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은 한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생애와 활동을 통해 한국사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의 역사이다. 따라서 역사를 이해할 때 그 안의 인간을 이해해야만 그 역사는 비로소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니게 되며,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 주재되며 변화를 겪기 때문에 역사에서 인간성을 배제하고는 시대적 관심도, 역사의 일정한 틀과 흐름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역사는 오늘도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있으며 과거를 심판, 평가하여 미래를 바람직하게 설계할 수 있는 예시를 준다.
이 책에는 한국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총 100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각 인물은 생년을 기준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일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인물이 관여한 중심적인 사건을 고려하여 한 시대 내에서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각 인물에 대해서는 생애와 활동 및 당대의 주요 사건 등을 중심으로 해당 인물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한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집필하였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인물만으로 한국사의 주요 인물이 모두 망라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역사학계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을 선정하여 다루었고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각 방면의 인물들이 고루 다루어지도록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하는 데 도움을 주신 청아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2010년 12월
지은이 윤재운, 장희흥
檀君 (?∼?)
■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
■ 현존하는 사서 중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처음 언급된다.
■ 한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민족적 자주 의식의 상징이다.
단군은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했다. 그는 한반도 역사상으로도 첫 임금이다. 곧 한민족의 시조라고 해야 옳다. 단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든 사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삼국 시대에 관한 사서라고 추정되는 《위서(魏書)》와 고려 시대 승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를 비롯해 다양한 자료에 실린 단군에 관한 기록은 조금씩 다르다. 이름만 해도 《삼국유사》에는 ‘제단 단(壇)’ 자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5년 후 출간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박달나무 단(檀)’ 자가 쓰여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후자를 정확한 표기로 삼는다.
또 《삼국유사》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제왕운기》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다음 단수신과 결혼시켜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의 신인 환인의 손자이다. 환인의 아들, 즉 단군의 아버지가 되는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살겠다고 하자, 환인이 그 뜻을 받아들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천부인 가운데 부(符)와 인(印)은 관리의 신분을 나타낸다. 제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리에게 내렸던 ‘부’를 통해 환웅의 지배를 하늘의 뜻을 받은 것으로 합법화하는 것이다. 천부인 세 가지를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땅에 도착한 환웅은 천제자(天帝子) 혹은 천왕(天王)이라 불렸다. 그는 하늘의 뜻을 담아 신시를 세웠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즉 바람과 비와 구름의 신을 거느리며 곡(穀), 명(命), 병(病), 형(刑) 같은 인간사의 360가지 일을 맡아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단군의 어머니는 곰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전하는 웅녀이다. 그녀가 아직 곰이었을 때 호랑이와 함께 환웅을 찾아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참으면 사람이 된다.”라고 말했다. 호랑이와 곰은 함께 동굴 속에 들어가 쑥과 마늘을 먹고 지내던 중 호랑이는 중간에 뛰쳐나갔지만 곰은 삼칠일(三七日,21일) 만에 여인의 몸으로 변했다. 그녀가 환웅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곰은 고아시아 족(Paleo Asiatic, 구 시베리아 어를 사용하던 민족)이 시조로 숭배하던 존재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곰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고아시아 족의 ‘세계목(世系木, 고대 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이 단군 신화에서는 ‘신단수’로 표현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 하늘 신의 아들과 지상을 대표하는 곰이 결합함으로써 제정일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단군 신화를 태양 숭배 신앙과 토템 사상이 결합된 기록으로 보아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두 부족이 정치적으로 통합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단군의 탄생 못지않게 해석의 여지를 주는 것은 바로 첫 도읍의 위치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해 국호를 ‘조선’이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평양성이란 ‘지금의 서경’을 말한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서경은 오늘날의 평양을 가리킨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일연은 ‘아사달’이라는 지명을 함께 사용했다.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니…….”라는 구절이다. 이로 인해 고조선의 첫 도읍의 위치는 평양이라는 설과 황해도 구월산이라는 설로 양분되었다.
단군 신화는 그가 1,500년이 넘도록 제왕으로 군림했다고 전한다. 죽음을 초월해 영원한 생명을 누렸다고도 한다. 이를 왕조사처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다. 대신 단군왕검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고조선의 군장을 지칭한 일반명사로 이해하는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성한 왕권이 대를 이은 권력자에게 전달된다는 시각이 그렇다. 그렇다면 단군이 죽더라도 새 단군이 신성한 왕권을 행사해 1,000년이 넘게 이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한 건국의 시조로 신성시되어 왔다. 특히 고조선이 있던 지역인 평안도 등지에서는 단군을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는 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부터 특히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추앙하며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역사 의식은 사직단에서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등 조선 시대에 계승되었다가 구한말 ‘단군민족주의’의 등장으로 강화되었다. 식민 지배라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구국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단군을 정신적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역사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이 일환으로 단기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기념하는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고 민족의 단결을 고취하는 데 단군 신화가 이용되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식민지였을까?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는 위만조선이 등장한다.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인데 랴오둥 일대에 망명했다가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쳐 준왕(準王)의 외신(外臣)으로 지냈다. 이후 고조선(朝鮮)의 오랑캐와 옛 연·제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기원전 194년에서 기원전 180년의 일이다.
한때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고조선 지역을 지배한 식민지 정권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고조선만의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했고, 지배층 대부분이 토착민이라는 점에서 이 주장은 곧 사라졌다. 위만조선에서 왕위는 세습되었고 왕을 정점으로 한 지역공동체의 수장들이 중앙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구조였다. 정치 체제가 문관인 상직(相職)과 무관인 장군직(將軍職)으로 나뉜 것도 위만조선의 특징이다.
