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민
1987년생. 초등학생 때 축구를 시작해서 부산 개성고등학교(현 부산아이파크 U-18)를 거쳐 싱가포르 S리 그의 코리안 슈퍼레즈에서 선수생활을 마쳤다. 육군 논산 훈련소에서 유로2008을 보고 스페인 축구에 매료된 그는 스페인으로 혈혈단신 축구지도자 유학을 떠난다. 현지에서 성실한 노력끝에 UEFA B 라이선스를 획득하고, 한국인 최초로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축구협회의 축구지도자가 되어 스페인의 어린선수들을 가르쳤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FC바르셀로나의 요청으로 한국 축구 학교 총괄 지도를 담당했으며, 현재는 서울이랜드FC U-12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EFA B 라이선스 보유
AFC B 라이선스 보유
2013~2014 스페인 UE코르네야 후베닐D팀(U-16) 코치
2014~2015 FC바르셀로나 한국 축구 학교 총괄 지도자
2015 솔뫼 스포츠 교육운영팀장
「축구 감독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자 「김태륭의 풋볼레시피」 고정 패널
2015~ 서울이랜드FC U-12팀 감독
열정은 성공의 열쇠이고
성공의 완성은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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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버핏
이 책을 마무리할 무렵, KBS에서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부상, 진학 실패, 가정형편, 팀 해체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축구선수라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에게 재도약할 기회를 주는TV 프로그램이다. 첫 방송을 보고 나서야 이 책으로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할지 머리말에 정리할 수 있었다.
「청춘FC 헝그리 일레븐」 공개 테스트에 신청한 2,311명의 참가자처럼 나 또한 축구선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지금은 다른 꿈을 좇으며 달려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볼 때, 이 책은 성공한 사람의 비결이 담긴 자기계발서와는 거리가 멀다.
10년이 넘도록 축구 하나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축구선수라는 직업을 얻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수많은 젊은이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또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탓에 어떠한 도전도 하지 못하고 청춘을 허비한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회의와 강연 등 크고 작은 모임에 참가하면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듣게 된 것은, 비단 전 축구선수 출신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 또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기보다는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경향이 짙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청춘이라는 한 단락을 지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 앞 관람석에 앉아 배우들을 향해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자신의 연기를 남들에게 선보이며 평가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가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가를 받기 위해 ‘무대 위에 올라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청춘이다.
도전하지 않는 젊은이는 청춘이라는 우산을 손에 쥐고 있지만, 펼치지 않은 채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낙비를 멍하니 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실패투성이 청년의 스페인 축구 체험기가 선진 유소년 축구에 관한 지식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손에 쥔 우산을 펼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용기를 준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조세민
이용수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은 저변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유소년 축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유소년 축구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의 축구 강국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왔고 눈부신 성과도 내고 있다.
유소년 축구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도자가 어린 선수의 축구에 대한 흥미를 계속 유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축구 저변 확대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축구선수 대부분은 학교 축구팀을 통해 육성이 되었는데, 최근에 축구 클럽팀이 많이 생겨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즐기는 축구보다 학교 축구 중심의 성적에 목매는 악습이 남아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순수하게 축구를 즐기는 문화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는 어린이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하고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수동적인 선수를 양산한다. 국가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이 아쉬운 점으로 꼽은 것도 한국 선수들은 자기 생각을 감독에게 표현할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학교 축구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포기하고 축구에만 모든 것을 쏟는 문화를 키워왔다. 그러다 보니 직업선수가 되지 못했을 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양산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못한다. 축구 강국일수록 축구에만 모든 것을 쏟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 2015년 수원 JS컵에 참가한 18세 이하 프랑스팀은 대입시험을 앞둔 선수를 대상으로 교사를 대동해서 대회 기간 중에도 공부를 시켰다.
