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칠두
1955년생. 시원스러운 키와 몸매, 멋진 수염, 긴 머리 등으로 사랑받고 있는 시니어 모델계의 총아.
의상실 점원을 시작으로 영어회화 카세트테이프 수금사원, 나이트클럽 웨이터, 니트공장 직원, 지퍼회사 ‘술상무’, 국내외 공사장 인부 등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한때 미니슈퍼와 채소가게, 순댓국집, 갈빗집 등 손대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려 ‘미다스의 손’을 자랑했으나 세 번째 스무 살(환갑)을 넘기면서 한순간의 실수로 다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모델계에 입문, 제2의 청춘을 구가하고 있다.
2020 퍼스트브랜드대상 시니어 부문 수상.
이헌건
30여 년 동안 책도 만들고 글도 쓰고 강의도 하면서 제법 바쁘게 살지만, 입으로는 늘 ‘바쁘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작가 겸 편집자.
출판사 편집자-잡지사 기자-자유기고가의 삶을 오가면서 대박보다는 소박, 뜻밖의 행운보다는 일상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다.
출간 도서로는 명상 아포리즘 「행복으로 요리하는 오늘」, 「사랑으로 요리하는 내일」(소담출판사)과 포스코플랜텍의 회생 과정을 기록한 「사람 일 꿈」(도서출판 바른기록), 6월항쟁 30주년 기념 도서 「6월항쟁 서른 즈음에」(공저, 도서출판 은빛) 등이 있다.
아이캔두! 김칠두!
아이캔두! 김칠두!
초판 1쇄 인쇄일 2020년 3월 19일
초판 1쇄 발행일 2020년 3월 25일
지은이 김칠두·이헌건
편집 김세라
디자인 윤현정
인쇄·제책 황금연필
펴낸이 천호선
펴낸곳 도서출판 은빛
출판등록 2013년 4월 26일
주소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서울혁신파크 1동 303-B호
홈페이지 www.mylifestory.kr
전화번호 070-8770-5100
ISBN 979-11-87232-18-6(03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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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P제어번호 : 2020011727)
응원의 글
전유성(개그맨)
솔직히 다들 말만 ‘인생 60부터’니,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실천은 안 하잖아!
실천의 힘이 얼마나 큰가?
칠두가 증인이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살면 얼마나 억울할까?
내 인생 내가 사는 거다. 나는 할 수 있다.
김칠두를 봐라! 얼마나 폼 나냐?
옛날에 금송아지 키운 것, 백 번 말하면 뭐하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살자.
칠두도 하잖아!
응원의 글
이상봉(패션 디자이너)
내가 김칠두 씨를 처음 만난 건 2018년 8월 10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광화문광장의 무궁화 패션쇼에서였다.
패션쇼가 끝나고 난 후 연출가를 통해 김칠두 씨를 소개받았고, 며칠 뒤에 있을 부천만화축제의 오프닝 모델로 캐스팅하게 되었다.
요즘은 젊고 어린 모델들이 런웨이를 점령해버렸다. 하지만 김칠두 씨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가장 개성 있는 캐릭터였고, 그에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그만의 멋과 인생이 있었다.
꿈을 위한 도전은 나이와 상관없이 운명도 바꿀 수 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응원의 글
오미연(탤런트)
나이가 들어도,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어지는 분들이 있다.
모델 김칠두 선생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 느낌이 딱 그거였다.
‘참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구나!’
그의 별명이 ‘모델계의 테리우스’라는 걸 나중에 들었을 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데뷔 2년을 기념해서 김칠두 선생이 책을 낸다.
테리우스처럼 멋진 외모 속에 숨겨진 그의 인생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누군들 고단하고 힘든 인생사가 없겠는가만,
누구보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씩씩하게 헤쳐온 그이기에
이제는 아름답고 행복한 꽃길만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응원의 글
최순화(모델)
김칠두 선생님 곁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원만한 성격이 많은 친구들을 부릅니다.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열리듯이 김칠두 선생님은 인생의 후반에 늦게야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많은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고 계십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재능을 사회에서 꽃피우니, 그 씨앗이 이 사회에서 또다른 싹들을 틔워내고 있습니다.
