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1
화창하지만 쌀쌀한 4월의 어느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기분 나쁜 바람을 피하느라고 턱 끝을 가슴에 틀어박고 승리 맨션의 유리문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그렇지만 따라 들어오는 모래 먼지 회오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는 양배추 삶는 냄새와 넝마처럼 낡아버린 깔개 냄새가 진동했다. 복도 끝에는 실내에 걸기에는 너무 큰 컬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폭이 1미터 이상은 되는 거대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이는 마흔댓쯤 돼 보이고 볼에 새카만 수염이 잔뜩 난 텁수룩한 미남이었다. 윈스턴은 층계로 올라갔다. 승강기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호황기에도 좀처럼 움직이지를 못했는데 지금은 낮 동안 전기가 아주 끊겨버렸다. ‘증오 주간’을 대비하기 위한 절약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7층이고 나이도 이제 서른아홉이지만, 오른쪽 발목의 정맥류성궤양 때문에 몇 번이고 쉬어가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야 했다. 층계참에 이를 적마다 승강기 맞은편에 붙어 있는 거대한 얼굴의 포스터가 벽에서 그를 응시했다. 포스터는 아주 교묘하게 고안되어서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그 눈초리가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표제가 그 밑에 적혀 있었다.
방 안에서는 선철 생산과 관계된 무슨 수치 목록을 읽어나가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오른쪽 벽면 한 부분을 차지한 흐린 거울처럼 된 장방형의 금속관에서 흘러나왔다. 윈스턴이 스위치를 돌리자 음성이 약간 작아지긴 했지만 소리는 여전히 명료하게 들렸다. 그 기구는(보통 ‘텔레스크린’이라고 불리는데) 소리를 줄이는 일은 가능하지만 아주 꺼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창께로 발을 옮겼다. 당의 제복인 청색 작업복 때문에 작고 연약한 얼굴과 말라빠진 몸집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아주 매력적이고 얼굴은 원래 불그스름했으며, 피부는 질 나쁜 비누와 무딘 면도날로 문질러댄 데다 이제 막 꼬리를 감춘 겨울 추위 때문에 거칠었다.
닫힌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세계는 쌀쌀하게 느껴졌다. 거리 저쪽에서 바람이 회오리쳐 먼지와 휴지가 하늘로 치솟고, 태양은 빛나고 하늘은 기분 나쁠 정도로 푸른데도, 거리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있는 포스터 외에는 색채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새카만 수염의 얼굴이, 눈 닿는 어느 구석에서고 위압하듯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바로 맞은편 집 앞에도 붙어 있었다. ‘빅 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표제와 더불어 그 검은 눈이 윈스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리 저 아래쪽에도 또 한 장의 포스터가 한 귀퉁이가 찢겨져 바람 부는 대로 펄럭이며 영사(英社)*라는 낱말을 가렸다 드러냈다 하고 있었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헬리콥터 한 대가 지붕 사이를 낮게 스치며 마치 똥파리처럼 잠깐 빙빙 돌다가 방향을 바꿔 날아가버렸다. 창문으로 사람들을 염탐하는 경찰기였다. 그러나 그따위 순찰쯤은 문제가 안 되었다. 문제는 ‘사상경찰’이었다.
*'영국 사회주의'의 약자.
윈스턴의 등 뒤 텔레스크린에서는 아직도 선철과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해 수선스레 지껄여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했다. 윈스턴이 입 밖에 내는 말은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그 기계에 잡혔다. 더구나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놓인 한 그가 하는 짓은 모두 보이고 들리게 되어 있었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상경찰이 얼마나 자주, 어떤 조직으로 개인에게 감시의 촉수를 뻗치느냐 하는 문제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모든 사람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들은 자기네가 그러고 싶으면 언제라도 감시의 손을 뻗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입 밖에 내는 소리는 죄다 들리고, 캄캄한 때를 제외하고는 일거수일투족이 빠짐없이 탐지된다는 전제 아래 살아야 했고, 또한 그것이 본능이 되어버릴 만큼 습관이 들어 있었다.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을 등지고 있었다. 등이 보이긴 했지만 그가 알기로는 그것이 좀 더 안전했다.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그의 사무실인 ‘진리부’ 건물이 너저분한 배경 위로 웅장하게, 그리고 하얗게 솟아 있었다. 이것이 런던이라고 윈스턴은 막연한 불쾌감에 싸여 생각했다. 이것이 오세아니아에서는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제1공대(空帶)’로 으뜸가는 도시였다. 그는 런던이 전부터 계속 이랬는지 알아내기 위해 어렸을 적 기억을 짜내느라 애를 썼다. 당시에도 이따위 썩어가는19세기 가옥들이 늘어서 있고, 벽이라는 것은 통목으로 떠받쳐놓아야 하고, 창문은 마분지로 때워야 하고, 지붕은 함석판이 우그러지고, 마당을 둘러싼 담벽이라는 것은 여기저기 죄다 허물어져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뿌연 횟가루 먼지가 하늘로 치솟고 버드나무 잎사귀가 돌 더미 위에 흩어져 있었던가? 또 폭탄이 말끔히 쓸어버린 널찍한 장소에 닭장 같은 더러운 판자촌 부락들이 솟아 있었던가?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이런 것들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 관해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뭐 이렇다 할 배경도 없고 대개 알아볼 수도 없는 일련의 밝게 빛나는 그림뿐이었다.
진리부—신어*로 ‘진부’—는 다른 건물과 외양에서 판이했다. 흰색 콘크리트로 된 번쩍거리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건물로, 계속 테라스로 연결돼 하늘로 300미터나 높이 솟아 있었다. 윈스턴이 선 곳에서 읽을 수 있도록 그 하얀 건물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품위 있는 글씨로 쓰여 붙어 있었다.
*신어(新語)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이다. 그 구조와 어원에 관해서는 ‘부록’을 참조하라(원주).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진리부에는 지상에 3천 개의 방이 있고 지하에 그에 맞먹는 분실이 있다고 했다. 런던에는 외형이나 규모에서 이와 같은 건물이 세 개나 더 있었다. 이 건물들로 말미암아 주위의 다른 건물들은 영락없는 난쟁이 꼴이 되어버렸고, 승리 맨션의 지붕에서는 이들 네 건물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정부 기관이 들어가 있는 네 개의 청사였다. 즉 보도, 연예, 교육 및 미술을 관장하는 진리부, 전쟁을 관할하는 평화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 그리고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부부였다. 그 이름을 신어로는 진부(眞部), 화부(和部), 애부(愛部), 부부(富部)라고 했다.
애정부는 정말 엄청난 곳이었다. 그 건물에 창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윈스턴은 애정부 건물에 들어가기는커녕 그 가까이 접근해보지도 못했다. 그곳은 공무로밖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얽어놓은 가시철망에다 철문, 또 기관총이 잠복해 있는 거미줄 같은 길을 뚫고 들어가야만 했다. 건물 외곽의 검문소로 가는 길에서마저도 고릴라 같은 낯짝을 한 검은 제복의 보초병이 마디 있는 곤봉을 가지고 으르렁거렸다.
