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지난 20세기 말부터 지금 21세기 초까지 지어진 것들이다. 즉, 지난 30여 년 동안 때론 정열적으로 또 때론 게으름을 피우며 지은 작품들이다. 그리하여 작품 가운데는 한 세대 전의 것이어서 오늘의 감각을 따라 잡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흔적이므로 탓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좀 더 열심히 살았다면 더 많이 보다 먼저 작품집을 펴냈을 수도 있는데, 본디 성정이 게으르고 건강에 자신도 없어 차일피일하다가 오늘에 이르러 겨우 부끄러운 소설집을 낸다. 지나치게 늦었으므로 탓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그대로 인생의 단면이요, 인간의 단면이다. 시가 그러하듯, 특히 예컨대 우리의 시조나 한시의 절구나 일본의 하이쿠가 그러하듯, 모름지기 짧은 글에서 촌철과 살인을 느끼듯 쓰는 입장에서 굳이 긴 글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담백한 형식의 글에서 웅장한 글이 풍기는 위대함의 연원을 엿볼 수 있지 않던가. 이런 이유로도 시가 소설에 앞선다고들 얘기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 시대다. 긴 글에 대한 지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끄러운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비교적 짧은 소설을 내놓는 것이 소설 문학에 있어 덜 본격일지라도 조금 덜 부끄러워해도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진정 부끄럽기 그지없다. 인생이 후반기 즈음이라 바삐 혹은 차분하게 또 다시 쓸 따름이다.
2015년 5월 15일
미산당(彌山堂)에서
이광식의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현대 철학에 등장하는 역사와 시간, 우울과 환희, 반복과 차별, 혁신과 지체 등의 단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등장한다.
……
작가 이광식은 이번에 상재한 소설집에 다섯 뭉치 역사의 시간 꾸러미들과 그 안에 사람 꾸러미를 건져 올려놓았다. 다섯 편의 역사소설이 그것들이다. 현대소설도 6 편 묶여져 있는데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이미 20 여 년 전에 쓴 작품들이라고 하였다.
요 근래에 쓴 작품들은 다섯 편의 역사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역사물을 쓴 이유를 밝혔다. ‘작품 내용이 현실에서 역사로 옮겨 간 것은 문학론의 새로움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혹은 세월 때문이라고….
……
이광식의 문학은 소설 작품 속에서도, 작품 밖에서도 ‘해체’라는 시대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문자로, 더러는 행동으로 일구어가는 혁신의 순수함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를 다 묶어 이를 한 문장으로 이어본다면 「인식의 용광로와 언어의 쇳물이 그려놓은, 데리다가 말한 차연(差延)의 기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