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초판 1쇄 펴낸날|2013년 7월 3일
지은이|이수영
펴낸이|박재영
편집|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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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본문에 인용한 《에티카》는 필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며,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는 영역본으로 다음과 같다.Benedict de Spinoza, Ethics, edited and translated by Edwin Curley, Penguin Books, 1996. 그리고 《에티카》를 인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독자들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 뒤에 해당 부와 명제 번호를 붙였다. 예를 들어 (1부, 정리33, 주석1)은 《에티카》의 제1부 정리33에 딸린 주석1에서 인용했음을 뜻한다.
2. 《에티카》를 공부하고 번역하는 데 다음과 같은 기존 국역본도 함께 참조했음을 밝힌다.
•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역, 서광사, 1990.
• B.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역, 피앤비, 2011.
3. 본문에서 주로 인용되는 스피노자 저술의 원명은 다음과 같다.
《에티카》: Ethica
《지성교정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정치론》: Tractatus politicus
4. 1차 문헌이든지 2차 문헌이든지 인용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두 번째 인용부터는 저자와 서명, 그리고 쪽수만 표시했다.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읽었기’ 때문이었다. 사사키 아타루(《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말처럼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한다면 진정 그 읽기의 혁명을 경험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아니었다. 《에티카》를 처음 접한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강영계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서광사판 《에티카》를 집에 사들고 와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았을 때의 참담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는 말로 유명하던(물론 이 말은 종교개혁과 독일어 성서번역으로 이름 난 루터의 말이었지만 이런 사실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스피노자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문장은 “나는 자기 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다”인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원인에 대한 규정과 존재와 본질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의 나에게 《에티카》는 읽고는 싶었으나 결코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렇게 《에티카》와는 인연도 없이 십 수 년이 흘렀다. 전공인 문학을 버리고 철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지젝이나 니체, 푸코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의 책들 주위를 주로 얼씬거렸는데 그러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를 읽게 되었다. 정말 ‘읽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를 읽은 것만으로도 나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획득해버리고 말았다. 들뢰즈의 해석을 거친 스피노자였지만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철학은 놀라운 사유의 광채를 보여주었다. 이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읽기의 혁명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를 알게 된 시기와 알지 못하던 시기로 삶이 구별될 수 있다는 것, 둘 사이에는 삶의 본성에 있어 극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 니체의 말처럼 준족의 아킬레스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두 시기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 그래서 다시 《에티카》를 ‘읽기’ 시작했다.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계속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모방의 법칙》을 쓴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불화들은 놀랍게도 산업상의 ‘발명’이나 정치적인 ‘발명’에 의해 진정된 적이 많았다고 한다. 빵을 먹고 싶은 주인의 욕망과 그 주인의 욕망으로 인해 밀을 빻아야 하는 수고로운 노동을 해야만 했던 노예들의 거부감은 언제든 전쟁 상태에 있었다. 빵을 먹고 싶다는 욕망은 그 지긋지긋한 고역을 원한다는 것이었고, 노동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아무도 빵을 먹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이 갈등과 전쟁을 진정시킨 것은 바로 물레방아와 풍차의 발명이었다. 물레방아가 발명되면서 노예들의 수고를 덜어주자 두 욕망은 서로 장애가 되는 일을 멈추었던 것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을 해결한 것도 망원경을 통한 천문학적 발견 덕분이었다.
실상 발명의 능력은 생활의 윤택보다는 불화의 해결에 있다. 발명으로 인한 풍요로운 삶은 해결된 불화에 따르는 귀결인 경우가 많고 또한 대개 그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법이다. 내게 스피노자의 철학은 온통 발명으로 보였다. 서양 철학에 과문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신’이 그렇고, ‘속성’이 그러하며, ‘감정’이 그러하고, ‘평행론’이 그러했다. 스피노자의 ‘신체’는 또한 얼마나 위대한 개념이며 ‘공통개념’은 또한 얼마나 위대한 개념이었던가. 《에티카》는 개념의 발명으로 넘쳐나는 텍스트였다. 스피노자는 기존의 개념에 새로운 용법을 설정하는 철학적 발명에서 획기적이었다. 스피노자가 경험했던 증오와 저주, 죄의식과 전쟁들은 이렇게 발명된 개념들과 더불어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철학자의 삶이란 무엇이고, 철학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피노자의 《에티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은 처음이었다.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증명의 방식이라는 서술 체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읽어나갔을 때 스피노자의 체계는 삶에 대한 놀랄 만한 아름다움과 긍정으로 가득한 개념들의 발명이었다. 스피노자의 개념적 발명과 더불어 나는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진정 공화국의 위험은 무엇인가.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 특히 좋은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이 아닌가. 공공의 평화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의 일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믿음만을 강요하는 맹목이, 신앙이, 우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군주제와 전쟁을 옹호했던 대중들이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하고 거리에서 살인을 감행할 때 스피노자가 내걸었던 문구가 있었다. “야만의 극치.” 내겐 스피노자의 플래카드가 우리 시대 한복판에 선명히 걸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몇십 년 전의 낡고도 위험한 정치체에 대한 일사분란한 숭배가 목도되고 있다면 이것이 어찌 내 개인적인 인상일 뿐이겠는가. 그래서 스피노자는 지극히 현재적인 철학자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적 망상과 환상들을 깨트리는, 진정 망치의 철학자이다. 신을 사랑할 수 있다거나 신이 인간을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망상, 의지가 자유롭다는 망상, 인간의 본성이 원래 타락한 것이라는 망상,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이 있다는 망상, 신이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망상, 신체 없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망상,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망상, 필연과 자유가 대립된다는 망상, 고독 속에 자유가 있다는 망상, 믿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망상, 국가가 최종 목적이라는 망상, 신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망상. 이 모든 망상들이 아직도 우리 삶에 그늘을 잔뜩 드리우고 있고 세계를 저주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삶과 세계에 대한 긍정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망상에서 벗어난 이성적 인식에 있다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의 가르침이다. 물론 이성이 반드시 신체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코기토’적 망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말이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스피노자는 철학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유일한 직계조상이다.