윈스턴이 갑자기 돌아섰다. 그는 차분하고도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텔레스크린을 마주 대할 때는 그런 표정이 이롭기 때문이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 옹색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청사를 나오느라 매점에서 점심을 먹지 못해서인데, 그는 부엌에도 다음 날 아침으로 먹으려고 아껴둔 시커먼 빵 한 덩어리 외에는 요기할 거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반에서 ‘승리주’라는 흰색 상표가 붙은 무색의 음료수 병을 꺼냈다. 승리주는 중국의 화주처럼 역겹고 느글느글한 냄새를 풍겼다. 윈스턴은 찻잔에 가득 찰 만큼 술을 따라 진저리치며 약을 마시듯 꿀꺽 삼켜버렸다.
금방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술은 꼭 질산 같았고, 더욱이 삼키는 순간에는 고무장갑으로 뒷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활활 타던 배 속이 가라앉고 기분이 한층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승리연’이라고 찍혀 있는 구겨진 담뱃갑에서 궐련을 한 개비 꺼내 무심코 곧추세웠는데, 담배 속이 마룻바닥으로 죄 빠져나오고 말았다. 다시 한 개비를 꺼낼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는 다시 거실로 가서 텔레스크린 왼쪽에 있는 자그만 책상에 앉았다. 그런 다음 서랍에서 펜대와 잉크병, 그리고 뒷장은 붉고 표지에는 대리석 무늬가 박힌 두툼한 4절 공책을 꺼냈다.
이 거실의 텔레스크린이 별난 위치에 놓인 데는 이유가 좀 있었다. 텔레스크린은 보통 온 방을 다 비출 수 있게 벽 끝에 설치되는 법이지만, 이 거실에서는 창문 맞은편 긴 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윈스턴이 지금 앉은 그 벽 한쪽에 깊숙하지는 않지만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아마도 방을 만들 때 책장을 놓기 위해 그렇게 설계한 듯싶었다. 이 구석에 앉아 몸을 잘 젖히기만 하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에서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내는 소리는 들리겠지만 구석에 앉은 한 발각될 리는 없었다.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대해 암시를 받게 된 것도 이러한 흔치 않은 방의 모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은 그가 방금 서랍에서 꺼낸 공책에서도 또한 암시를 받은 것이었다. 유난히 예쁜 공책이었다. 크림색이 도는 매끄러운 종이는 오래돼서 약간 누렇게 바랬지만,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에는 만들어진 일이 없는 그런 종류였다. 그러니까 공책은 40년은 훨씬 더 묵은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도시 빈민가(지금은 어디쯤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의 어느 악취 풍기는 작은 고물가게 진열장에서 공책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당장 불길처럼 일어났었다. 당원이 일반 상점에 드나드는 행위(그것을 ‘자유시장거래’라 불렀다)는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 규제는 엄격히 지켜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구두끈이라든지 면도날 같은 것은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리를 위아래로 재빨리 훑어보고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 2달러 50센트를 주고 공책을 손에 넣었다. 당시에는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 그 공책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나 지은 것처럼 그것을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공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의혹을 살 만한 입수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부터 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법은 아니지만(도대체 법이 없으므로 불법도 있을 수 없다) 일단 발각되는 날에는 사형을 받든지 적어도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윈스턴은 펜촉을 펜대에 꽂고 펜촉의 기름을 닦아냈다. 펜은 서명을 하는 데도 좀처럼 쓰이지 않는 옛날 필기도구이지만, 이 아름다운 크림색 종이에 볼펜으로 휘갈기는 것보다는 진짜 펜으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서 남의 눈을 피해가며 간신히 구입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손으로 쓰는 데 익숙지 못했다. 보통 아주 짤막한 메모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구술기록기’에 불러주곤 했는데, 물론 그것을 지금의 목적에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펜에 잉크를 찍고 잠시 머뭇거렸다. 뱃속으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종이에 무얼 쓴다는 것은 중대한 행위였다. 그는 작고 서툰 필체로 썼다.
1984년 4월 4일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 꼼짝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밀어닥쳤다. 무엇보다도 올해가 1984년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자기 나이가 서른아홉이고, 1944년인가 1945년인가에 태어났다고 믿어지니까 연도는 그쯤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1, 2년 내의 어떤 날짜도 꼭 찍어 말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누구를 위해서 이 일기를 쓰는지 별안간 의문이 일었다. 미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위해서인지. 그는 일기장 위에 쓴 의문스러운 날짜에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이중사고’라는 신어가 번쩍 떠올랐다. 처음으로 자기가 착수한 일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실감이 났다. 사람이 어떻게 미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가 현재와 흡사할 경우에는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그가 겪은 곤경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한참 동안 그는 멍청히 종잇장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에서 귀에 거슬리는 군악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당초에 자기가 뭔가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왔고,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기껏 그가 할 일이라고는 문자 그대로 지난 수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끝없는 독백을 종이에 옮겨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독백마저도 말라붙었다. 더구나 정맥류성궤양이 참을 수 없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걸 긁을 수도 없었다. 긁는 날이면 영락없이 염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며 가고 있었다. 그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앞에 놓인 그 페이지의 공백, 발목 살갗의 가려움증, 요란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 그리고 술로 인한 약간의 취기뿐이었다.
갑자기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을 쓰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되지 않았다. 첫 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도, 말을 맺을 때 마침표를 찍는 것도 잊어가며 작고 어린애 같은 필체로 비뚤비뚤하게 그 페이지를 써나갔다.
