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삽질여행 - 알아두면 쓸데 있는 지리 덕후의 여행 에세이

웰컴 투 삽질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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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선 


지도 위를 걸으며 세상을 수집하는 여행자. 지도가 좋아 여행을 시작했고, 여행과 지리에 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지리 덕후가 떠먹여주는 풀코스 세계지리』가 있다. 취미는 여행책 뒤적거리기요, 몇 없는 특기 중 하나는 세계지도 외우기다. 지리학을 전공했을 것 같지만, 일본학 그리고 문화관광학을 전공했다. 지도 위를 직접 걷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 24개국 100여 개가 훌쩍 넘는 도시를 여행했다. 여전히 귀를 쫑긋 세워 새로운 곳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미래의 여행 계획을 세운다. ‘지도를 알고 떠나니 여행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말을 듣기 위해 책과 여행매거진, 때론 강연으로 여행과 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웰컴 투 삽질 여행』을 펴내며 이번에는 여행의 민낯을 가감 없이 신랄한 에세이로 펼쳤다. 하늘길이 막혀도 여행의 희로애락을 모두 함께 느낄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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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결국 여행은 삽질의 연속이다

프롤로그


결국 여행은 삽질의 연속이다




사람마다 각각의 여행 스타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 지역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보아야 가성비 있는 여행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무조건 배낭을 메고 자유여행만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 아프게 계획을 짜고 헤매는 게 싫어 패키지여행만 다닌다. 또 누군가는 혼자 하는 여행만이 진정한 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른 누군가는 여행 메이트가 없으면 아예 여행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여행을 하더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여러 가지 여행의 방식을 모두 경험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세상에 완벽한 여행법은 없다. 당신이 여행자라면 어떤 여행에서라도 삽질은 하게 될지니.

초등학생 때 엄마를 따라 베이징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엄마를 잃는 인생 첫 번째 여행 삽질도 경험했다. 뭣도 모르는 채로 떠났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의 나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바로 옆 나라임에도 우리와 충분히 다른 환경에서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극적이었나 보다. 밥상머리 옆에 붙여놓은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점점 더 먼 나라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은 지도 구석까지도 눈길이 갔다. 나도 모르게 지리 덕후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어린 지리 덕후는 성인이 되면 지도 위 곳곳을 쏘다닐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 20대의 끝자락에 다다른 지금, 24개국 100여 개 이상의 도시를 여행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지리 덕후의 여행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요~”라고 질문한다. 지리 덕후의 여행은 한정된 세월과 한계가 있는 비용 내에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끌어낼 것인가가 중점이다. 고로 여행지 선정부터가 피곤하다. 호기심만으론 이미 아프리카 콩고분지의 침팬지와 인사했고, 남극의 펭귄과 기념사진이라도 찍었겠지만, 여행이란 게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만큼은 꼭 가봐야 해!’ 같은 곳조차 없었다. 전부 다 가고 싶으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지금 내게 맞는 최적의 여행지와 최선의 여행 방법’을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어떤 지역에 오래 머물러 보고 싶다! 그러면 오래 머물러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일본학과에 진학해 오사카에서 1년간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머물렀다. 유학 생활에서 겪는 삽질은 또 다른 맛의 삽질이었다. 생활 속의 실전 삽질이랄까. 장기체류의 맛을 한번 보니, 새로운 지역에 영어를 배울 겸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타로 떠났다.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 몰타는 영어를 배우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휴양지라서 대부분 공부보다는 노는 데 좀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단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나라이며 유럽에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다른 영어권 나라보다 비교적 저렴한 물가도 장점. 게다가 겸사겸사 유럽 배낭여행을 할 명목이 생겼다. 결국 3개월 정도 몰타에 머물고, 나머지 2개월은 배낭 하나로 유럽 본토를 떠돌았다. 그리고 배낭여행인 만큼 무수히 많은 ‘삽질 썰’들을 안고 돌아왔다.


