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마크 엥글러 Mark Engler
작가이자 <디센트Dissent> 편집위원, <예스!매거진Yes! Magazine> 편집기자, 진보적 싱크탱크인 포린폴리시인포커스Foreign Policy In Focus의 선임 연구원이다. 저서로 《세계를 지배하는 법: 다가오는 글로벌 경제 패권 전쟁How to Rule the World: The Coming Battle over the Global Economy》이 있다. www.democracyuprising.com에서 그의 글을 볼 수 있다.
| 지은이 폴 엥글러 Paul Engler
LA 소재 워킹푸어센터Center for the Working Poor의 창립 이사이며, 이민자 권리, 국제 정의, 노동운동 분야의 활동가로 일해왔다. 매년 수백 명의 활동가들에게 ‘여세를 몰아가는 대중운동’ 을 교육하는 모멘텀트레이닝Momentum Training의 창립 위원 중 한 명이다. 교육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www. momentumcommunity.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옮긴이 김병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귀환》, 《젓가락》,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달팽이 안단테》,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제자 간디, 스승으로 죽다》, 《인재 쇼크》, 《양심 경제》,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성장의 한계》, 《탐욕의 종말》, 《월드체인징》(공역), 《그라민은행 이야기》, 《선을 위한 힘》, 《경제인류학으로 본 세계 무역의 역사》,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경제, 공정무역》, 《과학자의 관찰 노트》, 《디데이》,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여우처럼 걸어라》, 《사회·법체계로 본 근대과학사》, 《생명은 끝이 없는 길을 간다》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이 책에 대한 찬사
“단연코 뛰어나다. 앞으로 전개될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 그만큼 훌륭한 책이다.”
‖ 스티븐 준스Stephen Zunes, 샌프란시스코 대학
“이 책은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고 계속해서 바꾸어나가는 대중 운동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열정과 통찰, 희망의 이야기들이다.”
‖ 마리아 엘레나 두라조Maria Elena Durazo, 민권, 다양성, 이민자를 위한 국제 연맹 부총장, 유나이트히어 노조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사회운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라.”
‖ 앤디 비크바움Andy Bichbaum, 예스맨 프로젝트
“전문가든, 활동가든, 매일 수많은 뉴스를 소비하는 일반인들이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회 변화를 이루어가는 순간과 운동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해왔다.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는 이 책에서 (…) 변혁적 진보가 단순히 역사적 환경 때문에 일어난다는 통념을 깨뜨리고, 시민이 이끈 성공적인 투쟁의 공학을 감추었던 오랜 도그마를 떨쳐낸다. 오늘날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제임스 루커James Rucker, colorofchange.org와 시민참여실험실의 공동창립자
“대규모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기후변화와 불평등 확대라는 두 가지 위기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다행히 과거 저항운동들이 보여줬던 역동성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다.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가 이 책에서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듯, 오늘날 조직 운동가들은 깊이 있고 풍부한 정치적 전통을 기반으로 그러한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책은 다수의 중요한 사례들과 예리한 주장들이 가득한,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든 대단한 책이다.”
‖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쇼크 독트린》의 저자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뿐 아니라, 현장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담긴, 정말 흥미진진한 책이다. (…) 우리 모두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한다.”
‖ 조지 래키George Lackey, 작가이자 활동가, 변화를 위한 훈련Training for Change 설립자
“이 놀라운 책은 역사의 분수령이 된 무수한 순간들을 이해하고 변화된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는 경로를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 그 도구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 우미 셀라Umi Selah(예전에는 필립 애그뉴로 활동한), 선교 책임자, 드림법 지지자
“정말 적절한 시점에 출간된 책이다. 우리는 지금 기후 정의, 경제 정의, 인종 정의, 이민자 정의 운동이 시민의 승리의 원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요한 순간을 살고 있다. (…) 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여러 번 꼼꼼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이 오늘날 세계에 주는 교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폴리나 곤살레스Paulina Gonzalez, 조직운동가이자 캘리포니아 재투자 연합의 집행위원장
“이 책은 신세대를 위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다.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는 대중 운동의 과학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책은 내가 이민자 권리 운동을 비롯한 여러 운동의 조직 운동가로서 경험했던 수많은 주요 논쟁들에 깊이 있는 해석과 통찰을 제공한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 카를로스 사베드라Carlos Saavedra, 아이니 연구소의 선임 훈련교관이자 유나이티드위드림의 전국 코디네이터
“진정 변혁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변화가 우리 생애에 이 땅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감히 꿈꾸는 (그러나 어떤 전략과 전술로 그런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전 세계의 강력한 비폭력 운동들은 우리가 얼마나 지혜롭게 우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 미셸 알렉산더Michelle Alexander, 《새로운 짐 크로법》의 저자
획기적인 책이다! 비폭력 투쟁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핵심 개념들의 정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어렴풋이 직관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것을, 세상이 요구하는 급진적 변화를 이뤄낼 강력한 방법인 ‘여세를 몰아가는 조직화’라는 개념으로 명료하게 보여준다.
‖ 빌 매키번Bill McKibben, 작가이자 350.org의 창립자
“비폭력 행동의 역사와 논리, 윤리, 영향력과 관련된 진정한 걸작이다.”
‖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 《시민 저항은 왜 작동하는가》의 공동 저자
“이 책은 반드시 크나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 두 저자는 대규모 대중 동원, 조직 건설, 비폭력, 혼돈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논쟁들을 아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이러한 전략적 딜레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지적 토대를 만들어냈다.”
‖ 프랜시스 폭스 피벤Frances Fox Piven, 《권위에 도전하기》, 《빈민 운동》의 저자
THIS IS AN UPRISING
Copyright ⓒ 2016 by Mark Engler and Paul Engler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8 by Galmabaram
All rights reserved.
First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by Nation Books, an imprint of Perseus Books LLC.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Nation Books, an imprint of Perseus Books LLC,
a subsidiary of Hachette Book Group, Inc. through Duran Kim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듀란킴 에이전시를 통해 Perseus Books와 독점계약한 갈마바람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일러두기
1. 본문에서 • 표시의 각주는 옮긴이 주이다.
2. 지은이의 주석은 본문에 번호를 달고 후주로 밝혔다.
3. 원서에서 이탤릭으로 강조한 부분은 볼드체로 처리했다.
4. 참고 문헌 가운데 국역본이 있는 것은 제일 처음 나올 때 서지 사항을 밝혀두었다.
5. 외국 인지명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을 기준으로 삼았으나, 마틴 루서 킹의 경우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지 않고 마틴 루터 킹으로 하였다.
차|례
서문
1장 — 전략적 전환
2장 — 구조와 운동
3장 — 융합
4장 — 기둥
5장 — 승리를 선언하고 알려라
6장 — 파괴적 행동
7장 — 회오리 바람
8장 — 분열
9장 — 규율
10장 — 변화의 생태계
결론
감사의 말
주
옮기고 나서
1963년 1월 초, 조지아 주 서배너Savannah 인근의 도체스터 수련원에 도착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그의 최고위급 참모 열두 명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지난번 투쟁에서 그들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가운데 가장 심각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더는 물러설 데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미국 남부에서 가장 불길함을 풍기는 도시 가운데 하나인 앨라배마 주 버밍엄Birmingham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중대한 시위들을 벌일 작정이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해야 했다.1
지난 일 년간, 킹이 이끄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SCLC)는 올버니Albany—조지아 주 남서부에 있는 소도시—에서 민권운동에 깊이 개입해왔다.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벌어졌던 시위로 무려 2,000명이 넘는 시위 참가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주요 언론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인 시 공무원들이 보여준 현명한 시위 대처 능력에 대해서만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올버니 “경찰,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맞서 능숙하게 대응”이라고 보도했고, 또 다른 매체는 “인종 간의 장벽을 조금도 무너뜨리지 못했다”고 논평했다.2
킹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그동안의 투쟁 방식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전략을 짜기 위해 조직의 핵심 인사들을 도체스터로 불러 모았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킹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정신적 조언자인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와 서른세 살의 SCLC 사무총장 와이어트 티 워커Wyatt Tee Walker가 있었다. 도로시 코튼Dorothy Cotton과 앤드루 영Andrew Young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아직 그들은 조직 내에서 하급 참모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코튼은 남성 중심의 지도부에 진입한 몇 안 되는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이미 조직원 양성 프로그램 운영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은 킹이 균형 잡힌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급진적인 참모들의 반대편에 서서 킹에게 온건한 목소리를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급진파 가운데 한 사람인 제임스 베벨James Bevel은 전투적 학생 조직인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SNCC)의 노련한 학생 운동가로, 연좌 농성처럼 큰 위험이 따르는 다양한 저항 행동에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데 탁월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3
그들은 지난번에 올버니에서 실패한 이유를 되짚어보며 다음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그들은 앞으로 몇 달간 진행할 대담한 계획의 기초를 짜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이 짠 전략은 오늘날 “버밍엄 모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에 그 계획을 알고 있었던 소수의 핵심 인사들은 그것을 “프로젝트 X”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프로젝트 C”라고 바꾸어 불렀다.