1984년 4월 4일. 간밤에 영화관엘 갔다. 전부 전쟁영화. 피란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어디선가 폭격당하는 장면이 제일 볼만했다. 엄청나게 거대한 체구의 뚱뚱보 녀석이 자기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는 대목에서 관객들이 좋아 날뛰었다. 처음에는 그 사내가 돌고래처럼 바다 속에서 용솟음치는 장면이 나오고, 다음 순간 헬리콥터의 총안(銃眼)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자 사내의 몸에 무수한 구멍이 뚫렸고 근처 바닷물은 분홍색으로 변했다. 녀석은 마치 구멍 속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관객들은 아우성치며 웃어댔다. 다음에는 아이들을 가득 태운 구명보트 위를 떠도는 헬리콥터가 나왔다. 뱃머리에서는 유대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세 살쯤 된 자그만 사내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꼬마 녀석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엄마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기라도 하듯 머리통을 가슴팍에 파묻고 있었다. 엄마 역시 공포로 사색이 되어 아이를 가슴에 안고 달랬다. 그녀는 자기가 아이를 싸안고 있으면 총알도 자기 아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 믿기라도 하듯 계속 아이를 감싸 안은 채였다. 그때 헬리콥터가 20킬로그램이나 되는 폭탄을 배 가운데다 떨어뜨렸다. 무시무시한 불꽃이 튀더니 보트가 한꺼번에 박살나고 말았다. 다음 순간 한 아이의 팔이 곧장 하늘로 치솟는 놀라운 장면이 나타났다. 헬리콥터가 기수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쫓아 오르며 찍은 것이 틀림없었다. 당원석에서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러나 극장 앞쪽의 노동자석에 앉아 있던 한 부인이 소란을 피우며 저런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애들 앞에서 저런 장면을 보이는 것은 잘못이다, 하고 소리치자 경찰이 그녀를 극장 밖으로 쫓아내고 말았다. 나는 그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무산자가 떠드는 데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전형적인 무산자가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절대로……
윈스턴은 쥐가 나기도 해서 쓰는 것을 중단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따위 쓰레기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은, 그가 멈추고 있는 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라 그것을 써둬야만 할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갑자기 집에 와서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막연한 일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날 아침 청사에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11시 정각 가까이 되었을 때 윈스턴이 근무하는 기록국에서는 개인 집무실에 있는 의자들을 끌어내 거대한 텔레스크린 맞은편 사무실 한가운데에 모아놓고 ‘2분 증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윈스턴이 가운뎃줄 자기 자리에 막 앉으려는 찰나 안면만 있을 뿐 말 한마디 건네본 일 없는 두 사람이 느닷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복도에서 곧잘 지나친 적이 있는 여자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창작국에서 일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따금 기름 묻은 손에 스패너를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소설 제작기(製作機)’를 맡은 모양이었다. 스물일곱쯤으로 생각됐는데, 대담해 보이고 숱 많은 까만 머리와 주근깨 있는 얼굴에 행동은 민첩하고 운동선수 같았다. ‘청년 반성(反性) 동맹’의 휘장인 좁다란 진홍색 띠를 바지허리에 여러 겹으로 둘러 엉덩이 모양이 아주 두드러졌다. 윈스턴은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하키나 냉수욕이나 단체행군 같은 것을 망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깨끗하게 보이려 애쓰는 듯한 흔해빠진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여자들을 다 싫어했다. 특히 젊고 예쁜 것들은 더 싫어했다. 요지부동하게 당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자, 슬로건을 찰떡같이 신봉하는 자, 이단자의 낌새를 귀신같이 맡는 자나 아마추어 스파이, 이런 사람들이 언제나 여자였고 특히 젊은 여자였다. 그런데 이 특이한 여자는 다른 여자들보다 한층 더 위험한 인상을 풍겼다. 언젠가 복도에서 지나칠 때 그녀가 곁눈질로 잽싸게 그를 스쳐보았는데, 마치 그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얼마 동안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던 일이 있었다. 그녀가 사상경찰의 앞잡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어디고 가까이만 있으면 그는 적의와 공포가 뒤범벅된 야릇한 불안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내부당원으로서 이름은 오브라이언이었고, 윈스턴이 그 지위를 가늠할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동떨어진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검은 제복을 걸친 내부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의자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오브라이언은 몸집이 크고 건장한 데다 굵은 목에 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짐승 같은 낯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매력적이었다. 그는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추켜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기묘하게 세련되어서 이상하게 긴장을 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런 표현이 괜찮다면, 그의 몸짓은 마치 18세기 귀족이 손님에게 담배 상자를 내놓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수년에 걸쳐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을 열두 번쯤 보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오브라이언에게 깊이 끌리고 있었다. 단지 그의 도시인다운 태도와 프로 권투선수 같은 체격의 대비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브라이언의 정치적 교조가 완전무결하지 못하다는 은밀한 믿음, 아니 어쩌면 믿음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희망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억누를 길 없이 그런 사실을 암시해주었다. 어쩌면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은 이단이 아니라 단순한 지성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됐건 텔레스크린이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만날 수 있다면 말을 붙여봄 직한 모습을 한 인간이었다. 윈스턴은 이러한 생각을 실현해볼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할 방법도 있을 리 만무했다. 이때 오브라이언이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더니 11시가 다 되어가는 것을 깨닫자 2분 증오가 끝날 때까지 기록국에 머물러 있기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는 윈스턴과 같은 줄에서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윈스턴의 다음 방에서 일하는 자그마한 갈색머리 여자가 자리했다. 까만 머리 여자는 바로 그 뒤에 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전율을 일으킬 만큼 무시무시한 굉음이, 마치 괴물 같은 무지스러운 기계가 기름 없이 돌아가는 듯한 굉음이 방 끝에 있는 거대한 텔레스크린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터지자 이가 악물리고 목뒤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증오’가 시작된 것이었다.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인민의 적인 이매뉴얼 골드스타인의 얼굴이 화면에 번득였다. 여기저기 관중들 가운데서 분노의 함성이 터졌다. 갈색머리의 작은 여자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뒤범벅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골드스타인은 오래전(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당의 지도급 인사 중 한 사람으로, 한때는 빅 브라더와 거의 동등한 자리에 있었으나 반혁명 활동에 개입해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러다 기적처럼 탈출에 성공해서 자취를 감춰버린 변절자이며 반동분자였다.2분 증오의 프로그램은 날마다 달랐지만 골드스타인이 중심인물이 아닌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일급 반역자이며 당의 순수성을 첫번째로 모독한 인물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모든 반당죄, 즉 모든 반역 행위와 태업 행위, 이단, 분파 행위 등은 그가 직접 교사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이 지구상 어디엔가 살아남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바다 건너 어디에서 외국 재정관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지도 모르고, 바로 이 오세아니아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소문도 심심치 않게 떠도는 것이었다.
윈스턴은 횡격막이 죄어왔다. 그는 골드스타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꼭 고통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골드스타인은 비쩍 마른 유대인의 얼굴에 후광 같은 흰머리는 심하게 헝클어졌고, 자그마한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재기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경을 걸친 칼날 같은 길쭉한 코에는 노인네들에게서 엿보이는 일종의 우매함이 서려 있었고, 어딘가 선천적으로 천박스럽다는 인상을 풍겼다. 염소를 닮은 얼굴에 목소리조차 염소가 내는 소리 같았다. 골드스타인은 늘 하던 버릇대로 당의 강령에 악독하게 공격을 해댔는데, 공격이 지나치게 악의에 차 있어서 어린아이까지도 그 과장됨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욕설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킬 만큼 놀랍게 설득력이 있어서 머리가 수준 이하인 사람들은 설복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빅 브라더를 매도하고 당의 독재를 비난하고 유라시아와의 즉각적인 평화 협정을 요구하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며 혁명이 배반당했다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빠르고 다음절(多音節)인 이 연설의 모든 것은 당의 웅변가들이 늘 쓰는 수법을 모방한 것이었고, 당원이 실생활에서 보통 쓰는 이상의 신어까지 구사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언변과 인기를 끌기 위한 말에 가려진 진실성에 사람들이 어떤 의심을 품을까 봐, 그가 말을 하는 동안 텔레스크린에 나타난 그의 머리 뒤에서는 유라시아 군대 대열이 끝없이 행진하는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무표정한 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딱딱한 모습의 인간 대열이 줄을 지어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지면, 똑같은 다른 대열이 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군인들의 둔탁하고 리드미컬한 군화 소리는 골드스타인의 염소가 우는 듯한 목소리의 배경음악 역할을 했다.