모든 나라에서 이렇게 유유자적 새로운 삶을 즐겨볼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시간과 자금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지역에서 색다른 문화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니 이럴 땐 그냥 패키지여행을 가버린다.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많이 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실현하기엔 패키지여행만 한 게 없다. 버스에 몸만 앉히면 알아서 데려가 주고, 설명해주고, 안전도 책임져주고, 잘 먹여주기까지 하니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욕심일 것 같다. 게다가 자유여행보다 훨씬 저렴하다. 이만한 가성비가 없다. 나처럼 패키지여행 많이 가본 여행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패키지투어에서도 삽질 걱정이냐고? 어떤 가이드를 만나냐, 어떤 동행인들을 만나냐에 따라 여행이 두 배로 재미있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엉망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특수지역 패키지투어는 패키지여도 온갖 돌발 상황이 쉽게 발생한다.


갔던 곳을 몇 번이나 재방문하는 것도 주특기다. 나에겐 도쿄가 그런 지역이 되어버렸다. 도쿄를 처음 방문한 건 2014년이었는데, 2020년까지 도쿄 방문 경력만 총 9번이었다. 일 년에 1~2번은 갔다는 수치가 나온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다닌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콘서트 관람이라는 취미가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커다란 도쿄돔에 풍성하게 울리는 음향과 웅장하게 터지는 폭죽을 맛본 후로 연례행사처럼 찾고 있는 꼴이다. 그렇게 도쿄를 자주 찾아대니 나라고 돈이 남아돌 리가 없다. 없는 돈을 짜내 왔으니 분수에 맞게 다닌다. 놀러 다닐 비용까지는 마련하지 못해 친구 집에 눌러앉아 뒹굴기도 한다. 정작 친구는 출근하고 집에 없다. 최근에는 남의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만 한 적도 있다. 이 행위에 대해서는 도쿄에서의 일상을 누려본다는 명목을 갖다 붙였다. 여행에 예산이 부족하면 매번 삽질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여행에 동행인이 붙으면 여행 계획은 좀 더 복잡해진다. 비교적 허술하게 계획을 짜도 현지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1인 여행과는 달리, 나만 믿고 있는 동행인을 위해 어떻게든 괜찮은 여행을 꾸려야만 했다. 동행인에게도 대부분 취향이라는 게 있다. 그 취향에 맞게 장소를 선택하고 스케줄을 짜기 위해 무수한 인터뷰를 거쳐야 한다. 다 겪어보고 하는 말이다. 대부분은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하지만, 경험상 막상 가면 하나도 안 괜찮더라. 최근에는 가족과의 여행이 잦아졌는데, 여행 인프라가 좋은 지역은 자유여행에 도전해보지만, 그게 아닐 경우 가차 없이 패키지투어만 예약했다. 머릿수가 많아질수록 여행은 산으로 가기 때문에 군말 없이 말을 따라야 할 리더가이드가 있는 편이 좋았다.


결국, 나는 조심스러운 여행자다. 모험을 추구할만한 배짱도 없다. 혹시나 애써 떠난 여행을 망칠까 봐, 그러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이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려 여행을 떠나지만, 어떤 방식의 여행이든 완전히 순탄한 여행은 없었다. 계획적인 나에게조차 여행길에서의 수많은 삽질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국 여행이란 삽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듯, 여행길에선 조금만 뒤틀려도 하루가 꼬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여행에서 삽질만큼 기억에 남는 게 또 없다. 해당 지역의 유명한 랜드 마크를 만난 감동은 서서히 잊히지만, 애써 고생한 이야기만큼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심지어 미화되어 추억으로 포장된다. 온갖 삽질이 또 어떻게든 해결되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별일 없이 잘 살아 돌아와서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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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동 길부터 삽질하는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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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find my lugg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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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가 넘은 늦은 밤, 낯선 공기와 섞여들 수 없는 분위기. 인천에서 런던까지 12시간, 그리고 또 런던에서 3시간을 날아왔다. 이곳은 몰타의 루카국제공항이다. 나의 첫 유럽. 늦은 밤 도착한 비행기는 런던에서 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내려주었고, 그 비행기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던 나 또한 몰타와 처음 마주했다. 오랜 비행에 고된 몸을 이끌고도 흥분되었다. 봄에서 여름까지 내 삶의 터전이 될 이 나라와 인사했다. 두근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컨베이어 벨트에 내 짐이 안 나오기 전까지는.

