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
박미숙·희정·이승훈·전주희·한인임·이희종·정하나
지음
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
초판 발행 2023년 1월 1일
지은이 박미숙·희정·이승훈·전주희·한인임·이희종·정하나
기획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법률감수 권호현 변호사
편집 이동권
교정교열 민중의소리 교열부
디자인 MJ Design Center
일러스트 이동환
경영지원 김대영
인쇄 ㈜서울문화인쇄
펴낸이 윤원석
펴낸곳 민중의소리
전화 02-723-4260
팩스 02-723-5869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69 서원빌딩 11층
등록번호 제101-81-90731호
출판등록 2003년 1월 1일
웹사이트 www.vop.co.kr
전자우편 su@vop.co.kr
전자책 제작 ㈜네오딕
웹사이트 neopub.co.kr
값 10,000원 ISBN 979-11-85253-99-2
ⓒ박미숙·희정·이승훈·전주희·한인임·이희종·정하나
일러두기
이 책에 실린 글과 이미지를사용할 경우 반드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프롤로그 | ||
001 | 밥줄의 배신 | 박미숙 |
1장 장덕준 | ||
002 | 장덕준, 박미숙 이야기 | 희정 |
2장 쿠팡스캔들 | ||
003 | 로켓의 민낯 | 이승훈 |
3장 야간노동사회 | ||
004 | 퇴행적 혁신과 새벽소비사회 | 전주희 |
4장 과로사 | ||
005 | 쿠팡 과로사의 주범들 | 한인임 |
5장 제언 | ||
006 | 조작된 편리, ‘야간노동’ ‘상품화된 밤’을 되찾기 위해 | 이희종·정하나 |
007 | 추천하는 말 | |
강규혁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진경호 전국택배노조 위원장 박석운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 공동대표 강은미 정의당 국회의원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이승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부 부교수 |
쿠팡에서 사람이 죽었다
2020년 3월 12일 안산1 캠프 배송기사 (47세, 남, 계약직)
경기도 안산 빌라 계단에서 심야배송 중 사망
2020년 5월 28일 인천물류센터 노동자 (40세, 남, 계약직)
인천물류센터 화장실에서 새벽 2시 30분경 쓰러진 채 발견
2020년 6월 1일 천안물류센터 조리사 (39세, 여, 외주업체)
조리실에서 가슴통증 호소하다 쓰러짐
2020년 10월 12일 칠곡물류센터 노동자 (27세, 남, 일용직)
야간근무 마치고 새벽 6시 귀가한 뒤 욕실서 쓰러진 채 발견
2020년 11월 10일 이천 마장물류센터 노동자 (50세, 남, 외주업체)
작업 도중 어지러움을 호소한 뒤 쓰러져 사망
2021년 1월 11일 동탄물류센터 노동자 (50대, 여, 일용직)
동탄물류센터에서 야간근무를 마친 뒤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
2021년 3월 6일 송파 1캠프 배송기사 (40대, 남, 계약직)
거주하던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
2021년 3월 6일 구로캠프 관리자 (40대, 남)
쿠팡맨 출신 관리자로 자택에서 새벽에 쓰러진 채 발견
2021년 3월 24일 쿠팡배송기사 (42세, 남, 계약직)
야간배송에 투입된지 2일차에 배송지 인근에서 쓰러진 채 발견
2022년 2월 11일 동탄물류센터 노동자 (53세, 여, 무기직)
2021년 12월 24일 오전 11시 30분경 어지럼증과 헛구역질 호소하며 작업 중 쓰러짐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스물일곱의 건강했던 아들에게
과로사란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미숙 경북 칠곡 쿠팡물류센터에서 심야노동 후 숨진 장덕준 씨의 어머니. 남편 장광 씨와 함께 쿠팡의 심야노동 과로사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
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쿠팡물류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원하고 몇 번 탈락한 뒤였기에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흥분하며 너무 좋아했다. 근무 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였다. 고객의 주문량이 많을 때는 새벽 6시까지 연장 근무도 했다.
