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ZEYO BOKURANO MAEGAMIWO
Copyright ⓒ 2021 by SAYOKO YAYOI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21 by TOKYO SOGEN SHA CO., 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TOKYO SOGEN SHA CO., LTD., Tokyo
through Eric Yang Agency Co., Seoul.
Korean translation rights ⓒ 2022 by YANGPA
Illustration copyright ⓒ y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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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서양관
제3장 성역
제4장 소녀
제5장 선율
제6장 상흔
제7장 우화
제8장 유리창
제9장 기념수
제10장 천칭
평론가 서평
다치하라 교고 - 살인사건의 피해자. 다치하라 법률 사무소의 전 경영자, 변호사.
다치하라 다카코 - 교고의 아내.
다치하라 시후미 - 다치하라 부부의 양자. 에이료 대학교 4학년.
미타 미나코 - 다치하라 부부의 딸. 시후미의 친어머니.
미타 다다히코 - 미나코의 남편.
사이키 아키라 - 시후미의 친아버지.
시마다 유카 - 카페 아오무기의 종업원.
고구레 리쓰 - 시후미의 중학교 동급생.
고구레 시즈토 - 리쓰의 양아버지.
고구레 마리코 - 시즈토의 아내. 리쓰의 어머니.
고구레 요이치 - 시즈토의 아버지. 전직 음악교사.
고구레 나오토 - 시즈토의 쌍둥이 동생. 유아기에 사망.
하나무라 마스미 - 고구레 집안의 전 가정부.
도다 미요코 - 고구레 집안의 전 유모. 고인.
사이토 리코 - 이누이 종합병원의 간호사.
고즈카 가이토 - 시후미의 중학교 동급생.
다무라 나오 - 시후미의 중학교 동급생.
다다 아이리 - 시후미의 중학교 동급생.
스기오 렌 - 시후미의 중학교 동급생.
데라이 레이나 - 시각장애인 소녀.
요시무라 게이코 - 시후미의 전 피아노 선생님.
와카바야시 유키 - 마쓰에다 탐정 사무소의 전 직원. 다치하라 다카코의 조카.
마쓰에다 도코 - 마쓰에다 탐정 사무소 소장. 유키의 대학 선배.
다케우치 - 형사.
바 람 아 우 리 의 앞 머 리 를
작년에는 팽이와 하고이타(주: 깃털 달린 공을 던지며 노는 전통놀이에 쓰는 나무 채) 무늬가 조화로운 겨자 색 기모노에 솟을무늬 나고야오비(주: 기모노의 허리띠인 후쿠로오비를 간소화한 허리띠) 차림이었다. 재작년 의상은 눈꽃 무늬 오비에다 은회색과 연보라색이 어우러진 옷자락에 큼지막한 크로커스 꽃이 피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메지로의 호텔에서 해마다 열리는 신년 우타카이(주: 일본 정형시인 와카를 발표하고 비평하는 행사) 때면 늘 그렇게 큰 이모인 다치하라 다카코는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살짝 대담하게, 새해다운 화사한 몸치장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올해는 수수한 검정색 원피스 차림이다. 결혼반지를 제외한 액세서리는 착용하지 않았고,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목에는 짙은 보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유키, 시간 있을까?”
우타카이가 끝난 뒤 조심스럽게 묻기에 와카바야시 유키는 친목회를 뒤로 하고 다카코와 메지로 역 근처의 일식 요릿집으로 갔다.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긴 때라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방이 따로 마련된 곳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고 다카코는 변명했다.
도코노마(주: 일본식 집의 장식 공간)가 있는 전통식 방으로 안내받자 다카코는 유키에게 상좌를 권했다. 유키는 송구스러워 하면서 칠복신이 그려진 족자와 남천나무로 장식된 도코노마를 배경으로 정좌했다.
“경사스러운 우타카이에 얼쩡대다니 다들 속으로 혀를 내둘렀겠지만 널 꼭 만나고 싶었어. 부탁이 있어서, 남편 일로.”
식전주로 나온 금잔의 술을 단숨에 털어 넣고 다카코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유키는 다카코의 영향으로 중학생 때 단가를 시작했다. 고등학생으로 올라가자 권하기에 별생각 없이 다카코가 소속된 협회에 들어갔다. 그 이후 열심히 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냥저냥 꾸준히 해왔다.
