한 것처럼 느껴지니 조그만 불행도 더 크게 느껴지는 탓이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주장은 맞는 말일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 밥을 먹지 않으면 힘들고, 추울 때 옷을 입지 않으면 힘들고, 한여름에는 무더위뿐만 아니라 모기나 해충의 공격으로 힘들다. 이런 생물학적 고통은 우리의 관념과 만나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기 일쑤다. 더 근사한 식사, 더 넓은 집, 더 멋진 옷에 대한 갈망, 자본주의가 증폭시킨 집착이 우리에게 더 큰 고통과 불만족을 안기기 때문이다.
의식주와 관련된 생물학적 고통뿐일까. 사회적 차원에서도 우리의 고통은 이어진다.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원하든 그렇지 않든 치열한 경쟁으로 지쳐가고 그만큼 우리 삶이 고통으로 범벅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독에 힘들어하면서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은 언젠가 내 곁을 떠나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게 이별이 찾아오기도 하고,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렇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우리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기만 한다.
돌아보면 고통이 우리 삶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행복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물게 찾아온다. 결국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기보다 불행하기 위해, 고통스럽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의 와중에도 바로 그 고통이 일순간 완화되는 상태, 바로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고통, 불행, 불만족의 상태에 있어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 삶에서 고통이 1차적이고, 행복이 2차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김선우 시인이 「고쳐 쓰는 묘비」라는 시에서 간파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
축하한다 삶의 완성자여
장렬한 사랑의 노동자여
— 김선우, 「고쳐 쓰는 묘비」
김선우 시인은 이 시에서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울음은 고통의 표현이고 웃음은 행복의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울음이 먼저이고 웃음은 그다음이라는 시인의 통찰이다. 웃으니까 우는 것 아니냐는 말장난이나 사유 실험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제 탄생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엄마와 둘이면서 하나인 듯 보냈던 자궁을 떠나 세상에 첫발을 내딛을 때, 아이는 운다. 허파로 처음으로 호흡하는 것도 낯설고 고통스럽지만, 엄마의 자궁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주변 세계에 곧바로 노출되니 그 낯섦과 고통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엄마의 배 속과는 다른 분만실의 강렬한 빛, 코를 자극하는 의료용 약품의 냄새, 양수의 따뜻함이 사라지자마자 느껴지는 외부의 한기 등등. 그래서 아이는 운다. 모든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 낯섦, 불안, 고독, 한마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 탄생은 고통과 거의 동의어가 된다.
다행히도 아이의 고통은 곧 완화된다. 그 증거가 바로 아이의 웃음이다. 울음 뒤에는 웃음이 찾아온다. 아이가 갓 태어나 마구 울면 아이를 엄마 옆에 가만히 누인다. 엄마 옆에, 엄마의 가슴과 나란히 누이면 아이는 자궁 안에서 느꼈던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와 안온감과 따뜻함을 느끼며 안정을 되찾는다. 곧 웃음이, 그리고 미소가 아이의 얼굴에 번진다. 이렇게 웃음은 울음 뒤에 오는 것이다. 고통 뒤에 행복이 찾아오는 것처럼.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팍팍한 사람들이 있다. 고통을 마치 이질적인 질병이라도 되는 듯 멀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김선우 시인은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해야 하고,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운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웃으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울면서 세상에 등장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권고다.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냉정한 진단이다. 절망 속에서만 진정한 희망을 길어낼 수 있는 법!
이어서 시인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운다”고. 여기서 핵심은 아마도 “배운다”는 말에 있을 듯하다. 수영을 배우듯 혹은 말을 배우듯,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본능으로 모두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웃음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의 얼굴에 웃음과 미소를 안길 외부, 혹은 타자가 필요하다. 아이 혼자서 스스로의 힘으로 웃기는 힘들다. 기적처럼 혹은 선물처럼 무언가가 바깥에서 주어져야 한다. 낯설어하는 아이에게 엄마의 따뜻한 품이 있듯, 갈증으로 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한 잔의 시원한 물이 있듯.