학교와 지도자가 성적에 급급한 나머지, 축구를 즐기지 못하는 선수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포기한 선수들, 이 두 가지는 한국 유소년 축구에서 꼭 바꿔야 할 문제다. 축구 강국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스페인 유소년 축구 시스템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을 쓴 조세민 코치는 우리나라 학교 축구의 지도 방식과 스페인 클럽 축구의 유소년 선수 지도 방식 모두를 선수와 지도자로서 겪어본, 특별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인물이다. 우리나라와 스페인 유소년 축구의 차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스페인의 방식이 우리나라에 무조건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겠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는 분들을 위해 귀중한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스페인의 유소년 축구를 현지에서 체득한 조세민 코치의 경험이 우리나라 유소년 축구 발전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김태륭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구루 축구팀장, TNT FC 감독)
현재 한국 축구는 격동기에 놓여 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 문화를 포함한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축구팬들 또한 이제는 단순히 축구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직접 축구계 업무에 진출하는 사례도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축구는 그동안 엘리트 시스템으로 선수를 키워왔다. 엘리트 시스템은 장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축구만 보고 살아가는 선수들의 시야를 좁아지게 했다. 또한, 비경기인 출신에게 엘리트 시스템은 하나의 커다란 장벽이었다.
이제 한국도 클럽 축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간이 분명 필요하겠지만, 유럽처럼 경기인 출신과 비경기인 출신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어릴 때, 동네 클럽에서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해서 재능이 있다면 훈련량을 늘려 프로 선수에 도전하고, 재능이 부족하다면 학업에 비중을 두고 취미로 축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축구가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경기인 출신이나 비경기인 출신이나 축구인으로서 장단점이 있다. 서로 존중하면 축구계에서 상생할 수 있으며,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각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각자가 잘하는 것, 바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다.
나는 조세민 코치와 같은 인물이 그렇게 되는 시간을 단축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세민 코치는 한국 축구의 격동기에 태어난 축구인이다. 한국의 엘리트 시스템을 몸소 경험했고, 혼자 힘으로 스페인 축구 속에서 호흡했다. 한국 축구는 스타일이 필요하고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조세민 코치가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FC바르셀로나의 축구는 유럽 정상에 오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하지만 FC바르셀로나뿐 아니라 세계의 그 어떠한 훌륭한 축구도 한국 축구의 윤활유가 될 수는 있어도 휘발유가 될 수는 없다.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다 축구 선진국의 좋은 시스템과 한국의 실정이 잘 어우른다면 우리만의 훌륭한 축구 스타일과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스페인, 엘리트 시스템과 클럽 시스템을 모두 겪은 조세민 코치가 앞으로 한국 축구의 훌륭한 연결고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이 그것을 위한 첫걸음이 되길 기원한다.
한준 (SPOTV 기자)
조세민 코치에 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12년 겨울, 리오넬 메시를 취재하기 위해 스페인에 출장을 갔을 때다. 마침 김용갑 현 동국대 감독이 스페인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고 있어서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김 감독이 라코루냐 지역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는 조 코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TV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가 2014년에 방영된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여행 가는 한국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도 기자로 일하면서 2009년부터 2010년 사이 스페인에서 특파원으로 일했고, 스페인 축구는 물론,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애정이 생겼다. 나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축구라는 꿈을 품고 미래를 그리는 조 코치의 이야기는 반갑게 느껴졌다.
조 코치와 직접 인연이 닿게 된 것은 2013년 봄이다. 조 코치가 꾸준히 스페인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을 보고 먼저 연락했다. 조 코치가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부분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정리해 더 많은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취한 연락에 조 코치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렇게 축구 전문 매체 ‘풋볼리스트’에 「조 코치의 비바 스페인」을 연재하게 되었다.