여기서 C는 대결을 의미하는 “Confrontation”의 첫 글자였다.
1963년, 버밍엄은 반동적 인종주의의 요새로 악명이 자자했다. 지역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집과 사무실들이 주기적으로 폭탄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한 유명한 흑인 거주지는 “다이너마이트 언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몇 년 전에 흑인 가수 냇 킹 콜Nat King Cole은 버밍엄 시의회 강당에서 공연하던 중 백인 우월주의 단체 북앨라배마시민의회North Alabama Citizens’ Council 소속 회원들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었다. 공연장 무대 위로 난입한 그들은 보안 요원이 냇 킹 콜을 아수라장에서 구해내기 전까지 그의 피아노를 부수며 소란을 피웠다. 냇 킹 콜은 두 번 다시는 남부에서 공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법원이 1962년 1월 15일 자로 공원 67곳과 공중수영장 8곳을 모든 인종에게 개방할 것을 명령하자, “황소”라는 별명의 악명 높은 경찰청장 유진 불 코너Eugene “Bull” Connor는 흑인 주민들이 그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게 허용하느니 그냥 폐쇄하겠다고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4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도모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킹은 회의 중에 참모들에게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번 투쟁에 자신이 참여할지 말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번 투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그 사실을 잘 숙고하길 바랍니다.”5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인 시위 지도부는 이번 투쟁이 전 국민의 양심에 불을 붙여 언론이 주목하는 중대한 사건이 될 거라고 믿었다. 나중에 킹이 버밍엄 시 교도소 감방에서 쓴 편지에서 고백했듯, 그들은 “아주 긴박한 위기 상황을 만들어내어” 너무 자주 간과되어왔던 인종차별이라는 악성 종기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추악한 고름 덩어리를 인간이 지닌 양심의 빛과 국민적 여론의 공기”에 노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6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기 국면을 인위적으로 조성한다는 생각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저 겉만 번드르르한 목표가 아니었다. 또한 비폭력 투쟁을 고수하는 것도 단순히 내적으로 도덕적 확신이나 정신적 결의를 다지기 위한 게 아니었다. 도체스터에서 청사진이 마련되고, 이후 몇 달에 걸친 세부 실행 계획 작업을 통해 완성된 프로젝트 C는 치밀한 계산 아래 만들어졌다. 버밍엄 상업 중심가의 상점주와 시 공무원들이 인종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이전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 전술을 조합한 야심찬 투쟁 계획이 등장했다. 즉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으로 상인들에게 경제적인 압력을 가하고, 1960년 내슈빌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던 놀라운 간이식당 연좌 농성을 실행하고, 올버니 시에서 자발적으로 체포됨으로써 감방을 가득 채우는 전략들을 짠 것이다. 시위 지도부는 이번에는 이런 전술들을 총동원해서 다단계 공세를 취할 작정이었다. 사회학자이자 민권운동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앨던 모리스Aldon Morris는 나중에 이 전략을 “치밀하게 계획된 대규모 교란 작전”이라고 불렀다.7
킹은 영리한 전략가이자 까다로운 행정가인 와이어트 워커에게 준비 작업의 총지휘를 맡겼다. 워커는 시위가 벌어질 장소들의 경로를 정하고, 시위대가 출발하는 16번가 침례교회 본부에서 1차, 2차, 3차 표적으로 선정된 다양한 상점과 공공시설들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 SCLC 지도부 역시 법원의 명령을 위반했을 때 치를 모든 대가를 저울질하고, 상대방이 취할 수 있는 법적 조치들을 예측했다. 그들은 시에 지불할 보석금 총액을 계산하고, 체포된 활동가들이 보석으로 석방되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어야 하는지—감방 안을 계속 가득 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구금과 석방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한 계획도 수립했다. 워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번 불매운동으로 버밍엄 상점주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입게 될 사업 손실액을 계산했다. 그들은 업주들에게 얼마나 큰 손실을 입혀야 상점 안의 탈의실과 음수대에 표시된 “백인 전용”이란 팻말이 사라질지 토론했다.8
민권운동가들은 버밍엄의 대규모 시위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난공불락 요새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를—그리고 미 전역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봇물을 터뜨릴 수 있기를—꿈꿨다. 만일 시위가 성공한다면 “그 여세를 몰아서 자유와 정의로 가는 모든 과정을 바꿀 수도 있다”고 킹은 역설했다.9
시위가 벌어지기 전, 대다수의 사람들은 버밍엄에서 투쟁을 벌이려는 SCLC의 계획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1963년 1월, 마틴 루터 킹은 막 서른네 살이 되었다. 1956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의 성공으로 그가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 반대편의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같은 진영의 경쟁 관계에 있는 민권운동 단체에서도 그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SCLC에 자금을 지원하는 일부 재단들은 불만을 표했고, 대중들은 조직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킹의 측근들도 자신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킹의 결점을 보완할 다양한 조치들을 취했다. SCLC 조직원들끼리는 대개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워커는 조직원들에게 그들의 대표를 언제나 “킹 박사”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 앤드루 영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가 매우 젊었으니까요. 게다가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거든요. 만일 우리가 그에게 과장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외부 사람들도 그럴 우려가 있었죠.”10
킹의 리더십만 의심받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규모의 “위기 국면”을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 있다는 생각—한 시대를 가르는 중대한 봉기는 조직화되지 않은 우발적인 시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실행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믿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대체로 사회운동이 높이 평가받지 못했고, 학자들은 특히 비폭력저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인도의 간디 사례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또한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의 성공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1963년 5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연장에서 와이어트 워커는 이렇게 말했다.
흥미로운 건 일부 사회학자와 비관론자들이 몽고메리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음, 이건 그저 사회학적으로 기이한 일, 즉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비폭력은 미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우리는 너무 서구화되어 있거든. 참을성 없는 우리 사회는 그런 걸 받아들이지 못해.” 또는 “그런 절제력은 명상과 사색을 즐기는 동양 문화에서 나오는 거라고.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너무 바삐 움직이고 행동하느라 정신이 없어”라고 말입니다.11
앤드루 영은 올버니 시위가 대실패로 끝난 뒤 전국적인 주요 언론 매체들이 “민권운동의 직접행동 국면은 이제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고 말한다.12
그러나 1963년 4월 3일 마침내 버밍엄 투쟁이 시작되자, 프로젝트 C의 치밀한 계산이 적중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버밍엄에서 끓어오른 긴장감은 단 6주 만에 전국적으로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폭발력 큰 중대한 사건이 되어 있었다. 역사학자 마이클 카진Michael Kazin이 주장하듯, 경찰견들이 비무장 시위대를 가차 없이 공격하며 물어뜯고, 학생 시위대가 강력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수많은 백인들이 처음으로 흑인의 자유라는 대의를 지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13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버밍엄 이야기를 보면 주로 그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고, 도체스터에서 시작된 준비 과정은 그냥 건너뛰기 일쑤다. 하지만 그 과정이 시사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미 전역을 불시에 충격에 빠뜨린 대표적인 민권운동은 결코 사회학적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다. 또한 평소에 드러나지 않았던 인종주의의 불의함이 인종차별주의자들과의 한 차례 충돌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고 북부의 한 언론 매체를 통해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분노가 확산된 우발적 사건도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투쟁 전략의 결과였다.
그리고 버밍엄 이후 이런 식의 전략을 구사하는 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즉흥적.” “무계획적.” “통제 불가능.” “감정적.”