또한 사유재산을 법으로 보호하는 ‘팔조금법(八條禁法)’을 통해 노비와 일반인의 구분이 엄격했고 단검이나 칼 같은 부장품들을 통해 정복 전쟁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만조선은 철기에 기반을 둔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영토를 계속 넓혔고 공납을 받는 등 국제적인 지배 관계도 실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채 100년이 지속되지 않았지만 철기 문화를 찬란히 꽃피운 고대 국가였다.
朱蒙 (B.C. 58∼B.C. 19년)
■ 동명성왕(東明聖王). 고구려의 건국 시조(재위 B.C. 37∼B.C. 19년).
■ 《삼국사기》에 따르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알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 기원전 33년 부여를 떠나 졸본에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 즉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주몽 이외에도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도모(都慕) 등 여러 이름이 전한다. 성은 고(高)씨이다.
수많은 이름 가운데 ‘주몽’으로 주로 불린 이유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설명되어 있다. “동명성왕은 성이 고 씨이고, 이름이 주몽이다. 일곱 살 무렵부터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당시 부여 속담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고 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따라서 주몽을 고조선이 멸망한 후 어수선한 주변국들 사이에서 활로 대표되는 철제 무기를 잘 다루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 시절 북부여의 관리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에는 주몽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문헌에서는 백제의 시조로 ‘도모’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동명’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런 혼용은 ‘동명’이라는 한 존재를 각기 다른 글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견해가 있다. 반면 중국 《후한서》의 <부여전>이나 《양서》의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위서》 등에서는 고구려의 시조를 ‘주몽’이라고 지칭한다. 즉 동명을 시조로 모신 전통은 부여에서 시작되어 고구려, 백제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자들은 동명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다른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명왕을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동명성왕은 주몽과 동명왕이 겹쳐지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이 건국자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부여의 동명왕 신화를 이용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주몽의 탄생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기도 하다. 이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태어났음에도 왕통의 근원이 북부여에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놀러 갔다가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저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 밑 압록 강가에서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그가 떠나 버린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라간 저를 책망해 이곳에 귀양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유화를 궁으로 데리고 돌아가 방에 가두었다. 이후 햇빛이 유화를 따라다니더니 곧 태기가 있었다. 유화는 크기가 다섯 되나 되는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이 알을 버리라고 하여 개, 돼지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았고, 길가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지나다녔다.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않아 결국 금와왕은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데에다 일곱 살에 이미 활을 자유자재로 쏘는 등 재주가 남달랐다. 그가 바로 활을 잘 쏘는 아이, 주몽이었다.
하지만 금와의 일곱 아들은 그의 재능을 불편하게 여겼다. 특히 맏아들 대소는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주몽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금와는 대소의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조금만 주어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이 붙도록 했다. 금와는 이런 줄도 모르고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말을 골라 기르며 때를 노리던 주몽은 어머니 유화의 조언에 따라 대소와 신하들을 피해 부여에서 도주했다. 주몽 곁에는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사람이 따랐다. 엄체수라는 큰 강에 도달했을 때 강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 수가 없자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나를 쫓는 군사가 곧 닥치는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 들이 떠올라 강을 건널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과 세 벗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 들은 다시 흩어져 군사들이 그 뒤를 쫓지 못했다.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졸본부여로 남하해 나라를 세웠다. 위치는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지금의 훈장渾江) 유역으로 전한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스스로 성을 ‘고’라고 지칭했다. 주몽은 기원전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아낸 뒤 국호를 ‘옛 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 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기도 했다. 2년 뒤에는 성곽을 올리고 궁궐을 지었다.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는 기록도 전한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북부여 출신 주몽이 졸본에 간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화와 달리 실제로 주몽은 금와의 후궁 유화가 낳은 서자였을 것이다. 대소를 비롯한 적통 왕자와의 경쟁에서 밀린 주몽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동부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졸본부여에 도착한 주몽은 그곳의 유력자였던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함으로써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전쟁에 유리했다. 고구려는 기동성과 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거점을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끊는 등 한족에 맞서고 변방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해 국경을 정비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24년 음력 8월,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숨을 거두었다. 금와는 태후의 예를 갖춰 정성껏 장례를 지냈다. 이를 계기로 주몽은 동부여에 토산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고,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와가 죽고 맏아들 대소가 왕위에 오른 뒤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기원전 19년에는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類利)가 주몽을 찾아 고구려로 왔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고 5개월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능은 졸본 근처 용산(龍山)에 삼았다. 시호는 동명성왕이다.
近肖古王 (?∼375년)
■ 백제 제13대 왕(재위 346~375년).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4세기 중반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 아직기, 왕인 등을 일본에 보내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했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그는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적 기틀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백제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닦았다.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된 후 한반도의 정세는 복잡해졌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치한 지역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벌였고, 신라―가야―왜는 필요에 따라 고구려, 백제와 각기 교섭을 맺었다.
4세기 중반 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갑자기 피살된 이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내분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당시 백제의 지배층은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구―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알력싸움이 한창이었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당시 왕위 계승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근초고왕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근초고왕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표기된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근(近)’ 자를 덧붙여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았다’는 뜻을 왕명에서부터 밝힘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이는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그는 그동안 왕권이 미치지 못했던 지방을 직접 통치할 수 있도록 구역을 나누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중앙집권화를 꾀한 것이다.
내부 조직을 정비한 근초고왕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 남쪽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전라도 지역 전체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통합은 공납을 받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현지 지배층의 권위를 일정 부분 보장해 주는 대신 공납을 받은 것이다. 이는 5세기 들어 이 지역에 대형 옹관묘가 조성되고 그 안에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을 부장할 만한 지배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근초고왕은 소백산맥 너머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백제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한 까닭은 왜와의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364년(근초고왕 19) 백제 사신 3명이 왜와의 통교를 위해 파견됐지만 해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2년 뒤 왜에서 사신이 찾아오자 근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보물창고를 열어 진귀한 물건을 보여 줬다. 왜 사신들의 교역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결국 근초고왕은 왜와의 독점 교역권을 확보했다.