장시간 비행하며 먹고 잔 것을 제외하면 딱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영화 보기 세 편 정도는 클리어했다. , 또 다른 하나는 여행 영어 책에 나온 문장을 외우는 일이었다. 공항 편에 나온 문장들을 보니 너무 과한 사건사고를 예시로 들어 딱히 쓸 일이 없어 보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말 몰랐다. 몇 시간 후의 내가 ‘제 짐이 안 나와요’ 즉, ‘I can't find my luggage’를 당장 써야 할 줄은.

난생처음 온 유럽인데 내 캐리어는 절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8인치나 되는 데다 진한 민트 컬러를 자랑하는 내 캐리어를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었다. 이건 그냥 안 나오는 거였다. 울고 싶었지만,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러게 내가 런던에서 경유할 때 캐리어도 제대로 탔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잖아, 이 히스로공항 놈들아!!! 속에서 저주할 대상들이 한둘씩 지나갔다. 하필 나한테 이 항공권을 예매해준 유학원 대표, 12시간도 넘게 타야 할 비행기임에도 착석 후 1시간씩이나 지연 출발한 항공사, 내 짐도 경유 편 비행기에 탔냐는 질문에 “maybe”라고 성의 없이 대답한 히스로공항 직원. 너희 다 저주할 거야. 으아아아!


“I can't find my luggage.”


밤 12시. 손님들은 모두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나만 빼고. 시간이 늦어 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직원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여유롭게 앉아 딴짓을 하는 단 한 명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몇 시간 전에 외워둔 문장을 발사했다. 그리고 “내가 런던에서 경유했는데 어쩌고저쩌고” 주절주절 몇 마디 문장을 덧붙였다.

“오케이.”

그는 그 어떤 안타까움도 미안함도 위로도 없이 종이 한 장을 꺼내 주었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 ‘칭얼거릴 대상을 잘못 찾았구나’ 싶어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는 여권과 항공편 정보를 접수해 가더니 너무나도 쿨하게 말했다.

“네 짐은 아직 런던에 있네. 내일 택배 보내 줄게. 주소 적어.”

그 와중에 난생처음 듣는 몰타식 영어 발음은 미지의 영어였다. 단 한마디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생판 가보지도 못한 주소를 적는 내 처지가 우스웠다. 지나치게 낯선 몰타의 지명은 어떻게 읽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그대로 알파벳만 따라 적었다. 그는 전화번호도 적으라고 했다.

‘나 전화번호 없는데.’

몰타에 온다고 한국 유심은 정지시켜버렸고, 새로운 몰타 유심은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허탈하게도 도착한 날이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이었다. 어학원은 주말에 쉬니까 어학원의 도움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허허허 웃으며 국내에 있는 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적었다. 종이를 주니 다 됐으니 나가 보란다. 네 짐은 다음날 도착할 거라는 말만 남기고.


출국장으로 나갔더니, 무척이나 따분해 보이는 택시기사 한 분만이 남아 내 이름표를 들고 있었다. 네가 ‘Seo’냐고 종이와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숙소까지 나를 데려다줄 픽업 서비스인 것이다! 나는 구원자를 발견한 뒤 신나게 기사님께 달려갔다. 이 먼 나라까지 동양인 학생이 왔는데 캐리어 하나 없는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징징거릴 타이밍이 왔다.

“제가 런던에서 경유했는데요. 글쎄 걔들이 제 짐을 안 태워준 거 있죠?”

드디어 내 편을 만났다는 안도감에 아저씨께 친한 척 말을 걸었다.

“그렇군요.”

대화가 끝났다. 이럴 수가! 다들 내 불쌍한 사연에 공감 좀 해달란 말이야! 말들이 왜 이렇게 짧은 거야? 숙소로 가는 동안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좌절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외로울 일인가. 기나긴 비행을 하고 온 내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몰타의 밤은 적막하기만 했다. 라디오에서는 알 수 없는 몰타 말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길거리에 유기견으로 추정되는 개 두 마리가 지나갔다. 무려 달마시안이었다.

‘무슨 길거리 개가 달마시안이야? 나 정말 먼 곳까지 와버렸구나.’