중동 전역에 걸쳐 몰아친 독재에 대한 거센 저항의 물결이든, 기업 권력에 맞서 시애틀 같은 대도시에서 폭발한 대규모 시위이든, 퀘벡 전역을 휩쓴 학생 시위이든, 이민자 권리를 요구하며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로 쏟아져나온 백만 명의 시민들이든, 구소련의 한 공화국에서 새로운 선거를 요구한 외침이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도시들에서 수백 개의 텐트를 치고 노상 투쟁을 벌이는 계기가 된 월스트리트의 공원 내 야영 농성이든, 소셜네트워크상에서 해시태그를 이용해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이든,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은 모두 똑같다. 텔레비전 화면에 불쑥 비친 대중운동은 마치 바이러스 전염병이나 대초원에 내리치는 뇌우처럼 돌발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2011년—아랍의 봄, 유럽 전역에서의 대규모 긴축 반대 시위, ‘점령하라’ 운동이 이어진 해—에 <타임>은 그러한 봉기들을 “리더가 없고, 확실한 형태가 없으며, 즉흥적”이라고 설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중동에서 일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바이러스처럼 전파”되고 “나라마다 서로 다르고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강타”하고 있는 무언가로 묘사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러한 시민 저항의 급격한 분출은 “어떤 정보기관도 예측할 수 없었던 범주의” 것이었다.14
알다시피, 언론의 그러한 묘사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1999년 세르비아의 대학생들과 노동조합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정권에 맞섰을 때, 언론은 “전국에 걸쳐 우발적으로 발생한 시민 불복종 행동에 따른” 노동자 파업이라고 보도했다. <모스크바타임스>는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부패와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오렌지 혁명이 “본질적으로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즉흥적인 감정 폭발”일 뿐이라고 썼다. 2006년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이민자들이 주도한 거리 행진에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을 때, <워싱턴포스트>는 그것을 두고 “즉흥적인 행동주의의 고조”라고 묘사했다.15
앨던 모리스는 당시 사람들이 민권운동에 대해 갖고 있던 일반적인 관념을 이렇게 지적한다. 즉 시위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지해서 맹목적으로 반발하고” 있으며, 간이식당 연좌 농성은 “일종의 즉흥적인 조직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 기록에는 그러한 서술이 차고 넘친다.16
그러나 일련의 대규모 운동들이 처음의 그런 인상들과 달리 즉흥적이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치듯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갑작스런 사회 변화가 실제로는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러한 뇌우의 의미와 그것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러한 변화에 실제로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버밍엄 대결은 마틴 루터 킹과 SCLC 지도부에게 엄청나게 큰 선물임이 밝혀졌다. 즉 광범위하고 의도적이며 비폭력적인 혼란이 국가정책 과정을 바꿀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버밍엄에서의 승리는 미 전역에 잔잔한 파문을 던졌다. 그들이 버밍엄의 상점주들과 인종차별을 철폐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지 두 달 반 만에 750건이 넘는 민권운동 관련 시위가 미국의 186개 도시에서 일어났고, 약 1만 5,000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다.17 SCLC가 투쟁을 개시한 지 1년 반도 안 되어 마침내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은 역사적인 1964년 공민권법Civil Rights Act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의 반전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에 여전히 답변하지 않고 있다. 올버니에서의 인종차별을 합법화한 짐 크로Jim Crow법을 철폐하려던 노력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실패했는데, 왜 버밍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는가?
올버니에서 투쟁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창조적 전술이 부족했다는 등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버밍엄 투쟁 때와 마찬가지로 올버니에서도 연좌 농성과 불매운동, 행진, 대규모 체포, 그리고 합법적 행동을 조합한 혁신적 시위 방식이 총동원됐다. 실제로 올버니는 시민 저항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배치한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유명했다. 킹은 올버니 운동을 여태껏 시도된 비폭력 저항운동 가운데 “가장 창조적으로 운용”된 작전이라고 불렀다.18
그러나 전술의 수준은 정교했지만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올버니 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던 킹도 시위가 끝나고 1년이 지난 뒤, “사람들이 활기를 많이 잃고 절망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encement of Colored People(NAACP)의 한 지역 책임자는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빈정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올버니는 성공했어요. 만일 그 목적이 감방에 가는 것이었다면 말이죠.”19
실패에 이르게 된 데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SCLC는 올버니에서 의도치 않은 분란에 휘말렸다. 지역 활동가들은 적의 약점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은 채 인종차별주의자의 권력 기구에 산만하고 광범위한 공격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다. NAACP의 험담이 암시하는 것처럼, SNCC를 포함한 다양한 민권 단체와 집단들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만연해 있었다. 그들은 킹을 비롯한 그의 참모들과의 의견 충돌을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반면에 시 당국은 품위 있고 차분한 경찰청장 로리 프리쳇Laurie Pritchett의 지휘에 따라 경찰력을 과도하게 투입하거나 감방을 구금자들로 채우는 일 없이, 시위대를 진압하기에 충분할 정도만 적당히 체포했다.
이 모든 요인들은 올버니 투쟁이 파국 속에 대단원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올버니에서는 인종차별 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압박하려면 어떻게 단계적으로 비폭력 투쟁의 수위를 상승시킬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을 희생하는 행위를 통해 긴장감을 높이고 인종차별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결정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버밍엄에서는 그러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았다.
킹은 올버니에서 실패한 뒤, “순서대로 버튼만 누르면 혁명적 권력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런 교묘한 전술론은 없다”고 깊이 자성했다. “사회운동의 얼개를 짜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배우며, 더 많은 실수를 통해 다시금 배운다.”20
짐 크로법을 폐지하거나 독재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는 마법의 공식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폭력 투쟁의 역학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어떠한 상황이든 대중 동원에는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프로젝트 C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기술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것—비무장 봉기 기술—의 원리를 연구하고 발견하고 현장에 적용하려고 애써왔던 전통의 일부이다.
이 책은 그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프로젝트 C를 탄생시킨 전략 수립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버밍엄 비폭력 투쟁의 설계자들이 단계적으로 투쟁 수위를 높이는 그들의 계획이 왜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프로젝트 C가 나오기까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실험 전통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러한 전통에서 얻은 교훈이 그후 어떻게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마침내 사회정의 실현의 역사적 획을 긋는 데 기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그러한 비폭력 행동의 전통이 어째서 다가올 세기의 정치 생활을 바꿀 수도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특정한 현상, 즉 운동의 여세를 몰아가는 대규모 대중 동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대중 동원을 가장 면밀히 연구한 사람들—광범위한 시위의 각본을 짜고 이를 뒷받침하는 방법을 검토한 사람들—이 전략적 비폭력의 전통에서 배출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대변동을 지켜보는 정치 평론가들은 사회 변동이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때 이러한 비폭력 전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러한 대변동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변화를 견인하기 위한 기존의 접근 방식에 이러한 통찰을 결합시켜야 한다.
비폭력은 대개 한물간 것으로, 즉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들과는 대부분 무관한 이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될 때마다 전략적 비폭력 행동은 자신을 하나의 역사적 힘으로 재천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기도, 돈도, 전통적 자원도 없이 비폭력 운동 대오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공적 논의의 조건을 뒤집고 국가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런 형태의 비폭력은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적과 정면으로 맞서는 전략이다.
비무장 대중 동원은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미국에서 있었던 그런 순간들로는, 1930년대 미시건 주의 자동차공장들에서 일어난 연좌 농성, 1960년대 반전과 언론 자유 운동, 1970년대 복지와 여권 운동, 1980년대 핵무기 동결 투쟁과 에이즈 행동주의, 1990년대 자연림을 보호하고 기업의 세계화에 반대하기 위한 직접행동, 21세기 초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들 수 있다. 국제적으로 전략적 비폭력 투쟁은 칠레에서부터 폴란드, 필리핀과 세르비아, 베냉과 튀니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의 독재 정권을 전복하는 데 매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런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많은 일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느끼며, 그런 상황이 일상의 정치 규범들을 깨뜨리는 흔치 않은 예외적인 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일생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사건들을 찾아보면, 일생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봉기들이 다양한 형태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랍의 봄과 ‘점령하라’ 운동의 출현을 목격한 2011년은 그런 저항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속도는 다소 주춤해졌다. 그러다가 그후 그런 대규모 저항이 멕시코, 터키, 브라질, 홍콩에서 갑자기 분출하기 시작했고, 그 운동들은 세계사에서 극히 보기 드문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되었다. 미국 내에서는 기후변화를 둘러싸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에 용감하게 맞서는 저항운동이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플래카드 아래 하나로 뭉쳤다.
여세를 몰아가는 조직화 방식은 때로 선거 정치에 깊이 스며들기도 한다. 2008년 젊은 상원 의원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캠프에서 보여준 선거운동—사회운동에서 흔히 쓰는 대중 동원 기법을 사용해 대통령 선거운동을 함으로써 기존의 방식에 익숙해 있던 선거운동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이 그런 경우였다. 이런 방식을 취한 보다 작은 규모의 운동들은 서비스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대학가의 중대 현안으로 만들고, 부정부패 공무원들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대로 주 정부 청사를 가득 메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보도와 폭로, 의회 연설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경우, 비폭력 투쟁은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불의한 상황을 드러내어 대중이 그 문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다양한 사회운동이 그토록 자주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데도, 대다수 전문가들이 그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무장 저항의 물결을 늘 즉흥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그들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선거에 어떤 후보자들이 뛰어들지 예측하는 데 마냥 시간을 허비한다. 그들은 의회에서, 법원에서, 백악관에서 전개되는 상황들을 예의 주시한다. 또한 그들은 선거 공학과 로비 활동, 입법 협상—일반인들이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좌지우지하는 과정으로, 엘리트의 가치관과 관행이 스며들어 있다—의 기술들을 면밀히 연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현실성에 호소한다. 그들은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강변한다.