기가 센 어머니에 눌려 살아온 유키의 눈에 일본 인형처럼 나긋나긋한 다카코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보였다. 옅은 화장에 벚꽃 빛깔의 볼터치를 살짝 발라주면 결 고운 하얀 피부가 한층 돋보이고 밤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빛났다.
나중에 어머니보다 열두 살도 더 위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는데, 67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다카코한테는 아직도 어딘가 소녀 같은 분위기가 있다.
다카코는 에도 중기에 창업한 화과자 가게의 세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데릴사위를 들여 가게를 이어받은 사람은 둘째인 아쓰코다. 애교 넘치는 웃는 얼굴과 견실한 경영으로 노포를 지켜낸 아쓰코는 지금도 매일 니혼바시 무로마치에 있는 본점에서 열심히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통통한 아쓰코와 달리 다카코는 가냘프고 날씬하다. 목소리도 가녀린 데다 성격까지 조신한 게 딱 고풍스런 양갓집 규수다. 장녀인 다카코가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게 된 데는 남편이 된 다치하라 교고가 다카코에게 첫눈에 반해 열렬히 구혼한 이유도 있지만 장사에는 아쓰코가 훨씬 적임자라는 사실을 선대가 제대로 알아봤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자매 중 셋째인 요코가 유키의 어머니다. 남한테 굽실거리기는 질색이고, 실수로라도 아양 부리는 웃음 따위 절대 못 짓는 성격이니 대를 이어 노포를 꾸려갈 사람이 아니기는 다카코보다 더할 것이다.
하기는 워낙 그런 기질이다 보니 상장기업인 와카바야시 집안 삼대째 사장의 후처로 들어와 하루아침에 세 딸의 어머니가 되고서도 버텨냈으리라.
시부모님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말 많은 친척들과도 지지 않고 싸워온 어머니의 지위는 장남인 유키를 낳고부터는 철옹성이 되었다. 아버지와 배다른 누나들도 유일한 아들인 유키를 금지옥엽으로 대했다.
유키는 숨이 조금 막히기는 했지만 온실 같은 환경 속에서 큰 좌절도, 소년다운 흔한 고민 이상의 고민도 모른 채 자랐다.
대학교 입학을 계기로 유키는 요코하마에 있는 집에서 나와 도쿄 고마고메 역 근처 빌라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수화 동아리에 들어갔다. 마침 그 무렵 둘째 누나가 중증의 난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리쿠기엔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1LDK의 빌라는 벚꽃놀이 철이 되면 본인을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어머니가 구입해줬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자매 셋이 나란히 만개한 벚꽃 구경하기를 연례행사로 삼고 있다.
올해는 상중인 다카코를 배려해서 중지될까. 어머니가 혼자서라도 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키는 금잔에 뻗었던 손을 무릎 위로 되돌리고 물었다.
“이모부 사건 관련 일 말인가요?”
다카코의 남편인 다치하라 교고는 두 달 전인 작년 11월 10일, 애견과 산책하던 중 괴한에 목을 졸려 살해당했다.
개는 암컷 웰시코기로 이름이 조르주라고 한다. 작가 조르주 상드에서 따왔다나. 교고가 다치하라 법률사무소를 사위에게 물려주고 현역에서 은퇴한 3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는 산책은 교고에게 빼먹을 수 없는 운동이 되어 있었다.
아침 산책은 아침 식사 전, 평소 같으면 6시 정각에 집을 나선다. 하지만 그날은 한 시간 이른 5시에 현관을 나섰다. 십수 년 만에 동창회가 열리게 됐는데 아리마 온천에 가서 일박하는 일정에 참석하기 위해 8시에는 출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가도 무리는 없었지만 교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교고의 시체가 발견된 시각은 오전 6시 20분. 장소는 산책 코스인 공원 벤치였다.
발견자는 동네에 사는 사십 대 남성으로 매일 아침 그 공원에서 걷기 운동을 하다 보니 개와 함께 산책하는 교고와 자주 마주쳐서 서로 가볍게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였다고 한다.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다 싶어서 말을 걸며 어깨에 손을 뻗자 손끝이 닿는 순간 상반신이 옆으로 휙 기울어졌고, 목에는 머플러 같은 물건에 졸린 흔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개와 산책하면서 큰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데다 윗옷 주머니 안에 있던 동전지갑이나 집 열쇠도 그대로 있었다. 노상강도의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참고로 조르주는 같은 공원 안을 돌아다니다 무사히 구조됐다.