증오가 시작된 지 30초도 채 지나기 전에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반이나 되는 수가 참지 못하고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화면에 나타난 자기만족에 넘친 염소 얼굴, 뒤에 나타난 유라시아 군대의 끔찍한 숫자를 보면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골드스타인의 꼴을 보거나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저절로 공포와 분노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는 유라시아나 동아시아보다도 더 끈덕진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이유는 오세아니아가 이들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와 전쟁을 한다면 나머지 한 나라와는 으레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골드스타인이 모든 사람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고, 매일같이 하루에도 수천 번씩이나 연단에서 텔레스크린에서 신문에서 책자에서 그의 이론이 공박되고, 두들겨 맞고 비꼬임을 당하고 가련한 허섭스레기라고 지탄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끊임없이 그의 꾐에 빠져 넘어가는 멍청이가 생겨났다. 스파이들과 태업자들이 그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다가 사상경찰에 발각되어 잡혀 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는 방대한 정체불명의 군대뿐만 아니라 국가를 뒤엎어버리겠다는 임무에 몸을 바친 지하조직 음모자들의 사령관이었다. 지하조직은 ‘형제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듯했다. 또한 골드스타인이 직접 저술한 모든 이단론을 요약한 무서운 책자가 있었는데, 이것이 여기저기서 비밀리에 돌려 읽힌다는 귓속말도 들렸다. 그 책은 제목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그 책’이라고만 불렀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도 다만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일반 당원도 형제단이니 ‘그 책’이니 하는 말을 가능하면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았다.
2분이 되자 증오는 광적으로 고조됐다.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화면에서 나오는 미친 듯한 염소 소리를 삼켜버리고 말겠다는 듯 목청을 다해 아우성쳤다. 갈색머리의 그 조그만 여자는 얼굴이 빨개져서 마치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해댔다. 오브라이언의 무쇠 같은 얼굴마저도 뻘게졌다. 그는 의자에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밀려닥치는 파도에 대항이라도 하듯 우람한 가슴을 벌떡거리고 있었다. 윈스턴 뒷자리에 앉은 까만 머리 여자는 “돼지! 돼지! 돼지!” 하고 소리치기 시작하더니 별안간 묵직한 신어사전을 들어 화면에다 내던졌다. 사전은 골드스타인의 콧잔등을 후려치고 떨어졌다. 그래도 아우성은 냉혹하게 지속되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윈스턴은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고함을 치며 발뒤꿈치로 의자의 가로대를 맹렬히 차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2분 증오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이유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합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어떤 가식도 언제나 30초 내에는 필요 없어졌다. 공포와 복수심에의 가공할 도취와, 살육하고 싶고 괴롭히고 싶은 욕망, 큰 쇠망치로 얼굴을 짓이겨놓고 싶은 욕망이 전류처럼 이 모든 무리에게 흘러 들어와,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도 오만상을 찌푸리게 하고 광적인 상태로 빠져들어 괴성을 지르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란 블로램프에서 나오는 불꽃처럼 상대를 여기저기로 바꿀 수 있는, 일정한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추상적인 감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윈스턴의 증오는 전적으로 골드스타인을 향하지 않는 순간에는 반대로 빅 브라더와 당과 사상경찰을 향했다. 그래서 이런 때는 화면에 나와 있는 외롭고 멸시받는 이단자이며, 이 거짓투성이 세상에서 진실과 정상적인 정신의 유일한 수호자인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한덩이가 되어, 골드스타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로 느껴졌다. 그러한 순간에는 빅 브라더에 대한 은밀한 증오심이 찬양으로 뒤바뀌며, 빅 브라더는 아시아의 약탈자 무리에 대적해서 바윗덩이처럼 우뚝 버티고 있고, 골드스타인은 무력하고 생존마저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에도 단지 목소리의 위력에 의지해 문명사회를 파멸하려는 재수 없는 마법사처럼 보였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 임의로 증오의 대상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었다. 별안간 윈스턴은 악몽에서 헤어나려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처럼 격렬한 노력으로, 증오의 대상을 화면에 나타난 얼굴에서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윈스턴의 마음속에 생생하고 아름다운 환각이 스쳐갔다. 그는 고무몽둥이로 그녀를 직사하게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녀를 홀딱 벗겨 기둥에 잡아매고 성 세바스티아누스처럼 수없는 화살을 쏘아 죽이고 싶었다. 또 그녀를 능욕하여 절정의 순간에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그는 이제야 ‘왜’ 그녀를 그토록 미워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녀가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성적 감각이 무딘 까닭이며, 그녀와 같이 자고 싶은데 절대로 그럴 수 없기 때문이고, 껴안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곡선미 넘치는 야들야들한 허리에는 순결의 진취적 상징인 그 밉살스러운 진홍색 띠만이 감겨 있기 때문이었다.
