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다쿠야松本卓也
의학박사. 1983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치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지치의과대학 대학원 의학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정신과 의사로 병원에서 진료하면서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마음의 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창조와 광기의 역사-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 『증상으로 아는 정신병리학』, 『인간은 모두 망상을 한다』 등이 있습니다.
형진의
현재 한남대학교 교양교육대학 교수입니다. 한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일본어 논술문 작성법』(공저), 옮긴 책으로는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언어, 권력, 헤게모니』(공역),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공역), 『사랑을 하고 싶은 너에게』 등이 있습니다.
KOKORO NO BYOUKITTE NANDAROU?
by Takuya Matsumoto
ⓒ Takuya Matsumoto 2021
AII rights reserved.
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by HEIBONSHA LIMITED, PUBLISHERS, Tokyo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HEIBONSHA LIMITED, PUBLISHERS, Japan
Through SHINWON AGENCY, Korea
추천의 글
외로운 마음에 ‘호’ 하고 따뜻한 김을 불어 주는 다정한 책
오한숙희 사단법인 누구나 이사장, 여성학자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20년 전 중학생이던 큰딸애가 했던 말이다. 사춘기의 푸념이려니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딸에게 미안하다.
마음은 똑같지 않다. 키처럼 얼굴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키 작은 사람에게 키 큰 사람이 왜 손이 여기 닿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듯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당해 보니 그랬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네’ 싶다가 어느 날 몸이 침대에 붙어 버렸다. 몸은 따뜻하게 돌볼 줄 알면서 마음의 감기에는 둔감했다. 주변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손목이 부러졌을 때는 사골국을 끓여 주고 좀 쉬어 가라며 다독여 주던 사람들이 마음이 꺾였을 땐 배부른 게으름인 양 정신 차리라고 채근만 해 댔다. 부러진 손목에 힘을 줄 수 없듯이, 꺾인 마음은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몰랐다. 보이지 않지만 꺾일 수 있고, 보이지 않아서 더 잘 돌봐야 하는 ‘마음’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무지하다.
참 이상한 책이다. 분명 글로 읽고 있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는 동안 누가 ‘호’ 하고 따뜻한 김을 불어 주는 듯 위로를 받았다. 정신의학적 내용을 쉽고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 발달장애가 있는 작은딸과 생활하는 데 긴요한 꿀팁을 얻었다.
‘네 마음은 지금 그렇구나!’ 알아주고 공감해 주는 것. 진정한 소통은 다름을 알고 다름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만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 난 적 있나요?
김영주 서울시 강남구 청소년심리지원센터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책을 읽으며 여러 차례 굵은 밑줄을 그은 대목이다. 저자는 몸이 아플 때와 다르게 마음의 병은 다른 사람이 잘 볼 수도 없고 느끼기도 어려워서, 스스로가 충분히 이해하고 또 이해받을 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말로는 그럴 듯해 보이는 이 과정이 실제로는 참으로 어렵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는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나 자신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느껴지는데, 모든 것이 내 잘못 같다가도 또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폭풍우처럼 화가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을 충분히 보듬으며, 진료와 상담의 과정을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가 보도록 격려한다. 몸과 마음, 생각과 느낌, 행동으로 경험하는 나만의 독특한 세계는 어떠한지 함께 알아차려 가는 것이 곧 자기이해의 시작이다. 저자의 말처럼 마음의 병은 참 수수께끼 같아서 답을 찾아가는 길이 답답하고 지루할 수 있지만, 나만의 특별한 공간에서 스스로 찾은 힌트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 나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
이 책은 실제 마음의 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증상을 겪고 있는지, 왜 그런 병에 걸리게 되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고 정말 나아질 수 있는지 등을 알기 쉬운 사례와 비유를 들어 소개하고 있어 더욱 편하게 읽힌다. 오랜 기간 인류가 연구해 온 마음의 병에 관한 내용들은, 스스로를 이해해 나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미로와 같은 숲길에 오롯이 숨어 있는 오솔길 같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 타인과 연결되어 있기에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상대방과 나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공감의 폭은 ‘나를 이해하는’ 주관적이고 특별한 과정이 충실히 경험될 때 더욱 넓어진다. 마음의 병에서 회복하는 과정은 내가 지나온 시간과 상대방이 걸어온 시간,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단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이해하는 데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여겨질 때, 이 세상에서 나만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 나는 밤, 마음이 힘든 친구와 이야기하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끊기를 반복하던 때, 혹은 지금 상담이나 진료를 받고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쫓겨 하고 싶던 말을 다하지 못하고 아쉽게 일어섰던 날이 있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자. 그동안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의문들에 차근차근 말을 걸어 주는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저는 정신과 의사로 병원에서 진료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마음의 병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특히 ‘정신병리학’이라고 해서, 마음의 병에 걸린 환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지에 관한 연구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여러분과 함께 마음의 병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해요.