“조르주가 짖지는 않았나요?”
“그런 증언은 없었어. 워낙 순한 애라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한테나 택배기사님들한테나, 사람한테 짖은 적이 없어.”
“발견한 남성은 정말 아무 관련이 없고요?”
“남편 시체가 발견됐을 때 사후 한 시간은 지난 때였어. 그분한테는 동기도 없고 경찰도 알리바이를 확인했어.”
“공원 방범카메라에 뭐 찍힌 영상은 없나요?”
“벤치가 사각지대에 있는 바람에. 카메라가 공원내부를 모조리 다 촬영하지도 않고, 도움 될 만한 영상은 없었나 봐.”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범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이라도?”
다카코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벚꽃 빛깔 볼터치가 들어간 뺨에 그늘이 지고 이마라인을 따라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인다. 지금껏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그 사람은 언제나 온전히 의뢰인 편이었어.”
교고는 건실한 경영자이며 유능한 변호사였다. 민사사건을 주로 다루는 다치하라 법률사무소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늘 몇 명의 변호사가 소속되어 있었고 번창했다.
“그야 잘 알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있고.”
“원수로 갚은 거라면 계획적이라는 이야기가 되잖아? 남편은 원래 평소에는 한 시간 늦게 산책을 나가. 그 시간에 나가기는 그날이 처음.”
“그렇다는 말은 범인이 동창회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다고 한 시간이나 일찍 산책할 줄 어떻게 알고.”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든가 아, 이모부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라든가.”
“…… 그렇다는 말이겠지.”
“집안 동정을 지켜보다가 기회를 노렸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 경찰도 물어보더라고. 집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진 않았느냐고.”
그때 직원이 다음 요리를 들고 왔다. 동그랗고 작은 홍백 떡을 넣고 끓인 떡국이었다. 달큼하고 걸쭉한 미소(주: 일본식 된장)로 맛을 냈는데, 뚜껑을 여니 따끈한 김과 함께 유자향이 올라왔다.
“미안.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리고 한동안은 친척들 근황이며 좀 전에 끝난 우타카이 이야기, 심사위원들의 취향 같은 무난한 이야기들만 나눴다.
싱그러운 초록색 깍지 콩이 든 게살 밥과 싸락눈처럼 잘게 썬 두부를 띄운 된장국이 나오고 직원이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젓가락도 들지 않고 유키는 물었다.
“그래서 저한테 부탁하고 싶다는 게?”
“아이 참, 유키야. 이제 곧 식사가 끝날 텐데.”
다카코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국 한 모금, 밥 한 술, 어머니와 같은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차분한 동작으로 수저를 놀리며 다카코는 말했다.
“있지, 이런 때 가장 의심받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최초 발견자일까요?”
“아니. 우리…… 집안사람들이야. 그중에서도 함께 사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랑 시후미…….”
시후미는 교고와 다카코의 양자인데 실은 손자로 부부의 외동딸인 미나코가 낳은 아들이다.
교고는 사무소의 유망주 청년을 미나코의 남편감으로 점찍어 뒀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미나코는 펄쩍 뛰며 반발했다. 열한 살이나 연상이었던 데다 미나코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애인이 있었다.
미나코 친구의 오빠 친구였던 사이키 아키라는 소극장에서 활동하는 극단원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팬도 제법 있었고 주인공 역을 맡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는 빠듯해 호스트바에서 일했는데 그 일로 번 돈은 대부분 외모 치장과 극단 활동비로 사라졌다.
교고가 그런 남자를 사위로 인정할 리 없어서 미나코는 가출,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해서 결혼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시후미였다.
그리고 얼마 뒤 사이키가 소속된 극단은 해체됐다. 호스트로 잘나가기에도 살짝 한물가버린 사이키는 육아와 계약직 일을 병행하는 미나코의 기둥서방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사이키는 술독에 빠져 살았고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것도 미나코가 아닌 어린 시후미에게. 시후미의 엉덩이에는 담배로 지진 흉터가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결혼생활은 6년을 채우지 못했다. 미나코는 다섯 살이 된 시후미를 데리고 도망치듯 친정으로 돌아왔다. 교고에게 자존심을 세울 기운도 없을 정도로 미나코는 피폐해 있었다.