2020년 10월 11일, 아들은 오후 4시 30분 집을 나섰다가 다음 날 새벽 6시 귀가했다. 집에 오자마자 까치발로 곧장 욕실로 걸어가 땀과 먼지로 덮인 옷들을 문 앞에 벗어 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아들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욕실 앞에 가지런히 놓인 아들의 휴대폰과 소지품, 동생에게 주려고 사 온 웨하스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벗어 놓은 옷가지들은 물에 담가 둔 뒤 욕실에서 잠든 아들을 깨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남편을 불러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욕조에 엎드려 있었다. 아들을 욕조에서 꺼냈다. 119 구급대에 연락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아들의 얼굴이 잠깐 환해지는가 싶더니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피가 흘러내릴 즈음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아들은 심장충격기를 사용할 사이도 없이 응급실로 이송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의사들이 응급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곧 아들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의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힘들 것 같다”고 말할 때에도 아들이 곧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의사는 아들이 병원에 도착하고 한 시간쯤 지나 사망선고를 내렸다. 나는 사망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의 손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었고, 얼굴은 출근하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의 시신을 운구차에 싣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장례 치를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아들을 잘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영안실에 아들을 홀로 남겨 두고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아들의 피 냄새가 온몸을 감싸며 급박했던 아침의 기억을 되살렸다. 현관문을 열자 또다시 피 냄새가 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아침의 처참했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피 냄새를 제외하면 평소처럼 평온했다. 병원에 간 사이에 동생이 형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피를 닦고 청소를 마친 뒤였다.
나는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아들의 소지품을 찾았다. 책상에 올려 둔 휴대폰을 챙기고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찾으려고 사진첩을 뒤졌다. 그런데 아들의 최근 모습은 없었다. 사진 찍는 걸 귀찮아해 피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진 하나 제대로 남겨 놓은 게 없다니.’ 아들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막막하게 다가왔다. 자식의 죽음에 부모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들어 허탈했다. 결국 나는 아들의 휴대전화만 챙겨 장례식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아들의 휴대전화를 들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모든 것이 부모인 우리의 잘못인 것 같아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들이 사라져 버린 공포가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아들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7년 정들었던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해주어야 하는데 정신이 멍했다.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주저하고 있을 때 ‘쿠팡C팀야간’이란 곳에서 전화가 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아들이 출근 신청을 했는데 코로나 자가 진단을 하지 않아 연락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들이 새벽 퇴근 후 사망했다”고 짧게 말했다. ‘쿠팡C팀야간’은 잠시 멈칫하더니 “근무 취소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근무 취소하겠습니다. 다음에 근무 지원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문자를 받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도 아들이 일 년 반을 일한 회사인데, 근무 외에는 관심 없는 듯 냉정하게 대응하는 것이 느껴져 언짢았다. ‘저곳은 죽은 사람도 노동자로밖에 보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었다. 뒤이어 통근버스를 같이 이용하는 회사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통근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들이 도착하지 않아 연락했단다. 나는 그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회사 동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새벽까지 같이 일하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들은 아들의 사망 소식에 적잖게 놀란 듯했다.
나는 아들의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 덕분에 회사와 동료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면서 장례 준비를 시작했다. 영정사진을 만들기 위해 가족들의 휴대폰 속에 남아있는 아들의 사진을 찾고, 액자를 고르고, 꽃을 선택한 뒤 영정사진이 도착하기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들과 같이 일하던 동료 두 명이 왔다. 나는 “와주셔서 고맙다”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면서 아들이 평소에 회사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오늘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는지 물었다. 동료들은 아들이 “근무 중 체한 것 같이 속이 메스껍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가슴을 움켜쥐고 통증을 호소했는데 잠시 안정을 취하고는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그래서 “쉬는 날 꼭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생각지 못했던 사망 원인이 있을 수 있었다. 동료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의사가 평소에 지병이 있는지, 머리나 가슴이 아프다고 한 적이 있는지 물었던 이유를 깊이 생각한 적 없었다. 아들을 죽게 만든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쓰러진 아들을 좀 더 빨리 발견하지 못한 자기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면서 서로 말도 못 하고 눈빛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 동료들이 하나둘씩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덕준이 너무 고생했다”였다. 그제야 지나쳤던 휴대전화 메시지가 떠올랐다. ‘덕준 몸은 개안나’라고 답 없이 남겨진 회사 동료의 마지막 카톡이었다.
돌이켜보니 아들은 일을 시작할 때의 건강했던 모습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고 피곤해 보였다. 일을 시작하고 3개월쯤 됐을 때 “만보기를 차고 일했더니 하루에 5만 보가 찍혀 있더라”며 장난스럽게 했던 말도 기억났다. “코로나로 물량은 늘어났는데 인원 보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두 명이 할 일을 혼자 했다”는 말도 떠올랐다. 아들은 일을 시작하고 일 년쯤 되어갈 무렵에는 몸무게가 15kg이나 줄었다. 그때부터는 친구를 만나거나 좋아하는 게임, 영화를 보는 것도 멈추고 퇴근 후 바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우리는 노예예요. 우리는 쿠팡을 이길 수 없어요.”라고 했던 아들의 말이 아들이 죽고 쿠팡과 마주하고 나서야 그 의미가 이해됐다.