여러분은 어떻게 이 책을 접하게 되었나요? 가족이나 친구 중에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싶어서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어딘가 좋지 않다거나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이 마음의 병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인가요? 단순히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마음의 병은 몸의 병과 달라서 어딘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기도 해요. 여러분이 마음의 병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인지도 몰라요. 사실 마음의 병은 환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마음의 병에 대한 정보는 많아졌지만, 실제로 병에 걸리게 되면 알 수 없는 일이 많이 나타나지요. 제가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도 “왜 갑자기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 책에서는 먼저 마음의 병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이야기한 후에, 마음의 병을 하나하나 예로 들면서 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겠습니다. 마음의 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것은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없애고 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무엇보다도 마음의 병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여러분이 병에 걸렸을 때, 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마음의 병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마음의 병, 왠지 어렵게 느껴져요
우선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은 어떻게 다른지부터 시작해 볼까요?
암이나 고혈압 등 몸의 병은 많이 있지요. 몸의 병의 특징은 그 병을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상처가 났다는 것은 몸의 표면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또는 표면에는 상처 하나 없어도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 골절된 것을 아는 경우가 있고요.
폐렴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 폐가 하얗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어요. 머리 MRI 사진을 찍으면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이나, 뇌혈관에서 출혈이 있는 뇌출혈을 볼 수 있습니다. 암도 그와 같은 검사로 볼 수 있고, 고혈압도 혈압계라는 기계를 사용하여 숫자로 볼 수 있지요. 즉, 몸의 병은 그 병을 볼 수 있는 여러 객관적인 방법이 있어서 검사를 받는 사람에게 그 병이 있는지, 또 그 병이 어느 정도 중증인지 알 수 있어요. 이것이 몸의 병의 특징이지요.
이처럼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상태를 보는 것은 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에요.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그 대상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예요.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요.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요?
예를 들어 경치 좋은 강가에 가서 ‘경치가 좋다’라고 생각했다고 해 봐요. 막연히 생각만 해서는 강의 흐름을 조절할 수 없지요. 그런데 ‘댐을 만들자’라는 목적을 가지고 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물의 흐름이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해야 하고, 물을 막으면 얼마만큼의 물을 담을 수 있을까를 계산해야겠지요.
단순히 강가에 가서 ‘경치가 좋다’ 하고 볼 때는 거기에는 자연이 있을 뿐이고, 대상은 없어요. 그 자연에 대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보려고 하는 순간, 물의 흐름이 대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댐을 만드는 것처럼 대상으로 파악한 자연을 조절할 수 있게 돼요.
이번에는 혈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게요. 혈압은 혈액을 심장에서부터 운반할 때의 힘을 가리켜요. 심장 주변에 손을 대거나, 손바닥을 위로 하고 엄지손가락 위쪽의 손목을 누르면 ‘팔딱팔딱’ 하고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힘을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낸 것이 혈압이에요. 정상적인 혈압(수축기 혈압)은 80~120mmHg입니다. 손목 등 신체 표면을 만져서 맥박이 느껴지면 혈압이 70mmHg 정도인 경우니까, 손목을 만져서 맥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혈압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의미예요.
혈압은 ‘심박출량×말초혈관 저항’으로 나타내요. 여기서 ‘심박출량’은 심장에서 내보내는 혈액의 양을 가리키고, ‘말초혈관 저항’은 혈관의 수축 상태를 가리켜요. 혈압이라는 대상이 분명해지면 혈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혈압을 조절하는 방법은 호스의 수압을 조절하는 것과 같아요. 물이 졸졸 나오는 호스를 물이 세게 나오게 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하나는 수도꼭지를 틀어서 흐르는 물의 양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호스 끝에서 물이 세차게 나오게 되지요. 또 하나는 호스 끝을 꽉 누르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해도 역시 물이 세차게 나오게 됩니다.
조절한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군요
교통사고로 많은 피를 흘려 방치하면 죽을 수 있는 상태로 병원으로 호송된 사람이 있다고 해 봐요. 혈압을 재니 50mmHg 정도였다고 하면, 당장 혈압을 정상 가까이로 올리지 않으면 뇌로 혈액이 가지 않게 됩니다. 이때 혈압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는 수도꼭지를 트는 것처럼 급히 링거를 연결해서 체내에 수분을 흘려보내면 심박출량이 늘어서 혈압이 올라갑니다. 또 하나는 호스의 끝을 꽉 누르는 방법처럼,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약을 투여하면 말초혈관이 수축되어 혈압이 올라가요. 의학은 몸의 병을 이런 방법으로 ‘대상화=객관화’함으로써 검사나 치료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병은 어떨까요? 마음의 병의 경우, 몸의 병과 달리 ‘대상화=객관화’한 것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도 다뤄야 해요. 객관과 주관은 대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객관’은 ‘객관적’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주관’은 “너의 의견은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가리켜요.