반년 뒤, 미나코는 교고 사무소의 유망주 미타 다다히코와 재혼했다. 다다히코는 온화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교고의 신뢰를 얻어 오랜 세월 다치하라 집안에 드나들었고, 미나코를 어릴 때부터 봐온 사람이었다.
다다히코의 성품이라면 시후미가 비록 핏줄은 아니지만 양아버지로서 지켜야할 의무 이상으로 섬세한 애정을 쏟아줬을 터다.
시후미를 사랑하지 못했던 이는 바로 미나코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유키는 생각한다. 시후미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미나코는 임신했다. 미나코와 다다히코, 교고와 다카코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유키는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해 여름부터 시후미가 조부모의 양자가 되어 다치하라 집안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미나코는 미타 집안의 ‘장남’인 고타로를 낳았고 2년 뒤에 딸 미즈키를 낳았다.
시후미의 심정이 어땠을지, 유키는 헤아릴 수 없다.
유키가 시후미와 가깝게 지낸 기간은 대학교 1학년 여름부터 3학년 말까지 약 3년간이다. 당시 시후미는 레이가쿠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레이가쿠칸은 전통 있는 학교로 유키의 어머니인 요코의 모교이기도 한데, 교고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한편 센다기에 있는 다치하라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세이세이 학원은 명문대 합격률로 매년 전국 톱 자리를 다투는 중학교 고등학교 통합학교이다. 편입생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 때 미역국을 마시면 고등학교 때 ‘약간 명’을 모집하는 데 합격하는 수밖에 없다.
교고는 시후미를 세이세이 학원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과외선생으로 현역 국립대학교 대학생이며 같은 분쿄 구 안에 사는 유키에게 눈독을 들였다. 유키로서도 보수가 짭짤한 아르바이트였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러 일주일에 나흘간 다치하라 집에 다녔다.
그때 유키는 시후미가 굉장히 머리가 좋으며 지나치게 조숙한 소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말수가 적고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사에 너무도 초연해서 실체가 아닌 허상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 눈매가 또렷한 시후미의 눈동자는 너무도 맑아서 생물이 살 수 없는 물처럼 투명했다.
원래 이런 애였나?
유키는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미나코가 사이키와 이혼한 뒤 일 년에 몇 번인가 시후미를 볼 기회가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 요코가 다카코와 사이가 좋아서 어머니를 통해서도 시후미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요코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시후미를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
미나코에게 아직 임신 징후가 없어 미타 집안에서 함께 살 무렵인, 구립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사이키한테서 받은 학대 때문에 조금 어두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활발하고 무엇이든 잘하면서 어른들한테는 약간 반항적인, 개구쟁이와 우등생 그 어느 사이쯤인 아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아이라고.
유키는 딱 한 번 어머니를 따라 시후미의 피아노 발표회에 간 적이 있다. 시후미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였는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주자 바로 앞 순서였다. 곡목은 베토벤의 <비창> 제3악장.
시후미의 손가락이 건반 위로 내려오고 첫 한 음이 울려 퍼진 바로 그 순간, 글자 그대로 소름이 돋았다. 나른하면서도 영롱히 아름다운 그 소리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피아노 소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무렵의 시후미는 숨 쉬듯 피아노를 쳤고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있었다고 안다.
그런데 그 피아노도 쉬고 있다고 했다.
시후미가 무사히 세이세이 학원에 합격한 뒤로는 명절날 어머니 친정에 친척들이 모일 때나 제삿날 같은 자리에서 일 년에 한 번이나 만날까 말까 했다. 시후미는 여전히 무척이나 예의가 발랐지만 그 깍듯한 예의는 주위 사람들을 거부하는 벽으로만 느껴졌다.
현재 시후미는 에이료 대학교 법학부 4학년이다. 제1지망이었던 국립대학교에는 떨어졌는데 사실 수능시험 성적은 발군이었다고 들었다. 시후미가 지원한 그 대학은 후기 일정을 폐지했기 때문에 한 번 떨어지면 끝이었는데 바로 그 본고사에서 미끄러졌다. 아마도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던가, 분명히 뭔가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만큼 시후미는 우수하다. 실제로 3학년 때 예비시험을 통과하고 작년에는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난 아니야.”
뜬금없이 다카코가 말했다.
“난 남편을 죽이지 않았어.”
다카코의 얼굴은 진지했다.
“난 현관 앞에서 남편을 배웅한 다음 한 숨 더 잤어. 증언해줄 사람은 없지만.”