달마시안을 보자마자 이질감이 설렘이 아닌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내 편도 아무도 없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 먼 곳으로 떨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우습지만 그 이후엔 몰타에서 달마시안과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아저씨는 숙소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어학원에서 준비한 전달사항 패키지와 내 방 열쇠를 받았다.

“그냥 들어가면 되나요?”

“네.”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별다른 의지가 되지 않은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영 모르겠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몰타에 있는 동안 내가 묵을 숙소는 여러 명의 학생이 함께 사는 일종의 셰어하우스였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집은 몰타의 여느 집이 그렇듯 아련한 상아색의 집이었다. 낯선 집으로 들어가자 새벽 2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누군가가 거실에 있었다.

“하이~”

누군지 모를 백인 여성 한 명이 나를 반겨주었다. 얼떨결에 “하, 하이” 인사한 나는 마지막 구세주 후보에 그를 올렸다.

“내 방은 7번 방인데, 7번 방은 어디야?”

그는 친절하게도 나를 2층 7번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싱긋 웃으며 “굿나잇” 하고 사라지는 그는 정말로 천사 같은 존재였다. 이후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몰타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진 않았는가 싶다. 고맙습니다, 그날 밤 당신은 저의 유일한 구원자였어요. 


나는 2인실을 신청했다. 어떤 룸메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밤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따고 들어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놈의 몰타 열쇠는 세상 구식이어서, 그 커다란 열쇠를 구멍에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열쇠 구멍은 안과 밖으로 뻥 뚫려 있었고, 한 열쇠로 안팎을 모두 잠그고 열어야만 했다. 손에 쇠 냄새가 진동할 즈음 겨우 문을 여는 데 성공했고,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매우 어지럽게 흐트러진 방의 모습을 보며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금요일 밤이라 클럽에 간 건가? 여기서 클럽이 되게 가깝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소지품을 보니 룸메이트가 한국인으로 추정되었다.

‘아, 진짜 센스 없게 룸메이트를 같은 국적으로 붙여놓냐.’

외국인 룸메이트와의 몰타 라이프라는 꿈이 산산이 조각났지만, 그보다 일단 너무나도 간절하게 씻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배낭뿐. 수건이고 잠옷이고 갈아입을 옷이고 다 캐리어에 있다는 것을. 내가 가진 것은 유일하게 칫솔과 치약뿐이었다. 울고 싶었다. 엉엉. 얼굴도 모르는 룸메이트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룸메이트의 마른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용품도 누군가의 것을 훔쳐 쓴 꼴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나 정말 너무 급하니까 이 정도는 봐주라.’

그러고는 화장실에 갇혔다. 그놈의 열쇠 때문에. 아무리 돌려도 뻑뻑하게 굳은 열쇠는 끝없이 나를 약 올리고 있었다.

‘나는 열 수 있다. 나는 열 수 있다. 나는 열 수 있다.’

그렇게 화장실 문을 붙잡고 최소 10분간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 후로도 일주일 동안 수도 없이 화장실에 갇혔다. 나는 그 열쇠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24시간도 넘는 긴 이동 시간 동안 입었던 땀에 찌든 옷을 잠옷이랍시고 다시 입어야만 했다. 와, 세상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도 야박하게 구는 것이냐!


몰타와의 첫 만남은 너무나도 지독한 머피의 법칙 그 자체였다. 다음날까지 룸메이트는 방에 들어올 낌새가 없었다. 변변찮은 다른 친구도 만들지 못한 채였다.

“네가 7번 방에 새로 들어온 애야? 네 룸메이트는 지금 네덜란드로 놀러 갔어.”

다음날 본 유일한 중국인 하우스메이트가 말을 건네주었다. 보통 새로운 하우스메이트가 오면 다들 환영해준다고 하던데, 내가 입주한 시기가 딱 온갖 이유로 사람이 텅텅 비어있을 때였단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는 상태라, 딱히 누군가를 만나서 인사하고 싶은 심정도 아니었다.