김칠두 선생님의 지나간 시간 속에는 희로애락의 많은 경험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난 김칠두 선생님께 경의의 박수를 보냅니다.
책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야, 너도 할 수 있어!
사회자의 화려한 인사가 이어지는 동안, 무대 뒤쪽의 흐린 조명 아래 대기 중인 동료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굵고 거친 천으로 자연미와 야성미를 함께 드러내는 베이지색 울코트에 통 넓은 청바지, 낡은 운동화 그리고 멋스럽게 얹은 검은 베레모.
‘역시 디자이너의 감각은 달라!’
처음 옷을 피팅하는 순간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연출이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고, 주변에서도 나와 잘 어울린다고 해주었다.
“와! 멋있다!”
“칠두샘, 멋져요!”
동료 모델들도 멋지기는 마찬가지였다. 2018년 가을/겨울(F/W) 패션을 가늠할 ‘2018 F/W 헤라 서울패션위크-키미제이쇼’ 무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된 3월 하순이었지만, 패션계는 이미 가을/겨울을 넘어 2019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리허설 때부터 귀에 익었던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무대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고, 나는 힘차게 런웨이를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무대를 밝힌 조명 때문에 관중들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아!” 또는 “와!” 하는 낮은 탄성과 함께 여기저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객석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됐어! 성공이다!’
몸이 리듬을 타면서 수십 수백 번 연습했던 캣워킹(catwalking, 패션쇼에서 모델이 무대 위를 걷는 것)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마치 마약에라도 취한 듯 몸이 붕 떠오르는 듯 황홀했다. 단 30여 초 만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몇 차례 더 런웨이를 밟았지만, 황홀한 기분은 여전했다. 2018년 3월 20일, 나의 모델 데뷔 무대였다.
성공적인 무대 데뷔에다 즐거운 뒤풀이까지 마치고 오랜만에 푹 잤다. 수없이 반복되는 리허설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지는 환복 연습 등에 몸도 마음도 꽤 지쳤던 터였다.
그런데 잠든 사이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이름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검색이 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동창 몇몇까지 전화를 걸어와 “칠두야, 너 출세했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네 이름이 나와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축하한다!” 하고 전해주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앉아 있는 내게 딸아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어제 패션쇼 무대에 선 아빠 모습을 내가 SNS에 올렸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여기저기 사진을 퍼 나른 모양이야.”
“SNS?”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하는 거 있잖아.”
“그런데?”
“아빠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반응이 장난이 아니야. 어느 나라 사람이냐, 뭐 하는 사람이냐 하는 댓글도 많고….”
딸아이의 휴대폰을 통해 런웨이를 누비는 여러 가지 내 모습과 다양한 댓글들을 넘겨 보면서 문득,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 인사가 돼 있더라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일이 뇌리를 스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일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거구나. 이제는 정말 벼랑 끝에 섰구나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델로 데뷔를 하다니…. 게다가 하루아침에 인터넷 세상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니….’
첫 무대 이후 간간이 나를 찾는 언론사들이 인터뷰 때마다 빼놓지 않고 물어본 말이 있었다.
“떨리지 않았어요?”
