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언어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귀로 들은 선율에 대해 딱딱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적절한 말을 골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완전하다. 아무리 현란한 수사도 언어로는 음악을 대체할 수가 없다. 언어로 음악을, 혹은 연주를 표현하고 규정하는 그 순간 우리는 벌써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안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의 피아노 연주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원고를 끝낸 순간 그 음악과는 아주 거리가 먼 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 오류의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웃과 친구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걸프전과 오랫동안의 경제 봉쇄로 경제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이라크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라고 한다. 문명의 진보와 선행에 관한 인간의 의지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축제개막을 기다리듯 초침을 재가며 전쟁이 시작되기를 사람들이 있다.
구약의 주요 무대였던 북부 도시 모슬의 니네베 성,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남부의 우르 지역을 비롯, 국토 전체가 인류문명사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라크 땅에 최신의 무기들이 엄청난 폭탄을 퍼부을 거란 뉴스가 매일 지면을 장식한다. 특히 모슬은 터키 국경과 가깝고 전략요충지역이라 격전이 벌어질 개연성이 많은 곳이다.
인류문명의 유적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바그다드에서 숨을 쉬고 있을 내 친구 로라 가잘을 위해서도, 예고된 이 전쟁이 뜬소문으로 그쳐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을 보노라면 지금도 진땀이 흐른다. 이 작품들 중 상당수가 여관방이나 하숙방, 선의를 베풀어 잠시 자기 방을 비워준 친구네 방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싸구려 여관방의 음습한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배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뼘의 방이 너무 귀하고 아쉬웠던 시절이었다. 풍요의 시대라고 말해지는 요즘 소설 위기론이 심심치 않게 떠들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첫 창작집의 복간이 이런 질문에 대한 자기성찰의 계기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싶다.
우리 삶과 생활에 음악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비록 스스로 선택하고 자청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아주 다양한 음악들과 우리는 접촉한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남아 선택해준 음악을 스스로 선택한 걸로 착각하고 듣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남이 선택해준 음악에 매일 길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진정한 '음악 듣기'라고 볼 수 없다. 음악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삶과 생각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스스로 음악을 선택해서 듣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아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이 책이 그런 노력에 적은 도움이라도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