증오는 절정에 이르렀다. 골드스타인의 목소리는 진짜 염소 우는 소리로 바뀌었고, 잠시 동안 얼굴마저 염소 낯짝으로 변했다. 그런가 싶더니 그 염소 낯짝은 어느새 유라시아 병사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그는 거창하고 무시무시하게 기관총을 마구 드르륵거리며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원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콧수염, 넘치는 힘과 신비스러운 침묵의 소유자인 빅 브라더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깊은 안도의 숨을 들이쉬었다. 빅 브라더의 얼굴은 너무나 커서 화면이 가득 찼다. 빅 브라더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몇 마디 격려의 말이었는데 전쟁터 북새판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일일이 구별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임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런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빅 브라더의 얼굴이 사라지고 대신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굵직한 대문자로 나타났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그러나 빅 브라더의 얼굴은 화면에 몇 초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눈에 와 닿은 충격이 생생하면 금방 씻어버릴 수 없듯이. 자그만 갈색머리 여자는 자기 앞쪽에 있는 의자 등판으로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떨리는 소리로 “나의 구세주여!” 하고 중얼거리며 화면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 다음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도를 중얼거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이 “빅—브라더! ……빅—브라더! ……빅—브라더!” 하는 장중하고 느릿하고 리드미컬한 찬가를 거듭거듭 읊조리기 시작했다. 빅과 브라더 사이를 길게 늘이면서 아주 천천히, 무게 있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마치 뒤쪽에서 야만인들이 맨발로 발을 구르며 둥둥 북을 쳐대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아마 30초는 족히 했을 것이다. 그것은 밀려드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하나의 후렴이었다. 한편으로는 빅 브라더의 지혜와 존엄성에 대한 일종의 찬송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가락이 있는 소음으로 의식을 꼼짝 못하게 익사시켜버리는 자기최면의 행동이었다. 윈스턴은 창자가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다. 2분 증오 때는 남들처럼 무아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바로 이 “빅—브라더!……빅—브라더!” 하는 비인간적인 노래를 부를 때는 영락없이 몸 전체에 소름이 쫙 끼쳤다. 물론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안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감정을 속이고 얼굴표정을 꾸민 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좇아 한다는 것은 하나의 본능적인 반사작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어린 표정이 자신의 위장을 폭로하는 2, 3초 동안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났다—만약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말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오브라이언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브라이언은 일어서서 안경을 벗어 들었다가 그의 특징적인 몸짓으로 다시 콧등에다 그것을 걸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찰나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이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그렇다, 그는 알았다! 틀림없이 내심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고 시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오브라이언은 “난 당신 편이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걸 귀신같이 알지. 당신이 경멸하고, 미워하고, 메스껍게 생각하는 걸 다 안단 말일세. 그렇지만 염려 마시게. 나는 당신 편이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 지성이 번득이던 눈빛은 없어지고, 오브라이언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사건의 전부였고, 그는 이미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사건은 결코 두 번 되풀이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도 당의 원수라는 믿음 또는 희망을 그에게 심어준 것이 전부였다. 거대한 지하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결국 사실일지도 몰랐다—형제단이 실존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형제단이 끊이지 않고 체포되고 자수하고 처형됨에도 불구하고, 그 단체의 존재가 그저 신화는 아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는 때에 따라 그 존재를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했다.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떤 의미가 있을 듯도 하고 없을 듯도 한 훌쩍 지나치는 일별, 귓전에 들리는 단편적인 이야기, 화장실 벽에 그어놓은 희미한 낙서, 낯선 두 사람이 서로 지나치며 뭔가를 알고 있다는 신호로 표정을 짓고 슬쩍 해 보이는 손짓 따위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럴싸하게 상상해버리는 것이었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고 자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들의 순간적인 접선을 두고두고 떠올릴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은 1,2초 동안 애매한 시선을 주고받았으며,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러나 폐쇄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기억해둘 만한 사건이었다.
윈스턴은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등을 세웠다. 트림이 나오고 술이 배 속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는 또다시 책장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가 무기력하게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자동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처럼 보기 흉한 악필은 아니었다. 그가 잡은 펜은 보드라운 종이 위에 큼직하고 볼품 있는 대문자를 그리며 쾌락을 좇듯 매끄럽게 나갔다.
빅 브라더 타도
빅 브라더 타도
빅 브라더 타도
빅 브라더 타도
빅 브라더 타도
거듭 되풀이한 결과 반 페이지나 가득 찼다.
그는 공포로 전신이 푹푹 쑤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공포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특수한 낱말들을 썼다는 사실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최초의 행동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순간 망쳐진 일기장을 찢어내고, 일기 쓰는 일조차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소용없는 짓임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빅 브라더 타도’라고 썼든 쓰지 않았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가 일기를 계속 써나가든 포기해버리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상경찰은 그를 똑같이 취급할 것이다. 그는 이미 다른 모든 죄를 포괄하는 본질적인 죄를 범했다. 그가 종이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것을 ‘사상죄’라 불렀다. 사상죄는 영원히 감춰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잠시 동안, 혹은 몇 년간은 어떻게 용케 은폐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조만간 반드시 발각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밤에 일어났다. 체포는 예외 없이 밤에 행해졌다. 잠을 깨우는 갑작스러운 흔듦, 어깨를 휘어잡고 뒤흔드는 우악한 손, 눈에 갖다 대는 번쩍이는 불빛, 침대를 삥 둘러싼 험악한 얼굴들. 대부분의 경우 재판도, 체포 보고서도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밤중에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성명은 호적에서 빠져버리고 그에 관한 모든 기록은 깨끗이 없어진다. 그가 한때 살았었다는 사실도 부인되고 그다음에는 잊히고 만다. 그는 폐기, 멸종되고 만다. 그것을 보통 증발되었다고 말했다.
한순간 신경질이 치밀었다. 그는 난필로 서둘러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총살하겠지 상관없다 놈들은 나를 목뒤에서 쏘겠지 상관없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 놈들은 항상 목뒤에서 쏜다 상관없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
윈스턴은 약간 창피하게 느껴져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펜을 놓았다. 다음 순간 그는 기절할 듯 놀랐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벌써! 그는 생쥐처럼 웅크리고 앉아, 어떤 놈이 한두 번 두드려보다가 갈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웬걸, 노크 소리는 반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좋지 않은 것은 지체하는 일이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얼굴은 오랜 습관 때문에 거의 무표정했다. 그는 일어나 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2
방문 손잡이를 잡으면서 윈스턴은 책상 위에 일기장을 펴놓은 채로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에 가득 쓴 ‘빅 브라더 타도’라는 큼직한 글자는 방 이쪽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미련한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떨리는 가운데서도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공책을 덮어 크림색 종이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문을 열었다. 순간 훈훈한 안도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핏기 없고 찌든 병아리 꼴을 한 여자가 주름살투성이 얼굴에다 머리는 쥐꼬리처럼 해가지고 문밖에 서 있었다.
“아유, 동무, 동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좀 건너오셔서 우리 부엌 수챗구멍 좀 봐주세요. 그만 막혀가지고……” 그녀는 침울하고 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바로 같은 층에 사는 파슨스 부인이었다(당에서는 ‘부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누구든 동무라고 부르게 했다. 그러나 어떤 여자에게는 본능적으로 그 말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서른 살쯤 되었지만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얼굴 주름살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윈스턴은 그녀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이런 따위의 손에 익지 않은 뜯어고치는 일은 거의 날마다 있는 지겨운 일이었다. 승리 맨션은 1930년경에 건축된 낡아빠진 아파트로 지금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천장과 벽에서는 횟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수도관은 추워지기만 하면 터지고, 지붕은 눈이 올 적마다 새고, 난방 장치 역시 절약한다는 이유로 꽉 닫아버리거나 사용하는 경우라 해도 스팀이 반밖에 돌지 않았다. 제 손으로 직접 고치는 것 외에 모든 수선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당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창틀 하나 고치는 데도 2년은 걸려야 가능했다.
“글쎄, 톰이 집에 없어서 이렇게……” 파슨스 부인이 맥 빠진 소리로 말했다.
