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ok, Memoir of A childhood
한옥집의 백미는 가을이다. 봄부터 붉다는 뒷마당의 단풍나무도 가을에 비로소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낮에는 친구들과 함께 흙과 돌멩이로 소꿉놀이를 하던, 강아지풀과 토끼풀과 온갖 잡초가 무성했던 공터. 해가 질 무렵이면 내일의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던 곳. 밤이 되면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따스히 흡수한 밤하늘이 깊고 푸르게 짙어지던 그곳. 토끼가 절구를 빻던 달과 그윽한 밤하늘. 모윤숙의 시 〈밤호수〉를 읽을 때면 늘 떠오르는 나의 밤하늘.
사랑채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면 밝은 햇살 아래 너른 땅이 펼쳐지고, 사랑스럽고 풍성한 갖가지 푸성귀와 야채,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한옥집 남새밭이다.
어린 나에게 그곳은 꿈의 세계였다. 널따란 마룻바닥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안쪽 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색색의 세계. 온갖 색으로 염색한 옷감들, 비단 헝겊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의 실들, 방 안을 뒹구는 아름다운 자투리 천들, 형용할 수 없는 갖은 옷감과 자수가 놓인 천들, 바늘과 골무와 진주 옷핀과 단추들.
그 방은 온통 할머니 냄새로 가득했다. 깔끔했던 할머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던 방. 너무도 따뜻했던 방. 할머니의 방.
장독대에는 서른말들이 큰 항아리가 서너 개, 중항아리가 열댓 개, 맨 앞줄에는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특히 큰항아리에는 바람결 무늬와 물결무늬, 구름이 피어오르는 무늬가 신비롭게 새겨져 있었는데, 가만히 귀를 대면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물결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틈만 나면 그곳에 가 있던 나는 중앙서림의 단골손님이자 애물단지였으며, 아줌마의 꼬마 친구였다.
작품에 나오는 ‘한옥집’은 어린 시절 작가의 세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고유명사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어 어문규정에 따른 ‘한옥’이라 쓰지 않고 ‘한옥집’으로 표기합니다.
내 기억 속의 집은 그러하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 많은 이들과 함께 가장 따뜻하고 밝은 시기를 거치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쇠퇴하고 소멸하여 생의 한 주기를 마감한 집. 오늘 나는 그 집을 다시 불러내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나의 한옥집.
문장은
잔인하다
나태주 (한국시인협회 회장, 시인)
아, 이런 글이 있었던가! 이런 글을 내가 언제 읽었던가!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뛰기 시작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극진한 시의 문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다. 서사를 펼치고 있었다. 웬만큼은 나도 작가가 알고 있는 세상과 대상을 짐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나에게 잊혀진 것이고 흐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흐려졌기에 더욱 선명한 것이 되었고 잊혀진 것이기에 더욱 가슴 아픈 것이 되었다. 하나의 파노라마다. 너무나도 생생하여 눈앞에 그림을 보는 것 한가지다. 그렇다. 숨을 쉬고 있는 풍경이요 움직이는 사물이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필시 그리움이었겠지. 안타까움이었겠지. 그 이전에 상실과 결핍이 있었겠지. 그런 점에서 문장은 잔인하다. 한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간 다음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을 선물해주신다.
임수진 작가의 글 내용은 한 개인의 기억 속에 잠겨 있는 추억의 세상이고 또 공주라고 하는 한 조그만 고장의 이야기다. 경험자의 세상도 변했고 글의 현장인 공주의 형편은 더욱 많이 변해버렸다. 아니,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글 속에는 그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글의 승리요 힘이다. 이거야말로 또 다른 건설이요 창조다. 그리하여 문장은 잔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하기도 한 것이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선후先後가 없다. 보다 아름다운 세상, 진실한 세상,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먼저다. 이 책의 작가는 저 멀리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앞서가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라고 묵언默言으로 말하고 있다.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이거야말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아주 오랜 세상이지만 지극히 어리고 사랑스럽고 새로운 세상이다.