조 코치는 축구선수 출신이자 스페인에서 축구지도자 교육을 받고 있는 인물로 프리메라리가 관련 주제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있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FC바르셀로나, 레알마드리드 등 이슈가 되는 주제뿐 아니라 한국과 다른 스페인의 지도자 교육 시스템, 스페인 유소년 축구의 환경과 철학, 스페인 유소년 클럽 운영 실태를 전달해 일반 독자뿐 아니라 축구계 전반의 행정에도 시사점을 줬다. 기자도 조 코치의 글을 받아 정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조 코치의 칼럼 연재는 개인 일정 문제로 2014년 2월 중단되었는데, 그 이후, 조 코치는 스페인 UE코르네야 유스팀에서 코치 직무를 수행하고, 2015년에는 한국에 들어와 FC바르셀로나 한국 축구 캠프의 지도자로 선발되는 등 꾸준히 경력을 쌓아갔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내지 못한 선수들, 또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축구계를 떠난 선수들이 많다. 조 코치는 이들의 앞날에 이정표가 되는 길을 걸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스페인으로 혈혈단신 날아간 과감한 도전 정신, 수많은 장애물을 정면 돌파하며 그 도전을 끝까지 밀어붙인 끈기와 의지에 늘 감탄한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쏟아낸 조 코치의 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길을 책으로 정리하게 된 것에 축하를 보낸다. 미처 듣지 못한 조 코치의 경험과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반갑다.
조 코치의 여정은 아직도 초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여정이 더 큰 목적지를 향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Buena Suerte! 조 코치의 여정에 늘 축복과 행운이 깃들길 기원한다.
전 세계 수많은 선수 출신 축구지도자가 그러하듯이, 축구선수로서 내 삶은 성공보다 실패에 가까웠다. 그리고 약 10년간 진행된 나의 축구선수 인생은 2010년 6월 육군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던 그 날 마침표를 찍었다.
축구광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유치원에 입학했던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조기축구 모임에 나가며 자연스럽게 축구를 하게 되었다. 경상남도 하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고 당시 K리그의 흥행을 이끌었던 전남드래곤즈의 캐논슈터 노상래 선수(현 전남드래곤즈 감독)를 보기 위해 2주에 한 번씩 아버지 차를 타고 광양 축구전용구장에 갔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어 이곳에서 뛸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나는 축구선수의 꿈을 꾸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다음 날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무언가 큰 잘못을 한 줄 알고 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남은 내가 축구선수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날 담임선생님은 부모님에게 며칠 전에 있었던 반 대항 축구 대회에 관해 언급하셨다. 그 대회에서 우리 반은 아쉽게 준우승을 했고 그날 패배 이후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훈련을 하곤 했다. 그 모습을 보신 담임선생님이 내 진로에 관해 상담하기 위해 학교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나라 축구선수 대부분이 처음 축구를 시작하는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났다. 전문적인 축구 교육을 받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전문적인 축구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학업을 포기한다’와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부모님 곁을 떠나 축구부 기숙사로 들어가던 날, 공부는 못 하더라도 매일매일 일기를 꼭 써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어쩌면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된 일기 쓰는 습관이 지금 이 책을 쓰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게 축구를 배우는 선수들, 앞으로 배울 선수들에게 꾸준히 ‘훈련 일지’를 쓰도록 지도할 계획이다. 날마다 훈련 일지를 작성하는 일이 경기와 훈련으로 많이 피곤한 선수들에게 좀 버거운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은 결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일 진행된 경기와 훈련 중에 느끼고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고, 진정 그것이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구선수를 향한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부모님 곁을 떠나 초등학교 안에 있는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새벽 훈련과 오후 훈련을 소화했다. 학교의 오전 수업에는 참석했지만, 새벽 훈련을 마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실에 들어갔던 터라 곧바로 엎드려 자기 일쑤였다. 그 당시 축구부 학생들은 특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교실의 맨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도 선생님들이 묵인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를 지도해주셨던 담임선생님들이 나를 축구선수 이전에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학생’으로 봐주시고 그들처럼 대우해주셨더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와 단둘이 앉아 장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축구를 시작해서 약 2년 정도 축구선수 생활을 하고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사실 훨씬 전부터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부모님에게 내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팀 내에서 축구 실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고 전국 대회가 아닌, 지역 대회에서도 나보다 훨씬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던 터라 중학교에 입학하면 축구선수를 그만두고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새벽마다 학교 운동장에 가서 혼자 훈련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던 나였지만,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우기 위해 전학을 간 이후부터 축구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리더라도 내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어머니는 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내가 축구를 하는 것을 처음엔 반대했기 때문에, 내가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조금만 힘들면 포기해버리는 나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축구만큼은 끝까지 해라”라고 하셨다. 