재작년 한 해 동안 스피노자 철학을 강의한 곳이 있다. 바로 소외된 여성들의 자활 공동체인 W-ing이다.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어눌한 강의를 들어준 여성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하고 이것이 지속되도록 온힘을 다해준 최정은 대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책에서 유독 강조하고 있는 부분들을 눈 밝은 독자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터인데, 그런 부분들은 W-ing이라는 현장에서 마주쳤던 문제들을 스피노자에 기대 풀어내고자 한 나의 초보적인 대답들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힘이 잔뜩 들어간 부분이나 목청이 높아지는 부분을 결정한 것은 W-ing이었다는 말이다. 철학 안내서라 할 수 있는 이런 책도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W-ing이라는 현장의 몫이다. 그리고 변변찮은 연구자에게 무한의 신뢰를 보내주고 책으로까지 만들어준 윤현아 씨와 박재영 선생께도 감사를 드린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그의 위대한 철학에 대해 충분히 깊게도 넓게도 육박하지 못한 이 책의 부족한 부분들은 이 땅의 날카로운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앞으로 보충해줄 것이라 믿는다.
2013년 6월 신길동 인문팩토리길에서
이 수 영
원한도 가책도 없는 삶, 서로에게 죽음이 되지 않는 삶, 오직 긍정으로만 가득한 삶. 그런 삶만을 꿈꾸고 그런 삶만을 실천하고자 했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지독히도 저주를 당하는 이율배반의 삶을 살았던 철학자였다. 대중들의 자유로운 삶과 민주주의적인 정치를 위해 《에티카》와 《신학정치론》을 썼던 그는 슬픔과 증오와 죽음에 중독된 대중들과 사제들에 의해 고독과 유폐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증오와 원한이라는 정념을 들어 인간을 부정하고 삶을 부정하는 대신 그런 정념의 자연학적 필연성을 찾아냈고 그 필연성을 바탕으로 인간들의 삶이 긍정과 자유에 기초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그는 진정 정념과 죽음을 넘어선 삶, 온통 긍정으로 가득한 삶을 철학적 개념의 발명을 통해 우리에게 선명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주었던 철학자였다. 검소하고도 고요한 삶, 하지만 엄청난 사유의 폭풍을 일으킨 삶. 어떠한 상황 속에서 그의 철학이 전개됐는지 간단한 연보를 통해 짧고도 강렬했던 그의 철학적 여정을 소개한다.
1632년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지구에 있는 한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대인 학교에서 신학과 상업을 공부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설립, 그리고 식민지 생산물의 증가 등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1654년 13세쯤 됐을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형과 함께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학업도 병행한다. 당시 스피노자는 예수회 소속의 자유사상가 반 덴 엔덴Franciscus van den Enden의 강의를 들었다.
1656년 유대인 사회와 경제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파문cherem(헤렘)’을 겪는다. 이름을 바뤼흐에서 베네딕투스Benedictus로 바꾸고, 렌즈 세공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는 정통 유대교 신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있어 스피노자도 그런 이단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위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부정과 인간과 닮은 신의 형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공포에 기초한 신의 구원에 대한 비판을 이유로 1647년에 공개적으로 태형을 당하고 파문의 위기를 겪다가 나중에 자살하게 된다. 후안 데 프라도Juan de Prado는 영혼이 신체와 함께 사멸한다는 것, 신은 철학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신앙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1656년 회개를 강요받고 파문당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프라도와 긴밀한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유대인 사회의 유력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칼뱅파 사람들 못지않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해 증오했고, 군주제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오란예Oranje 가문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칼뱅파들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주장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꿈꾸었다.
반면 스피노자는 여러 자유주의자들, 반교권적인 기독교인들, 범신론자들, 데카르트주의자들, 평화 정책과 자유경제의 발전에 관심을 갖고 있던 공화주의자들(대표적으로 1653년 이후 네덜란드의 재상이었던 요한 더빗Cornelis de Witt(형제)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피노자의 여러 이단적인 사상들이 유대교 원로들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랍비들이 화해와 회개를 원했음에도 스피노자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훗날 《신학정치론》의 초안이 될 〈유대 교회의 탈퇴에 대한 변명〉을 작성하면서 스스로 유대 공동체와 단절을 선언해버린다. 이로 인해 한 광신자에 의해 칼에 찔릴 뻔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을 계기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사유와 이성을 언제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칼에 찢긴 외투를 간직했다고 한다.