백제는 남으로는 왜국과의 무역을, 북으로는 북진 정책을 통한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따라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369년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에서 처음 맞붙은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371년 평양성 전투로 최고조에 이른다.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했다. 이제 역사상 최대 영역을 확보한 백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옛 땅에서 주도권을 잡아 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동아시아 국제 교역도 손에 넣게 되었다.
백제는 정복 활동에 힘을 기울이면서도 외교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구려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근초고왕의 백제는 한반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한 중국 동진(東晋)과의 외교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동진 계통의 발 3개가 달리고 자루가 있는 냄비인 초두(鐎斗), 석촌동 고분에서 출토된 동진의 청자와 배 젓는 노는 당시 양국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음을 입증한다.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된 것도 이런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제가 랴오시(遼西) 지방에 진출한 시기도 근초고왕 때이다. 호족의 침입으로 중국이 분열된 틈을 타 그는 랴오시 지방으로 진출하고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 랴오둥(遼東)으로 진출하려던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시에 무역기지를 확보해 상업적인 이득을 취한 것이다. 한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를 백제가 계승한 셈이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방의 무역기지와 한반도, 일본에 있는 백제계 세력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의 활발한 해상무역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절벽 위에서 발견됐는데 수성 뒤쪽 숲에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이 깔려 있었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가야와 왜는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게 되었다. 특히 왜왕은 낙랑과 대방이 축출된 이후 선진 문물을 공급받을 수 없던 차에 백제가 교역을 중개하기 시작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백제가 일본 열도에 해양 거점을 개설하고 왜왕과 긴밀한 교역을 펼쳤던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근초고왕이 369년 왜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인 증거이다.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에는 금석문자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해석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제후)’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밖에도 근초고왕 시절 백제는 왜에 다양한 선진 문물을 전수했다.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왜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유학 사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강력한 왕권과 외부 교역로를 확보한 근초고왕은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국사책 《서기(書記)》를 짓게 했다. 왕실의 계보를 정리하는 한편 그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취지였다.
삼국은 왜 한강 유역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접전했을까?
삼국 사이에 한강 유역 쟁탈전이 격화된 것은 551년부터이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한강 유역까지 점령한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빼앗긴 옛 땅을 회복하기로 했다. 양국이 고구려를 기습한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 남한산성 일대를,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양국의 동맹은 2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신라의 진흥왕이 다시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 하류까지 장악했기 때문이다. 백제 성왕이 보복에 나섰지만 전사(관산성 전투)함으로써 백제는 이후 다시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
한강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잡는 데 유리한 위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강을 지배한 국가는 서해를 통해 직접 중국과 소통할 수 있었다. 신라가 564년 이후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낸 것이나 훗날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 통일의 기치를 올린 것도 한강 유역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양국은 비록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기습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신라는 이를 방어하는 데 국력의 상당 부분을 쏟아야 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제압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잡으려 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8년 뒤 고구려를 제압했다. 그러나 신라는 676년에야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평양 이남 지역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삼국 통일의 순간에도 한강은 역시 신라의 영토였다.
廣開土大王 (374∼412년)
■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2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 최초로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는 영락으로 재위 시에 영락대왕이라고 불렸다.
■ 동부여를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한강선까지 진출,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랴오둥 지역을 확보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혹은 안(安)으로 전해진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사후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를 줄여 광개토왕 혹은 광개토대왕이라고 한다. 광개토대왕은 특히 한반도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따라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永樂大王)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수림왕의 정치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정복 군주로 유명하며,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했다.
광개토대왕은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고, 고국양왕 사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초기부터 백제와 크고 작은 전쟁을 벌였다. 재위 이듬해인 392년 7월 대방(帶方)을 탈환하기 위해 백제의 북쪽을 공격해 석현(石峴) 등 10곳의 성을 함락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미성(關彌城, 강화 교동도)을 20일 만에 함락시킨 것도 광개토대왕의 공적이다.
396년에는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 이북의 백제 성 58곳과 촌락 700곳을 공략했다. 고구려군은 위례성까지 포위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그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붙잡기도 했다. 이것으로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지역이 광개토대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백제는 왜를 내세워 399년 고구려와 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를 공격했고, 5년 뒤에는 고구려의 대방고지까지 침략했지만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가야 지역까지 추격당했다. 광개토대왕은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를 몰아내고 407년, 백제의 6성을 함락시켜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400년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에 원군 5만 명을 보내 격퇴시켰고, 이후 신라를 속국으로 삼아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하고 하슬라(何瑟羅, 지금의 강릉) 지방을 경계로 삼았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다. 396년 후연의 왕 모용보(慕容寶)가 광개토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한 이후 양국은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는 4년 만에 파탄을 맞는다. 후연의 새 왕인 모용성이 쑤쯔허(蘇子河) 유역에 있는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략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에 보복하기 위해 2년 뒤인 402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했고, 404년에는 후연을 공격했다.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랴오둥 성을 비롯한 랴오허(遼河) 동쪽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후연의 모용희가 405년 랴오둥 성을 침략했지만 모두 물리치고 국경을 튼튼히 했다. 이와 동시에 광개토대왕은 산둥(山東) 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게 천리마를 선물하는 등 후연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거란을 정벌해 500명을 사로잡고 볼모로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풀어 주었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정되는 비려(碑麗)를 공격해 부락을 격파하고 숱한 가축을 전리품으로 확보했다고 전해지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해 64개의 성을 빼앗아 동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로 편입시켰다. 결국 광개토대왕은 북으로는 동부여,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했고, 서쪽으로는 랴오허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 가운데 눈여겨볼 것은 내정을 정비하는 데에도 정력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는 장사, 사마, 참군 같은 중앙 관직을 신설했고 왕릉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했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어 불교를 장려해 훗날 장수왕이 단행할 평양 천도의 발판도 마련했다.
