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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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구멍의 벽면을 쳐다보았고,
벽들이 선반들과 책장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언제나 나를 위한 장소
서점은 한없이 조용한 곳이면서 동시에 온갖 소음으로 넘쳐나는 이상한 장소다. 적어도 내가 어릴 적 처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던 작은 동네 서점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그곳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공간처럼 무서운 기분을 자아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위가 모두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책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늘 사람들이 있었다. 책 읽는 사람,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사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시계를 보는 사람,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사람, 앞치마를 두른 사람, 양복을 입은 사람, 짙은 화장을 한 사람, 이상한 냄새가 나는 사람, 지금은 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진 사람들까지. 30분 정도 서서 살펴보니 서점은 결코 한적한 곳이 아니었다. 쏟아질 듯 쌓인 책과 책 주위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만드는 시끌벅적한 시장 같았다.
나는 딱히 무슨 책을 살 것도 아니면서 서점에 자주 놀러 갔다. 말 그대로 서점이 내 놀이터였다. 어떤 계시 같은 것이 있었다거나 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는 없고, 대신 특별한 목적이 한 가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 오신 교생 선생님을 좋아했다. 큰 키에 안경을 쓴, 약간 무뚝뚝한 표정이 수업 첫날부터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선생님의 나이는 분명 20대 중반 정도였을 텐데 무심한 표정 때문인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도 굳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하지 않는, 연륜이 깊게 쌓인 어른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름 방학 때 담임 선생님께서 재미있는 숙제를 하나 내 주었다. 방학 동안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하나씩 만들라는 것. 주제는 어떤 것이든 괜찮다고 했다. 시, 소설 같은 문학부터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채집 활동 등 갖가지 예를 들며 예술에는 경계가 없으니 방학 동안 무엇이라도 마음껏 해 보라고 우리를 응원했다. 나는 무언가 멋진 것을 만들어서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싶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방학이 끝나면 실습을 마치고 우리와 헤어질 교생 선생님께 어떤 식으로든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다. 고민을 거듭해 과자 상자를 재활용한 장난감을 만들기로 했다. 오롯이 내 아이디어는 아니었고 그즈음 일본 작가 기우치 가쓰가 쓴 『공작 도감』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물론 책에 나온 것을 그대로 베끼지는 않았다.
드디어 개학 날, 좀 더 눈에 띄고 싶은 생각에 『공작 도감』에 나온 것보다 훨씬 크게 만든 과자 상자 장난감을 들고 교실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모두 내가 만든 크고 멋진 작품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것을 늠름하게 들고 나가 교탁에 올려놓고 아이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연신 옆에 서 있는 교생 선생님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내 눈에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옅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개학식을 마치고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교생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따로 부른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칭찬하실까? 한껏 들떠서 교무실로 들어섰지만 기대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결과는 매우 허무했다. “방학 숙제로 만들어 온 작품이 아주 멋지더구나. 그런데 다른 것을 조금 흉내 낸 것 같아서 아쉬웠다.” 순간 화가 나서 대꾸했다. “세상에 장난감이 얼마나 많은데요. 완전히 새로운 게 어디 있나요? 다들 비슷할 수밖에 없잖아요!”
무례하게 굴었던 나를 야단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선생님은 그저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책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서점에도 많이 가 봤겠구나? 시장에 있는 서점에도 가 봤니? 거기 있는 책이 모두 몇 권일지 생각해 본 적 있니?” 나는 선생님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엄청 많겠죠. 그걸 어떻게 일일이 세어 봐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서점에 다시 한번 가 보라고 하셨다. 대신 이번엔 반드시 무슨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서점에 가서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라고 했다.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지만 그 많은 책이 서로 흉내 내지 않고 모두 다른 내용을 담고 있거든. 멋지지 않니?”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멋지다는 말인지.
그래도 며칠 후 서점에 갔고 거기서 무언가 다른 모습을 발견하려 애썼다. 다음 방문 때도 그 다음 방문 때도 꾸준히 다른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일이 서점에 대한 시선을 크게 바꾼 계기가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생각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한 거다. 책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만지고, 책과 이야기 나누고, 책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을 이 시기에 이렇게 모두 서점에서 배웠다.