축구선수가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쉽게 포기하는 습관은 나의 앞날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줄곧 수비수를 맡았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지역방어 전술’이 아닌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이 유행이었으며, 나의 포지션은 유행의 중심이었던 ‘스위퍼’였다. 여기서 축구 전술에 관해 중요한 내용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많은 분이 ‘지역방어 전술=포백’, ‘대인방어 전술=스리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상식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다. 현대 축구에서 이제는 정석이 되어버린 ‘포백’이라는 단어는 네 명의 수비수들이 일자 형태로 수비벽을 형성하는 것을 가리키며, 만약 두 명의 중앙 수비수들 중 한 명이 나머지 세 명의 수비수들보다 뒤로 가서 플레이한다면 ‘포백+지역방어 전술’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지역방어 전술의 핵심 요소인 ‘오프사이드 트랩’을 구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리백’을 형성하는 세 명의 수비수들이 일자 형태를 유지하며 수비한다면 ‘스리백+지역방어 전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수비 상황에서는 좌우 윙백 두 명이 수비 라인까지 내려와 ‘파이브백’을 형성하겠지만, 한 선수가 수비 라인과 골키퍼 사이에 위치하여 플레이한다면 그것은 지역방어 전술이라고 할 수 없다.
축구 경기장 가로 길이 68m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미드필드 라인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네 명의 수비수들이 일자 형태를 이룬 포백 전술이 세 명의 수비수들이 일자 형태를 이룬 스리백 전술보다 더 효율적이다. 그 이유는 스리백 전술보다 미드필드 지역에 더 많은 선수를 배치할 수 있음과 동시에 공격으로 전환할 때, 좌우측 사이드백을 공격적으로 쓸 수 있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 성공률이 높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세 명의 수비수들이 지역 방어를 하고 양쪽 측면을 윙백들이 수비 라인까지 내려와서 ‘파이브백’을 형성하는 스리백 전술 또한, 강팀을 상대로 약팀이 사용한다면 효과적인 경기 운영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종 수비 라인에 총 다섯 명의 수비수가 배치되기 때문에 그만큼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기 위한 수비 라인 제어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게다가 공을 빼앗은 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 포백 전술을 구사하는 팀보다 미드필드 지역에서 패스를 받아줄 선수 숫자가 부족하게 되므로 짧은 패스보다는 롱 킥 위주의 플레이에 비중이 커질 위험이 있다.
위와 같은 수비 전술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보여줬던 수비 전술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배웠던 그 ‘대인방어+스위퍼 전술’과는 확연히 다른 스리백 전술이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최근 몇몇 세계적인 명문 팀들이 쓰고 있는 스리백 전술, 즉 세 명의 수비수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필요할 때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는 현대 축구의 스리백 전술이 아니라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채, 대인방어를 하는 수비 라인 뒤에서 ‘청소부’ 역할을 하는 스위퍼라는 포지션을, 처음 축구계에 입문했을 때 맡게 되었다. 이는 현대 축구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전술이다.
그 뒤로 나는 포지션 변화 한 번 없이 줄곧 ‘청소부’ 역할만을 맡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2003년 3월, 같은 연고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감독님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포백+지역방어 전술’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선수를 쫓아다니면서 수비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공간을 중심으로 수비한다’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유소년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 한 명의 작은 실수 하나는 곧바로 골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경기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당시 대부분의 팀은 안정적인 경기를 펼치기 위해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을 선호했다. 하지만 중학교 감독님은 현대 축구에서 수비 라인을 앞으로 가져가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활용하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셨고, 당장 대회 성적이 좋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성장했을 때 개개인의 능력이 현대 축구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지역방어 전술의 이론과 실기를 지도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포백+지역방어 전술’ 교육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셨다.