412년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능과 능비는 현재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 현에 남아 있는데, 능을 둘러싸고 장군총설과 태왕릉설이 엇갈린다.
聖王 (?∼554년)
■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년).
■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고, 중국 양나라 및 일본과 친교했다.
■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해 전사했다.
성왕은 백제 제26대 왕으로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이름은 명농(明穠)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고 묘사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 훌륭하고 뛰어난 임금)로 일컬어진다.
성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538년에 이루어진 사비 천도가 꼽힌다. 성왕은 도읍을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성(泗泌城, 지금의 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다. 그러나 선대의 웅진 천도가 고구려의 남침에 쫓기다시피 이루어진 것이라면 성왕의 사비 천도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금강 유역의 사비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었으며 가야로 진출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였다. 또한 성왕은 지방 통치 조직을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 양나라,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사비 지역의 토착 세력이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강력한 정치적 지지를 바탕으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함으로써 백제의 시조 ‘부여’를 강조했다. 중앙의 22부(部)와 지방의 5부(部)·5방(方) 제도를 시행해 왕권을 굳건히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중앙의 22부란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의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의 외관 10부를 뜻한다. 지역별로는 수도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巷)을 편제해 통치에 유용하도록 했다. 전국은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강력한 전제 군주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다.
중국과의 교류는 당시 양나라에서 모시박사, 공장, 화사 등을 초빙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523년(성왕 1) 양나라의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해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백제는 인도와도 교류가 있었다. 성왕은 특히 인도에서 범어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져온 겸익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 고승들과 함께 번역하도록 했다. 담욱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직접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쓰기도 했는데 모두 불교를 장려하려는 성왕의 뜻이 담긴 것이다. 또한 성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달솔(達率) 등을 파견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경론을 일본에 보내는 등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힘썼다.
성왕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에 나섰다. 551년 성왕은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어 연합군을 형성했다. 연합군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해 기선을 제압한 뒤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도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했다.
하지만 2년 뒤인 553년, 신라 진흥왕은 나제 동맹을 깨고 백제를 위협했다. 한강 하류를 빼앗기 위해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것이다. 그 결과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고 동쪽 변경에 신주(新州)를 설치해 이를 공식화했다. 2대 전 동성왕이 이룩한 신라 왕실과의 혼인을 통한 양국 간의 우호 관계는 이렇게 파탄이 나고 말았다.
성왕은 당장 복수하고 싶었지만 일단 신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왕녀를 진흥왕의 후궁으로 보내는 파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듬해 수많은 전쟁 반대파의 만류를 묵살하고 신라를 습격했다. 이때 가야의 원군도 합세했다.
성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전투에 임했다. 양국의 맞대결은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전쟁 초반에는 백제가 우세했다. 그러나 성왕이 구천 지역에 매복해 있던 신라 복병의 공격에 전사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1품인 좌평 4명이 숨지고 병사 3만 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다. 패전 결과는 참혹했다. 백제는 동성왕 때부터 성왕이 이룩한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100년 가까이 이어졌던 나제 동맹도 완전히 결렬되었다.
眞興王 (534∼576년)
■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년).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 553년 백제가 점령했던 한강 유역의 요지를 공취하고 이듬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 영토를 확장하면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에 순수비를 세웠고 556년에는 기원(祇園), 실제(實際) 등의 사찰을 건립하고 황룡사를 준공했다.
진흥왕은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신라 제24대 왕이다.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진흥왕 하면 ‘정복왕’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신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왕으로 평가된다. 그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의 요지를 빼앗았고 화랑을 만들어 군사·문화의 기틀로 삼았다. 새로 점령한 지역에는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때문에 즉위 당시에는 어머니인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김씨가 섭정을 했다. 541년에는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해 백제와 화친을 맺었고, 551년(진흥왕 12)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진흥왕이 본격적으로 정복 활동을 시작한 것은 병부령 이사부와 함께였다. 그는 한강 유역을 늘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백제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했던 지역을 장악했다. 그는 거칠부(居柒夫)를 포함한 8명의 장군에게 한강 상류인 죽령 이북의 고현(高峴, 지금의 철령) 이남 지역 10개 군을 빼앗도록 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동맹을 뒤로하고 실리를 택했다. 진흥왕은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점령하던 한강 하류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고 백제를 기습 공격했다. 이로써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했다. 그리고 정복한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해 통치했다.
그가 이토록 한강 유역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백제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백제만 없다면 서해를 통해 바로 교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는 564년(진흥왕 25)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낙동강 유역에 진출한 것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 당시 백제와의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었다. 패전한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되었다. 562년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켰고, 진흥왕은 병부령 이사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마침내 대가야는 완전히 사라졌고 진흥왕은 대야주(大耶州,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를 설치해 가야 유민을 통치하는 동시에 백제의 기습에 대비했다.