파슨스네 방은 윈스턴의 방보다 넓었지만 어딘지 우중충하게 어두웠다. 마치 몸집 큰 맹수가 들어왔다 간 것처럼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마구 짓밟힌 것처럼 보였다. 하키 스틱, 권투장갑, 찢어진 축구공, 땀에 전 뒤집힌 운동복 등 운동용구들이 마룻바닥에 너절하게 흩어져 있고, 책상 위에는 더러운 접시와 꾸겨진 운동서적 들이 널려 있었다. 벽에는 청년 동맹과 스파이단의 깃발과 빅 브라더를 그린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 건물 어디에서나 풍기는 양배추 삶는 냄새가 여기서도 예외 없이 났고, 코를 찌르는 듯한 구역질 나는 땀내가 코를 훌쩍일 때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지독하게 풍겼다. 그런데 그 냄새는 지금 이 집 안에는 없는 사람의 냄새였다. 옆방에서는 누군가가 빗과 화장지 쪼가리를 들고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군대음악에 장단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에요. 오늘은 밖엘 나가지 않았네요. 물론……” 파슨스 부인은 약간 걱정스러운 눈길을 문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녀는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말을 끊는 버릇이 있었다. 부엌 수챗구멍에는 푸르죽죽한 더러운 물이 괴어 있어 양배추 냄새보다도 몇 배나 더 지독한 악취가 났다. 윈스턴은 무릎을 꿇고 앉아 파이프의 모서리 이음새를 검사했다. 그는 손을 써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고, 몸을 굽히길 싫어했다. 그렇게 하면 늘 기침이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파슨스 부인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톰만 있으면 당장 고치지요. 그이는 이런 일을 좋아해요. 손재주가 아주 좋답니다, 톰은……” 하고 그녀가 말했다.
파슨스는 윈스턴과 함께 진리부에 근무하는 동료였다. 그는 뚱뚱보에다 중풍에 걸린 것처럼 멍청한 구석이 있는, 그러면서도 천치 같은 열성을 지닌 활동적인 위인이었다. 당의 안정성은 사상경찰보다도 완벽하게 당을 신뢰하고 오로지 일만 하는 이런 유의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른다섯에 마지못해 청년 동맹에서 탈퇴했으며, 그 동맹에 가입하기 전에는 규정 연한을 1년이나 더 넘기며 스파이 단원으로 일했었다. 그는 진리부에서는 지식이 별로 요구되지 않는 하급직에 채용되었지만, 다른 한편 체육위원회라든가 단체행군, 자연 발생적 시위, 저축운동 등 일반적으로 자발적인 활동을 조직하는 다른 모든 위원회에서는 지도급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파이프를 물고 뻐끔대면서 지난 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회당에 나가고 있다고 은근히 자랑 삼아 지껄여대는 위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넘쳐흐르는 생활력을 무심결에 증명이라도 하듯 가는 곳마다 지독한 땀내를 풍겨댔고, 그가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그 냄새는 진동했다.
“스패너 있습니까?” 윈스턴은 파이프의 모서리 이음새 나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스패너요? 모르겠는데요. 아마 애들이……” 파슨스 부인은 당장 풀이 죽어 대답했다.
구둣발 소리가 쿵쾅쿵쾅 들리고 빗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나더니 아이들이 거실로 몰려 들어왔다. 파슨스 부인이 스패너를 가져왔다. 윈스턴은 물을 빼내고 넌더리를 내면서 파이프를 막고 있던 머리카락 뭉치를 잡아 뺐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찬물로 몇 번이고 손가락을 깨끗이 씻어내고 옆방으로 돌아왔다.
“손들엇!”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홉 살 난 튼튼하고 잘생긴 사내 녀석이 책상 뒤에서 튀어나오면서 장난감 자동 권총으로 그를 위협했다. 그와 동시에 그보다 두 살쯤 아래인 자그만 계집애가 나뭇조각을 가지고 오빠와 똑같은 시늉을 했다. 두 오누이는 스파이단 제복인 청색 반바지와 회색 셔츠를 입고 빨간 목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윈스턴은 머리 위로 손을 들었지만 기분은 꺼림칙했다. 녀석의 태도가 너무나 악의에 차 있어서 전혀 장난 같지가 않았다.
“넌 반역자야!” 소년이 소리 질렀다. “넌 사상범이란 말이야! 유라시아의 스파이란 말이야! 너를 총살하겠다. 내 손으로 너를 없애버리고 말 테다. 너 따위는 소금광산으로나 보내고 말겠어!”
갑자기 두 꼬마는 그의 주위를 팔짝팔짝 뛰면서 “반역자! 사상범!” 하고 외쳐댔고, 콩만 한 계집애는 제 오빠가 하는 짓을 그대로 흉내 냈다. 그 꼴을 보자니 마치 곧 자라면 사람을 잡아먹을 호랑이 새끼들이 날뛰는 것 같아서 얼마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일종의 잔혹함이 엿보였다. 그것은 윈스턴을 치고 걷어차고 싶어 하는 뚜렷한 욕망임이 틀림없었고, 커서는 충분히 그렇게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든 것이 진짜 권총이 아니라는 점을 윈스턴은 아주 다행으로 생각했다.
파슨스 부인은 신경이 곤두서서 윈스턴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아이들에게서 다시 윈스턴에게로 시선을 번갈아 움직였다. 재미있는 것은 빛이 환한 거실에서 보니 그녀의 얼굴 주름살 사이에 정말 때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왜 저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어요. 교수형 구경을 안 시켜줘서 저렇답니다. 저는 너무 바빠 데리고 갈 시간이 없지요. 또 톰은 제시간에 들어오질 못하니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왜 우리는 교수형 구경 안 가?” 아이 녀석이 큰 소리로 툴툴거렸다.
“교수형 보고 싶어! 교수형 구경하고 싶어!” 계집아이가 깡충깡충 뛰며 종알거렸다.
전범 혐의로 몇 명의 유라시아 포로가 그날 저녁 공원에서 교수형당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윈스턴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한 달에 한 번씩 벌어져서 보통으로 구경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이들은 밤낮 그것을 보여달라고 야단했다. 그는 파슨스 부인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문 쪽으로 갔다. 그러나 여섯 발짝도 채 떼기 전에 뭔가가 목뒤를 무섭게 후려쳤다. 마치 시뻘겋게 달군 철사로 사정없이 찌른 것 같았다. 몸을 휙 돌리자 바로 그때 파슨스 부인이 자기 아들을 문 안으로 끌어 잡아당기고 있었고, 녀석은 고무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가 나오고 문이 닫히자 소년은 “골드스타인!”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윈스턴에게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여자의 잿빛 얼굴에 떠오른 감당키 힘든 공포의 빛이었다.
자기 방에 들어오자 윈스턴은 재빨리 텔레스크린을 지나 책상에 앉아 목을 문질렀다. 텔레스크린에서 나오던 음악은 그쳤다. 대신 짤막한 군대식 말투가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사이에 방금 닻을 내린 새로운 유동(流動) 요새의 군비에 관해 우악스럽게 설명을 해나갔다.