이제는 어떤 이유로든 서점에 가는 게 자연스럽다. 책을 사는 것도 자연스럽고, 책을 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을 때 들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책을 사든 사지 않든 서점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곳만은 언제나 나를 위한 장소일 거라는 믿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서점은 아주 묘한 장소다. 그저 책이라는 물건을 파는 가게일까? 아니다. 책 가게로 한정 짓기에는 거기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서점은 온갖 것을 다 품고 있는 장소다. 서점의 말들, 서점이 들려주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서점은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어렸을 때 동전 몇 개를 들고 서점을 찾은 이후로 나는 언제나 서점의 단골이었고 거기서 들려오는 말에 귀 기울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졸업하고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서점의 말들은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끝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서점 주인이 되도록 이끌었다. 서점 주인이 되고 나니 손님일 때는 듣지 못했던 소리까지 들려 왔다. 그렇게 수집한 비밀스러운 말들을 이제 여기에 조금 풀어놓는다.
조용히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매번 새로운 저마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은 그러니까, 서점이라는 긴 이야기에 붙이는 100개의 짧은 주석이다.
등장인물
나
서점 주인이자 이 책의 화자. 아주 어릴 때부터 책과 서점을 좋아했고 학교를 마치면 집보다 서점으로 먼저 향했다. 서점 주인이 일하는 모습이 편해 보여서 어른이 되면 꼭 서점을 차리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IT 회사에서 일했다. 먼 길을 돌아 서른 살 되던 해 서울 은평구에 작은 서점을 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서점에서 읽고 쓰고 책 다루는 일을 한다.
G
부리부리한 눈이 특징인 미스터리한 서점 단골손님. 생긴 것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독특하다. 필요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보다 서점에서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책에 관해서만큼은 과소비를 즐긴다. 딱히 별스럽지는 않지만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그는 그 원인이 ‘W’ 때문이라고 때때로 말했다. 어쩌면 그가 유년기에 겪은 어떤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일지도 모르고.
N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그만두고 소설을 쓰고 있다. 나이는 확실치 않지만 60대 정도로 보인다. 외국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한때 그가 쓴 소설이 외설스럽고 부도덕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말이 많은 편이지만 그 이야기들이 지루하지는 않다. 특히 내가 운영하는 서점에 올 때면 ‘L’이라는 어린 소녀에 대해 자주 말하는데, 그 소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가 지어낸 이야기 속 인물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K
‘나’와는 고등학생 때 한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사이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고 우울증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여행은 거의 다녀 본 적이 없고 회사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있으며 퇴근하고 밤이 되면 소설을 쓴다. 존재감 없는 성격 탓인지 서점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서점 주인인 내가 본 바로는 소설을 꽤 잘 쓰는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책방이란 ‘장소’보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러 가는 것보다 가게 주인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큽니다.
기타다 히로미쓰, 『앞으로의 책방』 62쪽, 여름의숲, 2007.
서점이란 무언가를 ‘사러’ 가는 곳이라기보다 그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곳이라고 해야 옳다. 책을 사는 게 아니라 만나는 곳. 서점에서 만난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책을 쓴 저자, 즉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 서점은 그렇게 우연한 만남과 필연적인 마주침이 이어지는 커다란 미로와 같다. 때론 서점에서 아무런 책도, 어떤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우리는 늘 이 한 사람만큼은 만난다. 바로 서점 주인이다.
서점 주인은 서점 그 자체이며 서점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이다. 서점에는 언제나 그 문과 이 문, 두 가지 문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이 서점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책을 산 다음 다시 그 문을 통해 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책을 산 것은 맞지만 어떠한 것도 만나지는 못한 것이다. 뭔가를 만나려면 이 두 번째 문, 서점 주인이라는 문을 마주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고 그를 통해 이어진 책장을 구경하면 그때부터 책과 만나는 또 다른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서점을 지키고 있는 주인이 가끔은 사찰 입구에 있는 무서운 사천왕처럼 부담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불친절하거나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과묵한 주인을 만났을 때, 그가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과감하게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진짜 서점으로 통하는 두 번째 문이 활짝 열린다.
서점 주인과 친해져야 해요. 주인이 당신을 신뢰한다면 안쪽으로 데려가서 더 많은 자료를 보여줄 거예요.
파리 리뷰, 『작가란 무엇인가3』 149쪽, 다른, 2015.
손님이 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확실히 서점이라는 가게에는 적용할 수 없다. 서점에서는 주인이 왕이다. 손님은 대개 손님일 뿐인데 영원히 손님으로만 남을지, 언젠가 서점 주인의 친구가 될지는 둘 사이의 ‘신뢰 쌓기’에 달려 있다.
어떤 서점 주인은 숨기는 것이 많다. 주인만 아는 멋진 책, 멋진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그 혼자만 아는 보물 창고를 구경하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서울 연신내 상가 골목에 있는 ‘문화당서점’에 손님으로 드나들었다. 청소년 시절엔 계절마다 한두 번 정도 갔지만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한 달에 몇 번씩도 갔다. 직장 생활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더 자주 갔고 책도 많이 샀다. 좋은 책이 많았다. 이즈음 나는 문화당서점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시집 컬렉션이 범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사장님은 청년 시절에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 공부를 많이 하셨단다. 그렇게 방문할 때마다 이야기 주고받기를 몇 년 동안 이어갔다.