진흥왕 때 신라는 동북 지역으로 진출해 비열홀주(比烈忽州,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로 임명한 것으로 보아 함흥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고구려, 백제, 가야를 가리지 않고 공격해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순수비는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의 4개이며, 단양에는 적성비가 남아 있다.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진흥왕은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546년(진흥왕 16) 거칠부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특히 불교에 심취해 흥륜사를 짓고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도 허가했다. 549년 양나라에 유학 갔던 승려 각덕(覺德)이 석가모니의 유골을 가지고 귀국하자 모든 신하들을 대동해 흥륜사 앞에서 영접한 일도 있다.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 절을 짓기로 하고 566년에 황룡사를 완공했다.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업적이 화랑도를 창설한 것이다. 진흥왕은 기존에 있었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576년에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했다. 화랑은 초기에는 청소년기의 귀족 자제들을 수련시켜 관직에 등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점차 군대 조직으로 발전해 결국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 진실일까 거짓일까?
신라 제26대 왕인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백제의 30대 왕이 되는 무왕(武王), 서동은 어린 시절 공주를 연모하여 선화공주가 실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으로 찾아가 만난다는 내용의 노래 〈서동요(薯童謠)〉를 신라에 퍼뜨렸다. 이 노래는 곧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공주는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다며 귀양을 가게 되었다. 미리 대기하던 서동은 선화공주에게 막대한 황금을 보냈고, 공주는 신라 왕궁에 이를 보내 진평왕의 노여움을 풀고 둘의 혼인을 인정받으려 했다. 여기까지가 흔히 말하는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신라 진평왕과 백제 무왕 때의 양국은 적대 관계였다. 현실적으로 둘의 결합이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서동은 무왕이 아닌 백제 제24대 동성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왕족인 이찬 비지(比智)의 딸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얻는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밑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을 만나 감탄한 나머지 미륵사를 지었다는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익산을 지배했던 지방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于勒 (?∼?)
■ 대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의 뜻으로 12현금을 만들고 가야금 곡 12곡을 지었다.
■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하고, 552년 대내마 계고와 법지, 대사 만덕 등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 진흥왕에 의해 가야금 곡이 궁중음악이 되었다.
우륵은 신라의 음악가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아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가야국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 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실왕의 뜻에 따라 12현금(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북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설과 신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다 가야국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낭성에 숨어 살며 노래와 춤을 닦았다. 그러다 그 이름이 신라 진흥왕에게 알려져 우륵과 이문은 궁에서 새 노래를 지어 연주했고, 이에 감동한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륵은 552년 진흥왕이 보낸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대사(大舍)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각각 음악적 재능을 전수하였다. 이때 우륵은 세 사람의 제자를 받아 각각의 재주를 따져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세 제자는 우륵이 만든 12곡을 가리켜 “번거롭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라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를 전해들은 우륵은 처음에는 매우 화를 냈지만 곧이어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흥왕이 가야금 곡을 궁중음악으로 선포하고 〈하림조(河臨調)〉, 〈눈죽조(嫩竹調)〉의 2조가 생겨 가야금 곡 185곡이 남게 되었다.
우륵이 집대성한 가야 음악은 신라의 대악(아악, 궁정음악)으로 발전했다. 신라에는 전통 음악인 향악이 있었지만 가야의 음악이 훨씬 더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으로는 진흥왕이 멸망한 나라의 음악이라며 귀족들이 반대하는 가야의 음악을 대악으로 수용한 것은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 후 신라가 안정된 다음부터는 더 이상 가야 음악과 신라 음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옛날 우륵이 전한 가야의 음악이 이미 신라의 음악 안에 완전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륵이 가야에서 지었던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하가라도(下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상기물(上奇物)〉,〈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이다. 이 가운데 〈보기〉, 〈사자기〉,〈이사〉의 3곡을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 군현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의 금휴포와 탄금대의 이름은 모두 우륵이 지은 12곡 가운데에서 유래되었다.
삼국 시대의 음악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중국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시대별로 중국의 음악을 받아들여 각국에 맞는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음악은 안악 제3호분의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입고, 소, 북, 각, 요 등의 악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그림과 거문고와 유사하게 생긴 현악기에 맞추어 춤을 추는 그림이 남아 있다. 고구려의 악기로는 약 14종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대개 한나라의 악기와 유사하다.
백제는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일본의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 전해진 백제의 악기로는 고, 각, 공후, 쟁, 우, 지, 적 등의 악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국 남조의 청악과 유사하다. 백제 음악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백제인 미마지가 612년 오나라 탈춤인 기악무를 일본에 전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악무는 우리나라의 양주산대놀이와 내용과 구성에 있어 유사하다.
신라는 우륵이 전한 가야 음악이 궁중 음악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자국의 독창적인 음악 발전이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일본에 전한 음악 역시 가야금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음악이었다. 이는 신라가 두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국과 교류가 적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 신라의 음악에 대해서는 유리왕 때 회악, 탈해왕 때 돌아악, 자비왕 때 백결선생이 지은 대악 등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당나라와 서역의 음악이 유입되었다.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박판, 대고 등을 이용한 향악의 전통이 수립되었으며 본격적으로 불교 음악이 전래, 발전되었다.
曇徵 (579∼631년)
■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
■ 일본에 건너가 불법을 강론하고 채화 및 맷돌, 종이, 먹 등의 제조법을 가르쳤다.
