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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용운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879년, 충청남도 홍성 (처녀자리)

사망: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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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필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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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萬)海)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 서양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구 문물과 세계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년 고향에 돌아와 2년간 은신한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 대학림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이를 계기로 1913년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 준비 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후에는 각지를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내설악 백담사에서 은거하면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을 1926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50세를 전후하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은거하면서 불교 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으며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다. 일제의 강요로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을 때에도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학병 출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중풍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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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30년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 당수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27년 경성지회 회장
1924년 대한불교청년회 초대 총재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1914년 불교강구회 총재
1914년 조선불교회 회장
1913년 통도사 불교강사

저자의 말

<나를 쳐라> - 2005년 12월  더보기

스님께서는 문자를 전공하지 않았어도 그 시의 규범과 정공精工이 어떤 당대의 시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스님의 변화무쌍한 행리는 밝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과 같음이로다. 아직도 선지禪旨의 오묘한 운율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으니 스님의 경지를 어찌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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