1661년경 미완성으로 남은 《지성교정론》을 썼다. 그리고 이때부터 《에티카》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63년경 함께 하숙 생활을 하던 청년 카세아리우스Casearius를 가르치기 위해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이 책의 서문은 의사이자 시인인 친구 메이어Loddewijk Meyer가 썼다)를 쓴다. 이 책의 부록이 스콜라 학파의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인 《형이상학적 사유》이다.
1665년 《에티카》를 잠시 중단하고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신학정치론》을 집필한다.
대중들이 공화주의보다 칼뱅주의와 오란예 가문, 그리고 전쟁의 호전성에 경도되고 있는 사정을 보고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을 통해 왜 이토록 대중들이 비합리적이고 예속적인지, 왜 예속이 자유라도 되는 듯이 예속을 위해 싸우는지, 종교는 왜 사랑 대신 전쟁과 편협만을 낳고 마는지와 같은 문제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1670년 《신학정치론》이 가상의 독일 출판사 이름으로 저자의 이름도 없이 출판된다.
그러나 저자의 정체는 금방 밝혀지고, 스피노자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저주와 고발이 이어졌다. 이 책처럼 많은 비난을 받은 책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들뢰즈가 말할 정도이다. 사제들의 비판에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 스피노자는 한적한 교외를 떠나 수도 헤이그에 정착한다.
1672년 공화주의자 더빗 형제가 거리에서 살해된다.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공화주의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혁명이 발생하면서 오란예 가문이 권력을 장악한다. 이때 스피노자는 ‘야만의 극치’라는 벽보를 써서 거리로 나가려 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한 하숙집 주인의 만류로 포기한다.
1673년 팔라티나 선제후가 하이델베르크 철학 교수직을 제안하지만 거절한다.
기존의 도덕과 치안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신의 철학이 대학에서 제대로 가르쳐질 수 없으리라는 것, 그리고 철학의 자유가 사라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스피노자는 교수직을 포기한다.
1675년 《에티카》를 출판하려고 해보지만 상황이 불리해 곧 포기한다.
1676년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을 집필한다.
라이프니츠가 몰래 스피노자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1677년 폐병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다행히 친구인 메이어가 원고를 지켜내서 그해 말에 유고가 Opera posthuma(《유고집》)라는 이름과 익명의 도움으로 출간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책들은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고, 관리들이 서점에서 압수하기 시작한다.
1. 14년의 집필 기간
연구자들에 따르면 스피노자 최대의 역작인 《에티카》는 《지성교정론》을 집필하다 중단한 1661년경부터 1675년 사이에 쓰였고, 1675년에 출판이 시도되었지만 정세의 불리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사후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틀림없다면 무려 15년에 걸친 고된 사색의 결실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책인 셈이다.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이 기간 동안 《에티카》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닌데, 1663년에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들》을, 1665년에는 《신학정치론》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을 들라면 아무래도 방대한 체계와 치밀한 논증과 새로운 개념적 발명으로 가득한 《에티카》를 빼놓을 수 없다. 45세(1677년)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에티카》는 스피노자 삶에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생명력이 가장 고조된 청장년기 전체를 건 철학서라 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푸르도록 명징한 정신이 내놓은 그토록 찬연하고 밝은 세계의 비전을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 기하학적 스타일
《에티카》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다윈의 《종의 기원》과 같이 늘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음에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에 속한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내막은 서로 다른데, 니체의 책이 ‘너무나 인간적인’ 대중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반시대적인 인간만을 초대해서 어렵다면, 다윈의 책은 방대한 관찰 사실의 집적과 분류, 그리고 서술의 꼼꼼함을 견딜 독자만을 초대한다는 점에서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에티카》는 그렇지 않아도 난해한 철학적 논증을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증명의 절차에 포갬으로써 철학이나 수학에 골머리를 앓는 일반 독자들의 진입을 애초부터 차단해버린다는 점에 그 어려움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티카》의 기하학적 서술 스타일을 직접 보도록 하자.
1부. 신에 대하여
정의
정의1 :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에 속하거나 그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정의2 : 같은 본성의 다른 것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자신의 장르상에서 유한하다고 얘기된다.
(기타 등등)
공리
공리1 : 존재하는 것은 뭐든 자체적으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
공리2 :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자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기타 등등)
정리1 :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에 앞선다.
증명: 이것은 정의3과 정의5에 의해 명백하다.