■ 일본 호류지에 그린 〈금당벽화〉는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꼽힌다.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로 일본에 건너가 불법을 전하고 맷돌, 종이 등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삼국의 화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꽃피운 문화를 따로 지칭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는데, 담징은 《일본서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구려 화가이다. 담징 같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 당시 무덤이나 사찰의 구조, 크기를 정하고 내부 장식이나 벽화까지 모두 선택한 종합기획자로 전해진다. 담징이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그린 〈금당벽화〉는 동양의 3대 미술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담징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610년(영양왕 21)의 일이다. 그는 단순히 호류지의 벽화를 그린 화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 미술사에 그의 이름이 남은 까닭은 채색법은 물론, 종이, 먹, 연자방아 등을 제작하는 법도 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유교 경전을 가르쳐 선진 문물을 습득하게 하고 곡식을 갈아 먹는 방법까지 전해 식문화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본 나라 현에 있는 호류지는 스이코 왕(推古)의 조카 쇼토쿠(聖德) 태자가 601∼607년에 세웠다는 절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본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사찰은 금당과 오중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서원과 팔각당인 유메노도(夢殿)를 중심으로 하는 동원의 두 부분으로 나뉘며 아스카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금당 안에는 약사여래상, 석가삼존불상, 아미타삼존불상 등이 있고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 같은 수백 점의 고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로 인정받는 이 작품들은 모두 백제인이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금당의 불상대좌 밑에서 먹으로 낙서된 고구려 목공의 이름이 발견되었고, 이 절 최초의 주지스님이 고구려 승려인 혜자(惠慈)였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이 절을 건축하고 소장 미술품을 제작하는 데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예술가도 함께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고구려 화가였던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는 금당의 주벽에 자리 잡고 있다. 석가, 아미타, 미륵, 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인 이 벽화는 12폭의 큰 석가 그림과 천장 밑 작은 벽면에 그려 넣은 4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49년 1월 수리를 하던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사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금당벽화〉는 중국의 운강석불(雲崗石佛),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으로 꼽히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는 〈금당벽화〉를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림에서 드러난 화법이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색을 입힌 방식이나 인물 묘사 방법이 서역의 화풍에 기초하되 당나라 색채가 반영되어 있다며, 이 벽화가 7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미타여래상에 나타난 회화 기법은 서역의 화풍을 수용한 당시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해 고구려 회화와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스카 문화
7세기 전반 일본 정치의 중심은 나라 분지 남쪽의 아스카 지방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를 놓고 세력 다툼이 한창이었는데 승자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조카딸 스이코를 천황에 즉위시켰다. 정치는 그녀의 조카인 쇼토쿠 태자가 섭정했다.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시켜 천황의 절대적인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때 한국과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해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아스카 문화는 백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교, 불교, 건축, 조각, 회화 등이 백제에서 건너간 학자와 승려에 의해 전수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스카 지역에서는 불교 미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일본의 제1급 국보인 호류지의 본존인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좌상이 모두 백제인의 작품이고, 동양 3대 미술품으로 평가받는 〈금당벽화〉는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이 그렸다.
善德女王 (?∼647년)
■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년).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 자장법사를 당에 보내 불법을 수입했고,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했다.
■ 647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란 당시 병사했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으로 한반도 역사상 첫 여성 군주이다.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장녀로 기록되어 있지만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차녀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출생 순서에 대한 언급이 없다. 632년 진평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숨지자 화백회의가 선덕여왕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 한반도는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고구려의 영양왕이 598년에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랴오시 지역을 침공한 후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반격하는 등 한반도 북쪽은 전쟁이 한창이었다.
복잡한 대외 관계 속에서 아들이 아닌 그녀가 즉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골’이라는 신라 고유의 왕족 의식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화백회의에서 올렸다는 호 ‘성조황고’라는 단어에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당시 왕실은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왕통의 정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진평왕이 아들을 남기지 않았으니 석가족 남성이 없고, 그렇다면 석가족 여성이라도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명분이 생긴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성골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귀족들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즉위하기도 전에 이미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 632년,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이듬해에는 1년간 조세를 면제한다는 시책을 썼다. 민심을 달랜 왕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왕실의 자주성은 강조했지만 해마다 당에 조공 사신을 보내는 일은 계속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공에서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덕여왕은 재위 4년째인 635년 당나라로부터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 받았다. 같은 해 영묘사도 창건했다.
신라는 638년부터 계속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시달렸다. 638년 10월 고구려가 칠중성을 습격한 일은 물리쳤지만,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패해 미후성을 포함해 40곳의 성을 빼앗겼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는 바람에 나―당 통로도 끊겼다.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도 함락 당했다. 국가적인 위기에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한편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자장(慈藏)이 귀국했다. 자장의 권유에 따라 선덕여왕은 호국 의지를 담아 황룡사 9층탑을 축조했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이 목탑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하는 9층으로 제작되었다.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했을 정도로 선덕여왕의 의지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선덕여왕은 또한 동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瞻星臺)를 남겼다. 천문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해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 24절기를 측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석은 동서남북 방위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학자에 따라서는 첨성대를 천문 관측기구가 아닌 일종의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치적에도 여왕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재위 기간 내내 일어났다. 특히 신라의 구원 요청에 당태종은 사신을 통해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해 파란을 일으켰다. 또한 당나라는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희롱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즉위 당시부터 신라 내부에서도 여왕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이와 관련하여 불필요한 논란을 종속시키기 위해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여성이 왕위에 올랐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후대에 여왕과 관련된 신묘한 일화들이 많이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세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첫째,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시간이 흘러 꽃이 피었지만 그 꽃은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신하들이 이에 대해 물으니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둘째,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이다. 636년 궁 서쪽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수만 마리의 개구리가 모여들어 사나흘 동안 계속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곧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군사 2,000명을 데리고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갈 것을 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반드시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알천은 이를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의 장군 우소와 군사들마저 모조리 죽였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했다.
셋째, 선덕여왕은 죽을 날도 스스로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 “내가 몇 년 몇 월 며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 하고 말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의 위치를 묻자 선덕여왕은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만 했다.