쿠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을 수명이 다한 부품으로 취급했다. 회사를 위해 일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책임을 피하려고 변명으로 일관했고, 바로 들통날 거짓말로 우리 가족을 속이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우리 가족은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쿠팡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아들이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쿠팡은 유족인 우리에게 산업재해 신청에 필요한 서류조차 제대로 내어주지 않으면서 언론에는 산업재해 신청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들의 업무가 포장용 빈 박스와 빈 비닐을 보충하는 단순 업무로 노동강도가 약했고, 주 평균 44시간을 근무했기 때문에 과로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시간 과다(12주 평균 58시간 40분), 야간근무, 중량물 취급, 근무일과 휴일이 불규칙, 정신적 긴장, 유해한 작업환경의 사유에 의한 업무상 과로로 사망’, ‘근육이 급성으로 파괴되어 횡문근융해증이 의심되며 이는 근육의 과다 사용이 주요 원인’이라고 산업재해 인정 판정을 내렸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욕조에 웅크린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스물일곱의 건강했던 아들에게 과로사란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없는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평범했던 모든 일상이 멈춰 버렸다. 약에 의지해야만 잠을 자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간 아들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남은 가족에게, 또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들어 가슴이 먹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들의 죽음 후에도 쿠팡물류센터에서 죽음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쿠팡은 노동자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들의 산재 신청 전 산재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더니 산재 판정이 나고서야 ‘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하지만 일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리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최선을 다해서 만든 안전한 환경’ 에서 일한 노동자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생명을 위협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 무척 씁쓸하다. 아들의 일이 있기 전 우리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산업재해, 과로사란 단어는 남의 이야기였다. 나도 아들의 죽음 후에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 이게 우리 밥줄이에요.”
아들 동료의 얘기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판다. 문제가 많다는 걸 알지만 지금 당장 굶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열악한 조건인 걸 알지만 참으며 일할 수밖에 없다는 절실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쿠팡은 아들과 동료들에게 ‘당신들이 선택하지 않았느냐’며 노동자 책임이라고 한다. 정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일까?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쿠팡에서 일하는 아들 동료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실제로는 나한테 선택권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걸 교묘하게 포장을 해놓고는
무슨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희정 기록노동자.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저서로는 『두 번째 글쓰기』, 『여기 우리 함께』,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자 쓰러지다』 등이 있다. 공저로는 『회사가 사라졌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 『숨을 참다』 등이 있다. |
“우리 다신 보지 말자.”
“와, 이 일 진짜 못하겠어요.”
“그래도 돈 떨어지면 생각날걸?”
퇴근 셔틀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음료 자판기 앞에 몰린다. 대기 장소가 비좁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숨겨지질 않는다. 덕준이 소리가 나는 쪽을 흘낏 보니 노란 명찰이다. 오늘 온 일용직 알바. 한 명은 쿠팡 알바를 처음 해봤는지 앓는 소리를 한다.
“발바닥이 너무 아파요.”
“두꺼운 양말 신어야 해. 나 겨울에 할 때는 수면 양말도 신고 왔어.”
다시 보지 말자더니 노하우까지 알려준다. 무릎이, 종아리가, 어깨가, 온몸이 쑤신다는 대화가 이어진다. 덕준도 자신의 무릎에 찬 보호대를 본다. 몇 달 전, 무릎인대가 늘어나 고생을 했다. 출고(OB) 쪽에 사람이 없다고 해서 토트(상품 담긴 바구니)를 쌓아 올린 더미를 포장대로 밀어주는 일을 한동안 했는데, 그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이었다. 하체에 힘을 주고 상체로 밀어내다 보니 무리가 갔는지 무릎이 퉁퉁 부어올랐다. 한 달이나 병원을 다녔는데도 계속 보호대를 착용해야 했다.
자판기 앞엔 어느새 다른 무리가 와 300원짜리 음료수를 하나씩 뽑는다. 이번에도 신입인지 저렴한 음료 캔 가격이 ‘개꿀’이라며 호들갑이다. 한 해 전 쿠팡에 처음 일하러 왔을 때, 자신도 저 300원짜리 음료수를 마시겠다고 굳이 동전을 챙겨 왔었다. 그러나 일을 마칠 즈음엔 음료수라도 안 마시면 손이 떨릴 것 같아 자판기에 동전을 쑤셔 넣던 기억이 있다. 여름이 오니 그것도 필요 없고 제때 물이라도 마셨으면 좋겠는데, 사람들 마실 생수병 옮기는 것도 자신의 일이 되고 나니 덕준은 물이라면 징그럽기만 하다. 쿠팡은 워터1) 업무를 맡겨놓고 온갖 잡일을 다 시켰다.