저 애새끼들 때문에 그 비참한 부인은 평생을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 2년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은 이단의 낌새를 채고 밤낮으로 저희 어머니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이들 거의가 무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악랄한 것은 스파이단과 같은 그런 조직체의 힘에 의해 아이들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다루어볼 수 없는 작은 야만인으로 바뀌는 것이며, 더구나 당의 규율에 반발하는 성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반발은커녕 그들은 당과 당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찬양했다. 군가, 행진, 깃발, 등산, 모의총 훈련과 당의 강령 복창 및 빅 브라더 숭배 따위는 모두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놀이였다. 아이들의 잔인성은 모두 외부로 향해서 국가의 적들에게, 외국인과 반역자들에게, 태업을 일삼는 분자들과 사상범들에게 쏠렸다. 서른이 넘은 부모들이 제가 낳은 자식들이 무서워 떠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도청하여 고자질하는 학생—흔히 ‘소년 영웅’이라는 말을 썼다—이 어떤 위태로운 이야기 대목을 엿듣고는 저희 부모를 사상경찰에게 밀고했다는 기사가 〈타임스〉에 실리지 않는 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고무총에 맞아 쑤시던 것이 없어졌다.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펜을 집어 들고 일기장에 뭐 더 쓸 게 없나 생각했다. 문득 오브라이언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몇 년 전, 얼마나 되었을까? 꼭 7년 전 같은데, 그때 그는 캄캄한 방 안을 걷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누군지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가 지나갈 때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날 것입니다”라고 소곤거렸다. 뜻밖에 그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고, 명령이 아니라 진술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꿈속에서는 그 말이 별로 감명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에 점차적으로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오브라이언을 맨 처음 만난 것이 꿈을 꾸기 전인지 이후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오브라이언의 음성이라는 것을 처음 파악한 때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어둠 속에서 그에게 말한 사람이 오브라이언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이 자기편인지 적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늘 아침 시선을 서로 교환하긴 했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나 당파심보다 더욱 소중한 이해가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윈스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식으로라도 그것이 실현될 것임을 알 뿐이었다. 텔레스크린에서 나오던 음성이 그쳤다. 맑고 아름다운 트럼펫 소리가 답답한 실내에 감돌았다. 그러더니 신경을 박박 긁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립니다!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방금 말라바르 전선에서 들어온 긴급 뉴스입니다. 우리 군대는 남인도에서 영광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금 알려드리는 작전으로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리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긴급 뉴스의 내용은……”
윈스턴은 나쁜 뉴스가 나오겠군, 하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라시아 군대를 전멸시켰다는 피비린내 나는 잔소리와 더불어 엄청난 수의 피살자와 포로를 들먹이고 난 다음, 다음 주부터는 초콜릿 배급을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이겠다는 발표를 했다.
윈스턴은 또 트림을 했다. 술이 깨면서 기분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텔레스크린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서인지, 없어져버린 초콜릿 분량에 대한 미련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인지 <오세아니아여, 그대를 위하여>를 퉁탕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감시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위치는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오세아니아여, 그대를 위하여>가 가벼운 음악으로 바뀌었다.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을 등진 채 창가로 걸어갔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고 맑았다. 멀리 어디선가 로켓 폭탄이 우둔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요즘 와서는 일주일에 스무 개, 서른 개씩이나 런던 시내에 떨어졌다.
거리 저편에 찢어진 포스터가 바람에 펄럭이며 ‘영사’라는 글자를 가렸다 드러냈다 했다. 영사의 신성한 강령, 신어, 이중사고, 과거의 무상함. 그는 마치 괴물들만 사는 세계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어 방향을 잃고 바다 밑 숲 속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과거는 사멸되었고, 미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대관절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자기편에 서줄 것인가? 그리고 당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슨 방법으로 안단 말인가? 그 해답이라도 되는 듯 진리부의 흰 벽에 붙어 있는 세 개의 슬로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그는 25센트짜리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동전에도 역시 자그맣고 명료한 글자로 같은 슬로건이 새겨져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빅 브라더의 초상이 찍혀 있었다. 동전에서까지 빅 브라더의 눈초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동전에도, 우표에도, 책표지에도, 깃발에도, 포스터에도, 하다못해 담뱃갑에서까지 어디를 막론하고 좇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 눈이 감시하고, 그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식사할 때나,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목욕탕에서나 잠자리에 있을 때나 도저히 그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단 몇 제곱센티미터의 해골 속을 빼놓고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태양의 위치가 바뀌자 진리부의 수많은 창문들은 더 이상 햇빛에 빛나지 않고, 마치 요새의 총안처럼 무시무시하게 그 모습을 바꿨다. 윈스턴의 가슴은 어마어마한 피라미드형 건물 앞에서 질려버렸다. 건물은 너무나 튼튼해서 폭풍우가 쳐도 끄떡없었다. 로켓 폭탄이 천 개나 쏟아져도 부서질 리 만무했다. 누구를 위해 일기를 쓰는지 의아심이 또 생겼다. 미래를 위해서인가, 과거를 위해서인가, 또는 어떤 가상의 시대를 위해서인가.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죽음이 아니라 전멸이다. 일기장은 재가 되어버릴 것이고, 자신은 증발돼버릴 것이다. 사상경찰만이 그가 쓴 기록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기 전에 읽어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종이쪽지에 끼적거린 필자 불명의 글씨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꺼져버리는데 무슨 방법으로 미래에 하소연할 수 있단 말인가?
텔레스크린이 14시를 쳤다. 10분 안에 떠나야만 한다. 그는 14시 반까지는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희한하게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그의 마음에 새로운 기분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고독한 유령이었다. 그렇지만 좀 애매한 표현을 쓰는 한 그 발언은 지속될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은 그의 진실을 들려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을 지니고 있게도 하는 것이다. 그는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 펜을 들고 써나갔다.
미래에게 혹은 과거에게, 사상이 자유롭고 인간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서로 고립되어 살지 않는 시대에게—그리고 진실이 죽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짓밟혀 없어질 수 없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축복이 있기를!
자신은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체계화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고, 이미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 자체에 포함된다. 그는 다시 썼다.