그 말대로 그날에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신하들은 낭산 남쪽 양지에 장지를 마련했다. 이후 10년 후 선덕여왕의 조카인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 따르면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되어 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다.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파견해 난을 진압하던 중 평소 앓고 있던 신병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가 있다면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왕족과 일반 백성을 구분하는 계급제도였다. 신라는 경주의 사로국 6부가 중심이 되어 주변의 나라를 흡수하면서 성장했다. 자연히 지배층은 6부로 편입되었고, 이는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원래 경주에서 나고 자란 지배층과 신라에 복속된 피지배층이 관직에 진출할 때 진급의 상한선을 두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골품제도이다.
골품제도에 따라 신라인은 7개의 신분으로 나뉘었다. 골(骨)족은 왕족을 뜻하며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다. 원래 왕족은 모두 진골이었다. 하지만 진흥왕의 차남이었던 동륜태자의 후손들이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왕통의 정통성을 갖는다고 차별화하면서 성골과 진골로 나뉘었다.
그러나 성골 남자는 동륜태자의 아들인 제26대 진평왕까지만 이어졌다. 진평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함으로써 성골 남자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성골 여성’인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과 ‘진골 남성’이 남게 되었다. 결국 성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선덕여왕이 제27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제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진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성골 출신의 왕위 계승은 막을 내렸다.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로 구별되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6두품은 왕족을 제외하고 지배층 최고의 자리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6두품이 ‘득난(得難)’으로 불렸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6두품은 늘 진골보다는 박한 처우를 받았다. 예를 들어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즉 신분 상승의 한계로 인해 6두품이 신분제도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6두품이 진골이 되는 일은 없었지만 진골 귀족이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났다. 5두품과 4두품은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골품제도가 공복의 색깔과 착용할 수 있는 옷감의 재질, 관의 종류 등을 세밀하게 구분하고 관직의 상한선을 규정했다고는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노비제도 같은 규정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계급을 나눴다기보다는 관직 진출의 상한선을 정해 두는 데 그쳤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乙支文德 (?∼?)
■ 고구려의 장군.
■ 수나라 군대를 살수에서 물리친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의 전략에 의한 것이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이다. 그의 독특한 이름에 대해서는 ‘을지’라는 성이 고구려 관등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처럼 연장자 혹은 가부장을 뜻한다는 설과 ‘을’만 성이고 ‘지’는 존대의 접미사라는 설이 존재한다. 또한 ‘을지’를 선비족 계통에서 유래한 성씨 ‘울지(尉遲)’로 보고 그를 귀화인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적진으로 침투하여 형세를 정탐하고 후퇴 작전으로 적군을 교란시킨 전술로 유명하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의 거짓 항복에 후퇴하는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 양견은 튀르크까지 장악한 뒤 중원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도는 강경했다. 특히 고구려가 598년(영양왕 9)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해 랴오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한 이후 수문제는 반격을 단행하게 된다.
수문제는 같은 해 군사 30만 명을 동원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넷째 아들인 한왕 양량(楊諒)이 통솔하던 육군이 랴오둥으로 진격하던 중 홍수를 만나 군량 보급선을 놓치면서 숱한 군사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숨지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수군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평양에 가 보지도 못하고 풍랑을 만나 병선이 침몰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수문제의 1차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수양제 양광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수문제처럼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다. 612년 수양제는 113만 3,800명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향했다. 군량과 물자 수송을 맡은 부대의 숫자가 본군의 2배가 넘었고, 대군이 차례로 출발하는 데에만 40일이 넘게 걸릴 정도로 대규모였다.
수나라의 공격은 두 갈래였다.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각각 수군과 육군을 통솔해 동시에 침략한 것이다. 육군은 고구려의 주요 군사 거점인 랴오둥 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항전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에 수나라군은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역시 전멸했다. 수세에 몰린 우중문과 우문술은 군사 30만 5,000명을 차출해 별동대를 꾸렸다. 평양을 직접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별동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했을 무렵, 을지문덕은 새로운 작전을 꾸몄다. 별동대의 직접 공격에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다. 그는 아예 적진으로 들어가 항복하는 척하면서 수나라 별동대에 군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별동대는 처음에 100일분의 식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기동성을 위해 중도에 식량의 대부분을 버렸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약점을 간파한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하루에 7번 싸워 7번 모두 패배한 것처럼 행동했다. 즉 7번 싸워 7번 달아나니 수나라군은 을지문덕의 계략인 줄도 모르고 평양성 30리 밖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나친 싸움과 추격으로 수나라군이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다.
하루 동안 7번이나 후퇴하는 고구려군의 뒤를 추격한 수나라 별동대는 군량도 바닥난 지 오래인 데에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중간에 군량을 전해 줄 수군마저 패하고 쫓겨난 이후였다. 별동대는 감히 평양성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계략대로 풀리자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에게 회군을 종용했다. 을지문덕은 이번에도 꾀를 냈다. 영양왕이 수양제를 알현할 것이라고 거짓 항복을 해 수나라군이 퇴각할 구실을 만들어 주는 한편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당시 수나라군으로 보낸 오언시는 희롱조로 가득하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수나라는 안심하고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회군하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때를 기다렸다가 살수를 건너는 수나라 군대를 뒤에서 공격했다. 이 전투로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했고,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이는 불과 2,700명뿐이었다. 이것이 살수대첩이다.
淵蓋蘇文 (?∼665년 혹은 666년)
■ 고구려 말기의 장군, 재상.
■ 이름은 기록마다 개소문, 개금, 이리가수미, 성씨도 연, 천, 전 등 다양하게 표기된다.
