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호랑이 형상으로 그려놓은 한반도 지도를 보았는데, 문득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은 호랑이가 아니다. 구태여 찾으려고 한다면 우직하고 뚝심 있고 주인에게 순종하다가 죽어서는 머리부터 꼬리, 뼈, 가죽, 내장까지 몽땅 바치는, 우리 민족의 생구生口인 “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원래 그런 품성을 가졌다. 다른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하지 않고 오직 우직하게 소처럼 끈기 있게 살아온 민족이다.
서당 훈장이었던 증조부께서 남기신 서책은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훈민정음으로 쓰인 일기장 한 권이 있었다. 그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직감으로 나는 그건 증조부가 쓴 게 아니라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다른 글은 모두 한문이고 그 일기장만은 이른바 언문으로 된 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필체는 어딘가 닮은 꼴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구석이 전혀 없었다. 종이 질도 거칠고 거무칙칙하게 변질돼 있었다. 그 의문은 대학에서 중세국어를 배우면서 풀리게 되었다. 그 일기장은 16세기 아니면 17세기쯤에 쓰인 게 확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았다.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나는, 저절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숙명적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