사상죄는 죽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사상죄는 죽음 그 자체이다.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인정한 이상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졌다. 오른쪽 손가락 두 개에 잉크가 묻었다. 누군가를 적에게 넘기는 일은 바로 이런 사소한 실수에서 온다. 냄새 잘 맡는 진리부의 열성분자들이(가령 그 자그만 갈색머리 여자라든지, 창작국에서 일하는 까만 머리 계집애 같은 것들) 무엇 때문에 점심시간에 글을 쓰는가, 무슨 까닭으로 구식 펜을 사용하는가, 어떤 내용을 쓰는가를 의심하기 시작한 다음 당국에 슬쩍 고자질하는 것이다. 그는 욕실로 가서 조심스럽게 모래투성이의 거무튀튀한 비누로 잉크를 닦아냈다. 이 비누는 피부에 문지르면 마치 사포로 미는 것 같아서 이런 용도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일기장을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감추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넣어두면 적어도 그것이 발각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있었다.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머리카락을 한 올 붙여두면 쉬운 일이었다. 그는 알아볼 수 있는 하얀 먼지 알갱이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집어 들어 표지 한 귀퉁이에 놓았다. 누가 공책을 움직인다면 그 먼지 알갱이도 떨어져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3
윈스턴은 어머니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자취를 감춘 것은 그가 열 살인가 열한 살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씬한 키에 조각을 깎아 세운 듯했고 매력적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말이 없고 침착했다. 아버지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지만, 살결이 검고 깡말랐으며 언제나 깨끗한 검정 양복을 입었고(윈스턴은 특히 아버지의 종잇장 같던 구두창이 생각났다) 안경을 끼고 다녔다. 두 분은 분명히 50년대 제1차 대숙청 때 희생된 것이 틀림없었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누이동생을 품에 안고 그가 있는 자리 아래편 깊은 곳에 앉아 있었다. 윈스턴은 자기 누이동생에 대해서는 조그맣고 약하디약한 아기였고, 언제 봐도 입을 떼는 일이 없었고, 다만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굴리던 모습 말고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지하 어디엔가, 이를테면 우물 바닥이나 깊은 무덤 속 같은 데 떨어진 채였다. 그곳은 이미 그가 있는 곳보다 아주 밑이었는데도 자꾸만 밑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가라앉은 배의 1등 선실에 앉아서 캄캄한 물속을 통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실 안에는 아직 공기가 있었고 그들은 그를, 그는 그들을 서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쉴 새 없이 아래로 아래로 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바다 속에 파묻혀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는 빛과 공기가 있는 바깥세상에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죽음 속으로 빠져 내려가고 있었고, 그들이 바다 속 저 밑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은 그가 여기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들도 다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이 안다는 사실을 읽을 수는 있었으나 어떠한 원망도 얼굴에서나 마음속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죽어야 하고,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섭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튼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꿈속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한 꿈은 깨어난 뒤에도 그 인상적인 장면이 지워지지 않고 지속되어 계속 자기의 정신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항상 새롭고 가치 있는 일과 생각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 갑자기 윈스턴의 가슴을 치는 무엇은, 거의 30년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그 이상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고 슬픔이라는 사실이었다. 비극, 그것은 고대에나 존재했던 유물이고, 사생활과 사랑과 우정이 있었던 시대에, 그리고 가족이 이유를 알 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기대어 살아가던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어머니는 숨이 넘어가면서도 그를 쓰다듬어주었고, 그는 그때만 해도 너무 어리고 저만 아는 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다. 아무튼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은밀하고도 하늘과 같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시켰다. 그러한 일은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포와 증오와 고통만이 존재할 뿐이고, 감정의 존엄성이나 깊고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푸른 바닷물 속 수백 길 밑으로 계속 가라앉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본 것 같았다.
어느 여름날 저녁, 기우는 태양빛이 마당을 비출 때 갑자기 그는 잘 다듬어진 폭신한 잔디 위에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경치가 꿈속에서 너무나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실제 세상에서 이런 경치를 보았는지 어쨌는지를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할 때 그는 그곳을 ‘황금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토끼가 뜯어먹은 황폐한 목장이 있고, 그 사이에 오솔길이 나 있으며, 여기저기 두더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들판 저쪽 끝 볼품없는 울타리 너머에는 느릅나무 가지가 미풍에 한들한들 흔들렸고, 그 잎사귀들은 마치 여인의 숱 많은 머리카락처럼 날렸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바로 근처 어디엔가 조용히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있어서,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깊은 물속에서는 황어 떼가 노는 것 같았다.
검은 머리 여자가 들판을 가로질러 그가 있는 쪽으로 왔다. 그녀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옷을 벗어 거만하게 옆에다 내던졌다. 그녀의 몸은 희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욕망도 일지 않았다. 정말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바로 그 순간에 경탄해 마지않은 것은 그녀가 옷을 벗어 내던지는 솜씨였다. 우아하면서도 제멋대로인 그 동작은 마치 모든 문화와 모든 사고체계를 소멸시키는 듯했으며, 단 한 번 놀랍게 팔을 움직임으로써 빅 브라더나 당이나 사상경찰까지 휩쓸어 없애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또한 옛날에나 볼 수 있었던 몸짓이었다. 윈스턴은 잠에서 깨면서 ‘셰익스피어’라고 중얼거렸다.
텔레스크린에서 귀를 찢는 듯한 호각소리가 30초 동안 같은 음조를 유지하며 울려 나왔다. 7시 15분, 관리들이 일어나는 시각이었다. 윈스턴은 몸을 꼬면서 잠자리에서 나와—벌거벗은 채로, 왜냐하면 외부당원은 의복비로 1년에 딱 3천 쿠폰을 받았는데, 파자마 한 벌에 600쿠폰이었으므로—의자에 걸어놓은 때 묻은 내복과 바지를 입었다. 3분만 있으면 체조가 시작될 터였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꾸부리면서 발작적으로 심한 기침을 해댔다. 자고 나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기침이 쏟아졌다. 기침으로 허파에서 바람이 쏙 빠져나가기 때문에 등을 대고 누워서 몇 번이고 심하게 헐떡거린 다음에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기침을 하느라 힘이 들어서 혈관이 튀어나왔고 정맥류성궤양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30대 분들!” 찢어지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30대 분들, 자리를 잡으세요. 30대 분들 말이에요!”
윈스턴은 텔레스크린 앞으로 뛰어가 차려 자세를 취했다. 말랐지만 근육이 발달한 젊은 여자가 튜닉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모습으로 화면에 벌써 나와 있었다.
“양팔 구부렸다 펴기!” 그녀는 구령을 불렀다. “구령에 맞춰 하세요.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동무들 따라 해요! 힘차게 따라 해봐요!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윈스턴은 발작을 일으키는 듯한 고통스러운 기침을 하면서도 꿈속에서 받았던 인상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었고, 규칙적인 체조 동작들을 하면서 그 기억을 얼마만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체조 시간에 알맞다고 여겨지는 유쾌한 표정을 억지로 꾸민 채 기계적으로 팔을 앞뒤로 뻗으면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려고 몸부림쳤다. 그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50년대 이전의 일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참고할 수 있는, 외부로 나타난 기록이 없을 때는 자기 생애의 윤곽마저 흐릿해지고 마는 것이다. 아주 큰 사건이 있었다고 기억은 되는데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고, 아주 사소한 일이 떠오르는데 그때의 분위기가 잡히지 않아,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긴 공백 기간이 생겼다. 모든 것이 그때와는 달랐다. 나라 이름이나 지도의 모양까지도 달라진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제1공대도 당시에는 이렇게 불리지 않았다. ‘잉글랜드’나 ‘브리튼’으로 불렸던 것이다. 런던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런던이었다고 확신하지만 말이다.
윈스턴은 자기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은 때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