정말 변화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날까? 지난 150년 동안 일궈낸 대단히 중요한 진보 가운데 많은 것들—노예제 폐지, 여성참정권 확보, 어린이노동의 규제와 작업장 안전기준 시행, 다양한 형태의 차별 금지—이 그러한 대의들을 마침내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든 입법 활동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세상에 널리 알린 사회운동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국제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것이 아닌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외교술이나 군사적 행동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비무장한 채 집결한 대중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권력을 이양하고 자리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비폭력의 영향력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도 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크게 부족하다. 비폭력은 대개 철학이나 도덕 규칙의 하나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것을 정치적 분쟁과 혼란, 갈등 고조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기회를 발로 차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무장 봉기를 여전히 놀라운 일로만 여기거나, 그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 과정에 끼친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중대한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를 이해할 수 있는—그리고 그것의 영향력을 이용할—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킹에게 버밍엄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대중행동이었지만, 그는 불 코너의 위협적인 경찰력에 맞서는 시위대를 지켜보면서 “생애 처음으로 비폭력에 대한 긍지와 힘”을 느꼈다고 썼다. 킹은 프로젝트 C를 통해 기존 정치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전통적인 선거와 로비 활동 영역 밖에서 행동하고 종래의 지역사회나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 방식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것—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프로젝트 C는 공인으로서의 킹의 삶을 바꾸었고, 그가 생전에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21
지난 세기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 대규모로 집결한 대중의 파괴적 힘을 경험한 그들은 대규모 시위의 물결에 놀라거나 그러한 봉기를 통제할 수 없는 기이한 사회적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이 보여주는 역학 관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을 이끄는 활동가와 학자들은 비폭력이 단순한 도덕 철학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면밀히 검토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비폭력 투쟁 전략을 이용하여 더 많은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게 만들 순간을 촉발하고 이끌기 위해 노력해왔다.
킹이 경고했듯, 짐 크로법을 폐지하고 독재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결코 없다. 비폭력 투쟁의 역학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버밍엄의 조직 활동가들이 역설한 것처럼, 긴박한 위기 상황을 만들어내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의에 대중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앨던 모리스가 주장했듯 큰 혼란을 유발하는 작전 계획을 짤 수도 있다.
전략적 비폭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은 여러 사람의 전기들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적 성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에게서 영감을 받은 젊은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가 그동안 받은 변호사 교육을 던져버리고 다른 형태의 행동, 즉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본 집단적 저항 행동을 어떻게 가슴에 품게 되었는지가 바로 그런 종류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평화운동에 몰두하다, 비폭력에 대한 요구가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의 신조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의 실용적인 투쟁 무기로서 훨씬 널리 채택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발견한 학자 진 샤프Gene Sharp의 이야기도 그 범주에 속한다. 또한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투쟁 방식을 선보인—카우보이식의 남성미를 과시하는 문화 윤리가 지배적이던 당시의 급진적 환경운동에 새로운 방식의 전술을 도입한—페미니스트이자 노련한 노동운동가 주디 배리Judi Bari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명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끌어낸 대중 동원이든 역사책에 나오지 않거나 이름 없는 민중들이 견인해낸 대중 동원이든, 이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여세를 몰아가는 조직화 방식이 직접행동의 새로운 양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가장 기본적인 정치 의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운동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변화에 대한 요구에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할 것인가? 정부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하고, 언론 매체와는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 각 집단들은 예기치 않게 그들의 대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동력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그들은 언제 본격적으로 나서고, 얻어낸 성과들을 언제 제도화해야 하는가? 운동의 승리를 선언하기에 적당한 시점은 언제인가? 그들의 노력이 가져올 수 있는 지속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오늘날 존재하는 전략적 비폭력에 대한 지식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달되었고, 수십 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해 다듬어졌다. 때때로 이 과정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 이루어졌다. 활동가들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전통과 영감의 원천들에 기대어, 대중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핵심 원리들을 저마다 재창조해냈다. 하지만 철저한 계획 없이 행동에 옮긴 경우가 많았고, 거기서 배운 교훈들을 제대로 기록한 경우도 드물었다. 프로젝트 C는 비폭력 투쟁을 실천한 사람들이 그들이 구사한 전략의 주요 방향들을 철저하게 계획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경우였다. 비폭력 투쟁을 체계화하고 심사숙고한 다른 사례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운동들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났다. 그 운동들은 계획에 따른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저마다 비무장 봉기의 기술에 대한 집단적 지식을 축적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느린 지식의 축적이 1세기 넘게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다 최근에는 매우 정교한 형태의 교육과 연구를 통해 보완되기 시작했다. 아주 흥미롭게도, 일군의 학자와 활동가들은 전략적 비폭력 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이 그냥 상황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에 대한 중대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비폭력의 마키아벨리라고 알려진 한 인물에서 시작된다.
인터넷상에서 마권업자들이 활동하는 기이한 세계에서는 거의 모든 것—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지 알아맞히는 것을 포함해—에 돈을 걸 수 있다. 노벨평화상을 둘러싼 불가사의하고 비밀스러운 정치적 요소를 감안할 때, 그 상의 수상자를 예측하는 것은 늘 불확실성이 높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도박사들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손꼽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정부나 주요 비정부기관의 수반도 아니고 카리스마 있는 저항 단체의 지도자도 아닌,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보스턴의 80대 노교수였다. 그의 이름은 진 샤프다.
1953년 스물다섯 살의 반전주의자 진 샤프가 가장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이었다. 그 당시, 오하이오 주 개신교 순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샤프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는 모한다스 간디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한국전쟁 징병을 기피한 죄로 체포되어 연방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샤프는 재판에 회부되기 전, 말년에 평화운동가로 명성을 얻은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젊은 평화주의자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정신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당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처럼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샤프는 결국 징병을 거부한 죄로 코네티컷 주 댄버리 교도소에서 9개월 10일을 복역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입장이 결정되었다고 여긴다.1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뒤, 그는 그 당시 자신의 고독한 저항 행동에 대해 이전과 매우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전쟁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샤프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2010년에 그는 “당시 내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취한 태도가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단언했다.2
오랫동안 샤프는 비폭력 행동 사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전향 과정—앞으로 그가 할 일을 구체화하고 마침내 수십 개 나라의 사회운동에 반향을 불러일으킬 생각의 변화—을 겪었다. 그가 이해하는 비폭력은 더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결코 아니었다.
오늘날 샤프는 비폭력 투쟁의 역학에 대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긴 이론가이자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비폭력의 마키아벨리”라는 별명 외에도 “독재자 해결사”, 비무장 혁명의 클라우제비츠라고 불렸다. 그의 연구 환경은 보잘것없다. 그는 이스트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연립주택 지하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연구소라고 알려진 연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에는 샤프 외에 연구원이 한 명 더 있을 뿐이다. 샤프는 거의 수십 년 동안 무명으로—한 작은 연구 분야에서는 존경받았지만, 그 분야 밖에서는 실제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연구에 힘썼다.
한편 샤프의 연구는 대단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핵심 주장이 녹아 있는 93쪽짜리 소책자로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안내서인 《독재에서 민주주의로From Dictatorship to Democracy》는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얇은 소책자는 전 세계적으로 저항의 물결이 거센 분쟁 지역들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원래는 샤프가 버마의 반체제 인사들이 군사정권에 맞서 비폭력 운동을 펼쳐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1993년에 쓴 이 책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을 전복하려고 애쓰던 세르비아 학생들에게 소중한 지침이 되었다. 또한 이 책은 2003년과 2004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활동가들이 돌려보던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대중 시위가 발생했을 때도 많은 아랍인들이 그 책의 내용을 아랍어로 인터넷에서 내려받았다.
이란 정부는 이 책과 저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렬히 비난했다. 2005년 여름, 러시아의 두 독립 서점은 새롭게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된 샤프의 소책자를 책장 선반에 비치한 뒤에 화재로 불타버렸다(러시아의 한 반체제 인사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내 사무실 책꽂이에는 반쯤 타버린 책 한 권이 여전히 꽂혀 있어요”라고 말했다).3 샤프의 명성은 특히 아랍의 봄 이후에 다시 높아졌다. 그는 2011년 ‘점령하라’ 운동이 구체화되던 시기에 발표된 <혁명을 시작하는 방법How to Start a Revolution>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주요 인물로 다뤄지기도 했다.
징병을 거부하는 바람에 복역해야 했던 기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샤프에게 일어난 생각의 전환—향후 그의 연구와 교수 방향을 정하게 된 통찰—은 아주 단순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즉 비폭력은 일부 광신자 집단이 믿고 따르는 도덕률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샤프는 비폭력 투쟁이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 접근 방법이며, 그것이 변화를 견인하는 효과적 방안을 제공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그것을 중요한 수단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무장 사회운동이 어떻게 극적인 결과를 낳은 봉기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오늘날의 “시민 저항civil resistance”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러한 원칙에서 나온 것이다.
