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대식
카이스트(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뇌과학연구소에서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MIT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이후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미국 미네소타 대학 조교수, 보스턴 대학 부교수로 근무했다. 주로 뇌과학과 뇌공학, 사회 뇌과학, 인공지능 등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김대식의 빅퀘스천』, 『내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등이 있다.
지은이 다니엘 바이스(Daniel Weihs)
이스라엘 테크니온 대학(Technion 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항공우주공학대학 학장, 대학원장, 니만 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뒤, 현재 자율 시스템 및 로봇 연구 프로그램을 맡아 이끌고 있다. 이스라엘 우주연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스라엘 우주항공국 운영위원을 맡아왔으며, 최근에는 이스라엘 과학기술부 수석 과학관으로 위촉되었다. 또한 이스라엘 에일라트 소재 대학 연합 해양과학연구소 소장, 테우자-페어차일드 벤처캐피털 이사, 글로벌 피터 드러커 포럼 자문위원 등을 맡아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2015년에는 이스라엘 국방부에서 주관하는 창조적 사고상을, 2016년에는 국제생체공학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박영록
대학과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기획, 편집, 번역 등 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100억 명, 어느 날』, 『역사는 현재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나는 줄리언 어산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등이 있다.
창조력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가
창조력은 ‘생존’이다
2015년 서울에서 열린 콘퍼런스 ‘KOC 2015, 창조적 소수자 퍼스트 무버’에 초청되어 강연한 적이 있다. 당시 콘퍼런스에는 김대식 교수도 함께했는데, 사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그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만난 적이 있다.
첫 만남이 이뤄졌던 2013년, 김 교수는 내가 소속된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과대학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는 테크니온 공대 특유의 창업 지원 환경을 궁금해했고, 이와 관련해 내 연구실에서 우리가 벌인 토론 내용을 정리해 한국의 한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다.(‘이스라엘 특유의 군대 경험이 창업 밑거름’, <중앙SUNDAY>, 2013. 06. 09) 토론의 주제는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이스라엘이 어떻게 전 세계적인 스타트업 국가가 되었으며, 이들의 창조력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가’였다.
토론에서는 테크니온 공대의 교육 환경도 다뤄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독일계 유대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테크니온은 이스라엘이 단시간에 ‘창업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창업을 돕는 ‘T3 기술이전센터’ 등 다양한 지원 환경을 갖춘 덕에 졸업생 중 60퍼센트 이상이 스타트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이스라엘 100대 기업의 CEO 대부분이 테크니온 출신이다.
내가 서울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초청된 것은 2013년 김대식 교수와 벌인 토론을 담아낸 기사 덕분이었다. 당시 강연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전하려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창조력의 핵심은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연을 마친 뒤 출판사로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어떻게 창조력을 키우는지, 창조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혁신을 이끌어내는지’에 관해 김대식 교수와 대담을 진행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은 나와 김대식 교수가 창조력을 주제로 수차례 진행한 토론을 모은 대담집이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창업 분야의 벤치마킹 모델로 삼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토론을 통해 이 시점에 필요한 ‘진짜’ 창조력의 개념을 정의했다. 더불어 창조력이 훈련되고 혁신이 이뤄지는 방식을 포함한 ‘창조력의 비밀’들을 다양한 지적 영역에서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최근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 바로 창조력이 이 시점에 더욱 절실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떤 창조력이 필요할까? 미래의 창조력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낙관적이면서 동시에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어떤 면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처한 지정학적 특징은 창조력이란 주제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먼저 이스라엘이 가진 창조력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 역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유대교는 3,000년 전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민족국가였는데, 이후 열 지파가 포함된 이스라엘 왕국과 나머지 두 지파가 포함된 유다 왕국(여기서 유대인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으로 갈라진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하는데, 이때 열 지파는 이 지역에서 쫓겨났고,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던 유다 왕국도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두 지파 역시 쫓겨나고 만다. 