정리2 : 다른 속성을 갖는 두 실체는 서로 간에 공통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증명: 이것은 정의3에 의해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은 그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거나,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
정리1의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정의3과 정의5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번거로운 수고를 해야 하는데, 이는 정리들이 쌓여갈수록 더욱더 힘겹게 늘어난다. 게다가 각각의 명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정리의 형태로 독립적으로 배치된 수많은 명제들을 엮어 나름의 철학적 서사를 구축하는 일은 또 다른 만만치 않은 과제다. 그러나 그의 다른 저서인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일반적 서술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스피노자가 특별히 기하학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굳이 독자를 힘겹게 하는 스타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티카》는 신에서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다. 감정과 운명에 예속된 인간이 자유인이 되는 이성적인 방법에 대한 탐구, 그것이 《에티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 대한 통념에 있다. 자연을 기계적인 필연성의 영역에 두고는 인간이 그런 기계적인 필연성과는 상관이 없는 자유의지의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 특히 증오나 분노나 질투와 같은 감정을 들어 인간 본성의 근본적 결함이라고 생각하고는 인간을 저주하고 경멸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기하학적으로 서술하게 한 이유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한 자연의 법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므로(그렇다고 자연이 기계적인 법칙을 따른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과 본성을 자연 법칙처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발생 원인을 찾는 과학적 방법처럼 선이나 평면이나 입체의 발생적 원인을 탐구하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인간의 본성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하학적 서술 방법은 인간 본성에 대한 왜곡된 저주를 끊고 그 자연적 원인에 대한 탐색과 교정의 방법을 합리적 철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실천인 셈이다.
3. 전투와 발명
1부. 신에 대하여
2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4부. 인간의 예속 혹은 감정의 힘에 대하여
5부. 지성의 힘 혹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에티카》의 목차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의 자유를 철학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신이다. 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 가능해야 인간에 대한 왜곡된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자유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1부에서 스피노자는 신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라고 말한다. 이 명제를 대충 받아들이면 전지전능하다는 신학적인 신과 스피노자의 신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신의 신 개념과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 개념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들을 명백히 드러낸다. 절대군주와 같이 공포를 통해 통치하는 자유의지의 신 대신 만물의 생성과 더불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필연적인 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1부에서부터 스피노자의 전투는 강렬하게 전개된다. 창조한 세상에 대해 자의적으로 종말을 선포할 수 있는 신을 거부하는 스피노자는 신이 창조한 만물이 곧 신의 이해라고 생각한다. 이름하여 ‘인식론적 평행론’이다. 신의 이해는 곧 신의 생산이고, 이 둘은 정확히 평행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2부에서부터 인간의 삶으로 하강하는데, 기존의 왜곡된 통념과의 전투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신의 인식론적 평행론을 따라 인간의 신체와 정신도 평행해야 한다. 이름하여 ‘심신평행론’이다. 신체는 정신에 비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체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명제를 개진한다. 정신이 어찌 신체 없이 관념을 생성할 수 있으며, 신체 없는 순수한 의식(즉 코기토)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정신은 외부 대상에 대한 표상을 신체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서만, 즉 신체를 경유해서만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데카르트는 신체 없이 정신이 뭔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주의는 근본적으로 붕괴되고 만다.
3부, 4부로 넘어갈수록 전투는 격해지고, 통념들의 저항도 거세진다. 하지만 1부에서 형성한 신에 대한 정확한 통찰은 모든 위기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드디어 5부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인간들의 불화와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삶이 휘황하게 드러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기존의 철학자들의 자유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자유의 개념으로 무장한 자유인을. 홀로 사는 자유인이 아니라 함께 구성하면서만 개척되는 자유인을. 이름하여 공통개념의 자유인을.
지금까지 인간의 삶을 어둡게 채색했던 모든 왜곡된 통념들을 전복하는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세상과 삶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기하학적 안경을 제공한다. 우리는 《에티카》를 통해 스피노자가 직접 세공해서 교정한 안경을 끼고 새로운 개념적 발명의 향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내재인으로서의 신과 목적론에 대한 비판(1부),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2부), 능동과 수동의 새로운 정의, 그리고 감정의 기본요소로서의 기쁨과 슬픔(3부), 감정으로서의 선악과 공동체의 필요성(4부), 이성의 능력과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5부) 등 형이상학적 환상과 망상을 전복하는 스피노자의 개념들은 수없이 많다. 철학이 개념들의 창안이라고 한다면 《에티카》야말로 거기에 합당한 텍스트일 것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개념들은 단순히 정리와 증명으로 구성된 사변적인 체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증오와 갈등을 극복하는 구체적인 실천 체계라는 점에서 훨씬 더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위대한 긍정으로서의 신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에티카Ethics》는 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그 제목은 <신에 대하여〉이다. 그렇다면 이 제목이 미리 암시해주는 것처럼 인간 삶의 윤리학을 정초하고자 했던 《에티카》는 왜 신에서 출발해야만 했던 것일까? 우리는 신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는 《에티카》가 단순히 세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논증에 머물지 않으며, 또한 결코 그럴 수도 없음을 누누이 강조해야 한다. 기하학적인 증명의 절차를 따르는 《에티카》 서술의 수학적 고요 속에는 스피노자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절박함과 불화(不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사로잡는 치명적 ‘질병’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전투가 숨어 있는 것이다.1 신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규정, 그것은 스피노자에겐 한가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유희가 아니라 복잡하고도 지독하게 얽힌 인간들의 증오와 전쟁의 연쇄를 끊고자 하는 단호하고도 실천적인 전투이자 개념적 발명인 것이다.