샤프가 경험한 생각의 전환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폭력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보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난 세기의 수많은 위대한 혁신가들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즉 비폭력이 세상에 진정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략적으로 대중행동과 반드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 말에 샤프보다 1년 늦게 태어난 마틴 루터 킹은 그러한 혁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킹의 경우, 정치 투쟁의 한 수단으로 비폭력 투쟁의 사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프로젝트 C와 같은 계획을 짤 수 있는 정치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의 개인적 용기나 확신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을 완벽하게 숙달한 덕분에 미국 역사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진 샤프는 정치적 삶의 처음 몇 년 동안은 주류 평화주의 전통에 빠져 있었지만, 그후에는 그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1954년 감옥에서 석방된 샤프는 유명한 급진적 평화주의자 A. J. 머스티Muste의 보좌관으로 잠시 일했다. 그 뒤 그는 영국의 주간지 <평화 소식Peace News>에 글을 기고했고, 오슬로로 이주한 뒤에는 2차 대전 기간에 노르웨이에서 교사들이 파시스트 교육 시행에 저항하기 위해 어떻게 비폭력 전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했는지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비폭력 연구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의 논문은 1973년에 《비폭력 행동의 정치The Politics of Nonviolent Action》라는 제목의 900쪽짜리 책으로 발간되었다. 비폭력 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은 3권짜리 판본으로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샤프는 이 책을 출간했을 즈음부터 그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던 평화 단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평화주의—전쟁과 폭력에 대한 도덕적 반대—는 비록 수천 년은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 존재해왔고, 그 기원을 세계 주요 종교들의 핵심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뿌리는 젊은 연구자 샤프의 시대에 계속 모습을 드러낸다. 비폭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도덕적, 정신적 차원만을 역설했다.4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샤프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것과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1930년 인도에서 있었던 간디의 저항운동을 기록한 옛날 신문 기사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연구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곤혹스러웠다. 그는 간디가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고 이름붙인 저항운동에 참가했던 대다수 사람들이 비폭력을 도덕적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비폭력 투쟁이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기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샤프는 자신의 발견이 많은 사람들—오늘날 “원칙적 비폭력principled nonviolence”으로 알려진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내면 깊은 곳에서의 윤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2003년의 한 인터뷰에서 설명했듯이, 샤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했다.
• 힌두어로 ‘진실의 힘’이라는 뜻으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말한다.
무척 고심했죠. ‘그걸 말해야 할까?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겠어!’
하지만 결국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위협이라기보다는 큰 기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윤리적 또는 종교적인 비폭력을 결코 믿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도 실용적인 이유에서 비폭력 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5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로 한 샤프의 결정은 그의 연구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결국 그는 “전략적 비폭력”이라고 알려진 입장의 선구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생활철학”으로서의 비폭력을 여전히 믿었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점점 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동료 평화주의자들에게 사람들이 전쟁과 폭력에 의지하는 것은 그들이 사악하고 증오에 차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주 다루기 힘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폭력에 의지한다. 그는 “도덕적 이유로 폭력을 금지하고 사랑의 힘을 믿으라고 훈계”함으로써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폭력 투쟁 전략이 무장투쟁을 대체하는 효과적인 대안—심지어 더 우월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6
1959~1970년 사이에 쓴 글을 모은 수필집 《정치 전략가 간디Gandhi as a Political Strategist》 같은 책들에서 샤프는 초자연적인 마하트마mahatma●가 아니라, 상황 판단이 기민하고 계산이 빠른 전술가인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의 면모를 밝히려고 애썼다. 또한 그는 전략적 비폭력이 어느 정도 갈등 회피와 관련이 있고 오직 민주주의 체제에서만 활용될 수 있다는 통념과도 싸웠다. 그는 비폭력 행동이 수동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먼 “심리, 사회, 경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투쟁 기술”이며, 심지어 포악한 압제 정권에 맞설 때도 사용될 수 있는 전술임을 보여주는 연구에 착수했다.7
•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
샤프는 무장투쟁뿐 아니라 비폭력 투쟁에도 “치열한 ‘전투’의 전개”가 수반되며, “지혜로운 전략과 전술이 요구되고, ‘병사들’의 용기, 절제,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군 출신들이 평화운동가들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빨리 이해하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훗날 그의 가장 가까운 공동 연구자 중 한 명이 된 로버트 헬비Robert Helvey는 미 육군 퇴역 대령이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샤프의 강의를 들은 후 비폭력 봉기 내부의 작동 방식에 매료되었다.8
비폭력 투쟁에 대한 샤프의 분석은 눈에 띌 정도로 단호하다. 그는 운동의 공격 목표가 독재 정권일 경우 억압이 매우 심해질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어떤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어떤 경우에는 비폭력을 고수한 사람들이 폭행당하고 학대받았을 뿐 아니라, (…) 계획적인 대량 학살로 살해되기도 했다.” 샤프는 비폭력 투쟁이 꼭 성공한다고 확언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의 투쟁 기법으로 선택한 비폭력 행동은 투쟁이 승리를 거둘 거라고 보장하지도 않으며 보장할 수도 없다. 특히 단기적으로 볼 때 그러하다.”9
그렇지만 샤프는 어떻게 비무장 봉기가 놀랍고 때로는 직관에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기록했다. 폭동이 독재 정권—그들은 무장 공격을 진압하고 안보에 대한 위협을 빌미로 경찰국가 탄생을 정당화하는 데 능숙하다—의 힘에 맞대응하는 방식이라면, 비폭력 행동은 대개 독재 정권의 빈틈을 노린다. 사회운동은 샤프가 “정치적 주짓수”●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권력자들이 가하는 억압을 거꾸로 그들의 약점으로 바꿀 수 있다. 비무장 저항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결국 지배 권력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정권의 정당성을 무너뜨려, 많은 경우에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정권에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상황을 만든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ocolò Machiavelli는 이미 1500년대에 이러한 역학 관계를 간파했다. 그는 적의를 품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에게 제재를 가하려는 지도자들의 “잔학 행위가 늘어날수록 정권의 힘은 더 약해진다”고 썼다.10
• 유도의 원형인 일본 사무라이들의 일종의 호신술로, 주로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한다.
샤프가 생각하는 비폭력 활동은 고귀한 희생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 활동이 정말 가치를 가지려면 실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이러한 유효성에 대한 강조는 그가 이전의 평화주의 전통이나 원칙적 비폭력과 결별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이전의 평화운동은 “증언대에 서거나,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소규모 집단들과 어김없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 전쟁세 납세 반대, 공습 작전 참여 거부 같은 행동들은 그들의 전형적인 전술이다. 이런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변으로부터 고립되거나 돈키호테 같은 취급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이런 계열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베트남전쟁 이후로 더욱 극단적인 형태의 도덕적 증언을 시도했다. 보습운동Ploughshares Movement●의 지지자들과 가톨릭노동자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기독교 평화주의자 도로시 데이Dorothy Day와 피터 모린Peter Maurin이 창립했다—의 회원들은 “칼을 두드려서 보습으로”라는 성경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전쟁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 운동을 펼친 이 종교적 활동가들은 영장을 태우고, 전함의 갑판에 피를 뿌리고, 가공할 핵미사일이 배치된 군사시설에 잠입하여 미사일 탄두를 망치로 내리치는 행동을 감행했다.
• 1968년 미국의 형제 신부 대니얼Daniel Berrigan과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이 시작한 반전운동으로, 영장 소각과 징병 거부 같은 급진적 직접행동을 감행하였다.
그런 저항은 내면에 깊이 스며든 도덕적 정의감에서 나온 행동이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저항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힐 때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담대한 저항 행동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가톨릭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즐겨 말하는 격언은 그들의 접근 방식을 잘 요약해준다. 운동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오직 신실하라고 했을 뿐.”11
개인의 양심에 따라 전쟁에 반대하고 기꺼이 감옥 생활을 받아들인 25세의 진 샤프는 그런 생각에 공감했을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20년 뒤에 《비폭력 행동의 정치》라는 책을 발간한 샤프는 그런 생각과 전혀 무관했다. 그 책에서 샤프는 선의만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에 거듭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나중에 발간한 다른 책들에서 이렇게 썼다. “투쟁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리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선의를 보이거나 흔쾌히 죽는다고 해도 당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12
샤프에 따르면, 때로는 비폭력 투쟁이 매우 강력한 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울 때도 있지만 실제로 성공한 횟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원칙적 비폭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투쟁의 목표가 대개 “회심”, 즉 적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샤프는 그러한 양심의 변화가 바람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활동가들이 자신의 적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거나, 증오의 대상인 반대편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사실 샤프는 적의 마음을 돌리는 데 집착하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잔학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당연히 비통해하고 따라서 그들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다시 한번 샤프의 관점은 훨씬 더 현실적이 되었다. 만일 대중의 저항을 통해 독재자를 쫓아낼 수 있다면, 이 비민주적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 상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는 그의 축출이 목적인 사회운동의 주된 관심사일 필요가 없다. 샤프는 민권운동 지도자 제임스 파머James Farmer의 말을 지지하며 인용했다. “우리는 악을 행한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러한 악행을 종식시킬 수는 있다.”14
샤프와 평화주의 단체의 불화는 좋지 못한 결말을 낳았다. 샤프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지루하고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논의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자기만의 방식을 모색하기로 결심했다. 이론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 그는 “비폭력”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전반적으로 피했다. 그 용어의 의미가 너무 모호하고, 수동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나치게 많이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프는 그 단어를 하나의 명사로 사용하지 않고, “비폭력적인 행동”이나 “비폭력적인 투쟁”처럼 형용사로만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칠 변화였음이 밝혀졌다. 샤프의 영향을 받아 전략적 비폭력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최근에 용어 사용에서 훨씬 더 큰 간극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제 비무장 대중운동을 논의할 때 그냥 “시민 저항”이라는 용어를 쓴다. 기존의 평화주의 단체들과의 관계에서 매우 자유롭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진 샤프와 달리 마틴 루터 킹은 초기에 평화주의 전통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킹의 비폭력에 대한 생각—원칙적 비폭력이든 전략적 비폭력이든—은 점진적으로 발전해갔다.
