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해외저자 > 종교/역학

이름:찰스 웨슬리

성별:남성

최근작
2010년 2월 <웨슬리 찬송시선집>

찰스 웨슬리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동시에 형 존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의 부흥에 참여했던 찰스 웨슬리는 1707년 12월 18일 엡워드에서 태어났으며 초기교육은 어머니인 수산나로부터 받았다. 그는 1716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입학하였으며, 1721년에 왕립 장학생이 되었다. 1726년에 찰스는 다시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칼리지에 들어갔는데 이 대학은 당시 형 존이 막 졸업했던 학교로서 그 시대 대학 중에서는 가장 크고 유명한 학교였다. 그곳에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헌신과 독서생활 그리고 자선사업 등 여러 가지 종교적인 활동에 헌신한다.

1735년 형 존의 주장으로 영국 국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1735년 10월에는 형과 함께 새 식민지인 조지아로 떠나 형과는 달리 식민지 경영위원회의 서기와 제임스 오글리토프 장군의 개인 비서로서 일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지고 비서로서의 직무수행능력 부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738년 2월에 옥스퍼드에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모라비아교의 선교사 뵐러(Petter Bohler)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뵐러는 그 대가로 그와 그의 형 존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의 참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1738년 5월 21일 성령강림절에 그는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으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모든 것을 아는” 회심을 하였고, 그의 형도 회심을 경험함으로써 그들은 현재 로 알려진 찬송을 불렀고 진정한 중생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는 런던의 여러 교회, 감옥에 가서 설교했으며, 10년간 그의 형과 함께 영국전역을 순회하면서 야외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750년 5월 코크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폭동과 함께 10년간의 여행기간은 끝났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감리교 운동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들의 숫자와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찰스의 가장 큰 업적은 찬송가 분야에서이다. 그 많은 양의 작품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이 아주 훌륭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780년 나온 찬송가집을 능가할 만한 것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그 찬송가집의 대부분이 찰스에 의해 쓰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든 교회들이 커다란 기독교 축제일들을 지킬 때에 사용한 가장 훌륭한 찬송가들 중의 몇몇 작품들이 바로 찰스가 쓴 것들이며 아직까지도 기독교의 신앙 중 복음적인 부분의 내용에 관해 찰스보다도 더 세련되고 충실한 표현을 한 사람은 없다.

1788년 3월 29일 런던에서 사망할 때까지 불후의 찬송가를 지었으며, 감리교 신도들에게 종교는 비록 개인적으로 향유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표현되어야 한 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가 작사한 것으로 한국 찬송가에 소개된 것은 만유의 주 앞에, 천사찬송하기를, 예수 부활하셨으니, 만입이 내게 있으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나 맡은 본분은, 비바람이 칠 때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등이 있다.  

대표작
모두보기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