“시후미는요?”
“하필 시후미는 집에 없었어. 그 전날, 늦어질 테니까 저녁은 챙길 필요 없다, 어쩌면 못 들어올지도 모르겠다면서 오후에 외출했거든. 물론 집에 있었다고 해도 잘 시간이기도 하고 가족들 증언은 유효성이 없잖아. 하필이라고 말한 이유는 내 알리바이를 증명해줬으면 해서가 아니라 시후미가 범행시간, 범행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내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다카코는 어느새 밥풀 한 톨, 채소 절임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은 다음 젓가락을 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눈도 깜박하지 않고 유키를 빤히 쳐다봤다.
“시후미를 의심하고 있어, 난.”
유키는 오이절임을 오도독, 소리 내어 깨물었다.
11월 10일 아침, 다카코가 6시 넘어 다시 잠에서 깼을 때 교고와 조르주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집안을 다 둘러보고 마당에도 나가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옷을 챙겨 입고 근처를 돌아보러 나갔다.
다카코가 조르주를 산책시킨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산책 코스는 몰랐지만 동네에 큰 공원이 있으니 분명 그곳을 지나리라고 생각했다.
공원 주변에 수많은 경찰차와 암행 순찰차가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칠십 대로 짐작되는 남성이 불상사를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남편일지도 모르겠다며 자청해서 시체와 대면했다. 그게 7시쯤이었나.
다카코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그길로 교고가 옮겨진 병원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러다 겨우 생각이 미쳐서 시후미와 미나코에게 연락한 때가 9시 전후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시후미는 시나가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티 호텔 이름을 댔다.
“무슨 용건 있으세요?”
차가운 목소리에 기가 죽긴 했지만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시후미는 마지막으로 어느 병원이냐는 질문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먼저 네리마 구의 샤쿠지이에 사는 미나코와 다다히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고, 시후미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녹차와 정월 떡인 하나비라모치가 나와 다카코는 잠시 말을 끊었다.
“시후미는 여자애랑 같이 있었어. 내 전화를 받고 깼다고 했지. 경찰 조사에 따르면 시후미가 9일 밤 10시에 체크인하고 다음 날 아침 10시에 체크아웃한 건 확실해. 여자애도 시후미는 계속 호텔 방에 있었다고 증언했고.”
“그 여자애라는 사람은?”
“시마다 유카라고, 에이료 대학교 근처 아오무기라고 하는 카페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아가씨야.”
에이료 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야마노테 선을 타고 시나가와에서 하나인가 두 정거장 떨어진 역이다.
“증인이 있는데…….”
“시후미를 보호하려고 거짓말했을지도 모르잖아? 시후미가 수면제를 먹였을 수도 있고. 시후미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불면증 때문에 정신과에서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은 적이 있어.”
“경찰은 뭐라고 해요?”
“장례식 때도 왔었는데, 다케우치라는 형사 말에 따르면 혹시라도 시후미가 범행시간 전후에 룸서비스를 시켰거나 프런트에 얼굴을 내비쳤다면 오히려 시후미를 의심했을 거라고. 하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잠만 잤다는 말은 무방비 상태였다는 소리니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고 했어.”
“제 생각도 그래요.”
“경찰이 택시회사에 문의도 해봤는데 그런 젊은 남성을 태웠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했어. 호텔 엘리베이터, 로비, 비상구, 지하 주차장에 있는 방범 카메라에도 호텔에 머물렀던 12시간 동안 시후미가 찍힌 장면은 없대.”
“그럼 알리바이는 완벽하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잘 모르지만, 호텔 카메라는 절대 사각지대가 없어? 사각지대를 요리조리 이용해서 전철을 탔다면? 조사해봤어. 4시 33분 JR 시나가와 역에서 출발하는 전철이 야마노테 선 내선순환선의 첫차야. 이걸 타면 니시닛포리에 59분에 도착해. 1분 차이로 게이힌도호쿠 선도 있고. 거기서부터 남편이 살해된 센다기 공원까지는 그 애 걸음이면 20분, 달리면 15분. 사망추정시각인 5시 반에 맞아 떨어져. 떠날 때는 사람들 속에 적당히 섞여서 가거나, 운이 따라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다카코의 논리는 유키가 볼 때 억지였다. 마치 시후미를 범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시후미를 의심하세요?”