킹 목사가 젊었을 때 권총을 몰래 소지하고 다니기 위해 허가를 받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UCLA 대학의 법학교수 애덤 윈클러Adam Winkler는 2011년 발간한 자신의 책 《총격전Gunfight》에서 1956년 킹의 집이 폭탄 공격을 받은 뒤 그가 앨라배마 주에 권총 소지 허가 신청을 했다고 언급한다. 흑인들에게 그런 허가를 내주기를 꺼려하던 지방 경찰은 그를 “부적격자”로 간주하고 그의 신청을 불허했다. 하지만 결국 킹은 집에 총기를 비치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16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미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NRA)의 일부 회원들이 주장하고 싶어한 것처럼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킹이 총기 규제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킹이 전국 무대에 막 뛰어들고 있었던 1956년에 총기 소지 허가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그가 대중운동의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겪은 변화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17
비록 이러한 변화가 원칙적 비폭력과 독자적 평화주의의 채택을 낳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폭력 운동이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킹의 점진적인 사고의 전환은, 주저하면서도 결국 광범위한 영역에서 적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비무장 직접행동을 수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샤프의 전향이 비폭력에 대한 연구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듯, 다양한 전략적 차원의 비폭력 투쟁에 대한 킹의 발전된 인식은 그 실천 방식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킹의 명성을 세상에 처음으로 널리 알린 운동인 1956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과 마찬가지로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킹은 그 운동을 뒷받침한 전략적 원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1953년 배턴루지Baton Rouge에서 벌어진 비슷한 행동에서 영감을 얻은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1955년 말에 체포되면서 갑자기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킹은 몽고메리에서 상대적으로 신참이었는데도, 동료 목사들과 지역사회 지도자들은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시작될 무렵 운동을 총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몽고메리인권향상협회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의 회장으로 킹을 선출했다. 킹이 선출된 배경에는 그가 몽고메리의 흑인 저명인사들 가운데 특정한 당파에 속해 있지 않은 인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킹은 자신이 회장으로 선출되자 깜짝 놀랐다. 그는 새로운 역할을 맡고 그에 따른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주저했다. 실제로 그는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얼마 안 가 그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았다. “이봐 깜둥이, 똑바로 들어. 우리는 이미 너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어. 1주일도 안 돼 넌 몽고메리에 온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런 협박 전화를 받고 나서 실제로 1956년 1월에 자신의 집이 폭탄 공격을 받자, 그는 또 다른 암살 기도를 막기 위해 무장 경비원들을 배치했다.18
그때까지도 킹은 비폭력 행동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대중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전, 킹은 여러 차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했다. 대학에서 소로의 책을 읽기도 했던 그는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일종의 “대규모의 비협조적 행동”으로 묘사하면서, 자주 “소극적 저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킹은 “비폭력”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간디나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의 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점도 인정했다.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Taylor Branch는 당시에 비무장 직접행동에 대해서 잘 알았던 다른 주의 외부 인사들—화해연대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글렌 스마일리Glenn Smiley 목사와 반전운동가동맹War Resister League의 베이어드 러스틴Bayard Rustin—이 킹을 비롯한 몽고메리의 활동가들을 향해 “재능을 타고났지만 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언급한 내용을 지적한다.19
역사학자 데이비드 개로David Garrow가 전하는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러스틴은 빌 워시Bill Worthy 기자와 함께 킹의 목사관을 방문 중이었는데 워시가 하마터면 권총을 깔고 앉을 뻔했다. 러스틴이 기겁해 “조심해요, 빌. 의자 위에 권총이 있어요” 하고 주의를 주었다. 러스틴과 킹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자기방어를 위해 집에서 무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운동에 악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다. 러스틴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킹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20
오늘날의 NRA 회원들은 외면하고 싶어할지 몰라도, 킹이 총기 소지 금지를 주장하던 러스틴과 스마일리처럼 생각을 바꾸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스마일리는 킹이 몽고메리에 머물렀던 4년 동안 꾸준히 그와 교류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그 수많은 대화를 통해 킹의 정책이 구체화되었다.21
1959년, 간디국가추모기금의 초청을 받은 킹은 사티아그라하의 본질을 배우기 위해 인도 순례를 떠났다. 그는 거기서 큰 감동을 받았다. 결국 그는 샤프가 한때 보좌했던 A. J. 머스티의 완전한 평화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하던 블랙파워 시대에 킹은 집에 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하는 문제와, “조직화된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총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현명한 행동인지”에 대한 문제를 구별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비폭력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갔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 소속 활동가들은 조직의 지도자인 킹이 암살당할까봐 우려해 민권 수호 집회가 열릴 때면 자주 경찰과 연방 당국에 공공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킹은 여행할 때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는 것을 어김없이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언젠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2
1962년 9월 킹이 한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몸무게가 200파운드나 나가는 거구로 미국 나치당원인 로이 제임스Roy James라는 24세의 백인이 갑자기 강단으로 뛰어올라와 킹의 얼굴을 가격했다. 킹은 그날 집회에 모인 많은 청중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저명한 교육자이자 활동가인 셉티마 클라크Septima Clark는 킹이 “갓난아기처럼” 두 손을 떨구고 자신을 때린 사람에게 차분하게 말했다고 그 장면을 전했다. 킹은 또다시 가격을 당해 뒤로 밀려났을 때에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보좌관들이 로이 제임스를 붙잡아 킹에게서 떼어놓자, 킹은 연단 뒤에서 그에게 다가가 그를 고발하지 않을 거라고 강조했다.23
대개 평화주의 신봉자들은 그런 원칙적 비폭력이 한 개인의 도덕적 수준이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비무장 저항을 단순히 전략적으로 사용하는—도덕적 명령으로 인정하지 않고—사람들은 낮은 차원의 비폭력을 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간디는 이런 입장을 주장하면서 전략적인 이유로 폭력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약자의 비폭력”을 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킹도 “진정한 의미의 비폭력은 순간적 필요 때문에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략이 아니라, 그것이 요구하는 순수한 도덕적 의미 때문에 반드시 지키고 살아야 할” 중요한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며 간디의 생각에 동조했다.24
이처럼 전략적 비폭력에 대한 비난이 있긴 하지만,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킹을 개인적 평화주의자의 상징으로 우러를 경우, 우리는 그의 진정한 천재성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샤프와 마찬가지로 킹도 집단적 희생을 통해 견고한 기존 체제에 광범위한 균열을 일으키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마틴 루터 킹은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형태의 전략적 비폭력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입장 변화는 버밍엄과 셀마Selma에서의 역사적 대결을 낳았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킹이 몽고메리에서 정치적 시련을 겪고 몇 년이 지난 뒤의 일로 결코 쉽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성공한 뒤 킹은 몽고메리의 성공 사례를 미국 남부 전역에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는 광범위한 규모의 저항운동과 관련한 이론과 현실에 깊이 천착하는 전략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조직 운동의 전통이 아직 민권운동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57년 초, 킹은 인도에서 여러 해를 보냈고 비무장 저항에 정통한 학생 운동가 제임스 로슨James Lawson을 만났다.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의 설명에 따르면, 킹은 그 젊은 대학원생에게 학업을 중단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킹이 말했다. “남부에서 비폭력을 이해하는 흑인 지도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25
킹은 비폭력 투쟁 전략을 쓰고 싶어했지만, 폭넓은 대중이 참여하는 직접행동 운동을 전개한다는 생각은 킹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견해와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대중행동으로의 전환을 주저하고 있었다.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설된 킹의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목사들의 연합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 조직은 스스로를 “흑인 교회의 정치 부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버라 랜스비Barbara Ransby가 엘라 베이커Ella Baker의 전기에 쓴 것처럼, 보통의 교회 단체들 가운데 민권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할 정도로 대담한 조직은 없었다. “1950년대의 대다수 흑인 목사들은 여전히 보다 안전하고 덜 저항적인 정치적 방법을 선택했다.” 심지어 킹과 그를 매우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주류 미국인들의 관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 한정하고, 좌파 단체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26
SCLC가 초기 몇 년 동안 본격적인 시민 불복종을 전개하기보다는 “말만 번드르르한 연설”에 치중하는 데 실망한 버밍엄의 급진적인 목사 프레드 셔틀스워스Fred Shuttlesworth는 조직이 보다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조직 지도자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7
그다음 민권 행동주의의 중요한 돌파구는 투쟁을 주저하던 SCLC 내의 목사들이 아니라, 1960년에 시작되어 남부 전역을 휩쓴 간이식당 연좌 농성과 그 뒤를 이은 1961년의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남부 버스 자유승객 운동Freedom Ride을 벌인 학생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젊은 활동가들이 킹에게 투쟁에 동참하기를 간청할 때마다, 막 30대 초반에 들어선 고참 목사였던 킹은 이리저리 발뺌하거나 얼버무리는 태도를 보였다. 킹은 학생들에게 마음속으로 그들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당신의 몸은 어디 있죠?”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28
당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를 이끌던 존 루이스John Lewis에 따르면, 킹은 그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장소를 언급하면서 다소 짜증스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골고다의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29
킹이 이끄는 SCLC는 어떤 중요한 전략적 비폭력 캠페인에 참여했는데, 그때 이미 SCLC는 1961년에 시작된 조지아 주 올버니에서의 운동에 휘말려들어간 생태였다. 하지만 SCLC가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은 킹과 랠프 애버내시가 생각지 못하게 갑자기 체포되고 나서였다.30
올버니 저항운동의 실패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남부 버스 자유승객 운동과 학생들의 연좌 농성에서 얻은 통찰과 결합되면서, 앤드루 영의 말을 빌리면, 킹은 비폭력 투쟁의 원칙을 준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하고 계획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할 시점이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31
마침내 킹은 자신의 골고다를 선택했다. 1963년의 버밍엄이었다.