“야만의 극치Ultimi barbarorum.” 독재정치와 군주제를 원했던 네덜란드의 오란예파의 선동에 의해 동원된 대중들이 당시 재상이었던 공화주의자 더빗 형제를 갈가리 찢어 살해하는 폭동의 현장(1672년)을 목격한 스피노자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뛰쳐나가 내걸고자 했던 플래카드의 문구라고 한다. 아, 왜 이렇게 대중들은 무지몽매하고, 예속이 자신의 영예나 된다는 듯이 그 예속을 위해 비인간적인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대중들의 이 원한과 증오는 도대체 그 뿌리가 어디란 말인가? 사랑과 우정을 위한 종교는 왜 전쟁의 종교가 되어 있단 말인가? 여기엔 스피노자 자신이 당했던 종교적 파문의 경험도 가로놓여 있어 그의 철학적 작업의 근거가 얼마나 심각한 국면 속에 놓여 있는지 알게 해준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유대인 지구의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스물네 살쯤 되는 1656년 그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고 추방되게 된다. “그가 행하고 가르치는 혐오스러운 이단 학설들과 그의 극악무도한 행동들”에 대한 징벌의 차원에서 진행된 파문은 회개할 경우 돌이킬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스피노자의 회개 거부로 인해 결코 철회되지 않는 극단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 파문을 선언하던 문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바뤼흐 드 스피노자의 사악한 주장과 행동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마아마드의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수단과 약속을 사용해서 악한 길로부터 그를 돌이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신의 악한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반대로, 지도자들은 그가 행하고 가르치는 혐오스러운 이단 학설들과 그의 극악무도한 행동들에 대해서 더욱더 심각한 정보를 매일같이 받았다. (···) 우리는 바뤼흐 드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고, 비난한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그를 저주한다. 그는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그가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 누구도 그와 교제할 수 없다. 편지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친절도 그에게 베풀 수 없으며, 같은 지붕 아래서 그와 함께 머물 수 없으며, 그와 가까운 곳에서 4큐빗(1큐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거리-옮긴이) 이내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작성하거나 쓴 논문들을 읽을 수 없다.2
저주의 서(書). “그는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그가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도대체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적인 언사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국가적인 정치권력은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유대공동체였지만 대신 그 공동체만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점을 이용해 네덜란드에서 유력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공동체로부터의 파문은 곧 스피노자에게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고립이자 경제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고, 함께 있을 수도 없다는, 저런 증오에 기반을 둔 파문. 저주에서 시작해 저주로 끝나는 저 웅장한 파문. 이는 스피노자의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경향, 그리고 신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들이 초래한 것이었다. 이후 스피노자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업을 버리고 안경 렌즈 세공 기술을 익혀 철학자이자 장인으로서 은둔과도 같은 하숙생활을 하며 조용히 살아가게 된다. 이 고립 혹은 고독, 이것은 사유의 자유와 철학의 자유, 그리고 자유인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당대의 폭력적 정치제도와 증오의 종교, 그리고 대중들의 예속과 무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의 고독은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던가. 공동체로부터 추방된 이후 스피노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전율케 할 수 있”었고, 그의 “작품을 모순되게 말하더라도 이미 그 작품에 대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원죄의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여겨”3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강요당한 철학적 고독의 깊이가 어땠을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들뢰즈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한 철학자에게 결말이 기소인 경우는 있을 수 있어도” 스피노자처럼 철학의 시작이 (종교적) “파문과 살해 기도”에 있었던 경우는 극히 드문데, 심지어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한 유대 광신자에 의해 칼에 찔릴 뻔했다고도 전해지는 것이다.4 시작이 저주의 파문이었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의 끝은 당연히 파문 없는 사회에 대한 꿈, 즉 모두가 자유인의 삶을 사는 공동체에 대한 꿈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증오라는 사회적 배경이 《에티카》를 신에 대한 새롭고도 근본적인 고찰에서 시작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스피노자가 보기에 모든 갈등과 증오의 핵심에는 도저히 종교적인 삶이라 할 수 없는, ‘미신’에 사로잡힌 대중들의 삶이 있었다. 《신학정치론》(1670)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미신에 사로잡힌 인간들, 즉 신에 대한 편협한 생각 속에 빠진 인간들의 진상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어 이것이 과연 약 400년 전의 글인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온갖 종류의 미신에 가장 쉽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특히 운명의 호의를 탐욕스럽게 탐하는 사람들이며, 그들 모두가 기도와 여성적인 눈물로 신의 도움을 애원하는 것은 특히 그들이 위험에 처하여 의지할 곳이 없을 때임을 우리는 안다. 그들은 자신들이 탐하는 무의미한 것에 확실한 길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성을 장님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지혜를 공허하게 생각하지만 환영과 몽상과 유치하고도 어리석은 짓은 신의 신탁으로 여긴다. 진실로 그들은 신이 현자들을 내쫓으면서 인간의 정신이 아닌 짐승들의 내장 속에 자신의 명령들을 새겨 넣었다거나 바보, 광인 또는 새가 신성한 영감과 부추김에 의해 이러한 명령들을 예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에 의해 이와 같은 광기에 이르기까지 내몰린다.5