우리 팀 선수들은 감독님의 지시에 따라 정말 열심히 지역방어 전술 이론을 배우고 훈련에 임했다. 그렇지만 대회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지역방어 전술을 배워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대회 성적까지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지나친 욕심이었다. 현대 축구의 흐름과 대회 성적,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팀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할 때 수비 라인 컨트롤 미숙으로 실점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대부분 나의 실수로부터 비롯되었다.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수비 라인보다 조금 더 뒤로 가서 플레이하는 스위퍼를 맡았기 때문에 상대 팀에게 뒷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무척 두려웠고,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혼자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로 힘들어하던 내게 감독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상대 팀에게 뒷공간을 계속해서 허용하더라도 겁먹지 말고 포백 라인을 유지해야 한다. 뒷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무서워 너 혼자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 너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과 같은 거야.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에 집중한다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 팀이 언제, 어떻게, 어느 공간으로 볼을 투입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라.”
“실수하면서 배우는 것이 축구”라고 말씀해주시며 우리를 위로해주시던 감독님은 언제부터인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회 성적이 저조해서 해임되셨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감독님에게 감사의 인사도 전해드리지 못한 채 새 감독님을 맞이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에서 ‘지역방어+포백 전술’로 전환하는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수비 불안 문제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다른 나라의 중앙 수비수들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인 홍정호 선수(1989년생)와 김영권 선수(1990년생)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중앙 수비수라는 중책을 맡았다. 물론 홍정호 선수와 김영권 선수는 나와 두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이 두 선수가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대한민국 유소년 축구계에 ‘지역방어+포백 전술’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나이 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수비수 출신의 선배님들은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을 버리고 ‘지역방어+포백 전술’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현대 축구에서 요구하는 ‘지역방어+포백 전술’을 유연하게 구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다른 나라 국가대표팀의 중앙 수비수들처럼 베테랑이 아닌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는 홍정호, 김영권 선수가 맡았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이하 축구선수 자녀를 둔 학부모님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다. 자신의 아이가 ‘배우기 위한 축구’가 아닌 ‘이기기 위한 축구’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아이의 앞날을 위해 팀을 옮기는 것도 생각해보시라는 것이다. 현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부친 직업을 조사해보면 축구 관련 업무 경험을 가진 분들이 꽤 있다. 이는 곧, 스타 선수 한 명을 키우려면 축구지도자의 노력뿐 아니라 학부모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함을 뜻한다. 나의 부모님은 매달 합숙비를 지출하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역할 없이 전적으로 나의 은사님들만을 의지하셨고, 축구 대회 성적은 마치 나의 미래를 책임져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연달아 큰 부상을 입었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간이 학교 수업에 참석하는 시간보다 더 길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 문제가 다 해결된 상태였고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학교 3학년을 한 번 더 이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복학, 즉 유급을 해야만 했다. 몸과 마음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들과 같은 학년으로 축구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부모님이 다른 친구들의 학부모님들보다 회비를 1년 더 내셔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했고 이를 악물게 했다. 유소년 축구에서 한 살 차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차이가 있다. 유급한 이후, 나보다 한 살 어린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경기에 나가면서 점점 내 플레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시즌 막바지에 감독님으로부터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포항스틸러스 U-18팀인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현포항제철고등학교)에 스카우트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포항이 실제 내 고향이었기에,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포항스틸러스 유스팀에 입단하는 것을 꿈꿔왔고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포항스틸러스 U-18팀의 생활은, 다른 팀에서 지냈던 생활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먼저 포항스틸러스의 모기업인 포스코에서 선수들의 숙식비, 간식비, 축구용품비, 전지훈련비 등 모든 비용을 지원했기 때문에 학부모님의 경제적인 부담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등 축구 최강자’라고 알려진 포항제철중학교 소속 선수 대부분이 포철공고로 진학했고, 거기다가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선수들이 모였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옆에서 강요하여 생기는 ‘외적 동기’를 통해 열심히 하자는 의지를 품은 것이 아니라, 선수들 스스로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내적 동기’를 품고서 훈련에 임했다.