그래도 일은 적응이라도 되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건 더위였다. 대구의 여름은 길고 무더웠다. 봄가을에도 습기가 높은 물류창고에서 여름을 버티려니 몸이 땀범벅이다. 운동장 넓이의 층에 대형 선풍기 서너 대가 전부였다. 얼린 생수병을 센터 메인에 가져다 놓고 돌아보면 이미 녹기 시작해 바닥이 물로 축축했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이 죄다 열기와 땀으로 벌겋다. “형 멍하니 뭐해요?” 덕준이 뒤돌아보니, 아는 동생이다. 7층에서 같이 일한 지 반년쯤 되었을까. 1년 넘게 일하다 보니 여기 ‘고인물’들하고는 통성명을 하고 지낼 정도다.
“오늘 형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못 봤네. 오늘도 장난 아니었나 봐요.”
“말해 뭐하냐.”
“형은 진짜 고생인 거 같아요.”
“오늘 물량 왜 이러는지. 랩핑 뜯는 거만 천 번은 한 것 같다.”
빈 박스도 천 개 이상 주워 옮긴 것 같았다. 처음 물류센터에 왔을 때는 택배 상하차와 비교해 ‘꿀알바’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한때. 어느새 주 5일 출근에 손목은 너덜너덜해졌다. 물량은 나날이 늘어, 요즘은 누구든 근무 신청을 하는 족족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도 일손이 달린다. 대구 지역이 코로나19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3월보다 수개월 지난 지금이 더 일이 많은 것만 같다. 사람들이 대면하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워서일까. 발송 물량이 끝도 없이 늘고 있다.
알바가 많아진다고 해도 자신의 일이 되어버린 워터를 대체해줄 사람은 없다. 인터넷 셔핑을 하다가 본 쿠팡 알바 후기에 ‘워터에 선발되지 않게 조심하라’라는 글귀를 보고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건장한 젊은 남성이라면 최대한 어깨를 움츠리고 눈에 띄지 않게 하라’라는 조언도 있었다. 물류센터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워터는 알바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게다가 조력 일의 특성상 경력 없는 사람이 하기도 힘들었다. 일 눈치가 없다면 맡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장이건 관리자건 출근만 하면 자신을 7층 워터로 보냈다. 요즘은 날씨 때문인지, 늘어나는 물량 때문인지 전보다 힘에 부친다.
셔틀버스가 들어온다. 사람들이 타고 온 버스를 찾아 이리저리 웅성거린다. 덕준도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일어선다. 마스크를 뚫고 시큼한 땀내가 훅 끼친다. 집에 가는 길이 인적 드문 새벽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덕준은 버스에 올라탄다.
*
장덕준. 당시 27세. 2020년 10월 12일 아침, 자택 욕조에서 발견되어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오전 9시경 사망 선고를 받는다.
“일요일 저녁에 출근을 하고. 보통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새벽 6시쯤 돼요. 집에 오면 바로 씻으러 들어가거든요. 먼지투성이라고. 그런데 7시 반이 되었는데 애가 너무 조용한 거예요. 너무 피곤하면 욕실에 물 담가놓은 채로 잠들기도 하고 그래서. 자는가 하고 문을 두들기는데 반응이 없더라고요. 이상하다 그래서 덕준이 아빠를 불러가지고, 깨워서 방에 가서 자라고 하라고.”
그의 부모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장덕준 씨는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욕조에 쓰러져 있었다.
“사실은 저희도 너무 막막해서. 애를 조금만 빨리 발견했으면 살릴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죠. 우리가 애를 죽였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진짜 멍하니. 식구들이 다….”
사망진단서에는 사망 원인이 ‘미상, 병사’라고 간략히 적혔다.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가족들이 얼이 반쯤 빠져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는데, 장덕준 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왜 안 와? 어디냐?” 5시가 되었는데도 덕준이 셔틀버스를 타러 오지 않아 아는 형이 전화한 것이다.
