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집의 원고를 묶으면서 나는 또 한 번 남미여행을 떠났다. 소설 속에 담겨 있는 남미의 풍경은 그때와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때 내가 원한 여행은 나만의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는 것이었다.
가능한 시간을 많이 가지고 현지의 풍경을 보고 현지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내 안에서 뭔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좀 다른 내가 되고 싶었다. 달라지고 싶었다.
.....
이틀 동안 해발 고도 4천 미터가 넘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프의 양쪽에는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은 높고 그 위로 흰구름은 흘러가고 지프가 지나간 자리에는 뿌연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 어디에도 푸른색이 없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라마와 홍학들이 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니까 살 수 있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황폐하고 삭막해진다.
단단하게 무장했던 갑옷들이 벗겨지고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방어막들이 해체되고 포장하고 있던 감정들이 허물어졌다.
분노, 모욕, 수치, 수모 등의 거칠거칠한 감정들이 조금씩 들썩거리더니 소용돌이졌다.
감정들이 날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졌다.
매번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어가는 어느 여자, 그녀는 무엇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추적한다. 직장 상사인 선배에게 폭언과 성추행을 당하던 어느 여자도 충동적으로 그 선배를 고발하고는 자신의 머릿속에 살면서 제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추적한다. 부부 싸움 끝에 엘피지 가스를 폭발시켜 자살한 남자와 여자. 그것은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어 남겨진 아이의 삶에 번번이 끼어들었고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어느 노모는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소원하게 지내던 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가 하면 어느 노모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들을 분가시킨 뒤 몰래 이사를 한다. 또 아이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어느 부부는 각각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남편의 폭력으로 집을 나간 어느 여자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무도회를 연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지난해 봄 나는 신문을 제작하는 데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된 창간신문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종이 신문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 세상에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오래 굶주린 들개가 황량한 광야에서 먹잇감을 찾아 헤매고 있는 듯한 처절함으로 그네들은 세상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듯한 심정으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정말 사는 게 힘들다’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내용에는 그런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겪은 삶의 편린들이 구석구석 녹아 있다.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 동안 놓치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집요하게 탐색했다. 그리고 그 ‘무엇’을 끄집어내어 소설에다 녹이려고 애썼다. 갈수록 글 쓰는 일은 어려웠고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탄생한 여덟 편의 소설들. 의외로 마음이 담담하다. 아니,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서 슬금슬금 어떤 기대감이 차오른다. 내년에는 어떤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질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될까. 그리고 요즘 밀착 취재해서 쓰고 있는 장편소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날까. 상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