두려움에 빠져 이성을 잃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면 무조건 달려드는 대중들. 이 대중들의 두려움에 기생하는 종교란 이미 미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혜와 이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저 대중들을 안심시키겠다고 하는 종교적 처방이 어찌 참된 종교적 가르침일 수 있겠는가. 공포에서 비롯된 광기, 광기에서 비롯된 증오와 폭력. 이것이 스피노자가 진단한 당대 대중들의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절제를 얘기하는 종교인들이 그럼에도 맹렬하게 싸우고 증오심을 드러내는 일들은 너무도 당연한 사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의 삶을 찾아 종교에 매달리지만 그럼에도 서로 증오하고 적대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삶의 도가니 속에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필요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발명’이 아니겠는가. 미신에 의해 오도되지 않은 신, 두려움과 광기에 오염되지 않은 신, 그런 신에 대한 이성적인 규정만이 이 증오의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어떤 신인가? 스피노자가 규정하는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의 용어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다. 기본적으로는 실체, 속성, 양태에 대한 이해가 급선무이다. 제1부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정의는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고서는 그 본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이고, 첫 번째 공리는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 자체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이며, 첫 번째 정리는 “실체는 본성에 있어 그 변용들에 앞선다”이다. 다들 하나같이 우리에겐 낯설기 그지없는 개념들이지만 이 1부만 제대로 통과할 수 있다면 이후 스피노자의 체계가 아주 우아하면서 놀랍고, 긍정적이면서 혁명적인 사유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실체)’을 이해해야 한다. 실체란 무엇인가?
실체substance란,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의[실체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부, 정의3)
실체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의존적인 존재라 자체적으로 존재해본 적도 없고 자체적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자체적인 존재와 자체적 파악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결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실체라는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당분간은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실존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런 실체 개념은 데카르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6이라 말한다.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은 자기 외부에 자기 존재를 간섭하는 그 어떤 것도 두지 않는 절대적인 권능이니까 말이다. 물론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신에 대한 규정이 스피노자의 신 개념을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멀리 나아가기엔 아직 우리의 준비 상태가 부족하다. 실체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앞으로 계속 보충될 것이므로 ‘속성’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속성attribute이란, 지성intellect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부, 정의4)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의 본질은 다름이 아니라 속성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체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체의 속성들을 알아야 한다.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은 실체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실체에 내재하는 속성을 통해서인데, 까닭은 실체란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삼각형을 그린 사람을 아는 것인가? 아니면 삼각형을 그린 도구를 아는 것인가? 삼각형을 그리게 하는 외부 원인에 대한 파악은 삼각형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런 앎도 전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삼각형을 알기 위해서는 삼각형의 구성 방식(세 변과 세 점)이나 삼각형의 특성(내각의 합은 2직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그 본질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특성을 통해서만 알아야 하는 대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실체이다.
내각의 합이 2직각이라는 특성을 보유할 때 삼각형이 생성되고, 내각의 합이 4직각이라는 특성을 보유할 때 사각형이 생성된다. 이처럼 기하학적 대상들은 그 대상을 구성하는 특성들에 따라 대상의 성격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특성들을 철학적으로 ‘속성’이라 불러 일반적인 사물들의 특성과 구별한다. 그렇다면 실체의 속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스피노자는 실체의 속성이 무한히 많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과 ‘사유thought’라는 속성이다. 책상이나 신체가 갖고 있는 공통 속성, 즉 길이(혹은 크기)나 운동의 변화와 같은 것을 연장속성이라 부르고, 감정이나 생각이 품고 있는, 크기도 길이도 없는 것의 공통성을 사유속성이라 부른다. 따라서 실체의 본질은 최소한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양태를 보도록 하자.
양태mode란, 실체의 변용affections, 혹은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부, 정의5)
양태란 실체가 변화된 것으로서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쉬운 개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 동물, 책상, 구름, 바람, 식욕, 생각, 지구, 우주와 같은 만물들을 지시하는 철학적 개념이 양태인 것이다. 컵이 하나의 양태라면 사랑의 감정도 양태이며, 전쟁이 하나의 양태라면 증오의 감정도 양태이다. 이런 식으로 볼 때 핵발전소도 양태이고, 허영심도 양태이다. 크기를 갖는 것이든 갖지 않는 것이든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양태이다. 은행나무가 양태이듯이 인간도 양태이다. 은행잎을 떨군 은행나무가 양태이듯이 공포에 휩싸인 인간도 하나의 양태이고,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한 인간도 하나의 양태이다. 동일한 인간(이라는 양태)도 증오의 상태와 사랑의 상태가 다르듯이 모든 양태는 매순간 자신의 mode를 바꾸면서 존재한다.