타고났음이다. 거기에 갈고 닦음이다. 부디 큰 작가가 되지 말고 좋은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유명한 작가가 되지 말고 유용한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끝내 명성에 몸을 기대지 말고 명예를 얻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처럼만 한 걸음 한 걸음 정성 들여 앞으로 나아간다면 분명히 그런 날이 오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축복과 응원을 전해주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멀리 거제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문학 강연을 다녀와 피곤한 날 저녁, 보내온 원고를 읽자마자 더는 참을 수 없어 서둘러 이 글을 써야만 했다. 오늘 나 한 사람 늙은 시인으로서 한글로 글을 쓰는 좋은 작가 한 사람을 찾아낸 것을 기뻐하거니와 이 기쁨이 다른 많은 독자들에게도 공통의 것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프롤로그
그 시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에게
오래전 임용고시를 위해 날마다 도서관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20대 한창의 아가씨가 얼굴에 뾰루지가 나고, 부스스한 머리는 질끈 묶고, 추리닝 하나로 1년 365일을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국어교사가 되고, 아직도 열정만 가득한 채 헤매던 그때, 덜컥 미국에 오게 되었다. 잠깐의 휴직이 영원한 휴직이 될 줄 몰랐다.
‘미국에 올 거였음 뭐 하러 그 고생을 하고 시험을 보게 했어!’라며 잠시잠깐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수능을 위해서만 공부했던 수없이 많은 국어 교과서의 작품을 다시,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열람실의 불빛을 마지막까지 밝히던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국어교사’는 아직도 내 삶의 기둥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므로.
두고 온 삶을 뒤로 하고 이방인의 삶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저 이대로도 괜찮다 싶던 어느 날, 병이 도졌다. 아니 중병이 시작됐다. 가슴이 먹먹한 병. 그리운 게 많아서 죽을 것 같은 병. 보고픈 이들이 많아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병. 코로나 때문에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이 먼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면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친구, 나의 한옥집에 대해.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책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그린게이블즈에서 사랑을 받고 꿈을 꾸고 나서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듯 나 역시 나의 꿈을 키워준 곳, 한옥집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내 블로그에 ‘한옥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고, 첫 번째 스토리로 ‘뒷간 이야기’를 선보였다. 감사하게도 ‘그 시절 그 공간에 가 있는 것 같다.’라는 이웃들의 댓글이 이어졌고, 그 반응에 힘입어 계속해서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백일장 대회의 주제라며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주신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그 글자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던 그 시절, 한옥집과 함께 하던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움을 글로 쓰면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것을. 글로 쏟아낸 그리움은 아픔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이들이 미래를 바라보고 내일을 준비할 때, 나는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어제를 그리워하며 ‘추억’이 되어버릴 지금을 그리워한다. 그 안에서 힘을 얻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나는 오늘도 ‘그리움의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안녕 나의 한옥집’에는 옛 시절의 이야기도 있지만, 실재하는 세계 사이사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유년의 환상 또한 존재한다. 한옥집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시작되어 종적 횡적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한옥집을 둘러싼 마을과 고장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나는 몹시도 멀리 있으나 보이지 않는 시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추억이 되어 나를 더욱 가깝게 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 중 가장 애틋한 마음 하나는 저 먼 곳, 먼 시간에 두고 있다. 아름다웠던 나의 고향 공주, 지붕이 곱던 한옥집이 있는 그곳에 말이다.
그 골목길 끝에 한옥집 대문이 있었다.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만 서도, ‘아, 드디어 집에 왔구나’ 마음이 놓이던 곳, 한옥집 골목길.