킹과 샤프는 간디에게서 시작해 20세기 후반에 번성하는 비폭력 운동의 계보 형성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크게 기여했다.
비폭력 행동은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샤프는 기원전 494년 로마 평민들이 전개한 비협력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역사적 선례들을 찾아냈다. 또한 샤프에 앞서 같은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도 있었다. 1800년대에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그와 관련한 영향력 있는 저술을 많이 남겼다. 간디가 젊었을 때 편지를 주고받은 톨스토이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32
그러나 이러한 선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후 전략적 비폭력을 현실에 활용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간디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도에서 했던 경험들이었다. 킹과 샤프는 모두 자신들이 간디의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독교 목사인 킹은 간디의 영향력을 종교적 용어로 이렇게 묘사했다. “간디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를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넘어 대규모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사회적 힘으로 끌어올린 역사상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33
샤프는 좀 더 세속적인 언어로 킹과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간디는 항복, 협력, 복종의 거부를 통해 기존의 계층적 위계질서를 바꾸거나 파괴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해서 오랜 세월 동안 중대한 저항 체계를 끊임없이 구축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34
킹과 샤프에게는 간디가 인도에서 이루어낸 성과가 종착점이 아니었다. 간디가 전개했던 운동은 비폭력 투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였다. 간디의 투쟁 사례들은 이제 막 세계정세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그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에 잠재된 엄청난 가능성을 드러내 보였다. 간디 스스로도 때로는 비폭력을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 제목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라고 붙일 정도로 자신이 비폭력의 고유한 법칙과 특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킹은 이런 관점을 유지하면서 간디처럼 새로운 혁신의 경계들을 계속 개척해나가는 길을 걸었다. 반면에 샤프는 비폭력과 관련된 가장 흥미진진한 새로운 요소들을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분류학자의 역할을 맡았다.
샤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그리고 그가 무엇이든 세심하게 분류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주는—성과물 가운데 “198가지 비폭력 행동 방식”이라는 목록이 있다. 《비폭력 행동의 정치》 2권에 자세하게 나오는 이 목록은 실행 가능한 여러 가지 운동 전략을 제시한다. 목록에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접근 방식들이, 즉 철야 기도나 농성, 단식투쟁, 토지 점유, “나체 시위”, 깃발 게양과 상징적인 색깔 표시, 모의 장례식, 해학극 공연과 익살스러운 동작, 정교한 관료주의의 비효율성 이용, 시민 불복종, 그리고 그외의 수많은 특이한 형태의 파업과 불매운동이 망라되어 있다.
샤프는 2003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당시에 유명세를 올리던 그 목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1960년경에 여러 형태의 저항 사례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비폭력 행동에 18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전에는 최대 12가지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노르웨이에 있을 때 65가지로 늘어난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을 가나의 아크라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발표했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완전히 이 목록에 매료되었죠.35
《비폭력 행동의 정치》가 발간되었을 때, 샤프가 생각한 비폭력 행동 방식은 198가지로 늘어났다.
샤프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든 모두 때때로 그 목록을 오해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샤프가 그 목록에 있는 비폭력 전술들을 어느 정도 새로 고안해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방식들을 기록했을 뿐이다. 샤프는 기록보관소를 전전하며 수많은 사례들에 파묻혀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는 거의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유형을 구분해 쓰는 방식을 좋아했다. 샤프가 작성한 비폭력 행동 방식 목록에는 아주 큰 강점이 있었다. 반체제 인사들은 이 목록을 이용해서 창조적인 투쟁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이전에 시도했던 접근 방식을 더는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샤프는 그 198가지 방식을 재래식 군대의 무기고에 있는 다양한 무기들에 비유했다. 그 무기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유효 사거리와 효과를 가지고 있고, 특정한 조건에서 쓰인다. 그것들은 따로 쓰일 수도 있고, 함께 쓰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무기들을 얼마나 현명하게 고르느냐가 전투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비폭력 전술에 대한 무관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당시에 샤프의 확장성 있는 비폭력 행동 방식 목록은 행동의 실천과 앞으로의 연구 측면 모두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암시했다. 이것은 그의 원대한 프로젝트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역사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샤프는 비폭력 방식의 전개 사례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발견해냈다. 그는 대부분의 사례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국적과 시대의 활동가들이 이미 있는 투쟁 방식을 다시 고안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비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핵심 원리들을 보여줄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폭력 행동은 전술 자체의 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그는 썼다. 과거에 비폭력 전술을 시도한 운동들의 경우, 대개는 무계획적으로—“일부는 즉흥적으로, 일부는 직관적으로, 또 일부는 이미 알려진 사례를 모호하게 흉내 내는 형태로”—이루어지곤 했다.36
시민 저항에 관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질 경우 그것은 얼마나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샤프는 비무장 대중행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저항운동이 어떻게 촉발되고 그 힘이 어떻게 추동되는지—에 대한 완벽한 탐구가 현실 세계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샤프는 그 연구를 자신의 천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비폭력 투쟁의 본질과 능력, 요건을 매우 세심하게 검토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37
샤프는 적절한 이해와 엄밀한 계획을 수반한 비폭력 저항이 당대의 시대정신의 결과로 생겨나곤 하는 중대한 대변동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운동에서든 활동가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치·경제적 요인들이 많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상적인 환경이 마련될 때까지 잠자코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신중한 준비와 전술적 담대함의 조합이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통념을 뒤집기도 한다. “어떤 비폭력 투쟁은 상당한 악조건에서도 성공했다. 투쟁 집단이 그런 환경 아래서 행동하는 방법과 관련해 그들만의 강점과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특정한 조건들을 극복해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38
샤프는 이런 생각을 추구하면서 다소 외로운 길을 가야 했다. 전통적인 평화 단체들과 결별한 그는 학문 연구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하지만 샤프는 교수에 어울리는 유형이 아니었다. 때로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동료 학자들의 논문 평가 과정에 그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상이 학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1970년대가 아닌 오늘날에 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면, 의기투합하는 학자 집단을 훨씬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필이 새로운 연구 분야를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교수이자 비폭력 운동 분야의 전문가인 스티븐 준스Stephen Zunes에 따르면, 샤프 이전에는 비폭력 운동에 대한 강의가 대부분 종교학이나 윤리학 과목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사회학에서도 그 분야에 관한 연구가 서서히 무르익기 시작했다. 오늘날 비폭력 투쟁과 시민 저항에 대한 연구는 정치학과 전략학의 수준 높은 하위 연구 분야로, 과거에는 “평화 연구” 교육과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학자들을 사로잡는다.39
연구 진행 과정이 너무 느려서 샤프의 교수 경력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가 학계 외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은 그에게 약간의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샤프의 이론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널리 응용되었다. 시민 저항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영감을 받은—그리고 세르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란드, 짐바브웨 같은 곳에서 비폭력 투쟁 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했던—투쟁 지도자들은 과거의 대중 동원에서 얻은 교훈들을 바탕 삼아 새로운 조직 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활동가들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선배들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2011년 BBC와 인터뷰한 이집트인 시위대가 문헌 출처가 표기되지 않은 샤프의 198가지 행동 방식이 담긴 인쇄물을 손에 쥐고 있었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샤프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마침내 샤프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40
베이브 루스가 타석에서 홈런을 날릴 방향을 야구방망이로 가리키며 예고했듯, 샤프는 1973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 걸작 《비폭력 행동의 정치》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대담한 예측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이런 형태의 투쟁의 과거사와 그 투쟁에서 사용된 비폭력 무기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무기고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대체 가능한 비폭력 행동 방안들의 새로운 발전 단계”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피력했다.41
그리고 마침내 그의 바람은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1963년 버밍엄 현장에서 킹을 비롯한 여러 민권 운동가들은 샤프가 이론화한 그런 형태의 운동을 실행에 옮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 그 현장을 고찰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버밍엄의 활동가들이 매우 위험한 대결을 감행했을 때 그들이 사실상 그것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간과하기 쉽다. SCLC는 무척 신중하게 프로젝트 C를 계획하고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 앞에 수많은 거대한 불확실성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42