고통은 일차적으로 주어진 삶의 조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삶의 원초적 진상이다. 어떤 종류든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고통을 완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바로 이때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다. 웃음을 배우지 못한 평범한 이웃들이 오늘도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자신의 삶을 불완전한 채로 방치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고통에 직면하고 그것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배운 사람, 그런 사람이 「고쳐 쓰는 묘비」에서 김선우 시인이 말한 “삶의 완성자”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연인이 있어서 행복하고 밥을 먹어서 행복할 수 있다. 이때의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잠시의 행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외로움과 배고픔이라는 고통은 외부의 무엇인가에 의해 잠시 완화된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항상 되새겨야 한다.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웃음과 행복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정확히 말해 나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내면이나 방 안에 침잠하는 것은 웃음과 행복을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면에서 벗어나 외면으로, 방 안에서 외부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근사한 무지개를 볼 수도 있고, 맛있는 사과를 딸 수도 있으니까. “삶의 완성자”가 “사랑의 노동자”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란 나의 고통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감정이자 의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기본적으로 고통에 대한 직면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배고픈 사람을 더 배고프게 하지 않기! 우는 사람을 더 울게 하지 않기! 외로운 사람을 더 외롭게 하지 않기! 피곤한 사람을 더 피곤하게 하지 않기! 그러니 밥을 먹이고, 웃게 해주고, 함께 있어주고, 쉬게 해준다. 이 모든 일이 노동이 아니면 무엇일까?
머리로 냉정하게
살아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
불교의 가르침은 고(苦), 즉 고통의 자각 혹은 고통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 모두가 고통이다’라는 싯다르타(SiddhārthaGautama, BC563?~BC483?)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가르침인가? 보통 종교라면 희망과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불교는 애초부터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불교 경전에는 ‘타타타(tathatā)’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자주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타타타는 한자어로 진여(眞如), 여실(如實), 혹은 여여(如如)라고 번역된다.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일체개고’는 타타타한 진실, 여실한 진리, 혹은 여여한 진상이다.
여기서 불교의 최종적 이념이 바로 ‘자비(慈悲)’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비는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리-카루나(maitri-karuna)’의 한자 번역어다. ‘마이트리’는 ‘우정’을 의미하고, ‘카루나’는 ‘타인의 고통을 아파한다’는 뜻이다. 즉, 자비는 동등한 관계에서 상대방의 불행이나 고통을 아프게 느끼는 감정이다. 나와 상대방이 모두 혹은 동등하게 불행하거나 고통스럽다는 통찰이 ‘자비’라는 말에 전제되어 있다. 고통을 느끼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하는 것, 그것이 자비다. 그러니 ‘일체개고’라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이해한다면,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느꼈기에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다.
불교의 가르침을 좀 더 확장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해보자. 아주 높은 데서 뛰어내려 즉사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2, 3층에서 뛰어내려 죽지 않고 다치면 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죽은 듯 보이는 사람을 발로 차보라. 그 사람이 아픔을 느껴 움직이면 그는 살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발로 차도 꿈쩍도 하지 않으면 그는 아마 죽은 상태일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부모님이나 친구가 갑자기 쓰러지면 제일 먼저 따귀를 때리거나 팔을 꼬집어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고통을 느껴야 살아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살아 있다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배고픔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추위도 느끼는 것이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보자. 지금 당장 자신의 넓적다리를 힘껏 때려보는 것이다. 다리를 때리고서 아픔을 느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아프지 않다면 자신의 다리는 어떤 식으로든 마비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다면 계속 때려도 상관없다. 마비된 다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을 느낀다면, 어느 누가 다리를 계속 때릴까? 때리기를 중단하거나 최소한 아프지 않게 때리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자기 고통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약화시키는 것이 자기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이 내 다리의 아픔이나 고통처럼 느껴진다면, 그 타인은 이미 내 몸이나 다름없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그 사람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면 내 손에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동물을 죽이려면 그 동물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꽃가지를 꺾으려면 그 나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즉 고통의 감수성이다. 바로 이것이 자비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평범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뿌리다.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공양의 깊은 의미
사찰에는 ‘사물(四物)’이라는 것이 있다. 법고(法鼓),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板)을 가리킨다. 법고는 대개 가죽으로 만들어진 북이기에 들짐승과 관련된다. 즉, 법고는 들짐승을 깨우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종은 인간을 깨우고, 목어는 물고기를 깨우고, 운판은 날짐승을 깨운다. 새벽이 오면 사찰에서는 법고를 제일 먼저 치고, 이어서 목어, 운판, 범종 순으로 친다. 들짐승을 먼저 깨우고 최상위 포식자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깨우는 감수성에 주목하자. 가장 약한 존재부터 깨우려는 불교의 감수성이 제도화된 것이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있으면 누구부터 깨워야 할까? 당연히 초식동물부터 먼저 깨워야 한다. 토끼가 한창 쿨쿨 자고 있을 때 독수리가 먼저 깨면 안 되니까. 독수리가 먼저 일어나면 자고 있는 토끼를 쉽게 잡아먹을 것이다. 이렇게 사물과 관련된 의례적 절차에는 ‘일체개고’나 ‘자비’와 관련된 싯다르타의 가르침과, 모든 존재에 대한 ‘발원(發願)’이 녹아 있다. 토끼를 깨우면서 스님은 무의식적으로 발원한다. “오늘은 싱싱한 풀을 많이 먹고 독수리를 조심하렴!”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식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고통이라는 감수성이다. 그다음에 운판을 두드려 독수리를 깨우며 스님은 발원한다. “오늘은 배곯지 말고, 인간에게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렴!” 독수리도 배고픔과 포획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비의 마음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발원인가? 독수리가 배고픔의 고통을 면하려면 토끼를 잡아먹어야 하고, 토끼는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면하려면 독수리를 피해야 한다. 나아가 토끼도 배고픔의 고통을 면하려면 식물을 뜯어 먹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생물에게 배고픔의 고통이 없기를 발원하는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모든 생명이 유한자로 태어나기에 모든 비극이 생긴다. 누구도 자기 힘으로, 자기 살을 파먹고 살 수는 없다. 크게 보면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건강할 때에는 웬만해서는 다른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랑이도 병들거나 늙으면 땅에 쓰러져 식물의 거름이 되니 말이다.