끼니 해결을 위해 일단 밖으로 나갔다. 버거킹으로 가서 햄버거 세트나 시켜 먹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튿날 될 때까지도 의지 되는 사람 하나 없이 대체 뭘 하고 있던지. 다시 방에 들어가서 처박히고 싶었다. 마트에서 저녁으로 먹을 즉석식품을 하나 사 왔다. 집에 들고 오니 더럽게도 맛이 없어서 우울해졌다. 이딴 거에 돈을 5유로나 쓰다니. 남은 음식은 상온에 보관했더니 금방 쉬어서 곧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하루가 지나 택배가 오기로 한 날짜가 되었다. 이른 밤부터 잠이 잘 오더라니 아침 6시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평소에 워낙 밤낮이 뒤바뀐 삶을 살던 나인지라,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 없이 평범한 루틴을 구축했나 보다. 의외의 행운이었다.

‘그나저나 택배는 몇 시에 오겠다는 거야? 내 방은 2층인데 언제 택배가 올 줄 알고 받으라는 거야? 1층에 벨은 있나? 내가 못 받으면 대신 받아줄 사람도 딱히 없어 보이는데, 뭐 어쩌라는 거야!’

답답한 상황에 짜증이 차올랐다. 때마침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택배가 도착한다는 문자가 왔단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상앗빛 집들이 이곳이 몰타임을 알리고 있었다. 발코니 정취나 감상하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커다란 차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차에서 민트색 캐리어가 내려왔다. 내 캐리어였다! 내 캐리어야! 어리둥절하고 있는 기사를 보고 그게 내 짐이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타이밍이 좋을 수가! 택배가 오는 타이밍을 방에서 맞추다니! 후다닥 내려가 캐리어를 받아왔다. 32kg에 육박하는  항공사가 규정하는 추가 요금 최대치의  짐을 실은지라, 그 무게를 끌고 혼자서 2층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1층에서 캐리어를 열어 짐을 꺼내 일일이 옮기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캐리어의 등장에 삶이 다시 피어난 것 같았다.


“어, 안녕하세요. 제가 여행을 다녀와서요!”

뽀송뽀송하게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는 침대에 누워있으니 룸메이트가 도착했다. 한국말이다! 드디어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죠? 오늘 처음 왔으니까 밖에 산책 겸 나가볼래요?”

그는 나를 데리고 몰타의 해안가를 산책시켜주었다. 평화로운 해안가를 따라 반짝반짝 윤슬이 춤추고 있었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푸름과 반짝임이었다. 바다가 포근히 도심을 향해 굽어 들어와 있었다. 도심과 지중해가 맞물린 삶의 현장. 평화로운 얼굴로 제각각의 주말을 맞이하는 사람들. 아, 이걸 보기 위해 내가 이곳까지 왔구나. 

“언니, 저 몰타에 오길 잘한 것 같아요.”

24시간 동안 펼쳐진 머피의 법칙은 드디어 끝이 났다. 지독한 쓸쓸함이 반짝이는 윤슬 아래로 덮여 사라졌다.


2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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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는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뒀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이름은 여행길이다.


괴테가 사랑한 도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을 오래도록 꿈꿔왔다. 철학에 관심은 없었으나 괴테가 산책했다는 ‘철학자의 길’에는 관심이 있었다.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보인다던 고성과 강줄기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져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다. 대학의 역사는 무려 14세기부터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하이델베르크만 찾으면 손쉽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홀로 배낭여행 중에 기차로 떠나는 야심 찬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했다. 숙소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고, 하이델베르크까지는 고작 기차로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쉽게 갈 수 있었다. 당일치기 일정 중에서도 매우 만만한 일정이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어 보이는 이 길이 내 유럽 여행에서 가장 수난기가 될 줄이야.

고대하던 하이델베르크 여행을 앞두고 평소 게으른 여행자인 나조차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전날 예매해둔 기차표 시각보다도 꽤 이른 아침. 여유 시간을 가지고 프랑크푸르트역에 도착했다. 역 내에서 샌드위치를 사고는 곧장 기차표에 적힌 플랫폼으로 향했다. 

‘여기서 아침식사나 하면서 기다려야지.’

콧노래가 나올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역은 유럽 전역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기차들로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며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내 앞에서도 서넛 대의 기차가 도착하고 또다시 출발했다. 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출발할 시간이 되어 가는데, 왜 전광판에 안내조차 없을까?’