누가 물어보건, 나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아뇨, 전혀 떨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신나던데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처음 서본 런웨이 무대가 마치 수십 년 동안 누벼왔던 것처럼 익숙하고 즐거웠다. ‘정말?’ 누군가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런 나를 바라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나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비는 고치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하늘을 향해 나풀나풀 날아오른다. 마치 언제나 나비였던 것처럼 말이다. 날아오르기 전까지 나비에게 필요한 시간은 잠시 앉아 젖은 날개를 말리는 단 몇 분이다. 하지만 알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기까지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눈에는 꽃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아름다운 자태만 보일 뿐,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인고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나 김칠두의 시간도 다르지 않다. 한 마리 나비처럼 런웨이 무대를 날아올랐지만, 바로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적어도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다. 젊은 시절 한때 모델을 꿈꾸었지만 ‘현실’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그 꿈을 접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그 꿈을 펼쳤다. 그런 나에게는 잠시 날개를 말릴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벌레들은 마지막 허물을 벗은 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변태를 하지 않으면 벌레로만 살다 죽는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모델 데뷔 이후 지난 2년의 시간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다. 딸의 권유로 모델학원에 등록한 것이 2018년 2월이었고 ‘2018 F/W 헤라 서울패션위크-키미제이쇼’가 열린 게 2018년 3월이었으니 모델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데뷔 무대를 치른 셈이다. 그리고 2년이 흐르는 동안 패션쇼 무대는 물론이고 각종 광고와 방송, 뉴스 등을 통해 틈틈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마치 지난 30년의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듯 숨 가쁜 나날들이었다. 때로는 계속 이어지는 밤샘 촬영에 힘들 때도 있지만 내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꿈을 접고 살았던 지난 시간, 심지어 ‘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나는 언젠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시절, 내게 큰 힘이 되었던 한마디가 있다.
“야, 너두 할 수 있어.”
초보 영어학습자를 위한 광고의 어느 장면에서 주인공이 속삭이듯 들려주었던 그 말은 ‘나도 할 수 있다’라는 강한 자기암시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김칠두, 아이 캔 두!’
늦은 나이에 모델을 꿈꾸는 이들, 희망의 끈을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좌절의 순간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말을 들려드리고 싶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그 희망의 증거는 바로 나, 김칠두다.
2020년 3월
김칠두
| 차 례 |
응원의 글
칠두도 하잖아!_ 전유성(개그맨)
내가 본 모델 김칠두_ 이상봉(패션 디자이너)
모델계의 테리우스, 김칠두_ 오미연(탤런트)
인생의 후반, 용기와 희망을 선사한 김칠두 선생님_ 최순화(모델)
프롤로그
야, 너도 할 수 있어!
응원의 그림
Part 1 질풍노도의 칠두
될성부른 떡잎
언터처블 막둥이
세상에서 가장 험한 등굣길
그래도 중학교는 마쳐야지 이놈아!
돈 버는 것 빼고는 못 하는 게 없었던 팔방미인, 아버지
책으로 익힌 공부, 몸으로 익힌 공부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 김칠두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고○○ 선생님
택시와 함께 날아간 대박의 꿈
그래도 고등학교는 마쳐야지 이놈아!
‘어쩌다 범생이’
순수한 친구들과 함께한 ‘문학의 밤’
출석 일수라도 채워라, 좀
Part 2 영원한 자유인
‘스지 의상실’ 미스터 김
꿈으로 끝난 모델의 길
싱싱한 배추와 무가 왔어요~
술과 장미의 나날들
77번 웨이터 김칠두
“저는 술 한잔 해야겠습니다”
어쩌다 직장인
사글세 보증금과 맞바꾼 포니 한 대
내 삶을 바꾼 린이의 우유 한 통
부천 미니슈퍼, 장사의 시작
슈퍼와 구멍가게 사이
마음의 고향, 남대문에서 밀려나다
‘아메리카상’의 꿈
꿈은 사라지고 몸은 강화도로
Part 3 마흔, 순댓국을 알 나이
강화도령, 채소 장수로 돌아오다
역마살이 낀 미다스의 손
순댓국집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대박 신화, ‘장터 순댓국’의 시작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칼질 퍼포먼스
순대 없는 순댓국집
고기를 삶아다 줘 봐!
시화에 꽂히다
‘털보 토종 왕순대촌’, 대박 신화의 시작
어쩌다 문을 연 영통 직영점
영통점 대박을 이끈 돼지갈비와 소곱창전골
007 뺨치는 순대 비법 찾아내기 대작전
체인점의 시작
복수혈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실패는 또 다른 실패를 부른다
Part 4 칠두, 런웨이를 날다
린이가 바꿔준 두 번째 인생
제2의 김칠두는 나?