다카코는 소녀처럼 울먹울먹한 눈으로 유키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숨을 토해냈다.
“시후미 성장과정은 알지? 그런 남자의 핏줄이니까 잘못 삐끗하면 큰일 난다면서 남편은 그 애를 거뒀을 때부터 엄하게 대했어.”
“아무리 그래도…….”
“정말 불쌍할 정도로 엄하게 대했어. 학교만 해도 그래. 시후미는 계속 레이가쿠칸에 다니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시후미의 의사 따위는 들을 생각도 안 했어. 시후미를 미워해서가 아니야. 남편은 그저 다 시후미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어.”
그랬나. 시후미는 세이세이 학원에는 가고 싶지 않았던 걸까. 3년 가까이 과외선생 노릇을 했으면서 유키는 시후미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공부에 방해된다면서 피아노도 강제로 그만두게 하고. 제발 계속 치게 해달라면서 시후미가 남편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는데, 시후미가 그런 모습까지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남편은 세이세이 학원 고등학교에 합격하면 피아노를 치게 해주겠다고.”
“시후미가 이모부를 원망했었나요?”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겠지. 남편뿐 아니라 나까지.”
유키는 다카코가 그렇게까지 시후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면서 왜 조금이라도 더 시후미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불쌍했다고 말만 하지, 다카코는 교고에게서 시후미를 감싸준 적이 없었던 눈치다.
아니다, 탓할 수만도 없다. 남편 뜻에 거스르는 짓 따위, 다카코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옛날사람이라든가 시대착오적이라는 표현을 떠나 원래 기질이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다. 유키도 예전에는 그런 다카코를 조신하고 다소곳한 여성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 사실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엷은 동경 같은 마음을 품기도 했었다.
“아무리 그랬다고 죽이기까지.”
“응, 나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했어.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나서…… 나, 맨 처음 의심한 사람이 시후미였어.”
다카코는 하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동작으로 도자기 녹차 잔에 손을 뻗었다. 세 번에 걸쳐 다 마신 다음 냅킨으로 입술을 살짝 누르고는 말했다.
“유키, 사건조사 좀 해주면 안 될까?”
“예?”
느닷없는 의뢰에 유키는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쏟을 뻔했다.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 시후미일 수가 없다는 증거를 찾아줬으면 해.”
“왜 저한테?”
“너, 탐정이잖아?”
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죠? 이모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된다기보다는, 선배가 하는 탐정사무소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나 한 수준이라.”
졸업을 앞두고 크게 다친 유키는 어쩔 수 없이 몇 달 간 입원을 해야 했고, 결국 입사하기로 되어 있던 기업의 취직기회를 날려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키가 제 발로 물러났다.
그때 여차저차하다 보니 수화 동아리 선배인 마쓰에다 도코가 권하는 대로 그녀가 소장인 탐정사무소 조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말이 탐정사무소이지 직원이 달랑 유키 한 명뿐이라 의뢰 건수가 두어 개만 쌓여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바빴다. 그런가 하면 며칠씩 의뢰 한 건 없는 날도 수두룩해서 돈 벌 기미가 안 보이는 달에는 학원이나 스낵바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버텨냈다.
“선배랑 저 둘뿐인 작은 사무소고, 기껏해야 불륜조사 아니면 신원조사 수준, 고양이나 잉꼬 찾는 일 나부랭이나 하는 곳인데요.”
더 정확하게는 ‘하는’이 아닌 ‘했던’이다. 사무소는 연말에 그만뒀다. 4월부터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다.
아버지 회사가 요코하마에 있어서 지금 지내는 빌라에서도 나와야 한다. 지금은 이사 준비를 하면서 요코하마에 있는 적당한 임대 빌라를 찾고 있다.
“그럼 이 일도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해주면 안 될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라는 점을 인정하시고도 의뢰하신다면 저도 나름대로 이모부 사건을 조사해볼게요.”
유키는 천천히 녹차를 마셨다. 다행히 입사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고마워. 우선 이거.”
다카코가 내민 봉투를 유키는 되밀었다.
“이모한테 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잠시 입씨름을 한 끝에 결국 다카코가 포기하고 봉투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다카코는 이렇게 말했다.
“시후미, 장례식 때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 봤지? 고타로랑 미즈키는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는데.”