‘일체개고’의 가르침이 이보다 애절할 수 있을까. 식물에서부터 물고기, 토끼, 독수리, 늑대 등 동물, 나아가 인간까지 모두 배고픔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각각의 생명체를 대할 때 그 고통을 뼈저리게 함께 느끼는 것이다. 사슴과 늑대가 있다면 사슴을 깨우면서 이렇게 발원한다. “오늘은 늑대한테 잡히지 말고 풀 많이 뜯어 먹어.” 늑대를 깨울 때는 이렇게 발원한다. “오늘은 굶지 말고 사슴 잡아먹어. 사람한테 잡히지 말고.”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깨우면서 인간한테는 “오늘 냉이도 캐 먹고 사슴도 잡아먹어”라고 발원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모두가 배고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식물을 위해 사슴을 모두 잡아 죽일 수도 없고, 사슴을 위해 늑대를 모두 잡아 죽일 수도 없다. 새벽 산사에 울리는 사물의 소리에서 비장함과 애절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사찰에서 식사하는 것을 공양(供養, pūjanā)이라고 하는데, 스님들은 공양을 할 때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식사를 마치면 그릇에 물을 부어 마치 설거지하듯 그릇을 씻고 그 물을 모조리 마신다. 어째서 이런 관습과 제도가 만들어졌을까?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어진 것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야 다른 것을 죽여서 먹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것들, 아니 정확히 말해 죽인 것들로 배고픔의 고통을 최대한 완화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음식물을 버린 만큼 배고픔의 고통이 빨리 찾아올 것이고, 그만큼 다른 생명체를 새로이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고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숙명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Merleau-Ponty, 1908~1961)가 『휴머니즘과 폭력(HumanismeetTerreur)』(문학과지성사, 2004)이라는 책에 쓴 말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타자에 대해 순진무구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어딘가 우월하고 선한 듯이 보이지만, 인간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죽여야 생존할 수 있다. 개나 고양이 혹은 카나리아와 이웃처럼 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동물 공장에서 생산하는 닭이나 돼지, 소를 먹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이다. 다른 생명체, 나아가 타인에 대해 순진무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고.
메를로-퐁티는 여러모로 싯다르타의 통찰을 따르고 있다. 타타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결국 무언가를 파괴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의 말대로 ‘폭력의 종류’ 혹은 ‘폭력의 정도’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 중에서 최소의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 중 최소의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메를로-퐁티의 윤리다. 최대의 폭력과 최소의 폭력 중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다.
이제야 새벽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법고 소리와 정갈한 공양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싯다르타 이래 부처가 되고자 했던 모든 스님들은 최소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는 고뇌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깊은 산중 나무 하나, 돌 하나, 그리고 계곡물에 사무쳤던 법고 소리는 모든 생명체에게 최소한의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약속이었고, 밥알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 공양의 자리는 최소 폭력을 비장하게 실천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채식과 육식을 놓고 볼 때, 최소 폭력을 선택하려는 사람이라면 채식을 선택할 것이다. 잎사귀나 과실을 따는 것은 식물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일부분을 얻는 행위다. 고기를 먹으려고 소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과는 다르다. 채소나 곡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밝혀진 바 없으니, 돼지나 닭을 죽여 고기를 얻는 것보다는 채소나 곡물을 먹는 것이 생명체에 대한 최소 폭력임은 자명하다. 불가피하게 육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물을 죽일 때에도 최소 폭력을 실천할 수 있다. 가급적 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동물을 죽이든 그것은 생명체를 파괴하는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은 육식이든 채식이든 생명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시 말해 ‘비폭력’과 ‘순진무구’는 불가능하니 최소 폭력과 최대 폭력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이 자포자기를 넘어 최대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한 걸음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공양 속에는 최소 폭력의 윤리가 살아 있다. 타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통도 최소화하려는 중도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그것을 취하여 삶을 영위한다고 할 때 지금 내가 먹는 음식이 정말 다른 생명체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일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남기 마련이다. 이런 개운치 않음이 어쩌면 최소 폭력의 윤리성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가 아닐까. 최소 폭력인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아야, 우리는 생명체들의 고통에 더 민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 폭력의 감수성은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삼는 경우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같은 인간, 즉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폭력을 혹은 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자각이다. 복잡한 식당 안이나 매장 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입학을 해도 취업을 해도 나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다른 누군가는 나 때문에 인생의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이 되어도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는 나보다 근사한 여자나 남자를 배우자로 맞을 수도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오만에 빠지지 말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존재에 폐를 끼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내가 옆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최소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의 논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걷기 힘든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동시에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을 매번 찾아내야만 하는 길, 균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균형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그런 개운치 않은 길 말이다.