그로부터 수백 년 뒤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와 사는 것을 허용한다. 다시 몇백 년이 흐른 뒤 로마 제국이 유대국을 통치하게 되고, 그 시기에 예수가 탄생한다.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 땅의 이름을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필리시테인(또는 블레셋)’에서 따온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또다시 유대인들을 쫓아낸다. 그로부터 2,00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이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건국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 아랍 국가들은 유대인 국가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후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건국 당시 이스라엘은 10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인구로 1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지닌 주변 국가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 같은 힘과 인구 규모 면의 심각한 불균형을 극복하고 살아남으려면 자력으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스라엘이 가진 창조력의 배경에서 ‘생존’의 역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거듭하고 창조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원도 없는 자그마한 나라가 비교적 우위를 쟁취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창조력 덕분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창조력을 바탕으로 우선 국방을 튼튼히 다졌고, 그와 관련된 기술의 발전을 통해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인들은 물이 귀한 건조한 기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물을 절약할 수 있는 점적농법(點滴農法)을 발전시켰다. 또한 기후에 맞는 새로운 식품과 종자식물을 개발하고, 매년 여러 차례 수확하는 방식을 실행했다. 공학 분야에서는 군사적 정보 수집 활동(커뮤니케이션 분야)과 관련해 통신 관련 기술을 다수 발명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정보통신 산업은 폐쇄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국가적인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회사가 90여 개에 이른다. 이는 미국 외 국가 중에선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창조력에 기반을 둔 이스라엘의 이런 성취는 유대인 고유의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모든 이슈에 대해 토론과 논쟁을 벌이고, 논리적으로 입증된 권위만 받아들이며, 삶이 제기하는 숱한 질문들을 이해시켜줄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심지어 군대에서조차)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종종 사회가 혼란스러울 정도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 독자들이 이스라엘의 창조적 활동 경험을 습득하고, 나아가 각자 소속된 사회에서 혁신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김대식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두 나라 사이의 창업 문화와 창조력의 역사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지정학적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을 서로 배우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창조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한국 독자들에게,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니엘 바이스
차례
프롤로그 창조력은 ‘생존’이다
0장 생존을 위한 몇 가지 질문
제4차 산업혁명의 경고
인류와 일자리의 미래
1장 잃어버린 창조력의 고리를 찾아서
한 인간이 창조적 성장을 이루려면
창조력을 자극하는 환경과 경험
창조적 성과로 이어지는 질문의 힘
창조적 인간은 무엇을 가졌는가
2장 창조력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사소한 불만이 혁신을 만든다
인생의 골든 링크, 불완전을 인정할 것
서로 다른 영역의 접점을 확보하라
건설적인 불만족이 필요하다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구체적 지침
3장 창조력을 가로막는 적들
무엇이 창조력을 키우는가
조직의 창조력이 유지되려면
창조력을 보호하기 위한 구체적 장치
작은 원형 테이블에 숨겨진 힘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
4장 질문이 사라진 사회
각기 다른 견해를 펼치는 이스라엘 아이들
아이가 왜냐고 묻자 세상이 멈춰 섰다
창조력을 키우는 교육 vs. 창조력을 가로막는 교육
창조력은 시험에 의해 창출되지 않는다
‘사일로’를 없애려면
5장 실패와 회복탄력성
첫 번째 실패와 세 번의 기회
누구나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는 실패한다
회복탄력성과 창조력의 비밀
문제를 푸는 사람, 문제를 구성하는 사람
6장 혁신으로 나아가는 길
누구나 아는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
어떤 미래를 창조할 것인가
7장 인류, 창조적 모험을 권장하다
우연성과 필요성의 동거
창조력, 동맥경화증에 걸리다
경쟁력을 갖추려면
충격이 필요한 사회
8장 창조력의 지정학적인 미래
압박감과 성공의 상관관계
창조성과 ‘시간’의 딜레마
화성 여행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의 생존법
에필로그 우리에게 남은 과제들
미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앞으로 몇십 년 안에 기존 인류의 50퍼센트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고 한다. 사라질 것이라 추정되는 직업 중 다수가 고소득 지식 노동자들이 속한 직종이다.