예를 들어 마음의 병에는 ‘환각’이나 ‘망상’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환각이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거나(환시),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환청) 증상이에요. 환시나 환청은 객관적으로는 ‘없는’ 것이 그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는 ‘있는’ 것이에요. 또 어떤 환자가 “정부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 사람의 주관으로는 그것은 ‘사실’이에요.
마음의 병에 걸리면 환각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네,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객관만을 중시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환자가 “환각이 있어서 고통스러워요”라고 말하는데 치료자(정신과 의사나 상담사)가 “객관적으로 보아 그런 것은 없습니다”라고 하면 그 환자는 더 이상 그 치료자에게 오지 않겠지요.
덧붙여 말하면 언제나 객관이 옳고 주관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환각이나 망상 같은 증상은 객관적으로는 틀리다고 생각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의 환자의 주관이 중시되어야 해요.
예를 들어 “아무도 없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환자가 했다고 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환청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럼 이 환자가 듣고 있는 소리는 전혀 무의미한 것일까요? 만약 이 사람이 회사에서 매일같이 무서운 상사에게 “왜 이렇게 간단한 일도 못해?”라며 혼나고 있다고 해 봐요. 그런 일이 계속되던 어느 시기부터 집에 돌아가도 그 상사의 호통소리가 들리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객관적으로는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환자에게 그 소리는 강렬한 현실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봐야 해요. 그렇다면 환청이 일어나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이 환청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어떤 환자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후, 그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마음의 병에는 객관과 주관이 대립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관에도 명확한 현실성이 있어요. 이것을 무시하면 마음의 병의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치료자가 “너의 의견은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그 치료자에게 가고 싶지 않겠지요. 또 치료자가 “상사에게 갑질을 당한 사람 중(반려동물을 잃은 사람 중) 몇 퍼센트는 당신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라고 간단히 말해 버리면, 어쩐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것 같은 마음이 들지요. 자신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객관적인 데이터로 대체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몸의 병은 대상을 객관화함으로써 치료하는 데 반해, 마음의 병은 주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상태에서 다룸으로써 치료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의 큰 차이예요. 마음의 기능에 병이 생긴다는 것은 “나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됩니다.
마음의 병에 걸리면 나 자신이 달라지나요?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고 달라지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마음의 병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고, 병에 걸리면서 자신의 성질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과나 상담 센터에 가는 경우가 많아요. 마음의 병은 그 사람의 주관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을 다루는 몸의 병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음의 병을 진료합니다. 물론 정신과에서도 몸을 진료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환자의 주관적인 체험을 듣고 거기서부터 진료나 치료를 해요.
그렇다면 의사나 상담사는 환자의 주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의 주관은 나 자신만의 것이어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다른 사람의 주관은 좀처럼 알기 어렵지요. 그러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과에서는 환자의 주관을 모르면 진단도 치료도 불가능해요. 더욱이 마음의 병은 ‘나의 주관 자체가 나 자신에게 수수께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아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마음의 병에 걸리면 나의 주관적인 체험 그 자체를 자기 자신이 잘 모르게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소개할 ‘강박증’이라는 마음의 병은, 아무리 손을 씻어도 손이 더러운 듯한 기분이 들어 몇 번이고 계속해서 손을 씻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요. 주변 사람들은 “네 손은 더럽지 않아. 아까 닦았잖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은 환자 본인도 “내 손은 방금 전 씻었고 더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주관적인 체험으로는 “내 손은 더럽지 않나?”라는 불안을 도저히 털어 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 환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으로 고통받고 있고 스스로의 주관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환자가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으면, 치료자가 환자의 주관을 이해하지 않는 한 정확히 진단도 치료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돼요.
다른 사람의 주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죠?
마음의 병을 다루는 정신의학에서는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첫 번째는 정신과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이해(앎)’라는 방법이에요. 감정이입과 비슷한데 내 눈 앞의 환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또는 비유적인 의미로 ‘그 사람의 신발에 나의 발을 넣어 보는’ 방법으로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을 시도하는 방법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내 손이 더럽지 않나 자꾸 생각하게 돼요. 그 때문에 손 씻기를 멈출 수가 없고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요”라고 말했다고 해요. 이 체험을 치료자가 자기 마음속에 ‘생생하게 묘사해 보는’ 겁니다. 물론 “내 손이 더럽지는 않을까?”라고 곧바로 감정이입을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내 손에 시궁창의 오물 같은 것이 묻어 있는 상태를 상상하고, 그것을 씻어 내도 내 손에서 자꾸 오물이 나오는 것 같은 상태를 상상해 보며 기분을 증폭시켜 봅니다.