결국 나는 사장님의 친구가 되어 비밀 공간에 초대받았다. 거기서 본 것을 말로 다 설명하긴 힘들다. 각종 절판본과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호화장정의 책들, 저자 서명본, 육필 원고, 대판형 시집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감히 만져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40년 넘게 그 골목을 지킨 문화당서점은 대형 중고서점이 근처에 들어오고 나서 2016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그 모습이 생생하다. 그곳은 내게 진정한 전설 속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었다.
그 ‘린린도’는 정말 좋아하는 장소였는데, 책을 살 돈이 없어 책장 사이를 한 바퀴 돌기만 해도 기분이 풍요로워졌다.
유즈키 아사코, 『서점의 다이아나』 211쪽, 한스미디어, 2015.
서점은 손님이 물건(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괜찮은 가게다.
우리는 책이라는 물건을 언제부터 돈과 교환하게 되었을까? 최초의 책은 사고팔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책을 직접 쓰거나(베끼는 것도 포함) 훔치는 것뿐이었다.
현대에 와서 이 두 가지 중 하나, 베껴서 갖는 방법은 거의 사라졌지만 책을 훔치는 것만큼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지금도 전 세계 서점에서 생각보다 많은 책이 느닷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책을 훔치거나 돈으로 사지 않아도 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책장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것, 책과 책 사이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물론 기웃거린다고 실물 책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가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꼭 실체가 있는 물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가진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처럼 말이다. 희망을, 소망을, 사랑을, 목표를, 의지를 우리는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다. 책장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책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어느새 우리는 그 책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린린도 서점을 기웃거리고, 그 주위를 맴돌던 한 소녀는 나중에 그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고 싶고, 가지고 싶고, 그 안에 길게 뻗은 미지의 길을 걷고 싶던 한 어린 ‘젠틀 매드니스’는 결국 그만의 서점을 갖게 됐다. 거기서 일하고, 거기 있는 책을 갖고, 전에는 가질 수 없다고 믿었던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됐다.
☞ 젠틀 매드니스에 대한 묘사가 궁금하다면 [문장 064]로 가시오.
책을 샀을 때 그 책은 분명히 독자의 소유물이 된다. 옷가지나 가구를 샀을 때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책의 경우 이것은 겨우 일의 시작에 불과하며, 책이 정말로 독자의 것이 되는 것은 독자가 그 내용을 소화하여 자기의 피와 살로 만들었을 때다.
모티머 J. 애들러, 『독서의 기술』 48쪽, 범우사, 1993.
책이 누군가의 완전한 소유물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될 수 있다. 현대의 책은 상품이고 사람들은 책에 매겨진 값을 지불하고 그걸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온다. 영수증까지 챙겼다면 더 완벽하다. 다른 모든 물건과 똑같이!
하지만 책은 좀 다른 한 가지가 있다. 물건은 물건이되 돈을 내고 사기만 했다면 그건 아직 진짜 책이 아니다. 책 모양의 종이 뭉치일 뿐이다. 책을 사서 그것을 읽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책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종이 뭉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빈 종이라면 낙서라도 하겠지만 읽지 않은 책이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을 돈까지 주고 샀다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소유한다는 말은 나에게 속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속해 있으려면 그저 물건을 손안에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들려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책은 그것을 사는 행위만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사서 읽고 이해하는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소유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봤을 때 서점은 확실히 여느 상점과는 결이 다르다. 돈 내고 물건을 사는 것은 같지만 그것을 소유하려고 서점에 오는 사람은 아직 초보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기묘한 물건을 마주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빛은 선하고 아름답다. 그는 서점에 와서 책을 사지 않는다. 책을 만난다. 책을 자신에게 속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자신이 그 책에 속한 사람이 되려고 겸손히 무릎을 꿇고, 고르고 고른 책 한 권을 뽑아 든다. 서점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며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멋진 장소가 된다.
나는 책등만 보아서는 그 제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통로를 끝없이 걸어 내려간다. 나는 이게 꿈속의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읽었다고 생각하거나, 언젠가 읽고 싶었다거나, 이미 읽었으나 잊어버린 텍스트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 143쪽, 더난, 2018.
