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실린 소설들을 쓰면서 이십대의 한 고개를 넘었다. 아쉬움도 많이 남지만, 그때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곳곳에서 나를 붙드는 손길이 있었다. 두번째 책까지 이끌어주신 그 모든 손길들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좀더 고요히, 잠잠히.
나는 슬픔을 느낄 때마다 자랐다. 그것은 참, 황홀하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슬픔은 집중력이 약한 아이였던 나를 방에 가두고 세상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십대가 지나가자 주위가 넓어져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쓸 수 있었다. 낭만에 대해 가르쳐주신 부모님들에게 윙크를.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 다시 태어나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가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브래드 피트와 사귀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한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앉으나 서나 떠오르는 것, 자꾸만 잡아당기고 싶은 것, 생각하면 방긋이 웃음이 나는 것. 아직 쓰이지 않은 나의 소설이 나를 지지해준다.
용기를 잃지 않고, 성실히, 쓰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4
이 페이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과거에는 그랬다. 소설책을 보면 제일 먼저 ‘작가의 말’을 찾아 읽었다. 거의 집어삼킬 듯이 눈에 새겨 넣곤 했다. 작가의 ‘말’이란 과연 무엇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나도 그런 ‘말’을 갖고 싶었다. 가질 수 없다면 죽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다.
작가가 된 뒤로는 ‘작가의 말’을 읽지 않는다. 그러니까 10년 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네번째 책의 출간을 앞두고 며칠 동안 ‘작가의 말’을 골몰하였다. 책이 꾸려지는 내내 악몽을 꾸었고, 과연 계속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런 것은 좋은 ‘작가의 말’이 아니다. 나는 이 페이지를 그렇게 망칠 수 없다.
딸애의 손톱을 깎다가, 그 투명하고 하얀 막을 조심스럽게 잘라내다가, 문득 내가 서른네 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실에 언제나 화들짝 놀라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형편없는 인간인지 분명해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문학의 비호 덕분일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패배할 권리, 하찮아질 권리, 인간 변종이 될 권리를 얻었다. 문학이 죽었다, 살았다, 말이 많은데 나의 증언은 단지 이것, 문학이 나를 살렸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은 서른 살이 되던 해부터 쓴 것들이다. 이 중 아주 작은 일부라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척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종종 낙담이 더 큰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묘미란 그런 것이다.
2015년 여름
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이 꾸는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이 내 것처럼 달콤하고 쓰렸다. 나는 그들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착각, 혹은 간극 속에서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