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창작집을 낸 지 십 수 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창작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날마다 수많은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굳이 나까지 보태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미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놓은 작중 인물들도 세월 따라 안타까이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야 출간을 서두르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아는 나’와 ‘나도 모르는 나’가 만나 경계를 지우는 일이다. 그 경계가 지워질 때 느끼는 희열 때문에 나의 글쓰기 여정은 계속된다. 매일 아침 나는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다. 길이 험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는 늪과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며 주저앉아버리고 싶지만 나는 절대로 멈출 수 없다. 그 후, 찾아오는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글쓰기에 순응하며 모든 걸 맞추어나가야 하는 내 삶이 문학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여기 실린 9편의 작품은 오래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발표 시기가 십 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 기간을 지나면서 온몸으로 통과해온 삶의 자취를 하나로 묶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과 함께했던 여러 감정이 내 속에 스며들어 ‘지금의 나’에 도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 기쁨과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오롯이 남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내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걸 이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가을볕이 좋은 날이면 마당 한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래된 책들을 거풍시키곤 했다. 검은 테를 두른 책장에 갇혀 서재의 벽을 차지하고 있던 책들을 꺼내 펼치는 어머니의 손길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책 거풍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누렇게 변색되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책장들이 바람에 팔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사람이 가도 보던 책들은 그대로 남아 있네.”
마당에 한창 피어난 국화와 오래된 책들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그윽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서 울려나는 듯하다.
이제 이곳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아득히 먼 저곳에서 내 책을 받아들며 환하게 웃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2020년, 새로운 해를 시작하며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고 반성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는 내 의식을 붙잡아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글쓰기’이다. 글을 읽고 쓰는 일만큼 나를 온전히 사로잡는 게 아직 없다는 사실이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아주 잠시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안타까운 기다림으로 남아 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또한 헛된 욕심이리라. 시간이 환영(幻影)이듯이…….
이제 보낸 시간보다 보낼 시간이 훨씬 적게 남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를 구상하게 되었다.
신지수와 심진순은 헤어질 때면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 마법에 걸려 함께한 시간이 무조건 좋은 시간이 되기라도 하듯……. 이 소설은 서른 살인 신지수와 아흔 살이 넘은 심진순이 자신들의 미래와 과거를 서로에게서 찾아내며 한때를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역사적인 사건 사고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낡은 인습들이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때로는 치명적인 경우가 있다. 그렇더라도 힘없는 개인은 그걸 감내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심진순과 신지수도 마찬가지다.
많은 아픔을 안고 여전히 과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심진순과 현재가 고달프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하는 신지수지만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따뜻하고 즐겁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우정을 나누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말 ‘참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나는 작가로서 즐겁고 행복했다. 독자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참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