김칠두 이전과 이후
패션의 완성은 주름살
모델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없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오뚝이 혹은 7전 8기
나를 성장시키는 경쟁심리
부록
화성에서 온 여자, 아내 이야기_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속 깊은 딸, 린이 이야기_ 아빠 하고 싶은 것 다 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들, 웅이 이야기_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에필로그
‘뜨아’와 믹스커피
‘미스 트롯’ 출신 가수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더니 상금을 더 올려서 ‘미스터 트롯’까지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하다. 50년쯤 전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나도 분명 한 자리쯤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믿거나 말거나, 어린 시절의 김칠두는 일곱 살에 가수로 데뷔한 하춘화 못지않은 트로트 신동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18번’은 남상규의 ‘추풍령’이나 저음이 매력적인 가수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 등이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면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아따, 목소리 한번 간드러지네. 잘한다!”
“뉘 집 자식인지, 똑소리 나는구먼.”
“앙코르!”
무대 아래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쉴 새 없이 박수를 친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환호 소리가 뒤섞인다. 앙코르를 외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이번에도 최소한 인기상이나 장려상이다! 물론 어떤 상을 받건 온전히 내 손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무대가 있고 박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나는 어릴 때부터 무대 체질이었던 것 같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1962년. 5·16인지 뭔지가 휩쓸고 간 이듬해였다. 나는 일곱 살이 되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고향 마을은 물론, 인근 마을에서 열리는 콩쿠르 대회까지 거의 다 참가했다. 대도시에나 가야 겨우 극장 구경을 할 수 있었고, TV는커녕 마을 하나에 라디오도 몇 대 없던 시절, 시골 마을 여기저기서 열리는 콩쿠르 대회는 어쩌다 한 번씩 돌아오는 서커스단보다 더 큰 동네잔치였다. 주로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을 앞두고 열렸지만, 이 마을 저 마을 순회를 했기 때문에 읍내를 중심으로 한동안은 이 마을 저 마을이 온통 들썩거리곤 했다.
일종의 노래대회였던 콩쿠르 대회는 지금의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상업성’을 띠고 있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약간의(?) 참가비를 내야 했는데, 그 돈은 동네 형들이 알아서 내주었다. 나는 그저 무대에 올라가 신나게 노래만 부르면 되었다. 조건은 단 하나. 내가 받은 상은 참가비를 내준 형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번 형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인기상이든 장려상이든 하나는 꼭 타곤 했다. 참가비가 있는 대회인 만큼 부상이 꽤 짭짤했다. 형들로서는 남는 장사를 한 셈이고, 나는 내 끼를 맘껏 발산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일찌감치 ‘윈-윈’의 원리를 몸으로 터득했다.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된 무대 순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형들의 꼬임(?) 때문에 간간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서울 사당동으로 이사한 후인 중학생 때도 한 번 더 무대에 올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게 상을 준 것은 노래 실력보다는 꼬맹이의 재롱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게 아닌가 싶지만, 내가 무대 체질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 가지, 참고로 덧붙이자면 초등학교 때까지는 키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냥 또래들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쑥쑥 크기 시작해서 결국 친구들과 머리 하나쯤 차이 나는 키가 되었다.
지금은 형태가 좀 달라졌지만, 당시 초등학교에는 ‘치맛바람’의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방귀깨나 뀐다는 집안의 엄마들은 수시로 학교를 드나들며 선생님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고, 그 엄마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언터처블(untouchable)’ 존재가 되곤 했다.
물론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우리 집에서는 1년 365일이 다 가도록 학교에서 엄마의 ‘치맛바람’은커녕 치맛자락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시흥 소래초등학교이다. 시흥은 지금은 월곶 포구 그리고 박보검과 송혜교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남자친구’로 유명해진 갯골생태공원, 어시장으로 유명한 오이도 등으로 제법 이름이 알려졌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바다를 끼고 있는 흔한 시골 마을이었다. 때때로 열렸던 콩쿠르 대회 이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날이 그날 같은, 평온한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내 또래들이 흔히 겪을 만한 자그마한 풍파도 없었던 것은 사실 형과 누나들 덕분이었다. ‘칠두’라는 이름을 들으면 딱 연상할 수 있듯이 나는 7형제의 막둥이다. 내 위로 형만 6명이 있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누나가 두 분 더 있었으니 총 9남매다. 아무리 간 큰 ‘일진’이라 하더라도 나를 상대로 어찌해볼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으리라(물론 당시에는 일진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우리 동네에서는 중고등학생 형들도 웬만하면 내게 꿀밤도 잘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가끔 SNS에 나오는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언터처블’ 막둥이였던 셈이다.