또한, 축구 외적으로도 일반 학교 축구팀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축구부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국가자격증 하나를 취득해야 한다는 교내 규칙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 규칙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지만, 국가자격증 하나를 꼭 취득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자신이 취득하고자 하는 자격증과 관련된 수업을 들으며 공부하고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하고 난 이후, 약 6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일반 학생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당시만 해도 ‘축구만 잘하면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포철공고에 입학한 것이 내 삶 전체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하루하루가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경쟁의 연속이었고 실력이 뒤떨어지는 선수는 가차 없이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일반 학교 축구부는 학부모님들이 내는 월 회비가 팀 운영 경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고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베스트11에 포함되는 관행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고학년 선수와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하는 저학년 선수가 있다고 하자. 그 저학년 선수가 실력이 조금 더 낫더라도 그 차이가 누구나 인정하는, 월등한 수준이 아니라면 고학년 선수를 밀어내고 저학년 선수가 경기에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한 선수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그 팀의 지도자는 그 학생의 진로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위 학교 팀의 감독이나 스카우트에게 눈도장을 받아야 하기에 지역 대회 또는 전국 대회에 최고학년을 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저학년 리그도 없어서 중학교 1, 2학년과 고등학교 1, 2학년 선수는 총 4년의 시간을 팀 훈련과 연습경기만으로 실력을 키워야 했다.
중학교 때 다쳤던 부위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재발하기 시작했다. 처음 다쳤을 때 확실하게 치료받기 위해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퇴원한 뒤,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지 않고 하루빨리 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여 훈련에 참가한 것이 실수였다. 같은 부위를 세 번 연달아 다쳐서 다른 선수와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결국 고등학교 2학년 시즌 중에 감독님으로부터 팀에서 나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날 포항스틸러스 U-18팀 기숙사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했다. 뒷산에 올라가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입학할 때 꿈과 희망에 들떠서 매고 들어온 가방에 다시 짐을 챙겨 넣어야 했다. 동기들은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선배들은 그러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기숙사를 나와 아버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두 번 다닌 탓에 다른 학부모보다 1년이라는 시간과 비용을 더 투자하고 어렵게 포철공고에 입학시켜주신 부모님. 그 당시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며 더 힘들어하셨을 부모님이지만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말과 함께 나를 위로해주셨다.
감사하게도 부산 개성고등학교(현 부산아이파크 U-18팀) 감독님이 나를 받아주셨고 계속해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내 축구 인생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훈련에 임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경남 함안에서 열린 무학기 전국고교축구 대회 결승전에 내가 소속되어있던 개성고등학교가 올라간 것이다. 예선전을 1승 1패로 힘겹게 통과한 우리는 거제고 1대0 승, 정명고 0대0 승부차기 승, 군산 제일고 1대0 승, 울산 학성고 0대0 승부차기 승으로 짠물 수비를 펼치며 결승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와서야 밝히지만, 그때 우리 팀은 현대 축구의 기초가 되는 ‘지역방어+포백 전술’이 아닌 ‘대인방어+스위퍼 전술’을 펼쳤기에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예선을 통과한 뒤,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4경기 동안 1실점도 하지 않았다. 과천고등학교와의 결승전은 MBC ESPN에서 생중계해서 전국에 방송되었고 그날 중계를 맡은 해설위원은 “부산 개성고등학교는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이 대회 결승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 수비수를 맡았던 선수들 중 현재 축구선수 생활을 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힘겹게 결승전에 진출한 우리는 현 국가대표 김신욱 선수가 버티고 있었던 과천고등학교와 만났다. 당시 김신욱 선수는 190㎝가 넘는 장신인데도 헤딩 능력보다 두 다리를 이용한 볼 관리 능력을 더 인정받던 선수였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포지션도 현재의 센터포워드가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승전 경기 결과는 0대2, 참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