그랬었나.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아. 일부러 슬픈 척 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나, 봤어. 그 아이…… 웃고 있었어. 분향할 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입술 끝을 씨익 올리면서 조용히 웃고 있었어.”
다카코의 의뢰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1월 20일, 유키는 아오무기 카페를 찾아갔다.
아오무기는 복고가 콘셉트인지, 아니면 옛날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이 시대가 바뀌어 복고가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고 넓지 않은 내부는 불투명유리를 씌운 램프 불빛을 받아 옅은 호박색으로 어룽져 있다.
무늬가 조각된 칸막이. 커피색 가죽 의자. 바 안에서는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무뚝뚝한 마스터가 동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유키는 종업원에게 카페오레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시마다 유카인가.
카페오레를 가져온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시마다 씨인가요?”
“네, 그런데요.”
놀란 듯 쳐다보는 얼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본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인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결이 무척 곱고 여드름 하나 없다. 다만 옅은 눈썹과 두툼한 눈꺼풀 탓에 눈매가 흐릿했다. 이따금 앞니 두 개가 보이는 입술에 조금 짙은 색 립스틱이 발라져 있는데 그것이 유일한 화장다운 화장이었다. 풀면 길 것으로 짐작되는 머리카락은 쫑쫑 땋아서 하나로 묶어 올린 모습이다.
유키는 솔직하게 이름을 밝히고 다치하라 교고 살인사건과 관련해 질문이 있다고 말했다. 일이 끝난 뒤, 아니면 다음에 시간을 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자 오늘은 6시까지 일하니 그 이후 역 반대편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남아서 JR선을 타고 시후미가 머물렀다는 시나가와의 호텔에 가봤다. 도어맨도 몇 명 있고 지하주차장으로 유도하는 직원도 상주하고 있었다. 프런트에 사람이 없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호텔 스태프 단 한 사람에게도 목격되지 않고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일찌감치 약속한 패밀리레스토랑으로 가서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아오무기의 커피와 달리 향도 없는 데다 바싹 졸인 커피에 맹물을 탄 느낌이라 맛이 없었다.
유카는 6시 15분에 왔다. 유키와 눈이 마주치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선물로 초콜릿케이크를 준 다음 겨우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뭐 대단한 대접이라도 하는 꼴 같아 민망하지만 뭐든 주문해주세요, 하며 메뉴판을 건네주자 유카는 진지하게 고민하다 딸기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시마다 씨는 에이료 대학교 학생이신가요?”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키가 물었다.
“네? 설마요!”
유카가 깜짝 놀란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에이료 대학교라니 말도 안 돼요.”
유키는 상의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어 녹음기의 녹음 스위치를 눌렀다.
“크게 불편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시후미와는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됐는지요?”
“개인적으로 대화하게 된 건 작년 7월부터예요. 가게에 자주 왔기 때문에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저쪽 서점에서 마주쳐서…….”
“역 앞에 있는 그?”
“네. 그 통유리로 된 서점. 거기 문고본 코너에 서서 책을 읽다가 문득 보니 옆에 시후미가 서 있었어요. 아오무기에서 일하시죠, 하면서 말을 걸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그러다 제가 읽고 있던 책 이야기를 한참 했어요. 북유럽 호러 작가의 단편집이었는데 시후미도 그 사람 소설을 좋아한다고……. 시후미, 가게에서 볼 때는 어딘가 좀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었는데 전혀 딴판으로 대화하기 편하더라고요. 그 뒤로 가게에서도 조금씩 대화를 하게 됐고 책도 서로 빌려주고 그러다 음, 어느새…….”
유카는 발갛게 물든 뺨을 계속 문질렀다.
“저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어요. 에이료 대학교의 예쁜 여학생들이 분노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나 할까. 나 따위랑 시후미가…….”
“나 따위라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위로 안 하셔도 돼요.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커플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유카는 내가 부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건 아니어 보였다. 아니, 비하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에이료 대학교 여학생이라니요?”
“처음에는 가게까지 찾아와서 심술을 부렸지만 마스터가 쫓아내고 출입금지 시켜줬어요. 마스터가 우리 삼촌이거든요. 독신으로 애도 없고 해서 어릴 때부터 절 예뻐해 주셨어요. 가게에 출입을 못하게 했더니 길에 잠복해 있기도 하고……. 그 애들 중 한 명이 시후미를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진짜 예쁜 애였는데, 처음에는 전 여친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아, 딱히 무슨 해코지를 당하진 않았어요. 절 에워쌌을 때는 조금 무섭긴 했지만 거울도 안 보고 다니느냐, 분수를 알아야지, 이런 말만 했어요. 뭐, 그 정도에는 이골이 난 편이니까……. 그리고 우엉이라고도 했어요.”