성숙한 사람이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 이유
아이들은 보통 자기 고통만 느끼고 부모 혹은 타자의 고통은 잘 못 느낀다. 어쩌면 자신의 고통만을 강하게 느끼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힘들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듯하다. 자기 고통에 몰입할수록 그만큼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배가 무척 고프다. 그런데 엄마가 몸살이 나서 방에 누워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칭얼대지 않고 엄마 곁에 걱정하며 앉아 있거나 스스로 냉장고를 뒤져 먹을 것을 찾는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고통보다는 엄마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이는 배고프다고 투정하면 엄마의 고통이 가중되리라는 걸 안다. 허기진 채 귀가한 남편이 아내가 저녁을 차려놓지 않았다고 해서 몸이 아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엄마의 고통을 가중시키지 않으려고 냉장고를 뒤져 배고픔을 채우는 아이는 그런 남편보다 백배는 더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성숙의 잣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 나아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성숙해지고, 겉만 어른이던 사람도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작아지는 것을, 혹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이 돌아간다는 감정적 천동설에서 벗어나 자기만큼이나 타인도 고통에 아파한다는 감정적 지동설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성숙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일체개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 일체의 것들에게 잔인하게 굴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려는 마음을 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당연히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 같은 말이지만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다. ‘혹시 내 말이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혹시 이런 행동이 그를 속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 슬로건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나로 인해 당신의 고통이 가중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성숙한 인간은 자신이 빠져 있는 무미건조함이나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나의 연락이 타인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과의 연락을 귀찮아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타인이 먼저 연락을 취해오면 하염없이 기쁘지만,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고 기다린다. 이것이 성숙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려는 유아론적 욕망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왕따나 이지메, 심지어 학우들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교육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정보 습득과 스펙 쌓기 등 자본주의적 경쟁을 바탕으로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자신의 고통과 행복에만 몰입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는 성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숙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고통에 대한 원초적 자각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을 키우지 않는다면,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엄마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아픈 엄마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강요하게 된다. 친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 아이를 웃음거리로 만들며 즐거워한다. 고양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길고양이에게 돌을 던진다. 나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진액이 흐르는 꺾인 나뭇가지를 들고 의기양양해할 수도 있다. 이런 아이가 교육이라는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법적인 어른이 되었다고 해보자. 아내나 남편이 생겨도 그는 배우자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다. 배우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므로. 직장 생활을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동료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불행히도 이런 아이가 사회의 권력자가 되면,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을 것이다. 대중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대표자를 뽑은 결과다.
고통에 대한 인문학적 감수성이 개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시금석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구성원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고통을 가중시키는 공동체인가? 후자라면 우리는 그 공동체를 뿌리에서부터 바꿔야 한다. 혁명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의 규칙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낮은 공동체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하는 공동체로 바꾸는 것이 혁명이 아닐까.
고통에 대한 감수성, 사랑의 바로미터
겨울에 길을 가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길고양이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렇게 고통을 직면하면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고양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이미 느껴버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가 느끼는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자발적 감정이자 의지, 혹은 노력은 이렇게 탄생한다. 고양이를 외면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고통보다 고양이를 집에 데려옴으로 인해 생길 나의 고통이 더 크다고 판단하거나, 결국 고양이의 고통이 사무치게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내 넓적다리에 느끼는 고통만큼 고양이의 고통이 다가와야 고양이의 고통을 완화해주려는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라는 명제로 싯다르타가 절규했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닌가.
타인의 고통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에 자비가 차오르게 된다. 자비, 혹은 그냥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새겨두자. ‘사랑의 핵심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