버밍엄 운동이 성공을 거둔 이후 수십 년 동안 일부 저술가들은 그곳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1964년 3월 <제트Jet> 지가 젊은 SCLC 사무총장 와이어트 워커를 “마틴 루터 킹의 배후 인물”이라고 극찬하는 인물소개 기사를 게재할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기사에서 워커는 “세련된 옷차림에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키 크고 잘생긴 영화배우 같은 모습에 (…) 부드럽고 확신에 찬 경이로운 수완가”로 묘사되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워커의 버밍엄 계획은 빈틈없이 완벽했기 때문에 작전이 개시됐을 때 킹은 “워커가 이미 뇌관에 연결해놓은 버튼을 정확하게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43
보다 최근에는 또 다른 형태의 결정론이 은근슬쩍 스며든 버밍엄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런 유의 이야기에 따르면, SCLC가 버밍엄을 선택한 것은 성질이 급한 경찰청장 불 코너가 시위대에 폭력으로 맞설 것이 틀림없고 언론이 그를 완벽한 악당으로 만들 것이라고 간파한 시위 지도부가 그와 충돌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몇몇 중요한 복합적 특성들을 놓치고 있다. SCLC가 실제로 버밍엄의 시 공무원들과 한판 대결을 벌이려고 계획한 것은 맞지만, 시위 지도부가 단순히 불 코너, 다시 말해 한 개인의 기질에 근거해 시위 장소를 선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SCLC는 셔틀스워스와 그의 앨라배마기독교인권운동Alabama Christian Movement for Human Rights의 주도하에 세심하게 시위를 준비한 지역 활동가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킹과 그의 참모들이 도체스터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프로젝트 C를 실행에 옮길 즈음이면 불 코너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긴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오랫동안 버밍엄 경찰청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코너는 곧 교체될 예정이었다. 그는 시장 선거에서 중도 성향의 온건한 앨버트 부트웰Albert Boutwell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SCLC는 선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위 계획을 두 번이나 미루었다. 버밍엄의 흑인 지역사회는 코너가 낙선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민권운동가들은 더 광범위한 지역사회의 소망을 공유했다. 킹은 버밍엄 시 교도소에서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우리도 역시 선거에서 패배한 코너 씨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썼다. “그래서 우리는 곤경에 처한 이 지역사회를 돕기 위해 거듭 시위 계획을 연기했던 것입니다.”44
시위를 지연한 것이 단지 그 지역 주민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랠프 애버내시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철저하게 조심했던 것은 단순히 버밍엄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활동가들은 다가올 시위에서 “불 코너가 이끄는 지방정부보다 앨버트 부트웰이 이끄는 지방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찰청장이 부임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트웰은 버밍엄 시장 선거에서 코너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코너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소송을 제기해 재판정에서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는 경찰력을 일상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45
시위 전략과 준비가 버밍엄의 성공에 중요했던 것은 틀림없다. 프로젝트 C는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혼란과 비폭력 투쟁의 단계적 확대 방향을 설계했다. 그러나 그 방침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인내와 창조성이 필요했다. 사회학자 앨던 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SCLC의 전략가들은 버밍엄 시위를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즉 처음에는 느리고 절제된 형태로 시작해서, 위기 국면에 도달할 때까지 차근차근 몸집을 키워나가면 상대편은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시위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지도부는 시위가 도중에 멈추는 일이 없도록 애썼다. 시위 동력이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긴장을 유지하게 만드는 영리하고 끈질기고 교묘한 책략은 성공한 봉기가 “즉흥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요소였다.46
실제로 아무리 계획을 철저히 검토했다 해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일단 시위가 벌어지면, 지도부는 그들의 계획에 따라 펼쳐지는 연출과 관련해 많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따지고 보면 프로젝트 C는 결코 사회과학 공식이 아니었다”고 킹의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는 썼다. “그것은 냉정한 승부였다.”47
1963년 4월 3일에 버밍엄 시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상황이 처음에 바랐던 것만큼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시위가 시작되자 지역 활동가들은 시내 중심가 상점들에 대한 경제적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버밍엄의 지명도가 높은 흑인 교회들은 대중 집회를 밤에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이식당 연좌 농성과 행진이 날마다 벌어지면서 소수의 시위대가 체포되었다. 시위 초기에는 거의 매일 10~20여 명이 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들은 킹을 비롯한 집행부가 꿈꿨던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사실 SCLC는 감옥에 갈 자원자를 모집하면서 지원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을 요구했고, 결국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봉기 몇 달 전, 버밍엄에 도착한 조직원들은 지역의 흑인 목사들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단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버밍엄 흑인 중산층의 저항도 생각보다 컸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킹이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유명인”이라며 과소평가했다. 게다가 몇 차례에 걸쳐 시위 개시를 연기하면서 늘어난 비용도 문제였다. 시위 지도부는 시장 선거가 끝날 때를 기다리느라, 인종차별주의자 상인들이 많은 수익을 올리는 부활절 쇼핑 기간 동안 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귀중한 몇 주를 날려버린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48
몇 주에 걸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 후 버밍엄 시위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최고 지도부의 빈틈없는 행동과 지역 활동가들의 커다란 용기 덕분이었다.
먼저 SCLC는 지역 기업가 A. G. 개스턴Gaston과 버밍엄 침례교목사협의회 의장 J. L. 웨어Ware 목사처럼 시위 참여를 주저하던 지역사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분열된 버밍엄 흑인 지역사회의 기반을 회복시키려 고군분투했다. 이런 노력이 버밍엄의 흑인 주간지 <더 월드The World>의 지속적인 공격을 막아주지는 못했지만—4월 10일 <더 월드>는 4월 3일에 시작된 그 공세적인 시위를 “파괴적이고 무가치하다”고 단언했다—웨어 같은 인사들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저녁 대중 집회 참가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49
감옥에 갈 자원자 모집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가운데, 킹은 자신이 4월 12일 성금요일에 감옥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가두시위를 이끌다 체포된다는 것은 불과 이틀 전에 법원에서 내린 명령의 위반을 의미했다. SCLC의 지도부 가운데 다수가 이번 시위가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이미 수감된 수십 명의 시위자들의 보석금과 변호사 비용을 댈 자금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존경받는 목사인 킹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일부 참모들은 체포되겠다는 그의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SCLC 의장이 장기간 투옥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북부로 가서 자금을 모금해 점점 기세를 잃고 있는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킹은 신중히 검토한 끝에 “내가 갈 길은 명백합니다. 난 가두시위에 나설 겁니다”50라고 말했다.
킹은 자신이 개인적 희생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버밍엄에서의 조직 운동이 점점 극적으로 확대되는 느낌을 분명하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킹 목사가 체포되는 사진이 국제적으로 널리 퍼지자 케네디 행정부는 즉각 이 사건에 개입했다. 버밍엄 시 당국은 킹을 체포한 뒤 그를 독방에 수감하고 그가 외부와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저명한 한 흑인 시민이 미국의 딥사우스 지역Deep South●에 있는 감옥 안에서 “실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와 그의 형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막기 위해, 그들이 관심을 갖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코레타 스콧 킹Coretta Scott King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 마틴이 안전하다는 것을 FBI에서 확인했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와이어트 워커는 이러한 전화 통화가 언론을 통해 버밍엄 시위 소식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도록 확실하게 작업을 했다.
• 미국 최남부 지역인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5개 주를 가리킨다.
킹의 체포가 일시적으로 시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는 했지만, 프로젝트 C의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세 번째 중대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것은 “소년십자군Children’s Crusade”이라고 알려진 고등학생들의 시위대 합류 결정과 맞물려 일어났다. 초기에 제임스 베벨은 시위에 적극 참여할 10대 청소년 수십 명을 모집했다. 하지만 나이 든 지도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민권 투쟁의 선두에 세우기에는 학생 시위대가 너무 어리다는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청소년들의 열정과 시위의 여세를 몰아붙여야 할 필요성이 그러한 우려를 이겼다.
훗날 킹은 “우리는 청년들에게 자유와 정의 문제에서 그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한 참된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 깨달았다”고 썼다. 시위에 돌입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 시위 지도부는 모든 민중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했고, 학생들은 그 결정에 열렬히 호응했다. 5월 2일, 소년십자군이 시위에 참여한 첫날, 청소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버밍엄 거리로 물밀듯이 쏟아져나왔다. 프로젝트 C는 이제 더 이상 감옥에 갈 것을 감수하는 수십 명의 활동가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단 하루 만에 500명이 넘는 사람이 경찰에 체포되었다.51
시위대를 수감할 버밍엄 시 교도소의 공간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불 코너는 더욱 공격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시위 양상을 결정적으로 바꾼 최후의 중대한 국면을 낳았다. 경찰이 무자비하게 행사한 폭력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코너는 “흑인 말썽꾼”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자신을 앨라배마의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만들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앨라배마 주에서 자신의 지지층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고, 아마 그의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