차례
추천사. 문장은 잔인하다 _ 나태주 시인
프롤로그. 그 시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에게
1 。
한옥집의 세계로
한옥집과 나
골목을 지나 나의 한옥집으로
이보다 강렬한 곳이 또 있을까
까치에게 헌 이를 남기지 못한 자의 저주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그렇게 언니는 완전범죄를 꿈꾸었지만
독일제 파마 약의 비극
초코파이 한 개와 흰 우유 한 개
팔팔 끓던 솥뚜껑에는 왜 앉았을까
언니의 눈물
그 길에는 개가 살았다
꼬리가 긴 아이
그날의 설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걸
토끼가 절구를 빻던 달과 깜깜한 밤하늘
2 。
한옥집은 그네들과 함께 꾸던 꿈이다
한옥집과 사람들
코끝을 간질이는 그 방의 향기와 감촉은 그대로인데
한옥집에서 40년을 산 소년 이야기
오토바이 타는 여자
왕촌 살던 처녀
드가의 그림 속 발레리나 소녀들을 꿈꾸며
동자승 얼굴의 환영은 어디로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금슬 좋은 부부
3 。
한옥집을 나와 거리에 서다
한옥집과 공주 이야기
이승도 저승도, 삶도 죽음도, 사람도 귀신도
그때 그 책들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자수가 놓인 옷감들이 바람에 흩날리듯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아카시아꽃 흐드러진 멧돼지 농장에서
환상동화의 한 페이지처럼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웅진과 고마나루와 유년의 신화 속에서
흐르는 제민천의 물소리도 맑구나
빛의 교회
4 。
한옥집이 써 내려간 이야기
한옥과 집
그렇게 집은 한 생애를 마감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당 한가운데서 계절을 느꼈다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할머니의 식초병
상실은 그리움으로, 소멸은 추억으로
따스한 봄날의 생일잔치를
그때 그 이야기들은 황홀했었지
그 밤은 깊고 신비로웠다
한옥집 기와 위로 붉은 어스름이 내려앉고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잃어버린 것들
내가 살았던 집
에필로그. 유년의 꿈과 환상 가운데 행복했던 시간들
골목을 지나
나의 한옥집으로
골목길 。
그 골목길 끝에 한옥집 대문이 있었다.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만 서도,
‘아, 드디어 집에 왔구나’ 마음이 놓이던 곳.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오줌싸배기가 되고
때론 똥싸배기가 되었던 곳.
한옥집 골목길.
그 끝에 갈색 대문이 있었다.
골목 끝까지 달려가서 한번쯤 잡아보고 싶은 청동 손잡이.
끼익 소리 내어 밀어보고 싶어지는 낡은 문.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게 하는 다정한 흙 담벼락.
그 안에 나의 세계가 있었다.
골목길은 늘 분주했다.
도립병원 담을 끼고 있어 병원의 분주함이 전해지고,
반대편에는 골목 집들의 낮은 담이 정다운,
와글거리고 시끌벅적하던 골목길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아침이면 교복 입은 하숙생 언니오빠들이 바삐 걸어가던 길.
여름날 저녁이면 골목길에 모기약 차가 연기를 뿜고,
한 달에 한 번인가 똥차가 돌면
지독한 냄새가 골목에 가득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병원 담벼락도, 나무들도
각자의 이유로 분주한 골목길이었다.
밤이 되면 무섭도록 고요한 골목길이었다.
때때로 나는 길을 잃었다.
그 작은 고장에서도 길을 잃고 멀리 헤매다 들어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 멀리 장기든가
외곽에 사는 양계장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집과 반대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버렸다.
멀리멀리 간 후
눈물콧물을 빼며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다.
“여기가 서울이에요?”
맘씨 착한 아저씨가 원래 자리로 데려다 주셨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날
어둑어둑해져서야 나는 골목 끝에 섰다.
대문이 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흙바닥의 긴 골목길은
그렇게 나를 감싸주었다.
이제 집에 다 왔다고.
이제 마음 놓으라고.
친구와 싸우고 집에 오던 날,
돈을 잃어버리고 울며 오던 날도,
아파서 조퇴하고 돌아오던 그날도,
골목길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서 뛰어가서 저 손잡이를 잡고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고단함을 안아주는
한옥집의 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가 있는 따뜻한 곳으로.
나의 나무와 꽃들이 있는 곳으로.
나의 세계로.
이보다 강렬한 곳이
또 있을까
뒷간 이야기 。
나에게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치 오늘인 듯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곳이 있다. 커다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 훤하게 돌아다니고, 응석을 부리고, 오만 참견을 다 하고 다니고, 언니들을 쭐레쭐레 따라다니는 곳이 있다.
나의 고향.
나의 고향집.
ㄷ자형 한옥집.
당시 주소,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중동 323번지.
전화번호 2국에 4204.
미국 감리교재단에서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공주사회관과 담벼락을 공유한 집이자, 도립병원의 바로 뒤 기와집. 철마다 마당 가득 꽃이 피고, 정다운 나무들이 아름드리 우거져 그 위에서 책을 읽던 나의 어린 날이 있는 곳. 젊고 아름다운 엄마와 아빠가 있고, 다정했던 할머니가 계신 곳. 진돗개 한두 마리와 두 언니들, 그리고 친척들과 이웃들이 복작거리던 한옥집.
나는 그곳을 지금인 듯 느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늘도 한옥집의 세계를 만난다.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있는 고향집의 따뜻한 향내를 느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곳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한옥집 전방 10미터 앞에서부터 족히 그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좀처럼 범접하기 쉽지 않은 장소.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냄새에 이미 취해버릴 것 같던 공간. 바로 뒷간이다.