내 기억 가장 밑바닥에 있는 최초의 독서는 책이 아니라 책등에 있는 제목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냥 ‘보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책을 전부 읽은 것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 방엔 내 책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읽을 만한 책, 읽고 싶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오직 아버지의 책장뿐이었는데 거기엔 어린이가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책들은 정음사에서 1960년대에 출판한 세계문학전집이었던 것 같다. 수십 권이 가지런히 들어차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초록색에 똑같은 크기로 제목만 달랐다. 어린 나는 그게 각각의 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 똑같아 보여서, 천일야화처럼 그 모두가 아주 긴 하나의 이야기라고 여겼다.
특히 그중에는 『일리아드』, 『데카메론』, 『마농레스꼬』같이 읽을 수는 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책이 여럿이었다는 기억이 뚜렷하다.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처럼 이해할 수 있는 제목도 꽤 있어서 나는 그 책 제목들을 연결해서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일리아드라고 하는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데카메론 왕이 마농레스꼬라는 기사를 시켜서 폭풍의 언덕으로 괴물을 불러내 싸우게 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우스운 추억 같지만 사실 요즘도 서점에 가면 종종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에 푹 빠지곤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일하는 서점에서도 책을 진열할 때 책 제목을 보고 뭔가 이야기가 연결될 것 같은 순서로 책을 배치한다. 누가 알겠는가, 나와 비슷한 어떤 사람이 이 서점에 와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 상상의 텍스트로 재구성할지.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만나려면 이따금 친숙한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토 A. 뵈머, 『운명적 영감에 빠진 문학가들』 169쪽, 북하우스, 2006.
대략 30년 전 즈음, 내가 책방을 찾아다니는 모험을 시작할 무렵에는 동네 곳곳에 책방이 참 많았다. 찾아가서 안을 보면 대개 내부 구조는 비슷했고 판매하는 책들 역시 아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책방 이름도 비슷한 경우가 꽤 있었다. ‘대한서림’, ‘글벗서점’, ‘동아서점’ 같은 이름은 내 친구 ‘김경식’처럼 흔했다. 그러나 같은 학년에 세 명이나 있었던 경식이들과 똑같이 친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닮은 책방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방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드는가 싶더니 지금은 또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런 책방을 다녀 보면 어렸을 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어렸을 때는 그 비슷해 보이는 책방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반대다. 모두 다르게 개성을 뽐낸다고 생각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구석이 많다. 개성시대라고 하지만 그 개성이라는 것이 어떤 범주 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런 책방을 구경 다니면서 매번 나는 어떻게 달라지면 좋을지 생각에 잠긴다. 뵈머의 책에 나온 말대로 내가 십수 년 동안 운영해 온 이 친숙한 공간을 자주 벗어나 보려고 한다. 그래야만 멀찌감치에서 내 책방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게 달라질 때 나만은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 싶다는 반항심 섞인 철학을 가지고 있다. 아마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나는 변함 없는 태도를 지키며 살고 싶어서 변해가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 내게서 조금 떨어져 한 걸음 멀리 있을 때 오히려 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자주 책방 문을 닫고 다른 책방으로 향하는 이유다.
사실 서점의 일은 이 ‘기다린다’는 말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찾아올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게 문을 열어두고 계속 기다립니다. 머지않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가만히 책장을 바라볼지도 모르고, 가게 안을 그냥 지나 곧장 나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도 가게 문을 열고 오직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서점 일의 본질입니다.
쓰지야마 요시오, 『서점, 시작했습니다』 178쪽, 한뼘책방, 2018.
기다림. 나는 그것을 아주 귀한 삶의 선물이라 믿는다.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 책을 읽곤 했다. 지금도 짧은 기다림의 시간을 위해 습관적으로 가방 속에 책이나 얇은 잡지를 넣고 다니며 읽는다. 5분이나 10분 정도 틈이 날 때 글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게만 허락된 비밀스러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책이나 잡지에 실린 글을 보며 한순간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날아 갔다가 다음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올 즈음에 맞춰 다시 제자리에 안전하게 착지한다.
지금은 생활 패턴이 바뀌어 이 기다림이라는 소중한 일상이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문득 서점에 출근해서 손님이 없는 오후를 보내자면 다시 그 미묘한 감정이 찾아오는 걸 느낀다. 서점은 손님을 기다리는 게 중요한 일상이다. 손님에게 서점은 갈 마음이 생겨야 가는 곳이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 온종일 기다렸지만 아무도 서점을 찾지 않았던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쓰지야마 요시오 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지금 그가 운영하는 서점은 꽤 유명해져서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어쩐지 그가 한 말을 읽으니 동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점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책을 멋지게 진열하거나 찾아 준 손님을 친절하게 맞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문을 열어 두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서점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