우주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인 사물들로 이뤄져 있다. 증오가 커다란 슬픔의 경험에서 비롯되듯이, 컵도 흙과 장인과 그 용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결코 실체일 수 없는 존재라 할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이라고 규정한다. 신적인 실체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 실체가 자신을 변화시켜 만들어낸 mode들이라는 것이다. 양태들은 실체의 다양한 mode들이다. 이제 실체와 속성, 그리고 양태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자.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실체이고, 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속성들이며,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가 변화된 것들이 양태이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양태를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실체와 속성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실체와 속성에 대한 규정과 정의, 그것에 인간이라는 양태의 삶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기본적인 개념들을 좀 더 심화된 상태에서 이해해보도록 하자.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속성이므로, 신(실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태라는 개념보다는 속성이라는 개념이 관건이 됨을 알았다. 사실상 양태들에 적용되는 개념을 실체에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개념을 거의 완전히 왜곡하게 되고, 스피노자가 비판했던 신학자들의 신학이나 데카르트주의로 귀착되고 만다. 양태들에는 양태들만의 개념을, 그리고 실체에는 실체만의 개념을. 이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방법론이다. 실체 개념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양태들이 어떤 방식으로 구별되는지 아는 것이고, 그리고 양태에 적용되는 구별의 방식을 실체에 적용하기를 철저히 그치는 일이다.
책상 위에 컵이 놓여 있다. 우리는 분명 책상과 컵을 전혀 다른 사물로 구별해서 파악한다. 하지만 두 구별된 사물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지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장속성의 차원에서다. 두 사물은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연장속성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연장속성 상에서는 무차별성이, 모양이나 크기의 차원에서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 책상과 컵이다. 이처럼 속성의 동일성(여기서는 연장) 하에서도 구별의 가능성이 성립하는 것이 바로 양태들이다. 다수의 인간들은 동일한 연장과 사유를 갖고 있음에도 분명히 서로 구별되는데, 이것을 “양태적modal 구별”이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둘 또는 다수의 사물들은 실체의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거나 아니면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된다.(1부, 정리4)
사물들은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거나 양태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된다. “변용들의 차이”라는 위 명제의 구절은 앞에서 실체의 변용을 양태라고 했으므로 곧 양태적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태적 구별의 특징은 우선 동일한 속성 속에 수없이 많은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연장속성으로 구성된 것들을 떠올려보라. 구름, 책상, 인간, 동물, 식물, 기계, 전쟁, 지구, 자연, 우주 등등. 하지만 양태적 구별의 특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책상을 하나, 둘, 셋, 이렇게 셀 수 있듯이 물도 1리터, 2리터, 3리터 이렇게 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양태적 구별은 “수적인 구별”이라고도 부른다. 수적인 구별의 핵심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아보자.
사물에 대한 참된 정의라면 정의된 사물의 본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포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삼각형에 대한 정의에 포함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볼 때 그것은 반드시 삼각형의 본성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각형에 대한 정의에 결코 포함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삼각형의 개수와 같은 특징들이다. 주어진 삼각형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는 그런 삼각형이 몇 개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삼각형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내각의 합이 2직각이라는 특성들뿐이다. 그렇다면 본성에 대한 정의에서는 도출되지 않았던 삼각형의 ‘개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스피노자의 예시처럼 이 우주 안에 정확히 20명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하필 20명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의 속에서 20명이라는 숫자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든 도구적 동물이라고 하든 인간에 대한 그 어떤 규정 속에서도 하필 20명의 인간이 실존하는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20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 원인은 (주의2와 3에 의해) 인간에 대한 참된 정의가 20이라는 수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 안에 포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의4에 의해) 왜 이들 20명의 인간이 존재하는지, 결과적으로 왜 그들 각각이 존재하는지 그 원인은 필연적으로 그들 각자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가 절대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수의 개체들로 존재하는 본성을 갖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하기 위한 외적인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1부, 정리8, 주석2)
이 지구상에 인간이 50억 명도 아니고 하필 20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에 대한 규정 속에서는 도출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본성(정의) 바깥의 외부적인 원인에서 그 이유가 탐색되어야 한다. 가령 지진이나 빙하기와 같은 지구 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멸종되고 겨우 20명만 남았다고 설명하지 않고서는 지구상의 20명의 인간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20명이라는 인간의 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자체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지진이나 빙하기와 같은 인간 외적인 것에 의해 파악된다. 이처럼 양태적이고 수적인 구별은 동일한 속성의 다른 외부 사물을 조건으로 해서만 가능한 구별의 방식인 것이다. 즉 수를 셀 수 있다는 특징은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양태들에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20명이 아닌 인간 자체의 본성, 혹은 20개의 삼각형이 아닌 삼각형의 본질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적인 규정에 의해서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를 셀 수 없는 대상(즉 실체)에 적용되는 구별을 “실재적real 구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진행된다. 물론 인간이나 삼각형은 수를 셀 수 있다. 그러므로 실재적 구별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수를 센다고 해서 인간이나 삼각형의 본질이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실체는 아예 수적이고도 양태적인 구별의 대상이 아니다.
