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읻다 시 선집
이 한 권의 작은 책은 ‘읻다’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인 친구들로부터 시작하였다. 읻다는 열두 명의 발기인이 함께 만든 출판 공동체다. 여러 현장에서 일하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오직 책이 좋다는 이유로 모여 우리가 생각하는 양서를 내기로 마음을 모았다. 2015년 3월 11일에 정식으로 출판 등록을 하였고, 각자 노동력을 보태고 자본을 갹출했다.
우리에게 가치 있는 책이란 잘 팔리는 책도, 유명한 저자의 책도, 멋 부리며 내세울 만한 화려한 명분이 있는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수차례 소개된 책이어도 다시 전혀 다른 언어로 읽을 필요가 있다면, 상업성이 없어 판매가 부진해도 마냥 아름다우면, 현재의 상식이란 것에 반하여도 조금 더 어떤 불멸에 가닿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세계 바깥의 미지를 향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런 책이야말로 한국어로 존재해야 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닫힌 괄호 ‘( )’가 아닌 열린 괄호 ‘) (’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에 부응하는 인문 총서 ‘괄호 시리즈’ 열 권을 기획하였고, 첫 세 권으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쟁일기》,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Y 교수와의 대담》을 선보였다. 하나는 철학적 작업이고 하나는 시, 하나는 소설로 분류되는 책이다. 혹자는 이 책들이 어째서 하나의 총서로 묶일 수 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기준에서는 한 권 한 권 개별적이면서도 일관을 이루는 구성이었다.
그렇게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말처럼 여러 얼간이들이 함께 흥겹게 책을 만들었다.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만들고자 서로의 생각을 부딪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한 권 한 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완성해갔다. 읻다의 책을 지지해주기 위해 누구는 저자로, 역자로, 읻다에서 소규모로 진행하는 아카데미의 강사로 힘을 보탰고, 또 누구는 읻다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괄호 시리즈’ 이후의 시리즈로 ‘읻다 시인선’이, 또 디자이너로 참여하던 최성경을 대표로 하여 퀴어 문학 전문 출판사 큐큐가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괄호 시리즈’ 열 종과, ‘읻다 시인선’ 네 종, ‘큐큐’의 퀴어 문학 네 종을 공식 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작부터 예감했으나 외면했던 자본의 논리에 계속 부딪혔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가 하면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하였다. 지난 봄, 나 역시 읻다대표직을 벗고 에콰도르로 떠났다. 번역가로서 차후의 기획과 ‘읻다시인선’ 번역에 전념하기 위하여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출판 일을 내려놓고 나의 언어를 벼리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읻다는 누구 한 명을 위한 회사가 아니라 모두의 애정으로 자란 회사였기에 계속 출판을 이어나가고 있다. 발기인 중 한 명인 김현우가 읻다의 대표를 맡고, 최성경이 큐큐 대표로서 내일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잠정적으로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되면서 이 책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우리가 모두 함께하는 작업으로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처음 이 책을 만들게 된 계기는 앞에서 언급한 열여덟 종의 책에 앞서 비공식으로 출간한 시 선집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때문이었다. 읻다의 시작이었던 이 책은 백지에서 시작한 읻다를 믿고 후원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증정하고자 읻다의 역자들이 아끼는 시들을 골라 엮은 책으로 오백 권 한정으로 제작하였던 것이다. 한 편 한 편이 좋았지만 한 권의 시집으로는 호흡이 가빴던 어설픈 책이었음에도 적잖은 호평을 받았고, 계속되는 증쇄 요청과 ‘읻다시인선’의 출범을 계기로 좀 더 온전한 한 권의 시 선집을 내보기로 하였다. 유명 작가 이름에 기대어 감상적인 시들을 적당히 골라 꾸린 책, 특정 사조나 외국 문학의 논리만을 좇아 넝마를 기운 듯 엮어낸 시 선집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리듬을 지니면서도 생경한 많은 목소리들이 함께 움직이는 한 권의 시집을 만들고 싶었다. 수록할 시를 선별하기 위해 멀리는 1921년에 발간된 김억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 1954년 발간된 김춘수 편저 《세계명시선》에서부터 최근에 나온 시집들까지 한국에 나온 외국 시집과 시 선집들을 살펴보았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새로운 시들을 찾아 헤맨 결과 대략 삼백 편을 골라내었다. 이후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와 마찬가지로 시라는 것을 매개로 만나 가장 오래 서로 응원하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친구인 윤유나에게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줄 것을 부탁했으며, 그렇게 고른 시편들을 읻다의 친구들이 함께 번역하였다.
시집의 제목이 된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는 아폴리네르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원튼, 원치 않든, 읻다의 책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에게는 쓰잘 데 없고 이해 못 할 괴물 같은 책일 테다. 하지만 이 이해 못 할, 어쩌면 이해를 바라지도 않을 괴물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 괴물의 자승자박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이 책이 읻다와 함께해온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 자신만의 독서 여정을 이어나가며 읻다와 함께해나갈 누군가에게 소중한 책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도 허사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2018년 7월 31일
최성웅
나만의 언어를 꿈꾸고 찾아왔던 내가 어떻게 외국 시와 만나게 됐고 또 그것을 좋아하게 됐을까. 이 시 선집을 엮는 작업은 이런 질문에서 비롯했다. 나는 우리말로 옮긴 외국 시를 읽는 게 정말 좋았다.
내 모국어의 많은 말들이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을 주고받는 일은 사람을 아프게 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는 말이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선 사람을 베는 날이 되고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말을 견디기 위해 글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배우는 장에서는 말에 대한 억압에 시달렸다. 소위 문학적인 말과 문학적이지 않은 말을 구분해야 했고,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기 이전에 주입된 판단 기준들이 나의 언어를 강박과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역된 외국 시와 만나게 되었다. 번역된 외국 시를 읽으니 한국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한국어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즐거웠다. 나만의 특별한 언어를 갖게 된 것 같았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최대한 그 본연의 호흡에 가깝게 옮기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거친 리듬이 좋았다. 그것은 내가 찾고자 했던 어떤 언어의 진정성에 닿아 있었다. 번역된 외국 시를 읽는 것은 낯선 모국어를 읽는 일이며, 또한 모국어의 순수함을 느끼는 일이었다. 외국 시를 읽다보면 한국의 시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이 시 선집은 정신의 다른 방향에 각기 존재하는 시를 찾아 외국의 헌책방과 서점과 도서관들을 전전한 내 소중한 친구가 모아온 시들을 내 호흡대로 가려 엮은 것이다. 다양한 외국의 언어로 쓰인 시들은 때때로 읽는 이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로 비치곤 한다. 그 나라의 언어나 정서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더더욱 생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시인의 내밀한 목소리에 좀 더 쉽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만한 작품들을 고르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이 책의 옮긴이 중 한 명이 독일어로 쓰고 한국어로 옮긴 시 한 편을 담았다. 그 나라 말을 몰라도 감정은 전달될 수 있기에 이국과 한국의 경계를 벗어난 시에서 읽히는, 같지만 낯선 형태의 감정을 읽는 이에게 전달하고 싶다.
시 선집이라는 형태의 이 무질서한 세계에 실린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