혹자는 기술 발달로 인해 먹고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자괴감이나 무력감 등 ‘심리적 쇼크’다. 즉 육체적 생존이 아닌 정신적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중동의 몇몇 부유국은 풍부한 자원으로 국민 대부분이 국가로부터 기본 소득을 보장받고 있고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지만, 젊은 세대 중 상당수가 스스로 공부하거나 경제 활동을 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회를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에게 닥칠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며, 인공지능 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과거의 창조력이 생산성의 관점에서 부각되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창조력은 단순한 생산성을 뛰어넘은 무형의 가치, 분야와 분야를 잇는 연계성과 혁신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결과를 도출해내기보다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김대식 교수님과 창조력을 주제로 대담을 진행하게 되어 기쁩니다. 인류를 구원할 미래 전략으로서의 창조력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창조력이란 개념은 미래에도 여전히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닐까요? 또 하나, 창조력이라는 개념이 미래에 더 큰 역할을 하게 될까요? 혹은 지금보다 축소된 역할을 할까요?
다니엘 바이스(이하 바이스) 창조력이란 개념이 미래에 바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군요. 제 답은 향후 5~10년 사이에는 그 개념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쪽입니다. 앞으로 대부분의 활동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로봇 등에 의해 자동화될 테니까요.
김대식 맞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있을 테죠. 이것이 제가 교수님과 논의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정말 큰 변화가 있을 거고, 우리는 각자 이 변화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바이스 몇몇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35년에 이르면 현존하는 직업 중 50퍼센트 이상에서 더 이상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사라지게 될 50퍼센트의 직업 종사자들이 과연 지금보다 창조적인 유형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우선 창조력이란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죠. 한 예로 지금까지는 어떤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인간의 창조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빅데이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죠. 즉, 인간의 사고와 분석이 필요했던 작업들을 기계가 대신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될 겁니다. 기계적이거나 자동화된 방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부터 바뀌어야겠죠. 그런데 여러 문제 중 하나는 창조력을 증진할 만한 교사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미래 세대를 어떻게 훈련하고, 새로운 시대의 창조적 인류로 교육할 것이냐가 중요한 숙제입니다.
또 한 가지, 일자리의 위기 앞에서 과연 인간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짚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인간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말합니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훈련이 필요할 겁니다. 컴퓨터나 자동화 시스템이 지닌 뛰어난 기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또 하나는 설득과 동참의 문제입니다.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공업지대로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옮긴이)로 대변되는 굴뚝 산업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제까지 그들은 틈새시장을 찾아내면서 생명력을 유지해왔죠. 하지만 이제는 어떤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결국 회사는 문을 닫을 거고 일자리는 사라질 겁니다. 이미 그런 경고가 나오고 있지만 일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죠. 하지만 결국 새로운 일을 해야 할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문제예요. 전통적인 산업에서 변화를 꾀하고, 창조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김대식 지금 우리 대화의 배경에는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industry 4.0)이 있습니다. 약 250년 전 영국 맨체스터에서 첫 번째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산업혁명 당시 도입된 기계가 인간과 동물의 근력을 필요로 하던 육체노동을 대신했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던 인간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됐죠. 그 결과 현재 OECD 국가 노동 인구 중에서 60~80퍼센트는 육체노동이 아닌 지식노동과 서비스 산업에 종사합니다. 그런 변화는 좋은 측면도 있었습니다. 늘어난 시간 중에서 상당 부분을 자신과 사회 교육에 쓸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자동화, 인공지능,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빅데이터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옮긴이), 딥러닝(Deep leaning, 머신러닝의 한 분야로 컴퓨터가 여러 데이터를 이용해 사람처럼 스스로 학습하게 하는 기술-옮긴이) 등의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시장은 다시 심각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미래학자인 토머스 프레이와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앞으로 20년 내에 OECD 국가의 일자리 중 47퍼센트가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죠. 사라지는 직업 중 다수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직업으로 불리는 고소득 직종, 즉 금융 전문가와 변호사, 회계사, 심지어 과학자와 엔지니어 등이 있습니다. 기존 지식노동자들의 활동이 기계에 의해 더 빠르고 저렴하게 수행될 것이란 예측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그 예측에 충격을 받고 있죠.