속성이란 다름이 아니라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 했고, 양태들의 차이가 아닌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실체라고 했으므로 “다른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두 실체 사이에는 공통성common이 전혀 없다”(1부, 정리2)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실체가 연장속성을 갖고 있고, B라는 실체가 사유속성을 갖고 있다면 두 실체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으므로, “서로 간에 공통성이 전혀 없는 사물들은 그것 중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1부, 정리3) 주지하다시피 공기의 집중적 흐름인 태풍이 집을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태양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다. 속성이 다르면 서로 다른 실체다. 그렇다면 속성이 같으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을 공유하는 실체가 여럿 있을 수 있을까?
만약 하나의 속성(예컨대 연장속성)을 두 개의 실체가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 두 실체는 속성이 동일하므로 속성상에서는 결코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정리4에 따라) 양태상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두 개의 ‘실체’가 ‘양태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동일한 나무(즉 속성)의 책상이 두 개 있다는 것은 양태적이고 수적인 구별이다. 이렇게 동일한 속성을 가진 실체가 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실체를 사실상 양태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연 안에 동일한 본성이나 속성을 갖는 둘 이상의 실체는 없다.”(1부, 정리5) 각각의 실체는 다른 실체와 공유하는 공통의 속성을 결코 갖고 있을 수 없다.
실체는 수적이고 양태적인 구별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그리고 양태는 실체가 변용된 mode이므로 실체는 최소한 양태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실체로 존재했어야 한다. 양태보다 앞서고, 양태의 변용을 만들어내며, 수적으로도 양태적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것, 그것이 실체이다. 모든 실체들은 자기 속성을 그것이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다른 실체와 조금도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체들 사이에는 공통성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므로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될 수 없다.”(1부, 정리6) 양태가 아니라 실체라고 한다면 실체는 최소한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되면 안 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실체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되지도 않고, 인간들처럼 외부에 의존하지도 않고 존재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는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된다. 이 말은 곧 실체의 본성 자체에 이미 존재(실존)가 속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이를 스피노자는 “자기원인cause of itself”이라고 하는데,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고서는 그 본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1부, 정의1)이다.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는 실체 외부에 작용하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본성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실체의 본성에 속한다.”(1부, 정리7)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작은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실체는 반드시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하므로 한 실체가 갖는 속성을 다른 실체가 동시에 갖고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각각의 실체가 갖고 있는 속성들은 서로 달라야 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속성의 실체들이 있다면 그것은 여럿이 아니라 실상 하나의 실체일 것이다. 그리고 속성을 공유하는 실체들이 없으므로 실체는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될 수도 없고 오직 자기원인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이 자신의 본성인 존재, 자신의 본성 안에 존재가 포함된 존재. 따라서 외부에 아무런 제한도 없는 존재, 그러면서 스스로 실존하는 존재. 실체는 이런 점에서 무한하다고 얘기된다. 1부 정리8의 다음 명제는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의 중요한 결론이자 새로운 논의의 시작이다.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infinite.” 들뢰즈의 간략한 정리를 보충하면서 이 작은 결론을 끝내도록 하자.
동일한 속성의 여러 실체는 없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이 나온다. 관계의 관점에서 하나의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서 산출되지 않는다. 양상의 관점에서 실존은 실체의 본성에 속한다. 질(質)의 관점에서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7
그렇다면 무한성이란 무엇인가? 가령 인간의 신체와 같이 자신을 포함하는 더 큰 공간 속에 놓여 있는 양태들, 그리고 우리 신체와 속성을 공유하는 다른 연장 양태(다른 인간의 신체나 칼, 건물 등)에 의해 제한을 당하는 양태들은 유한하다고 말한다. 즉 “동일한 본성의 다른 것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사물은 자기 장르kind 안에서 유한하다finite고 말한다.”(1부, 정의2) 따라서 동일한 본성(혹은 속성)을 갖고 있는 다른 것에 의해 한정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무한성을 갖는 게 바로 속성들인 것이다. 가령 연장속성은 무한한데, 그것도 오직 “자기 장르 안에서”만 그런 것이다. (연장속성의 양태들인) 칼은 우리 신체를 파괴할 수 있으므로 신체는 유한하다고 말하지만 연장속성인 한에서 그것은 어떤 제한도 없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속성들은 기본적으로 실체적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명제는 우선 속성들의 실체적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무한성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가 직접 제시하고 있는 예를 보자.8 그는 ‘연장extension’과 ‘운동motion’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속성으로서의 연장이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면, 운동은 다른 것 안에서 파악되는 위치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물체가 움직이거나 정지하는 ‘운동’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떤 공간 안에서의 시간적 변화이다. 따라서 아무리 빠른 운동이라고 해도, 아니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운동이라고 해도 모든 운동은 위치상의 변화를 낳는, 다시 말해 그 운동의 크기를 넘어서는 공간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속성으로서의 연장은 위치의 변화나 시간의 변화와 같이 다른 것에 의해 파악되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체적이고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점의 운동과 정지에 의해 선분이 그어진다면 운동과 정지는 (속성으로서의) “연장이 취하는 두 가지 직접적 규정”(직접무한 양태)으로서, “연장은 불활성의 용기(容器)가 아니라 공간화하는 순수 활동”이자 “자기가 취하는 구조들을 산출하면서 자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