“덕준이가 이렇게 되었다…하니까 많이 놀라더라고요. 믿어지지가 않았겠죠. 그날 아침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다음날 함께 일한 동료라며 40여 명이 조문을 왔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사이라고 했다. 하루 일당을 버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와준 것이 고맙기만 해서 음식을 챙기고 인사를 하다가 어머니 박미숙 씨는 막연한 마음에 물었다. “덕준이가 평소랑 다른 점이 없었나요?” 건강하던 아들이 왜 갑자기 그리된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체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긴 했어요. 속이 메스껍다고 그랬다고.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고 하고. 그래서 애가 통증을 호소했는데 어떻게 했냐 했더니. 좀 앉아 있다가 괜찮아진 것 같아 다시 일을 했다는 거예요. 왜 그때 바로 일을 했을까. 다른 조치를 취하질 않았을까. 이상한 생각이 든 거죠.”
이번에는 다른 동료가 물어왔다.
“덕준이 형이 가슴을 치는 버릇이 혹시 있었어요?”
“아니요. 없었는데. 왜 그걸….”
“일하면서 한 번씩 흉부 쪽을 두드렸거든요.”
물류센터 한복판에서 멈춰서 답답한 가슴을 두들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제야 아들이 들려주던 일터 이야기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친 아들에게 아침이라도 차려줄까 물으면 입맛이 없다거나 첫차 기다리며 편의점에서 사 먹었다고 하는 날이 많았다. 밤새워 일하고 온 아들이 안쓰러워 옆에 앉으면 덕준이는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몰리는 일에 대해 토로했다. 친구 같은 아들이었다. 별스러운 이야기, 소소한 일상을 나누었지만 새벽 근무를 마치고 온 날에는 애써 더 들어주려 했다. 최근 들어 힘들다는 말이 잦았다. 일은 많은데 인원은 늘지 않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층은 워터 일을 두 팀이 하는데 자신이 일하는 7층은 한 팀이, 그것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관리자와 일하느라 버겁다고 했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미숙 씨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속 이야기라도 들어주자 한 거였다. 몸이 힘든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운동을 좋아해서 몸이 단단했어요. 170센티미터에 76킬로그램이었는데. 대구가 덥잖아요. 여름 시작되고 살이 계속 빠지더니 7월쯤 되니까 60킬로그램이 나갈 정도로 말라버렸어요. 바지를 34사이즈를 입다가 나중에는 28사이즈 입던 바지가 점점 커지니까 아예 못 입고 체육복만 입고 다녔는데. 살이 빠져서 주름이 막 지는 거예요, 젊은 애가.”
그날 밤 미숙 씨는 장례식장을 서성였다. 장례식날 아들 동료들이 와서 해준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남았다. ‘덕준이가 일을 도맡아 했다. 성실했다. 다른 사람 일도 다 도와주었다.’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생각했다. 자기 것만 챙기게 약삭빠르게 키울 것을.
다음 날 오전, 덕준이가 일한 물류센터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인사과장이라 했다. 이름만 아르바이트고 일용직이었지, 아들이 매일같이 출근하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근조 화환 하나 보내지 않은 것이 섭섭했던 덕준 씨의 부모는 인사과장에게 물었다. 회사 차원에서 오신 거냐고.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 개인적으로 오신 거예요? 그렇다 했다. 우리 애 얼굴은 아나요? 얼굴은 안다고 했다. 같이 온 센터장에게도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개인적으로 왔습니다.”
센터장은 덕준이를 잘 안다고 했다. 한 층마다 100여 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수백 명이, 그것도 당일치기 일용직 알바가 대부분인 센터에서 센터장도 알 정도로 근무했다. 그만큼 오래 자기 역할을 가지고 일한 아들이 내내 피로를 호소하다가 갑자기 심장이 멎었다. 장덕준 씨의 부모는 ‘과로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 장덕준의 죽음이 언론에 알려졌다. 첫 시작은 <JTBC> 뉴스룸이었다. 당시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 진경호 집행위원장이 뉴스룸에 나가 택배 배송 노동자들의 죽음을 말하며, 물류센터에서 일한 27살 청년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함께 알렸다. 진 위원장은 전날 장례식장에 찾아와 장덕준 씨의 증상이 과로사와 유사하다고 했다.
“과로사. 그때 저희는 처음 과로사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위원장님이 말하기를, 과로사는 맞는 것 같은데 이걸 밝히기가 쉽지가 않다. 산재 신청을 해야 하는데, 국내에서 과로사가 산재로 인정받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장덕준 씨의 부모는 아들을 보낸 장례식장에서 결정해야 했다. 귀를 닫고 장례를 마무리할 것인지, 아니면 산재 신청이라는 직업병 인정 싸움을 시작할 것인지.
“주변에서는 다 말렸어요. 어렵다. 안 된다. 저는 진짜 이렇게는 아들을 보낼 수가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