그러면 “손 씻기를 멈출 수 없다”, “혼란스럽다”는 감정은 어렴풋이 “알겠다”가 됩니다. 씻어도 씻어도 시궁창의 오물이 떨어지지 않고, 게다가 손을 씻는 나를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나 자신도 이상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괴로운 상태를 조금은 체험할 수 있게 되지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환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주관적 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면 이번에는 “내 손이 더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자꾸자꾸 일어나는 상태” 그 자체도 점점 알 수 있게 됩니다.
정말 그래요?
누구나 불안을 느낀 경험은 있지요.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매우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었던 경험이 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느끼는 불안은 그것보다 조금 센 것일까?” 등의 상상이 가능하지요. 내가 체험한 것은 밤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좀 더 세지면 어떤 걸까, 게다가 하루 종일 계속되는 느낌이라면? 하는 식의 상상입니다. 혹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감각의 일부분을 조합한 것일까? 하고 생각함으로써 잘 알게 되기도 해요.
이렇게 알기 위한 작업을 열심히 계속함으로써 “이 환자가 주관적으로 체험한 것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생생하게 아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도덕 수업에서는 쉽게 말하지만 하나하나 성실히 수행해 가기가 매우 힘들어요. 그러나 훈련을 하다 보면 점점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치료자는 환자에게 몇 개의 질문을 하는데, 그때는 치료자가 환자의 주관적인 체험을 알고자 하는 것이 환자 측에도 전달돼요. ‘안다’기보다 ‘함께 체험한다’는 느낌에 가까워지면 대성공입니다. “이 사람은 나의 주관적인 체험의 세심한 부분까지 느껴 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진찰은 환자에게도 만족도가 높고, 환자 자신이 지금까지 미처 몰랐던 것을 진찰 중에 비로소 알게 되기도 해요.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라도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함께 체험하는 것을 통해 점점 형태가 보이게 되면 조금은 두려움이 줄어들어요. ‘이해(앎)’라는 방법에는 이러한 치료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이해하는 척한다고 생각하진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멋대로 남의 마음속 상태를 추측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해도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주관은 남들은 모른다”는 것은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생각은 “나와 타인은 처음부터 구별된 두 명의 개인이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지요. 서로 다른 두 사람 중 한쪽이 말로 상대방에게 전하고, 그것을 들은 쪽은 그 말로 상대방의 상태를 알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나와 타인은 구별되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원을 이루어 놀고 있을 때 누가 나이고, 누가 타인인지 그런 구분이 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지 않나요? 또는 학교에서 합창 대회에 나간다거나 연극을 한다든지 해서 모두가 하나를 이루고 있을 때, 내가 어떻고 타인이 어떻고 하는 것이 그다지 관계없다가 문득 생각하니 “내가 있고 옆 사람도 있다”고 의식한 적은 없나요? 처음에 ‘우리’가 있고, 그다음에 나 또는 타인이라는 개인을 의식하게 되는 측면도 인간의 경험에는 있습니다.
처음부터 “나와 타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나도 타인도 없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주관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가 아니고, 오히려 “나와 타인은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나와 타인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많아요
보통 때는 의식하지 않지만 나와 타인 사이에는 ‘우리’라는 연대의식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지요.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인간은 타인에 대해 일종의 동물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어요.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간주관성(집단 또는 개별적 인간에게 내재된 공통된 이해 : 옮긴이)’이라고 해요. 문자만으로, 언어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오해도 일어나기 쉽고요. 하나의 같은 공간(상황)을 공유하고 마주하고 있을 때 소통은 쉽습니다. 이처럼 ‘간주관성’을 사용해서 아는 방법이 두 번째 방법이에요.
세 번째는 ‘정신분석’에 의한 방법이에요. 정신분석은 현대의 ‘카운슬링’ 기초의 하나가 된 치료법입니다.
정신분석은 면담 횟수가 많아서 주 3회, 4회, 5회 이상인 경우도 있어요. 그 정도로 빈번하게 면담을 계속하면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납니다. 치료자와 환자와의 관계가 달라지는 거지요. 환자가 치료자에 대해 독특한 감정을 품게 되고, 치료자를 매우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매우 싫어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랑과 증오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 용어로 ‘전이’라고 해요. ‘전이’는 ‘장소를 이동시키다’는 의미인데, 과거의 인간관계가 현재의 치료관계로 이동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