바이스 그러나 기계가 수행하는 일은 인간의 지적 활동과 비교하면, 보다 획일적으로 수행되겠죠.
김대식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들이 생깁니다. 첫째, 약 50퍼센트의 인류가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둘째, 실업률이 50퍼센트인 상황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요? 과거 잘나가던 바이마르 공화국(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혁명을 통해 1919년에 탄생한 독일 공화국으로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붕괴되었다. 1920년대 후반 미국발 경제공황 여파로 실업자 급증 등 경제 위기를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옮긴이)도 실업률이 20퍼센트에 이르자 큰 혼란에 빠졌었죠. 지금 예측되는 일자리 쇼크를 그와 같은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로 바라봐야 할까요? 우리는 기술 발전이 초래할 실업 문제에 대해 걱정스러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젊은 세대의 취업률은 현저히 낮아지고 있지요.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과 정부 차원의 실업자 지원책 등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일자리를 잃은 데서 생기는 무력감 같은 ‘심리적인 쇼크’와 관련된 것일 수 있어요. 인간은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면, 당연히 자존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무력감은 사회에 해로운 작용을 할 거고요.
바이스 맞습니다. 그 해결책 중의 하나는 새로운 종류의 활동 영역에 투입하는 거겠죠. 사람들은 기존 산업군과는 다른 분야에서 주체적인 참여자로서 자존감을 세우는 법을 찾게 될 거예요.
다시 이번 대화의 주제인 인류를 구원할 미래 전략으로서의 창조력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산 분야에 종사할 수 있는 인원이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것이란 사실입니다.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소수에 속하려면 그만큼의 창조력이 있어야겠죠. 미래에는 창조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생존이란 경제적 의미에서의 고용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아이들이 미래 일자리에 적합한 창조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아이들의 창조력을 북돋아 미래형 인재로 키울 것인지가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죠.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관점을 대폭 수정해야 합니다.
김대식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대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사람들 대부분이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생성되는 직업보다 소멸하는 직업이 더 많을 것이라는 예측에 동의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제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웃어넘깁니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현재 직업의 47퍼센트가 사라질지 모르지만, 더 많은 직업이 새로 생길 거라는 겁니다. 과거 제1차 산업혁명 때는 기존 80~90퍼센트의 직업이 사라졌지만, 더 많은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긴 했죠. 해피엔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피엔딩이 앞으로도 가능할까요?
바이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의견이라는 점에서 별로 놀랍지 않은데요. 그들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사람들이니까요.
김대식 그렇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소수의 직업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낙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이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 역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약 100년 전에 그는 이동용 마차를 끄는 말들의 굽을 갈아 끼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직업을 잃어야 했죠. 그가 찾은 비슷한 일은 용접이었을 테죠. 그런데 다시 기계가 일을 대체하면서 육체노동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새로운 일자리를 준비해야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최근 영국 경제는 타타 철강(Tata Steel) 처리 문제로 골치가 아픕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산 저가 철강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경영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졌죠. 결국 타타 철강 이사회는 영국에서의 모든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노동계에서는 대량 실업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타타 철강에서 일하던 광부 1만 5,000명을 비롯해 약 4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으로 예상되거든요. 이는 철강 산업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마을의 경제와 일자리 등 전체와 연결된 문제입니다.
한 마을 주변에 대규모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이 있다고 해보죠. 어느 날 이 공장이 완전 자동화되면서 기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면, 결국 그 마을은 황폐해지겠죠. 그렇기에 하나의 산업이 무너지고 대량 실업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 마을 경제는 회복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규모 실업 사태에 자주 쓰였던 대책은 강력하고 거대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또 지금 세대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고요.
김대식 이 문제와 관련해 저는 실리콘밸리의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지 보라고 얘기해줍니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육체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노동이다. 그런데 기계가 일을 대신하면서 육체노동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 그 뒤 인류 대부분이 지식노동에 종사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지식노동의 상당 부분 역시 기계가 수행하는 상황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물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겠지만, 난 그 수많은 사람이 새로운 일자리로 이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죠.