뒷간은 한옥집의 부엌 뒤쪽 구석에 독채로 있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꺾어지지 않고 죽 걸어 들어가면 으슥한 뒤쪽에 마련되어 있던 고요한 장소. 나는 무섭기도 하고, 부엌에서 퍼지는 고소한 밥 냄새와 섞인 희한한 뒷간 냄새가 싫기도 해서 언제나 그 언저리를 최대한 피해 다녔다. 뒷마당으로 가야 할 때도 일부러 반대쪽으로 멀리 돌아가는 수고를 감내하곤 했다.
다행히 막내였던 나는 언니들에 비해 뒷간 이용 나이를 조금은 늦출 수 있었기에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도 마루에서 토끼변기를 이용하곤 했다. 언니들이 이미 뒷간을 익숙하게 다닐 때도 토끼변기를 끌어안고 당당하게 그 특권을 만끽했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엄마와 할머니의 강한 압력–뒷간을 이용할 때가 되었다는–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부담과 두려움은 꽤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어떻게든 낮에는 넓은 집 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몰래몰래 해결하고, 밤에는 요에 실례를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오줌싸배기가 시집을 갔어?”
“오줌싸배기가 아들을 낳았다고?”
지금도 고모부는 내 소식만 들으면 나의 정체성이 오줌싸배기임을 강조하곤 하신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리곤 했던 내 흑역사는 이리하여 나이 사십이 되어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뒷간을 이용하느니 차라리 ‘오줌싸배기’로 남고자 했던 나의 처절한 투쟁을 그 누가 알랴.
우리 집의 뒷간으로 말하자면, 다정하고 화사한 한옥집의 풍경과 달리 그곳만은 으스스한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왜 그렇게 뒷간들은 모두 으스스한 걸까? 마치 뒷간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나무 뚜껑을 치우면 회색 시멘트 바닥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 아래 똥통으로 똑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하고, 한쪽 구석에는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놓은 신문지가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아니 고전이 되어버린 뒷간 공포 시리즈. 화장실 구멍에서 시커먼 손이 쑥 나오고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뭐 그런 것들을 굳이 물어보는 귀신이 살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러니 어떻게 뒷간을 이용할 수가 있었겠는가. 〈전설의 고향〉을 그리 좋아하면서도 정작 귀신이 살고 있을 뒷간은 갈 수 없는 것이 어린 나의 현실이었던 것을. 그리하여 요를 빨아 널어야 하는 날이 늘어나고, 집 구석구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 밝혀지며, 할머니께서 총대를 메고 나의 ‘뒷간 훈련’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할머니가 특별히 준비하신 기다란 막대기를 하나 들고 뒷간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밖에서, 나는 안에서 그 막대기의 양쪽 끝을 붙잡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섭고 불안해서 끊임없이 “할머니, 할머니! 막대기 놓으면 안 돼!”를 외쳐댔다. 마치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손을 잡아주던 선생님이 손을 놔버릴까, 그래서 물속으로 빠질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할머니가 막대기를 놓으면 가운데 구멍으로 쏙 빠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다. 볼일을 보는 것보다 막대기를 놓칠까 더 조마조마한 나머지 볼일을 봤는지 안 봤는지도 모르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저 네모난 어둠의 구멍 안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어찌 됐든 간에 임무를 완수하고 나오면 할머니는 커다란 눈깔사탕 하나씩을 벽장에서 꺼내주곤 하셨다. 그렇게 성공한 날에는 얼마나 어깨를 으쓱하며 식구들에게 자랑자랑을 하곤 했던지. 그렇게 온 집안사람들의 칭찬과 과도한 관심 속에서 뒷간 훈련을 마친 나는 다행히도 그 후로는 뒷간을 애용하곤 했다. 엄청나게 어려운 성년식의 관문을 통과하여 그제야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으면 제법 편안하다는 것,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차차 알게 되었다. 휴지 대용으로 할머니가 반듯반듯하게 잘라둔 신문지 조각을 들여다보며 전체 내용을 짐작해보기도 하고, 최신 동향을 살피는 척하는 센스까지 갖추게 되었다. 사실 제대로 읽지도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몇 년 안 있어 나는 더 이상 뒷간을 이용할 일 없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를 골라서 내어주는 친절한 귀신이 살던 뒷간도 더는 갈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훈련하지 않고 좀 더 버틸 걸 그랬나 보다.