그때 독일인 친구가 해준 조언 하나가 생각났다.

“독일 기차 믿지 마. 매번 지연되는 게 독일 기차라고.”

음, 그렇구나. 짜식들~ 의외네? 약속 잘 지킬 것 같고 대중교통도 발달했을 것 같은 이미진데? 천진난만하게 ‘후후’ 웃고 말았다. 그런데 출발 시간에서 10분이 지나고도 전광판에 안내 하나 없는 건 너무 하잖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역무원을 붙잡고 어영부영 질문을 시작했다.

“저기요. 하이델베르크 행 열차는 도대체 언제 오나요?”

약속 잘 지킬 것 같고 교통 시스템도 좋을 것 같던 이미지는 다 부서졌지만, 무뚝뚝할 것 같다는 역무원 이미지만큼은 편견 그대로였다. 그는 귀찮다는 듯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출발했는데요?”

“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40분 전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플랫폼 바뀌어서 옆 노선에서 출발했어요.”

“헐….”

플랫폼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샌드위치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안내방송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탓일까.

“티켓은 이미 샀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하이델베르크로 가야 해요?”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티켓 값 날려먹었다는 말만 돌아오지 않길 빌면서.

“30분 뒤에 오는 거 타세요. 하이델베르크가 종착역이에요.”

“헉. 정말 감사합니다!”

퉁명스러웠지만 매우 도움이 되는 대답에 만족하며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그래, 사람이 이 정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지! 시간을 좀 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


잠시 후, 역무원이 타라고 한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종착지가 하이델베르크라는 것을 확인하고 냉큼 올라탔다. 곧이어 기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기차는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서기도 어찌나 자주 서는지 아무래도 내가 KTX 요금을 내고 무궁화호, 아니 체감상 비둘기호에 탑승해 버린 것 같았다. 이 속도로 가는데 1시간 만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대폰을 켜 GPS를 찍어 보았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났는데, 하이델베르크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승무원 씨…. 제가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걸 타고 가라고 조언할 수가 있어? 도착 시간이 전혀 예상되지 않았지만, 일단 탔으니 버텨보기로 했다. ‘하이델베르크 행 기차’니까 언젠간 하이델베르크엔 도착하겠지, 뭐.

기차는 느릿느릿 움직였고,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길 반복하다 어느 구간부터는 내가 탄 기차 칸에 그 어떤 손님도 남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남겨졌다. 게다가 이번엔 한 역에 정차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나 긴지 10분이 넘게 도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러움과 지겨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아아, 기차가 출발을 안 해.”

“안내 방송 없었어?”

“독일어로만 뭐라 뭐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봐.”

“내가 탄 칸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잠시 내린 사이에 문 닫히고 기차가 다시 출발해버리면 어떡해?”

이런 이야기를 실컷 나누다 다시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기차가 정차한 지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역시 내려서 물어봐야겠어.”

전화를 끊고 기차에서 내렸다. 역무원과 기관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차의 머리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기차의 꼬리에서 머리까지 빠른 걸음으로 질주했다.

“이 기차는 언제 다시 출발하나요?”

나의 질문에 그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 열차는 지금 선로 과열 때문에 여기까지만 운행해요.”

“네에?”

어이가 가출할 것 같았다. 때는 7월이었지만 선로 과열을 걱정할 정도의 더위는 절대 아니었는데, 뭐요, 다른 것도 아니고 선로 과열 때문이라고요? 여기 기술 선진국 맞아? 

“저는 그럼 하이델베르크까지 어떻게 가나요?”

“역 밖으로 나가면 무료로 버스를 탈 수 있어요.”

“네…. 알겠어요….”

이제는 나더러 또 버스를 타란다. 일단 가라는 데로 갔는데 대체 어디서 뭐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 헤매다가 딱 한 대 있는 버스를 발견했다.

“기차가 멈췄는데 여기서 버스를 타라고 하네요. 저는 하이델베르크까지 가야 해요.”

갑자기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버스 기사가 당황했다. 몇몇 승객과 버스 기사는 독일어로 웅성웅성 토론하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여성이 대신 설명해주었다.