우엉? 되물으려다 입에서 나오기 직전에 말을 삼켰다. 까무잡잡하고 깨깨 마른 유카를 놀린 말이 분명하다.
“저기, 시후미가 우엉전이란 거 아세요?”
“시후미가 뭐라고요?”
“우엉 전. 그 애들이 만들어낸 말 같아요. 우엉 전문이라는 소리겠죠. 나처럼 피부가 새까맣고 비쩍 말라빠진 여자애가 시후미의 취향이라 그 부분만 통과되면 나머지는 뭐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시후미한테 차인 여자애들 중에 나중에 준 미스 캠퍼스가 된 애도 있는데, 정말 배우 뺨치게 미인인 데다 피부가 뽀얗고.”
“질투하라고 하세요. 그쪽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소리니까.”
“아,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우엉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시후미랑 사귈 수 있었으니까. 정말로 행복했으니까.”
“현재 시후미와는…….”
“안 만나요. 피해를 끼치게 될 테니까 이제 만날 수 없다고 전화로 이야기한 게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뒤였고, 그날로 연락도 끊겼어요. 물론 가게에도 안 오고요.”
“유카 씨가 먼저 연락해 본 적은 없나요?”
“네? 아니요, 어떻게 그래요!”
유카는 또 손사래를 쳤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유키는 진심으로 말했다. 유카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핵심으로 들어갔다.
“사건 전날 이야기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작년 11월 9일이죠.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시후미랑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니까. 시후미는 리포트 쓸 때 필요한 자료를 보러 학교에 간다고 했고 그 이후에 만나자고 해서 6시 반에 여기서 만났어요. 선로 하나 너머에 있어서 그런지 의외로 여기엔 에이료 대학교 학생들이 잘 안 오거든요.”
유키는 가게 안을 슬쩍 둘러봤다. 유키로서는 패밀리레스토랑이라는 장소와 시후미가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리고 호텔로 갔어요. 시후미는 늘 제대로 된 호텔 방을 잡아줬어요. 저기, 뻔뻔하게 대놓고 다 말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시후미의 알리바이 문제니까 경찰한테도 다 이야기했어요. 확실하게 말 안 했다가 시후미가 의심받는 건 싫으니까요.”
유카는 결심이라도 한 듯 그때 처음으로 유키의 눈을 쳐다봤다.
“시후미, 아직도 의심받고 있죠?”
그런 오해를 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다 털어놓는 모양이다. 유키는 시선을 피한 채 컵 바닥에 남은 커피를 마시며 약간의 미안한 심정을 얼버무렸다.
“체크인한 때가 몇 시쯤이죠?”
“아마 10시쯤이었을 거예요. 영화가 9시 반 정도에 끝났으니까.”
“곧바로 방으로?”
“네. 프런트에서 바로 방으로 갔고 아침까지 내내 같이 있었어요. 둘 다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요.”
“맹세코 말입니까?”
“맹세코요. 샤워 할 때는 따로 있었지만 기껏해야 10분 정도고, 그 다음엔 함께……. 저, 원래 잠을 깊이 못 자는 데다 특히 시후미랑 있을 때는 자는 얼굴 따위 보여주기도 싫고. 시후미가 계속 팔베개를 해줬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리를 비웠다면 분명히 알았을 거예요.”
유카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장담했다.
“체크아웃은?”
“아침 10시요. 방에 있던 커피 마시고 어쩌고 하다 보니 체크아웃 시간이 다 돼서. 9시쯤에 시후미 어머니가 시후미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시후미는 별일 아니라고 했어요. 서두를 필요 없다고.”
“시후미가 서두를 필요 없다고 했다고요?”
유키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살해를 당했다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네. 그래서 설마 그런 일이…… 시후미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뉴스로 알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경찰도 와서 꼬치꼬치 캐묻기에 시후미가 의심받는구나 싶어 무서워서.”
“걱정 마세요. 유카 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시후미는 범인이 아니니까.”
유카는 유키를 올려다보며 까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을 나가서는?”
“역에서 헤어졌어요. 저는 반대쪽인 요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