별이 가득했던 한옥집 앞마당의 밤하늘이 그리운 것처럼,
부엌의 커다란 가마솥에서 번지는
고소한 밥 냄새가 그리운 것처럼,
“서 있으면 복 달아난다.”
잔소리 듣던 할머니 방 문지방이 그리운 것처럼,
한옥집 뒷간도 그리울 때가 종종 있으니
추억은 뒷간마저 그리움을 잔뜩 뿌려놓은 모양이다.
까치에게
헌 이를 남기지 못한 자의 저주
유치가 빠질 때 즈음 。
언니들이 학교에 가고 엄마아빠가 직장에 나가시면 집 안은 온전히 나만의 왕국이었다. 할머니와 복렬 언니를 쫓아다니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고, 할머니 방의 벽장 속에 들어가서 엿가락을 훔쳐 먹기도 하는 시간들. 그렇게 자유롭던 시절의 나에게 다가오던 또 하나의 공포는 바로 유치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집 안 구석에 숨어서 특별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사명을 홀로 짊어지고.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그 누구도 나의 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 전에,
어서 이 이를 빼내야 한다는 필살의 사명.
도대체 그 시절의 우리는 왜 이가 흔들리면 실에 묶어 빼내야만 했던 걸까? 언니들을 통해 몇 번이나 그 과정을 본 기억이 있었다. 할머니의 실 묶기. 가차 없이 이어지는 이마 때리기와 실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그마한 이. 그다음 아빠가 그것을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의 가락에 맞춰 멀리멀리 지붕 위로 날려보내는 의식.
이 일련의 의식들은 언니들이 하는 걸 구경할 때는 재미나고 두근두근하지만, 내 상황이 되면 완전히 달라지는 얘기다. 한마디로 공포 그 자체다. 입 안에 실을 묶고 이마를 때리며 빼버리다니!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밥을 먹기도 불편하고, 잘 씹지도 못하니 아무래도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또 시치미 딱 떼고 아니라고, 이는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우기곤 했지만 할머니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직감은 도저히 피해 갈 수가 없었다.
그날도 아마 몇 번째인가의 유치가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이미 두어 번 어른들의 눈을 피해 혼자 이를 뺀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감을 갖고 몰래 이를 흔들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매의 눈을 지닌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는 내내 내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채셨고, 이미 하얀 무명실까지 준비해놓고 나를 할머니 방으로 부르셨다.
할머니의 반짓고리에 있던 하얀 무명실은 언제나 나에게 포근함을 주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한 새하얀 이불 홑청을 방 안 가득 펼쳐놓고 무명실을 대바늘에 끼워 꿰매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햇빛을 머금은 이불 위에 올라가 있다가 방해되니 얼른 내려오라 혼이 나면서도 그 느낌을 즐겼다.
바로 그 무명실을 치마폭 아래 숨겨놓고 할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이가 흔들리나? 얼마나 흔들리나? 뒤에 덧니가 생겼나 안 생겼나 보기만 하자고. 누워보라고. 결국 유인에 넘어간 나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고, 그때 할머니 손에서 나온 무시무시한 무명실.
“싫어, 싫어, 할머니! 나 이 안 뺄 거야!”
“안 빼면 큰일 나! 이가 다 삐죽삐죽해져서 도깨비처럼 되면 어쩌려고!”
“그래도 싫어! 안 뺄 거야!”
그렇게 실을 감으려는 자와 도망치려는 자 사이의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그 순간 할머니의 손에 잡힌 나의 이는 실을 감기도 전에 쑥! 빠져나와 내 입 속으로 꿀꺽!
그 순간의 정적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할머니와 나.
순간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정적.
그리고 밀려온 공포.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학교도 못 가보고 나이 여섯에 이렇게 가는구나.’
왕방울 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루로 나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계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곧 나는 죽는다고,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 전화하는 거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본 인생의 첫 기억이다. 엄마가 죽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고, 할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나의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왜 이를 삼키면 죽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후로도 아빠는 종종 놀리곤 하셨다. “수진이는 밥 안 씹어도 돼. 뱃속에 가면 삼킨 이가 다 씹어줄 거야.”라고. 그 말도 나는 한동안 믿었다. 뱃속에서 그 이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또 다른 이빨들과 함께 괴물같이 커다랗고 삐죽삐죽한 입을 만들고 있는 무서운 상상도 따라다녔다.