“오케이. 당신한테는 지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이 버스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데, 버스를 기다려서 하이델베르크까지 가는 방법이 있고요. 아니면 경찰차를 타는 방법도 있어요.”

경찰차는 대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여기서 경찰차까지 타야겠어요…? 내 얼굴은 당혹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 버스, 출발하려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요?”

그는 다시 버스 기사와 한참을 독일어로 토론하더니 다시 영어로 입을 열었다.

“그냥 저만 따라오세요. 저도 어차피 하이델베르크로 가야 하거든요.”

“헉,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목적지가 같은 현지인이라니!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니! 온갖 고비에도 한 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무려 자전거를 끌고 탄 임산부였다. 기꺼이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달리 의지할 데도 없었으니 그는 오롯이 나의 구원자였다.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던 버스는 생각보다 일찍 출발했고, 작은 기차역 하나를 거쳐 이름 모를 또 다른 기차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지금 내릴게요. 따라오세요.”

“네. 알겠어요.”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쫄랑쫄랑 따라갔다. 기차역에서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아, 또 시련에 부딪히는가’ 싶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0분 후에 오는 기차를 탈 거고요. 타고 10분 정도만 더 가면 하이델베르크역에 도착해요.”

“네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현지인 찬스라니 이렇게 듬직할 데가 있나! 그렇게 마지막 기차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고, 약 10분 후 드디어 나는 고대하던 하이델베르크역에 도착했다. 기존의 도착 예정 시간보다 무려 3시간이 흐른 후였다.

하이델베르크에 살고 있다는 그는 버스티켓 구매와 버스 타는 방법까지 알려준 후 내 곁을 떠났다. 여행길에서 만난 천사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 방황이 어디까지 비틀어졌을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흑흑.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아기는 무사히 잘 태어났나요? 지금쯤이면 아기도 많이 컸겠군요. 


내가 하이델베르크로 여행을 다녀온 일주일 후, 이제 막 유럽 여행을 시작한 다른 친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이델베르크 당일치기에 도전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 친구는 버스를 예약해 아주 빠르고 편하게 다녀왔다고 한다. 젠장. 나도 버스나 예약할 걸! 여유만만하게 플랫폼에서 샌드위치나 먹던, 이 작은 실수가 이렇게 기나긴 괴로움을 낳다니! 다음부터 독일 기차는 절대 믿지 않을 테다.


3

변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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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오전 8시 30분 기차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손목시계 시침은 숫자 9를 찍고도 10을 향해 절반은 이동해 있었다. 스리랑카 홍차의 도시 누와라엘리야에서 기차를 기다린 지 어언 한 시간이 넘어서야 저 멀리서 낡은 기차가 꾸물꾸물 들어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역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매우 지루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다림 후, 한 세기는 과거로 타임리프를 한 듯한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것은 뉴트로가 아닌 진짜 레트로였다. ‘찐’이었단 얘기다. 공기가 답답해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끝까지 올렸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더 이상 볼 수 없는 기차의 창문 손잡이! 게다가 아직도 더 기다릴 시간이 남아 있었는지, 기차는 30분 가까이나 정차해 있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맙소사, 심지어 역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여긴 스리랑카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바깥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는 홍차밭이 이어졌다. 구름도 시선 아래에 깔려 마치 천상의 열차에 탄 것만 같았다. 열차는 낡았어도 주행 코스는 무려 알프스 특급 산악열차 클래스다. 창문으로 신선한 산바람을 맞으니 비염으로 막혀있던 코도 휑하니 뚫려버렸다. 기차 안으로 아련하게 퍼지는 햇살에 실컷 잠을 즐기다 깨길 반복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가만있어 보세요. 다 주제와 상관이 있으니 하는 겁니다.

‘갬성’ 한가득한 ‘찐’ 레트로 열차에서 오랜 시간 여유를 부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거나, 싸 온 간식을 야금야금 꺼내 먹거나, 햇빛을 받으며 늘어지게 잠을 잤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쉴 만큼 쉬고 놀 만큼 놀았는데도 열차가 도통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구글맵을 켜 목적지인 엘라까지 자동차 이동 시간을 찾아보았더니 약 2시간이란다. 그런데 이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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