■ 642년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추대하고 이후 대막리지가 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 도교 진흥책, 대당 강경책을 폈고 신라, 당과 적대적 외교 관계를 펼쳤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의 재상이자 장군이다. 이름이 ‘개소문(蓋蘇文)’, ‘개금(蓋金)’, ‘개금(盖金)’, ‘이리가수미(伊梨枷須彌)’ 등 다양하게 전하고, 성씨도 ‘연(淵)’, ‘천(泉)’, ‘전(錢)’ 등 기록마다 다르게 표기된다. 원래 연씨였지만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과 같은 이름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뜻만 같은 ‘천(泉)’으로 개명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출신지에 대해서도 고구려 동부 출신이라는 설과 서부 출신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막리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대중을 현혹시켰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의 묘지명에도 “그의 집안이 연못(泉)에서 나왔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물과 관련된 동북아시아의 고대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연개소문의 다른 아들인 남산(男産)의 묘지명에서는 그의 조상을 고구려 시조인 주몽과 연결시키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생김새가 씩씩했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그는 또한 의지가 강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의 자리인 막리지직을 이어받으려 하자 유력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며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귀족들의 견제에도 연개소문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다. 특히 642년(영류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된 이후 그를 두려워하던 대신들은 왕과 상의해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역공을 폈다. 그는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100명이 넘는 귀족을 다 죽이고 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동생인 장(臧)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이제 연개소문은 귀족회의가 지니고 있던 병권과 인사권을 모두 장악했다.
이제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반대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그를 드러내 놓고 반대했던 안시성의 성주를 가장 먼저 공격했으나 승패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고,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을 새 집권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하며 일단락되었다.
연개소문은 이처럼 고구려 말기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적절히 이용하며 실권을 유지했다.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대대로직은 5부 귀족들이 3년에 한 번씩 선임했는데 연임도 가능했다. 그러나 때때로 귀족들이 의견을 모으지 못하면 각기 사병을 동원해 무력으로 후임을 정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왕이 중재할 수 없었고 방임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연개소문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를 벌이고 안시성주와 물리적으로 충돌한 것까지 귀족 연립정권의 일면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연개소문은 장기 집권을 했고, 그 지위는 아들로 세습되었다. 연씨일가는 왕과 귀족보다 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한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는 등 도교를 육성하는 정책을 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도참설을 배격하고 도교적인 전제 정치를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교를 기반으로 한 기존 귀족 세력의 잔재를 억압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연개소문이 집권하는 동안 고구려의 대외 정세는 긴박했다. 수나라와 20년에 걸쳐 지속된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됐지만 중국 내부의 분열을 통일한 당나라의 세력이 막강해져 있었다. 당나라는 서쪽의 고창국(高昌)을 제압하고 북의 튀르크를 멸망시킨 뒤 동북아시아 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렸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사용했지만 당나라가 건국된 이후로는 온건책을 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당에 대해서도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연개소문이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거대한 성곽인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도 이런 당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다. 신라는 이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당나라 사신이 중재자로서 고구려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의 사신마저 가두어 버렸다. 당태종은 고구려가 사신을 가둔 일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당군은 초기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안시성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당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는 전략을 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옛 귀족들은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직을 계승하고 온건책을 펴려고 했지만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이 강경책을 요구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권력 싸움에서 패한 남생이 당으로 망명하자 당은 남생을 앞세워 나당 연합군의 이름으로 고구려 정벌에 성공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내분과 멸망의 원인이 연개소문의 독재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적지 않다.
金春秋 (604∼661년)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년). 신라 제29대 왕으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 신라 왕권의 전제화를 확립했고 당나라의 율령제를 모방하여 관료 체제를 정비했으며, 구서당을 설치하여 군사 조직을 강화하는 등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백제부흥군을 격파했고, 이어 고구려 정벌군을 조직하던 중 사망했다.
태종무열왕은 신라 제29대 왕으로 당나라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진지왕의 손자로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춘추(春秋)라고 한다. 이찬(伊飡) 용춘(龍春, 龍樹)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의 딸, 즉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를 배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진지왕 이후 왕위 계승 서열에서 벗어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롭게 진골 귀족으로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군사적 결합이 완성되었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부부가 숨졌고, 이 사건으로 김춘추는 외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하지만 고구려의 생각은 달랐다. 고구려는 진흥왕 시절, 신라가 고구려를 공습해 한강 상류 지역을 빼앗은 일을 거론하며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김춘추는 그럴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고 말았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갇혔다가 겨우 탈출한 후 김유신과의 정치적 결속을 더욱 단단히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구귀족 세력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인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김춘추가 외교 활동과 내정 개혁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적인 배경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데 실패하자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전력했다. 648년(진덕여왕 2), 그는 당나라로 가는 사신을 자처해 적극적으로 친당 정책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당태종으로부터 백제를 공격할 때 군사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2년 후 진덕여왕이 신라가 오랫동안 써온 자주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채택한 것만 보아도 김춘추의 친당 정책이 신라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다.
김춘추가 추진한 내정 개혁도 친당적인 색채를 띠었다. 649년 의복과 머리에 쓰는 관을 중국식으로 따르게 한 중조의관제를 채택했고, 2년 뒤에는 조정의 모든 신하가 설날 아침 왕에게 하례를 올리도록 하는 정조하례제도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후원 세력으로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하여 사전 작업의 일환으로 이런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구귀족들은 상대등 알천을 왕위 계승자로 천거했다. 하지만 곧 화백회의에서 친당 외교와 내정 개혁을 통해 급성장한 신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한 김춘추가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김춘추는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의 대표인 알천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52세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신라 왕조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왕족이었지만 그가 진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진평왕 때부터 유지된 ‘성골 출신 왕’의 전통이 깨졌다.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무열왕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해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했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율령을 반포해 왕권을 강화했다. 이듬해에는 원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해 왕권을 조기에 안정시켰다. 게다가 다른 아들인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 주어 그들이 각자의 권력 기반을 잡도록 해 주었다.
656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임명하고 3년 뒤에는 역시 당에서 돌아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