그것은 까치에게 헌 이를 던지지 못하고 뱃속에 남긴 자의 저주와 같이 무섭고도 오묘한 세계였다. 한옥집 안에 실재하던 신비의 세계 말이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똥싸배기 이야기 。
그날은 학교에서부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배가 살살 아픈 것이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에이, 조금 참았다가 얼른 집에 가서 해결해야지.’ 하고 일단은 참았다. 그런데 학교가 끝날 때쯤엔 꽤 배가 아파왔다.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책가방을 챙겨 친구들보다 앞서 집을 향해 나섰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은 어린 나에게는 꽤나 먼 길이었다. 우선 공주교대와 같이 붙어 있던 학교 둘레를 빙 돌아 나오는 것부터 오래 걸렸고, 그 뒤로 플라타너스 나무길을 지나 제민천을 따라 한참 내려와야 했다. 제민천 다리를 두 개쯤 지나고 조금 더 걸으면 한옥집 골목길에 다다른다.
배와 다리에 힘을 주고 걸으며 학교 지났고, 나무길 지났고, 첫 번째 다리 지나~려는데…. 어머나! 작년에 전학 간 친구가 걸어오는 게 아닌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뛰어오는 친구.
“수진아!”
“어, 그래. 반가워!”
인사를 했지만 꾸루루루룩 뱃속에서는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파래져서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집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제민천은 제법 물이 불어 있었다. 가끔 여름에 물이 많이 불면 다리 대신 돌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이 종종 있곤 했다. 난 무서워서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지만.
첫 번째 다리를 지나면 그 옆으로 엄마 친구네 마리아 수예점도 있고, 내 친구들의 집도 있었다. 그날 따라 마리아 아줌마가 누굴 기다리시는지 문 앞에 서 계셨다. 다른 때는 늘 닫혀 있던 문이었는데….
“수진이 학교 갔다 오는구나.”
“네, 아줌마.”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다리를 꼬며 걸음을 빨리 했다. 아줌마가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걸까 두려워하며.
이제 두 번째 다리가 보인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려는데 왜, 도대체 왜 지금 하필! 다른 날은 누굴 만나고 싶어도 그렇게 안 만나지는데! 오늘은 왜 또! 지난 학기 학교에 오셨던 교생 선생님이 오고 계셨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교생 선생님인데!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선생님을 모른 척하고 갈 순 없었다.
“선생님!”
“어머! 수진아!”
나를 기억하시는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생 선생님이 가실 때 아이들 사이에서는 한창 색깔물 만들기가 유행이었는데, 엄마의 다 쓴 화장품 통 속에 곱게 섞은 여러 가지 색깔물, 말하자면 물감을 탄 물을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갖가지 색의 새로운 화장품은 얼마나 예뻤는지, 아이들은 서로 더 예쁜 색깔물을 만들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나도 그렇게 몇 통인가를 만들어서 교생 선생님 이별 선물로 드렸는데, 선생님이 과연 그 선물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걸 지금까지 간직하고 계실지도.
묻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았는데 점점 더 급해져서 제대로 물을 수가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 다리 사이로 삐져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선생님과 이야기를 끝내고, 겨우 두 번째 다리를 지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다. 휴우~
‘잘 참았다!’
그렇게 드디어 우리 집이 보이는 골목 끝에 들어섰다. 이렇게 집이 반가울 수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에 휴~ 크게 한숨을 쉬는 순간!
뜨거운 것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하늘색 바지 양쪽으로 뜨끈한 느낌이 퍼지는 순간 온몸에 곤두서 있던 힘이 스르륵 풀리고 모든 희망도 꺼져버렸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참으며 여기까지 왔건만 정녕 똥싸배기가 되고 말았다는 자괴감.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한 좌절과 부끄러움. 작은 머리에 온갖 괴로운 생각들을 지닌 채 어기적어기적 집을 향해 기어갔다. 뜨거운 그것과 함께 눈물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평소 그렇게 사랑스럽던 갈색 대문은 온통 절망으로 시커매 보였고, 다정했던 골목길은 그토록 길고 멀게 느껴졌다. 가는 도중 어느 이웃이라도 만날까 두려워하면서 다리를 질질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믿을 데라곤 할머니뿐.
대문을 열며 나는 큰소리로 울어댔다. 놀란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