그러나 평온하고 즐거웠던 초등학교 시절은 졸업과 동시에 끝나고 말았다. 12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고향 집을 떠나라는 아버지의 엄명 때문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나를 한동안 보시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름지기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다.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 칠두 너도 중학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니도록 해라.”
말씀은 갑작스러웠으나, 내심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미 형과 누나들도 서울에서 학교에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뉘 말씀이라 거역하랴. 나는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내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모교가 된 곳은 용산 보광동의 오산중학교. 일본이 막 조선을 삼키기 직전인 1907년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유서 깊은 학교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역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오산중학교 입학과 함께 내 삶은 갑자기 꽃길에서 가시밭길로 바뀌어버렸다. 가시밭길의 시작은 ‘통학’이었고, 결론은 가출과 유급이었다. 결국, 나는 중학교만 4년을 다닌 ‘문제아’가 되었다.
서울내기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당시 내 심정은 북한인지 중국인지가 겪었다는 ‘고난의 행군’이 바로 내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서울에 있는 오산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온전히 ‘유학’을 보내주신 게 아니라 ‘통학’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통학 코스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난코스 중의 난코스였다. 눈곱을 겨우 뗀 채 새벽밥 챙겨 먹고 시흥 미산동 집에서 버스를 타고 소사역까지 가는 게 1차 관문. 그리고 앉을 자리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통학 열차를 타고 용산역까지 가는 게 2차 관문. 용산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용산 보광동에 있는 오산중학교까지 가는 게 3차 관문이었다. 시간으로는 대략 3시간 전후.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간 어린 소년이 매일 오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는 토요일 수업까지 있을 때였으니 더더욱 힘이 들 수밖에.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험한 등굣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저게 바로 내 얘기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곧바로 주인공 꼬마들이 학교에 지각했는데도 선생님이 오히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걸 보고는 채널을 휙 돌려버렸다. 나 때와는 너무도 다른 상황에 괜히 심통이 났다.
나도 그 애들처럼 수시로 지각을 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어린 몸으로 하루 6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학은 무리였다. 하지만 나의 담임 선생님은 TV에 나오는 인자한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 심한 꾸중은 기본이고 때로는 꿀밤을 먹이거나 친구들 앞에서 손을 들고 서 있게 하기도 했다.
학교 가는 게 점점 싫어졌다. 그러다 담임 선생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던 어느 날, 나는 중대 결심을 했다.
‘학교가 뭐 이래? 만날 혼만 내고…. 내가 지각하고 싶어서 하나? 내가 치사해서라도 내일부터 학교 안 나온다!’
그러고는 실제로 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집에서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씩씩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학교 대신 청계천이나 남대문, 서울역 등을 쏘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내 동급생들이 학교에서 교과서를 펴놓고 영어, 수학을 공부할 때 나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공부 했다.
칠두 스타일_Cildu Style
칠두삼천지교_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시장에서 배웠다.
세월이 지난 뒤 돌아보면 갑자기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아찔한 순간이 있다. 물론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심드렁하게 지나갔지만, 어느 날 ‘그때가 바로 내 인생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내 머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위기는 바로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 대신 서울 시내를 온통 휘젓고 다니기를 며칠이나 했을까. 슬슬 집에서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딴에는 학교를 그만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썼지만, 그래 봤자 중학교 1학년. 산전수전 다 겪은 부모님을 길게 속이기는 어려웠다.
“칠두야, 요즘 학교 잘 다니고 있나? 통학하는 게 너무 힘들지?”
“예? 네…. 괜찮아요. 잘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