인류의 일자리 역사를 보면 농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이 공장으로, 또 사무실로 이동해왔습니다. 이제 곧 사무실을 떠나게 될 수백만 명의 사람이 이동할 새로운 일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런 일자리가 생긴다 해도 이를 차지하는 건 우수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겠죠. 미래의 시장이 큰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다 포용하지는 못할 겁니다. 인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인구의 5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의 생계(기본 소득)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이게 경제적으로 가능할까요?
바이스 가능할 수도 있겠죠. 제 분석은 이렇습니다. 300년 전엔 인구의 6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식량을 생산했습니다. 농업 인구가 생산한 식량 중 50퍼센트는 자신들이 먹고, 나머지 50퍼센트는 저장해놓았죠. 요즘 대부분 나라의 전체 인구 중 농부의 비율은 5퍼센트 정도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건 이 농업 인구가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머지 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농업 분야에서 자동화가 이뤄지고 생산성과 일의 효율이 높아지면서, 과거 인류의 60퍼센트가 이루어냈던 성과를 5퍼센트 안팎의 인구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낙관론을 펴는 한 이유입니다.
김대식 그런 경제적 계산법이 낙관론의 한 근거가 될 수 있겠네요. 그러나 기본적인 생계 지원이 있다 해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쇼크, 즉 낮아질 자존감과 무력감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죠. 몇 년 전에 과학 관련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카타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카타르는 부유한 나라죠. 카타르 수도 도하에 머무는 며칠 동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카타르의 주요 일자리는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평범한 일자리는 동유럽인의 몫이었죠. 허드렛일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하고 있었고요. 그 상황을 지켜보자니 ‘카타르 국민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지?’ 하는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카타르 국민들은 기본 소득을 보장받고 있어서 일자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 역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교육을 받으려는 동기가 생길 리 없고요. 이른바 풍요로운 ‘잉여 세대’인 셈인데, 그들이 어떤 미래를 맞게 될지 궁금하더군요.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겠죠. 인공지능 사회에서 가능한 시나리오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도 굶지 않지만 5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스스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거고, 일하지 않아서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미래)을 위한 교육(훈련)을 받지 않는 거죠. 이런 상황은 곧 사회의 불안 요소가 되겠죠.
마르크스나 케인스는 인류가 기본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발전된 체제를 갖게 되면, 노동의 부담에서 해방되어 자기계발과 여행, 예술 등에 시간을 쏟게 될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꿈입니다. 또한 그런 체제를 이룬다 해도, 그 사회가 인류에게 바람직할지 의문이 듭니다.
바이스 그렇습니다. ‘쓸모’의 문제가 생기겠죠. 일자리를 갖고 살아가는, 쓸모가 있는 타인들을 보면서 자존감이 떨어질 테니까요. 사실 일자리의 암울한 미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일에서 물러나는 나이, 즉 정년이 빨라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이스라엘에서는 퇴직 연령을 기존 65세에서 67세로 조정했습니다. 이제는 퇴직 연령을 70세까지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요.
김대식 저는 제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하고 싶습니다.
바이스 제가 하려던 얘기가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시장의 한편에서는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역할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자리를 더 젊은 세대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논리가 숨어 있죠. 물론 그게 합리적일 수 있어요. 일자리는 한정적이니 나이 든 사람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만큼 젊은 세대의 일자리가 줄어들 테니까요. 결국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어떻게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겠죠.
제가 속한 연구소에서는 은퇴한 엔지니어들이 자원봉사를 할 만한 일이 없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금을 통해 기본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럼에도 일을 하고 싶어 하더군요. 연구소에서 한 은퇴자에게 당신은 연금을 받고 있어서 채용할 수 없다고 통보한 적이 있었죠. 그랬더니 그는 “차라리 연금을 포기하더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생산적인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김대식 호모 사피엔스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계를 떠나서 생산적인 일을 계속하기를 원하니까요. 이는 경제적 논리에 앞서는 본성과 자존감의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교육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 흥미를 갖도록 이끌어내는 게 중요해질 겁니다. 세계가 변화하는 방식에 따라 아이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고 흥미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새로운 것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